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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장자스쿨] 씨맨(Seaman) 허먼 멜빌, 폭풍을 쫓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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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라뇽 작성일19-07-19 15:59 조회2,0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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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맨(Seaman) 허먼 멜빌, 폭풍을 쫓는 자

오찬영(감이당 장자스쿨)

에이헙스 커피 AHUBS COFFEE

   글로벌 커피 브랜드의 대명사, 스타벅스 커피는 <모비딕>의 캐릭터에서 따온 것이다. 창업주들은 에이허브 선장의 날뛰는 광기에 맞서는 차갑고 침착한 일등항해사 스타벅에게 마음을 뺏긴 게 틀림없다. 하지만 내가 커피 브랜드를 만들었다면 스타벅이라는 이름이 고려 선상에 오를 일은 없을 것이다. ‘에이헙스 커피’, 내게는 이쪽이 훨씬 끌린다. 그러나 대부분의 독자들 사이에서 에이허브는 주인공임에도 언급될 만한 유쾌한 캐릭터가 절대 아님을 커피 브랜드 이름에서도 유추해 볼 수 있다. 무모하게 흰 고래를 추격하다 결국 동료들을 죄다 죽음으로 몰아넣고 그 자신도 파멸하는 인간. 악당도 이런 악당이 없다. 그러나 <모비딕>을 가장 특별한 책으로 만드는 바로 그 지점에 에이허브의 투쟁과 파멸이 있으며, 이 책 이후로 이어지는 허먼 멜빌의 작품 대부분이 에이허브를 연상케 하는 비극으로 점철된 캐릭터들의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허먼 멜빌은 왜 비극에 꽂힌 걸까? 존재를 극한까지 몰아넣는 고통의 일대기를 그려냄으로써 그가 말하려고 하는 건 뭐였을까?

 

불멸을 꿈꾸다, 야생을 만나다

   몰락한 가정의 생계 부양을 위해 배에 올라탔던 소년가장 허먼 멜빌은 폴리네시아 군도의 식인종들과의 만나게 되고, 이 경험을 27살의 첫 데뷔작, <타이피(Typee)>에 옮겨 쓴다. 그 때 그가 목격한 것은 야만인들의 야생적 우아함, 그들을 문명화시키려는 백인 선교사들의 폭력성이었다. 그러나 그가 당시 탐구한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기준이 대체 무엇인지 묻는 심오한 질문과는 별개로 이 책은 소재 자체의 독특성 때문에 큰 인기를 끌게 된다. 그로서는 절호의 찬스였다. 데뷔작부터 터뜨린 축포였으니 이대로 글을 쓰기만 한다면 가족들을 부양할 수도 있고, 좋아하는 책도 마음껏 읽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에게는 모종의 반발심이 들끓어 오른다. 단순히 반짝하고 사라질 상업 작가가 아니라, 미국의 셰익스피어로 자리매김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것이다. “불멸의 것을 쓰려면 불멸이 되어야 해!”, “웅대한 책을 낳으려면 웅대한 주제를 선택해야 한다.” 허먼 멜빌이 계속해서 캐릭터들의 입을 빌려 반복하는 대사들은 그의 궁극적 지향을 가장 잘 나타낸다. 작가는 동시대의 평판보다도 후대의 독자들을 더 의식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미국 아이들의 머릿속에 자신이 그저 친절한 식인종들과 어울린 별난 모험가 아저씨정도로 각인되는 걸 가장 두려워했다. 바다 위에서 그가 포착한 세계, 새롭게 깨닫게 된 철학을 어떻게 다시 생성해낼 수 있을 것인가?

   해소되지 않는 예술적 욕망 속에서 더듬거리던 허먼 멜빌에게 새로운 눈을 선물해준 사람은 바로 선배 작가 나다니엘 호손이었다. 호손의 화두는 미국 초기 정착 시절부터 뿌리 깊게 이어져온 청교도적 관습에 반박하는 것이었다. 그는 신의 길을 따르게끔 설계된 미국 사회 속에서 보조를 맞추려 허덕이는 인간을 관찰한다. 거기에는 인간적인 열정들을 죄악시하고 신성을 추구하면 할수록 오히려 각자의 위선은 증폭되는 아이러니가 있다. 그의 소설 <주홍글씨>에서는 간통을 저질러 가슴팍에 낙인을 찍고 살아가는 여성의 고통스러운 삶을 그린다. 율법을 어겼기에 사회에서 쫓겨난 죄인이지만, 바로 그 죄로 인해 그녀는 마을 사람들과는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인지하고 바라보게 된다. 청교도 윤리가 철저하게 작동하는 마을에서 추방된 자가 누리는 인간 본성의 자연적 힘. 그녀의 딸은 작은 악마라고 불릴 정도로 자유분방하며 거리낌이 없는 소녀로 자라난다. 경계 밖의 아웃사이더들만이 가질 수 있는 삶의 다른 가능성, 즉 문명 바깥의 야생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나다니엘 호손의 이런 소설적 배치 속에서 허먼 멜빌은 자신의 철학을 글쓰기로 구현할 수 있는 문학적 영감을 발견한다. 1850, 모비딕의 집필 방향이 완전히 바뀌어버리고, 이 책은 이후의 모든 작품들에 있어서 허먼 멜빌만의 독특한 문학적 패턴이 시작됨을 알리는 신호탄이 된다. “태초부터 쌓아올린 모든 증오를 흰 고래에게 쏟아 붓기 위해 기꺼이 닻을 올리는, 미국 문학 역사상 가장 무모한 캐릭터, 에이허브가 탄생한 것이다. 에이허브뿐만이 아니다. <필경사 바틀비>, <수탉의 노래>, <피에르 혹은 애매모호함> 등 문명과 정주의 이탈자들이 보여주는 투쟁기가 계속해서 이어진다. 기꺼이 폭풍을 쫓아 존재를 내던지는 필사적인 사투!

 

진리의 멘토, 고통과 비극

   19세기의 미국 포경선은 석유가 등장하기 전에 자본주의의 연료를 책임졌던 바다 위의 공장이었다. 스타벅이 사사건건 에이허브를 반대하는 이유도 여기서 비롯된다. 고래를 열심히 잡아서 시장에 내다 팔고 돈만 벌면 됐지, 무슨 복수니 원한이니 따지냐는 것이다. 그러나 에이허브의 눈에 비친 고래는 단순한 화폐와 돈벌이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그 무엇이다. 대다수가 만들어놓은 고정된 역할극을 전에 없던 방식으로 인식하는 자에게 들이닥치는 건 동료의 외면과 고독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필연적인 비극이 뒤따라온다.

   비극은 서구권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학 장치다. 단순히 극의 형식 중 하나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길섶에서 끊임없이 마주하는 고통이나 운명의 장난에 대해 탐구하게 한다. 특히 미국인들이 삶의 비극성과 모순을 대하는 자세는 두 가지였다. 처음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 미국을 건국한 필그림 파더스의 정통 기독교 신앙을 다시 부활시키거나 세련된 정치 이데올로기에 기대거나. 전자는 19세기를 휩쓸었던 종교적 광풍, 2차 대각성 운동으로 분출되고, 후자는 미국 민주주의의 시작을 알리며 합리적인 현대 시민이 출현하는 신호탄이 된다. 하나는 모든 사건과 만물에는 신의 뜻이 숨겨져 있으리라는 메시지를, 또 하나는 모든 인간이 평등해지면 자유로워질 것이며, 무엇이든 스스로 선택할 수 있고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자유의지를 강조한다. 점점 세밀해지는 법과 제도, 사람을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으로 여겨지는 자본의 출현 역시 민주주의의 빼놓을 수 없는 동반자다. 기독교의 부활과 민주주의의 등장, 삶의 비합리성을 명백히 설명하고 인간을 행복으로 구원할 수 있는 것. 이 두 가지가 기묘하게 혼합되어 탄생한 미국의 사조가 바로 초절주의'이다. 그 유명한 랄프 왈도 에머슨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바로 미국 초절주의의 얼굴들이다. 이 초절주의는 나름의 철학 체계를 갖추지도 않았으며, 논리적 개념의 정립 없이 당대의 동서양 철학들을 이것저것 갖다 쓴 것에 불과했다. 근본 없이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실용적인 철학이니 어쨌든 가장 미국스러운 철학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당시 미국이 인디언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해외 식민지를 찾아 팽창주의 정책을 채택하며 제국주의적 야욕을 실현하는데 결정적인 명분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이 뜬구름 잡는 철학의 한계성이 그대로 나타난다.

   특히 선악(善惡)에 대한 그들의 관점은 지나치게 낙천적이었는데, 선과 악은 나뭇잎의 앞뒷면 같아서, 고통, 수난, 죽음 같은 세상의 악함 역시 모든 만물에 작동하는 신의 손길에 따라 결국에는 선이 된다는 게 그들의 지론이었다. 그러므로 악이란 없다! 악처럼 보이는 게 있을 뿐. 지금 삶이 힘든가? 거기에는 신의 선물이 숨겨져 있다. 죽음이 두려운가? 너를 위한 천국이 예비 되어 있다. , 그들의 관점에서 고통은 결국 최종선(=)에 도달하기 위한 일종의 관문일 뿐이다.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마침내 선한 신의 자비로움이 모든 것을 최상으로 구원할 것이다. 초절주의자들이 말하는 구원은 이토록 간단하고 명백한 선과 악의 순리에서 비롯된다. 허먼 멜빌만큼은 이 짬뽕철학의 그럴듯함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그 진실을 그대는 어렴풋이나마 보는 것 같다. 무릇 깊고 진지한 생각은 망망한 바다의 독립성을 지키려는 영혼의 대담한 노력일 뿐이며, 또한 하늘과 땅에서 가장 사나운 바람은 서로 공모하여 인간의 영혼을 배반과 굴종의 해안으로 내던지려 한다는 것을 그대는 아는가?” <모비딕>, 허먼 멜빌, 작가정신, 152

   그가 초절주의의 하릴없는 낙천성을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포경선이라는 학교의 충실한 학생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바다 위의 학교는 그에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진실을 알려준다. 초절주의 식의 정신승리는 존재에게 모욕적인 육지와도 같다고. 느닷없이 닥쳐오는 고통과 수난을 신과 이데올로기에 기대어 재빨리 행복과 선()으로 탈바꿈시키는 눈속임이야말로 인간을 배반과 굴종의 해안으로내던진다. 무엇이 이토록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주는가? 삶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 이것들을 직면해야만 알 수 있는 가없고 무한한 진리를 외면한다는 것이 존재에 대한 배반이고 굴종이라는 것이다. 흰 고래를 추격할 수 있는 자는 안락한 육지를 뒤로 하고 폭풍이 으르렁대는 바다를 존재적 피난처로 삼는 자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고 죽음에서 건져줄 신의 손길은 없으며, 신의 존재에 기대어 성립되는 선악의 명확한 흐름이나 인과도 없다. 이 알 수 없고 불분명한 혼돈의 물보라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자만이 영웅이 되어 솟아오른다. 육지에 두고 온 어여쁜 아내와 딸을 생각하며 그리움에 눈시울을 붉히는 스타벅이 이 소설의 영웅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이런 배치 속에서 캐릭터들의 행동은 모두 결말을 향한 복선이 되고, 비극이라는 한 초점으로 모아진다.

 

바다에 서서 불멸에 눕다

   호손의 아내 소피아가 허먼 멜빌에 대해 이렇게 쓴다. 허먼은 야생의 눈을 가진 사람이라고. 야생의 눈이란 건 뭘까? 유한함으로 규정된 육지가 아니라 무한한 바다의 심연을 감지하는 능력 아닐까? 그 바다가 가르쳐주는 것이 설령 고통과 혼돈, 죽음과 공포일지라도, 존재의 끝없는 투쟁만이 비극을 동력 삼아 무한정으로 넘실대는 곳. 허먼 멜빌의 모든 작품이 바다 냄새를 풍기는 건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비극을 동반한 실존적 대결을 가장 잘 그려낼 수 있는 무대로 바다만한 곳이 없으리라.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바다가 간직한 야생과 깊게 감응한 사람이었다.

   산업혁명의 시대로 접어들며 이제 막 경제 번영의 초입으로 들어선 미국의 육지인들에게는 그의 야생성을 감지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제일 쓰고 싶은 글은 금서가 되고 팔리지 않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하지만 힘주어 말한다. “그런데 다른 식으로는 쓸 수가 없습니다.” 벌레처럼 육지로 기어가는 비참함을 선택하느니 차라리 폭풍 속의 바다로 뛰어드는 비극을 원했던 소원은 그를 추락하게 만들었다. 화려한 데뷔와는 정반대로, <모비딕> 이후로 이어진 소설들의 불경함과 파격 때문에 결국에는 미쳤다는 수군거림과 함께 대중에게서 완전히 잊힌 채로 은둔하다가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후대 사람들은 그의 생애를 두고 저주 받은 작가라고 말하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염원은 모두 이루어졌다. 작가로서 불멸하고 싶다는 이 위험한 소망대로, 그가 빚어낸 투쟁과 비극은 소설 속에서 허먼 멜빌이라는 존재의 생명력을 그대로 품고 있으며, 때문에 사후 120여년이 흐른 지금에도 계속해서 그를 부활시키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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