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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금성] 무착, 유(有)도 공(空)도 아닌 식(識)의 시대를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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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짱숙 작성일19-07-19 16:32 조회2,1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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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착, 유(有)도 공(空)도 아닌 식(識)의 시대를 열다


장현숙(금요대중지성)


유식무경(唯識無境)


유식(唯識)은 ‘오로지 식만 존재한다.’는 뜻이다. ‘유식무경(唯識無境)’은 유식사상을 한마디로 설명하는 것으로, 경계(境)는 없고 오로지 식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일체유심조’와 비슷한 개념이다. 유식에는 ‘일수사견(一水四見)’이란 말이 있다. 하나의 물(水)을 네 가지로 본다는 뜻. 인간은 마시는 물로, 물고기는 사는 집으로, 아귀는 피고름으로, 천상에서는 세계를 장식하는 보배로 본다는 것이다. 어릴 적에 날아다니는 벌레를 보며 가끔 궁금할 때가 있었다. 이렇게 형형색색으로 보이는 세상이 저들에겐 어떻게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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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은 대승불교의 한 학파이다. 정화스님이 쓰신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는 『유식삼십송』을 해설한 것이다. 『유식삼십송』은 서기 400년~480년경 인도 북서 간다라국의 푸루사푸르에 사는 ‘세친’이라는 사람이 썼다. 그럼 세친이 유식사상을 처음 생각해냈나? 그건 아니다. 유식학파의 실제 개조는 ‘무착’이다. 세친과 무착은 형제관계이다. 무착이 형. 그런데 우리는 불교는 ‘공(空)’사상이라고 알고 있다. ‘일체는 모두 공(一切皆空)’이라는 말은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본 말이다. 그런데 대승불교의 한 학파인 유식은 ‘일체개공’이라는 말은 하지 않고 ‘유식무경’이라고 한다. 왜 그럴까? 이것을 알려면 유식사상이 나오기까지 인도의 불교의 상황을 알아야 한다.   


부파불교의 ‘유(有)’와 용수의 ‘공(空)’


불교는 부처님 열반 후 100년 무렵 근본 분열을 하게 된다. 그 이유에 대해 남방 불교와 북방불교는 각자 다르게 말하지만, 어쨌든 상좌부와 대중부로 분열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무렵 마우리야 왕조의 아쇼카왕이 인도를 최초로 통일하게 되는데, 아쇼카왕은 통일제국의 통치권을 확립하고, 왕의 권력을 제약하고 있는 브라만 세력을 극복하기 위해 불교에 귀의한다. 그러면서 사찰에 많은 토지를 하사하게 된다. 그런데 사찰이 부유해지자 승려들은 걸식을 멈추고, 경제적으로 윤택해진 승원에 머물며 불교에 대한 각종 이론을 만들어 논쟁을 일삼았다. 이 시기 불교를 ‘아비달마불교’ 또는 ‘부파불교’라 한다.  

이 시기 승려들은 대중과 만날 수 있는 걸식은 하지 않고 ‘법’에 대한 이론과 논쟁에 빠졌다. 그리고 대중의 구제보다 ‘아라한’이라는 개인적 열반을 최고의 가치로 두게 되었다. 대승불교는 대중을 외면하고 부처님의 ‘법’을 독식하는 승려들에 대응하여 일어난 새로운 불교 운동이었다. 이들은 부처님 사리를 보관한 불탑을 예배하거나 부처님을 찬양하는 불전(佛傳) 문학을 통해 부처님을 숭배했는데, 재가신도와도 다르고 승도 속도 아닌 제3의 성격의 집단이었다. 이들 집단의 신앙적 성격은 부파불교의 ‘법(法)’ 중심에서 부처의 깨달음을 체험하려는 ‘불(佛)’ 중심의 불교가 형성되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어쨌든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이 ‘공(空)’을 이야기하는 각종 대승경전들이 편찬되자, ‘공’에 대한 이론적 체계를 마련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공’이란 무엇이며, 그것의 이론적 근거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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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공의 철학적 근거를 마련한 사람이 ‘용수’(나가르주나, 150년~250년)이다. 용수는 『중론』을 통해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인 ‘공’을 이론적으로 이해시키고, 아비달마불교를 비판한다. ‘세계는 무엇이며, 자아는 무엇인가?’에 대해, 초기불교에서는 ‘세계는 경험된 것이며, 자아는 그 같은 경험을 통해 드러나는 가설적 존재’라고 했다. 그런데 아비달마불교에서는 이러한 경험을 구성하는 온갖 원인과 조건들을 실유(實有)로 해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세계를 구성하는 구성성분들(法)에 자성(自性)이 있다는 것. 이에 용수는 아(我)와 법(法)엔 고유한 본성이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의 언어적 분별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일체의 모든 존재는 ‘공’임을 천명한 것.   


유식, ‘공(空)’이 아닌 ‘식(識)’을 이야기하다


‘공’은 연기(緣起)를 의미한다. 이 현상계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여 연기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자성이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체가 공이라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다 무엇인가? 유식사상은 용수의 공사상이 체계화 된 후 생겨났다. 현상계는 연기적으로 존재하고 별도의 자성은 없다고 해서 모든 존재가 아예 없는 것이 아니다. 일시적이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집도 있고 산도 있듯이, 어떤 형상과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우리의 마음은 존재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공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공을 다시 실체화하거나 모든 것은 허무하고 공허하다는 염세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일시적이긴 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것, 즉 주체의 인격과 그가 행한 행위의 유전(業)에 관한 문제가 연구되어야 했다. 

유식은 ‘유가사(瑜伽師)’들에 의해 연구되었다. 유가사는 ‘요가를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요가수행 중 각종 선정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마음속에 나타나는 갖가지 영상은 다만 식(識)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정을 통해서 ‘나타나는 대상은 모두 마음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는 자각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경험은 우리의 일상 경험도 마음이 나타난 것이라는 자각으로 이어졌다. 유식의 소의경전인 『해심밀경』에 ‘아타나식’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는데, 아타나식은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식’을 의미한다. 우리의 표면 의식이 잠자고 있을 때도 아타나식은 계속 활동하면서 호흡, 심장의 활동 등을 유지한다고 생각했다. 표면 의식에 가려져 있지만 우리의 모든 활동을 주관하는 잠재의식. 이 ‘아타나식’이 유식에서는 ‘아뢰야식’으로 불러지며 ‘인격·경험의 주체 또는 인식의 주체’로 설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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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에 의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가 현행(現行)하여 나타난 것이다. ‘아뢰야식’이라는 깊은 무의식에 저장되어 있던 종자가 전변(轉變)을 거쳐 드러난 것이 이 세상인 것이다. 그러니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는 종자가 무엇이냐에 따라 그리고 그 종자가 어떤 인연을 만나느냐에 따라, 하나의 물(一水)이라도 사람에게는 물로, 아귀에게는 피고름으로, 물고기에겐 집으로, 천상에선 보배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는 것(四見).   


무착, 유가사(瑜伽師) 미륵을 만나다 


유식의 사상가로 미륵, 무착, 세친을 들 수 있다. ‘무착’은 서기 395년~470년 경 북인도의 사람이다. 소승불교로 출가해서 상좌부 계통의 선정을 닦아 공관(空觀)을 체득했다. 하지만 공을 체득했음에도 여전히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 등의 마음의 동요가 있었다고 한다. 무착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륵을 친견하고자 했다. 마침내 선정 상태에서 도솔천에 올라 미륵보살을 친견하고 유식의 교리를 듣게 된다. 그리고 돌아와 그 내용을 대중에게 전하게 되는데 이것이 유식의 시작이다. 그런데, 무착이 실제로 미륵보살을 만났을까? 그건 알 수 없지만, 무착이 만난 ‘미륵’이란 도솔천에 있는 미륵보살이라기보다 무착 이전에 유가행파의 논사들을 ‘미륵’이라는 이름으로 통칭하여 부른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무착은 미륵에게 들은 유식의 교리로 『유가사지론』을 짓는데, 『유가사지론』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논서는 요가를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인 ‘유가사’들이 현실에서 닦은 마음의 경지를 설명한다. 




마음을 ‘심,의,식(心,意,識)’으로 나누어 부르는 것은 초기불교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초기불교에서는 심, 의, 식 각각의 차이를 뚜렷하게 분석하진 않고, ‘심,의,식’ 전체를 그냥 ‘마음’이라고 부른다. 마음을 세분하여 나누어 연구하는 것 보다 자기와 세계를 연기적으로 인식하는 실천수행이 ‘고(苦)’를 해결하는 더 큰 방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착은 공을 체득하고도 마음의 불안이 계속되는 것을 계기로 마음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했고, 표면의식에 영향을 주는 잠재의식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잠재의식이 표면의식에 주는 영향과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체계화시켰다. 


우리시대 왜 ‘유식’인가?


인도에서의 불교는 유식을 끝으로 중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용수의 공사상은 티벳에 영향을 미쳐 ‘티벳밀교’가 탄생하고, 중국으로 가서는 ‘선불교’로 발전한다. 그리고 서양으로 건너가서는 심리학과 만난다. 심리학은 식(識)의 학문이다. 우리의 고통이 어디서 오는지 마음을 탐구하여 해법을 얻고자 한다. 특히 심층의식을 분석하여 현실의 고통에 영향을 미치는 원인을 찾는다. 연기법, 즉 공을 체득하는 것이 고통에서 해방되는 가장 빠른 길이지만, 화려한 물질로 정신을 현혹하는 이 시대에 ‘나도 없고, 대상도 없다’는 공은 어렵고도 모호하다. 오히려 ‘마음속에 나타나는 갖가지 영상은 다만 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이해하는 것이 더 쉬운 세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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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가 세상을 하나로 연결하며, 우리는 ‘하나’로 그리고 ‘각자 다른 세상’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대한 세상과 마주했다. 앞서 일수사견을 얘기했다. 물은 물로써 절대 변하지 않는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언제,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물은 수많은 모습을 한다. 그 수많은 모습은 물이라는 ‘대상’과 만나는 주체의 ‘식(識)’이 반영된 것이다. 그러니 내가 경험하는 세상은 나의 식이 반영된 세상이다. 이 시대 SNS, 영화, 홀로그램 등을 통해 볼 수 있는 형형색색 다양한 세상은 그 세상마다 각자 다른 식이 반영된 다른 세상이다. 분리되고 작은 세상이지만 하나이면서 거대한 세상을 이루며 연결되어 있다. 유식은 우리의 식이 잠재의식까지 전의(轉依)되었을 때 이 거대한 하나의 세상과 마주할 수 있다고 한다.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호흡하는 한생명의 세상. 무착이 발견한 그 세상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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