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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금성] 장자, 인간의 굴레를 벗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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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연 작성일19-07-19 18:28 조회1,96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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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자, 인간의 굴레를 벗기다  

                                                             배서연(금요대중지성)


2019년 초 나는 한 남자와 접속을 시도했다. 남자의 몰골은 추레했으나 나는 지질구레한 그의 행색에 실망할 겨를이 없었다. 그의 깊은 고뇌의 산물로 인해 나 역시 고뇌에 빠졌기 때문이다. 하긴 말단직인 옻나무 숲지기를 잠시 한 것을 빼고는 짚신을 삼으며 생계를 겨우 이어갔으니 뭘 갖추고 말고 할 것이 있었겠나 싶다. 짚신과 함께 가난의 일상을 엮으며 살았던 그는 지금으로부터 꽤 오래 전, BC 370년경 태어났으며 이름은 주(周)이고 자는 자휴(子休)다. 

언젠가 그는 물을 관리하는 감하후에게 양식을 꾸러 갔다. 감하후가 빌려준 돈을 받게 되면 그때 많이 꾸어주겠다고 하자 장자는 감하후의 꼼수를 멋지게 후려친다. 땅바닥에서 헐떡거리는 물고기에게 필요한 것은 한 모금의 물이지 저 엄청난 동해 바닷물이 아니라고! 이 사실만으로는 ‘오, 진짜 배짱 좋은 백수다’ 하겠지만 그의 인간을 넘어선 생명, 자연의 도에 대한 범상치 않은 시선이나 사유의 깊이를 보면 결코 나태하지도 비루하지 않은 삶을 살았음이 역력하다. 권력과 부귀와 안락한 삶을 반역하는 삶, 가난을 자초하고 소박을 추구한 그는 인류라는 종족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인간이 스스로 만든 굴레에서 벗어나 대자유인 될 때까지 불멸의 업적이 될 『장자』를 남겼다. 그의 행보는 당시 그 어떤 사상가도 감히 생각지도 못한 파격적인 것이었다. 장자의 사상적 핵심은 인의(仁義)도 덕(德)도 아니요 그렇다고 명예나 패권도 아니고 물론 부국강병이나 겸애(兼愛)도 아니었다. 

그의 예리한 시선은 시대적 고통을 뛰어넘어 인간을 근원적으로 옭아매고 있는 삶과 죽음의 문제에 꽂혀있었다. 또 그는 삶과 죽음 사이에 끼인 채 버둥대다 시들어가는 인간의 삶, 그 비극을 결코 간과할 수 없었다. 이 전례가 없는 삶과 죽음에 관한 그의 천착은 어디서 시작되었으며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난세가 피워낸 사상의 꽃, 『장자』  
장자는 천하대란이라는 전국시대를 살았다. 대란은 인간의 욕망과 철기문명의 부딪침으로 전통적 삶에 획기적 변화가 일어나면서 불이 붙었다. 철농기구로 인한 농산물의 생산 증가는 인간에게 땅에 대한 욕심을 불러 일으켰고 이어 수공업 상공업의 발달에 바퀴까지 등장하게 되자 인간의 욕망은 끝 모르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내 중원 대륙은 서로 죽이고 빼앗는 전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패권을 다투던 왕들의 머리가 땅바닥에 나뒹굴고 수십 개의 나라가 엎어지고 뒤집어지면서 중원은 오백년 동안 피비린내를 풍겼다. 더욱이 장자가 산 송(宋)나라는 4전지지(四戰之地)로 사방에서 적군이 쳐들어오는 데다 약소국이어서 전화(戰禍)의 참상은 더 끔찍했다. 해골이 들판을 덮고 피가 강을 이루고 땅과 집을 잃은 이들은 짐승 떼처럼 죽은 원귀들과 함께 중원을 떠돌았다. 죽은 자의 참혹함, 살아남은 자의 비통과 절망,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공포와 불안, 이어지는 기아와 유랑의 삶 어디 그뿐인가. 툭하면 발 자르고 코 베고 사지를 찢어 죽이는 권력자의 잔인무도한 횡포와 하극상은 다반사였다 이 무도한 시절, 장자의 눈에는 인간이란 죽어서도 비극이요 살아서도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왜 인간은 이렇게 죽고 죽여야 하는가? 삶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 끝도 없는 불행과 고통은 멈출 수 없는 것일까?
  
이런 삶과 죽음에 관한 장자의 고뇌는 조릉 숲 사건 이후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한다. 어느 날 장자는 밤나무에 앉은 까치를 잡을 요량으로 활을 겨누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까치는 버마재비를 노리고 그 버마재미는 매미를 노리고 있었다. 더욱이 까치를 노리고 있던 자신을 숲지기가 노려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장자는 크게 충격을 받는다. ‘서로 노리고 노리는 이 관계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 고뇌로 오랜 시간 동안 침잠에 빠졌던 장자는 드디어 자신을 포함해 모든 생명은 먹고 먹히는 ‘파괴의 사슬’ 속에 있으며 그건 피할 수 없는 존재들의 운명이며 자연의 순리라는 것을 통찰하게 된다. 장자의 이런 생명의 민낯에 대한 이해 내지는 받아들임은 자연의 한 존재인 인간에 대한 이해로 이어졌다. 인간이란 그렇게 특별하지도 굉장하지도 그렇다고 하찮거나 미미하지도 않은 평등한 자연 속의 한 생명이었다. 또 인간의 삶이란 시간이 주어졌으니 다른 존재들과 함께 어우러져 자신의 모양과 빛깔로 그냥 살아가는 것, 그뿐이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한 죽음 또한 다른 생명들처럼 변화의 한 과정을 겪는 것에 불과했다. 낮과 밤이 바뀌고 봄가을이 바뀌는 바로 그런 자연의 순리처럼. 자, 이제 장자가 장자이기를 그쳐도 자신은 여전히 우주의 어느 한  부분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삶에 매달려 아등바등할 필요가 없었다. 설사 죽음이 영영 헤어나지 못할 구렁텅이라 할지라도 구렁텅이 역시 자연이라는 것, 그리고 그 구렁텅이 역시 변화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을 자연 속의 한 생명으로 봄으로써 인간의 근원적 부자유, 생사로부터 해방된 장자는 더 이상 무엇을 추구하고 말 것이 없었다. 가뭇없는 자연의 세계에서 찰라찰라 변화 중인 한 존재가 무엇을 집착하고 무엇을 욕심낼 것인가? 따라서 그에게는 권력도 명예도 부귀도 비난도 수모도 그냥 스쳐 지나가는 바람일 뿐이었다. 그는 초(楚)의 위왕(威王)이 천금을 주며 재상 자리를 권유했으나 자신은 흙탕물에서 노니는 돼지로 살겠노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또한 양식을 구하러 다니는 남루한 삶 속에서도 거리낌 없이 당당했다. 이는 인간적 삶을 넘어 너나 구별할 것 없는, 위계 없는, 각기 다르되 차별 없는 만물제동(萬物齊同)의 생명적 삶을 살고자 하는 장자의 깊은 사유에서 나온 삶의 방식이었다.     
 
말라비틀어져가는 삶에 대한 연민 
물론 장자만이 이런 살육과 권모술수, 약탈이 횡횡하는 광란의 시대에 대해 고민한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의 여러 제자백가 중 장자와 같은 세대를 산 맹자, 그는 공자의 인의(仁義)사상을 이어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된 왕들을 설득하기 위해 정치적 행보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유려한 언변으로 덕의 정치, 역성혁명을 주장하며 수십 대의 마차와 수백 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인간의 선(善)함을 굳게 믿었던 맹자는 왕이 덕을 쌓으면 백성들이 모여들고 부국강병이란 절로 따라오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인간을 우주만물의 한 존재로 통찰한 장자에게 삶의 기준이 되는 건 모든 존재를 품고 있는 자연의 이치, 도였다. 그런 그에게 굳이 인의예지라는 인위적인 틀 속에 인간으로 밀어 넣어 도덕적 인간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맹자의 주유(周遊)가 얼마나 호기롭게 보였을까?   
 
호기롭기를 말하자면 사실 묵가를 따라갈 사상이 없다. 유가의 예악의 전통과 충효 사상에 맞대응하여 낮은 자세로 헌신하며 세상을 바꾸어보겠다고 나선 이들이 묵가의 무리였다. 겸애, 검박, 평화를 내세운 이들은 검은 먹과 검은 옷으로 무장하고 정강이 털이 한 올도 남아있지 않을 만큼 타인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들의 혈육을 넘어선 너른 사랑이라는 것은 정작 자신들의 삶을 억압하고 피폐화시키는 데서 나온 것이다. 장자는 분명 자신을 죽이고 다른 생명을 살리는 이런 희생적 삶이 진정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일까 고뇌했을 터이다.   
 
어찌 되었든 이들 사상가들의 행보는 자신들의 사유나 구미에 맞게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는 야망의 발로였다. 또한 백성을 순한 노예로 길들이기 위한 것이었고 패권쟁탈에서의 승리, 혹은 부국강병의 욕망을 부추기는 것으로 이는 민초들에 대한 억압과 폭력일 뿐이었다. 장자가 보기에는 패권의 열망으로 중원을 내달리는 군주나 이들 사이에서 시비를 일삼는 사상가들이나 언감생심 부귀영화를 꿈꾸며 버둥대는 민초들이나 고달픈 인생을 살기는 마찬가지였다.  

서로 해치고 다툰다면 일생은 말달리는 듯 지나가 버려 막을 도리가 없다. 슬픈 일 아닌가. 평생 속 썩이고 수고해도 그만한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지쳐서 늘어져도 돌아갈 데가 없다. 가엾지 않은가. 세 상사람은 살아 있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 몸이 늙고 마음도 따라 시들어 버린다. 비극이라고 아니할 수 있는가. 사람의 생애는 본래 이렇듯 어리석은 것일까? (『장자』 「제물론」 안동림)
  
전국시대 사상가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무도했고 사람들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고통과 질곡 속에서 허덕였다. 외물에 쏠린 사람들의 마음은 달음박질하고 널뛰기를 하느라 한시도 평온을 유지할 수 없었다. 당연히 그들은 자신들의 치달리는 삶이 자신들의 생명에너지를 갉아먹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이러한 세속적 삶 가운데서 장자는 초라한 움막집에서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고 거친 밥에 나물 한 가지로 소요유(逍遙遊)하는 삶을 살았다. 그의 사유는 세상을 바꾸려하기 보다는 자연의 도, 천도에 이르는 한 개인의 내적 수양- 좌망(坐忘), 심재(心齋), 허심(虛心)과 같은 ‘마음 비우기’로 이어졌다. 이는 권력자든 민초들이든 육손이든 외발이든 꼽추든 그가 누구든지 생사의 부자유와 사회적 물질적 억압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탈출구였다. 장자의 이러한 한 개인의 자유, 행복의 길에 대한 사유는 노자가 자연의 도에 입각한 군주의 무위를 주장하고 처세보민(處世保民)의 정치적 입장을 표명한 것과는 사뭇 다른 길이었다. 
 
누구보다도 인간 존재에 대한 관찰이 예리했던 장자, 그는 인간이 광활한 우주의 한 생명으로서 변화하는 존재라는 것을 통찰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와 해탈의 길을 제시하였다. 또 그의 마음에 관한 사유는 인간이 만든 굴레로부터의 탈주의 신호탄이자 걸림이 없는 대자유의 길, 바로 그 길로 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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