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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금성] 『안티 오이디푸스』, 텍스트가 수행한 혁명
 글쓴이 : 성남 | 작성일 : 19-07-19 17:10
조회 : 459  


안티 오이디푸스, 텍스트가 수행한 혁명

                 

                                                                                                                 이성남 (금요대중지성)



685,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안티 오이디푸스는 저 ‘68혁명의 5로부터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프랑스는 드골정부였는데, 전후 경제적으로 가장 안정을 이룬 시기였고 실업률도 가장 낮았던 시기였다. 가장 안정된 번영기에 예고 없이 다가온 혁명. 그것은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무의식 속에 있던 삶의 욕망들이 만들어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교육, 예술, 여성, 성 소수자, 이민자 등 사회전부문의 억압된 욕망들이 꿈틀거렸다. 즉 사회구조에 도전한 욕망의 흐름이 권위적인 제도장치들에서 저마다 뛰쳐나온 셈이다. 딱히 혁명의 리더도 강령도 없었던 낯선 혁명. 제각기 다른 욕망의 목소리가 거리를 물들였다. 이제껏 한 번도 혁명에 등장하지 않았던 욕망의 혁명이 분출했던 것이다. 주체가 없고 흘러 다니는 욕망의 발견.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있어서 685월의 경험은 그들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욕망이란 무엇인가? 그들은 욕망론을 새롭게 쓰고 싶었다.


68혁명은 확실히 사회 변화를 촉발하는 기폭제였다. 당시 세계적인 흐름으로는 근대자본주의에서 탈근대자본주의로 이행된 분수령으로 본다.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는 수정자본주의가 만연했었고, 대놓고 억압하던 훈육사회에서 이제는 지능적으로억압하는 통제사회로 이행한다. 프랑스 내부적으로 가장 큰 변화를 꼽자면 프랑스 공산당의 몰락이다. 좌파가 더 이상 혁명적 대안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고 그들의 무능함은 혁명을 더 촉발시켰다. 그래서 기존 좌파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롭고 다양한 사상들이 생산된다. 소위 포스트 68’로 불리는 철학자들에 의해 사상이 전개되는데, 그 중 푸코와 들뢰즈가 가장 돋보였다. 그들은 노동자를 거대 주체로 보는 역사의 선형적 발전 개념이나 국가 중심의 권력 개념으로부터 벗어나야한다고 주장했다. 또 계급보다는 각각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신체와 욕망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푸코는 권력으로,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으로 68혁명이 남긴 과제를 각각 이어간다.


혁명은 뜨거웠지만 두 달 만에 막을 내렸다. 대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가서 직장에 취업해야 하는 걱정이 있었고, 노동자들은 그들 나름의 이해가 있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데올로기가 문제가 아니라는 걸 직감한다. 계급투쟁과 권력획득으로 환원되지 않는 욕망을 다루는 미시정치로의 이행! 그들은 왜 예속을 욕망하는가?’라는 스피노자의 고전적 물음으로 돌아가 유물론적 정신의학자인 라이히의 답변에 주목한다. 대중은 속은 것이 아니라 파시즘을 욕망한 것이라고. 그들은 더 나아가 68혁명에서 분출했던 욕망과 무의식을 관통하는 하부구조를 분석하지 않고서는 자본주의에 예속된 삶을 벗어날 수 없고 세포 속까지 침투한 미시파시즘을 떨칠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절박한 물음에 대한 답변이었다.

 


새로운 존재의 출현, 욕망기계


이 책은 68혁명 그 5월로부터 온 것이라고 가타리도 밝혔듯이, ‘중심이 없는 권력’, ‘분열하는 욕망의 작동 방식을 추적한다. 그들은 먼저 정신분석학자들의 욕망론에 태클을 건다. 당시 프랑스 사상계를 주름잡고 있었던 라캉과 정신분석학자들은 욕망을 가족극장으로 이해했다. 그들이 주장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욕망의 생산성을 모른다. 욕망을 언어로 구조화시켜버리고, 결핍과 재현만을 재생산한다. 그들은 해괴망측한 거세남근을 내세워 오이디푸스 가족 삼각형 안에 보기 좋게 가두어 놓고, 자본주의에 복무하는 부르주아 도덕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어줬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가 생각하기에 욕망은 공장과도 같아서 끊임없이 낳고 낳는 생산만이 있을 뿐 어떤 의미화나 주체화도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우리 시대의 욕망은 자본주의에서 흘러 다닌다. 무엇을 하건 시장과 돈의 논리가 강력하게 우리의 무의식의 층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나 의식의 층위에서 혁명을 논한다는 건 매우 순진한 생각이다. 욕망의 해방을 부르짖던 혁명의 주역들이 왜 무기력하게 자본에 다시 포획됐는가? 들뢰즈와 가타리는 예속을 욕망하는 하부구조를 논하지 않고는 혁명을 제대로 분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해서 욕망의 생산성을 논증하기 위해서 기계 개념을 내세운다.


자연 철학자이자 유물론자였던 그들은 언어논리를 와해시키고 인간중심주의 인식론을 과감하게 벗어난 기계개념을 펼친다. 이때 기계는 기능적 관점만 지닌 메카닉(mecanic)’이 아닌 작동과 이탈을 멈추지 않는 머쉰(machine)’이다.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까지 무너뜨리는 존재, 생명과 우주를 포괄하는 개념의 머쉰(machine)’말이다. 그런데 머쉰(machine)’이 욕망과 결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바로 주체가 해체된다. 탈주체가 일어날 때 기계와 욕망 사이에 직접적인 연줄이 생기고 욕망은 기계화된다. 욕망이 곧 기계이고 욕망기계는 우주로 뻗어나가며 무엇과도 접속이 가능하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기계와 기계의 만남만 있다. 다른 기계들과 무한히 접속하며 확장되는 욕망기계들.


68혁명의 욕망의 분출은 다양한 집단들이 결합해서 이전에는 없었던 '기계들'로 나타났다. 그들은 68혁명이 최초로 제기한 욕망의 혁명욕망 기계로 응답했던 셈이다. 푸코가 이 책을 윤리책으로 읽은 것은 정확했다. 나에게 이로운 덕이 나를 기쁨의 신체로 만들어준다고 에티카의 원조 스피노자가 주장했듯이, 당시 정신분석이 주입하고 있었던 거짓 욕망들은 얼마나 인간을 비루하고 슬픈 신체를 만들고 있었던가. 들뢰즈와 가타리는 스피노자의 힘의 변용 능력을 가져와 욕망기계 개념을 완성시켰다. 무한한 능력을 가진 실체로서의 을 기하학적인 방식으로 증명해나가면서 인간의 무한한 변용능력을 주장했듯이, 들뢰즈 가타리 또한 욕망기계라는 인간 존재를 뛰어넘는 새로운 존재를 출현시켜 무한한 접속 변이성을 강조했다.


욕망과 자본의 흐름은 참 닮았다. 서로 흘러 다니고 탈주체화 한다는 점에서. 자본은 우리 신체를 잠식하고 모든 존재를 사유화해버린다. 자본주의의 덫인 사유화와 사유화가 만들어낸 인물들. '아빠-엄마-아이'로 무한반복 재생산되는 존재들은 욕망기계로 접속 변이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도처에 파시스트적 편집증 기계들. 들뢰즈 가타리는 욕망기계만이 미시파시즘을 대적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신체가 다른 신체를 만나 결합을 이룰 때 기쁨의 신체로 이행할 것인가, 혹은 슬픔의 신체로 이행할 것인가. 한 신체가 다른 관념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다. 스피노자는 힘의 변용 능력이 외부에 있지 않고 자신의 내부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가 곧 의 부분임을 증명해냈다. 들뢰즈 가타리는 접속 결합할 수 있는 무한한 네트워크의 가능성을 욕망기계에서 답을 찾았다.

 

분열자로 산다는 것


들뢰즈는 고1부터 철학책만 쭈욱 판 개념을 창조한 철학자였다. 그는 아카데미 쪽에 몸담고 있었지만, 주류철학을 따르지 않았던 안티철학자였다. 오이디푸스를 강력하게 안티하는 그의 사상의 원류는 스피노자와 니체다. 그는 시대와 타협하지 않았던 두 철학자의 안티면모를 그대로 닮았다. 한편 가타리는 몸으로 뛰고 움직이는 활동가 쪽에 가까웠다. 그는 정신병원 클리닉 원장이었고 래디컬한 공산당원이었며, 당시 프랑스 정신분석의 최고 권위자였던 라캉의 제자였다. 그러나 들뢰즈와 공동작업을 하면서 정신분석을 배반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안티철학자'이자 '배반의 철학자'였던 두 사람이 68년 다음해인 1969년에 만나 안티 오이디푸스를 시작으로 천 개의 고원, 카프카, 리좀까지 한 10 년간 공동 작업을 하고 가타리가 1992년 급사할 때까지 별다른 갈등 없이 이들의 우정은 끝까지 간다. 함께 글을 쓴다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데, 그들은 4년 동안 꼬박 매달려 공동의 이름으로 안티오이디푸스(1972)를 출간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들뢰즈가 가타리와의 작업을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다. 때로는 재미있었지만 때로는 아주 지겨웠다고. 그리고 한 쪽에서 어떤 개념을 제안하면 들은 척 만 척 침묵하다가 몇 달이 지나 다른 문맥에서 그것을 사용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고. 가타리 또한 이 책 쓰기를 논리적 작업이 아니라 육체적 작업이라고 했다. 왜일까? 자기의 개념이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그 순간들을 견뎌내는 것. 서로의 다른 생각이 섞여 화학적 결합이 일어나고 그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주체가 해체되는 작업이 바로 가타리가 말한 육체적 작업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함께 글을 쓴다는 것은 수행의 과정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아의 둑을 무너뜨리는 실험과도 같았을 것이다. ‘함께 글쓰기를 통해 둘은 매번 새롭게 생성되는 주체를 실험함과 동시에 자기 안의 분열하는 욕망을 확인하는 작업을 온몸으로 했을 것이다.


권력이 돼버린 언어 형식을 파괴함으로써 외설스럽고, 산만하고, 어이없고, 웃기는 책 기계의 탄생! 이렇게 그들은 책을 쓰는 순간, 코드에 포획되지 않고 욕망기계로 끝없이 생성의 길을 냈다.안티 오이디푸스』라는 텍스트를 생산해내는 과정 자체가 혁명적이었다. '무의식의 바닥에서 으르렁거리고 윙윙거리는' 멈추지 않는 공장으로 분열이란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보여줬다 수많은 들뢰즈들,타리들 혹은 들뢰즈와 가타리들의 이름으로 결합하고 변이하는 분열자로 존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예속되지 않고, 기쁨의 존재로 생성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텍스트로 그들은 증명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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