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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금성]인간주의에 맞서다,『안티오이디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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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담담혜정 작성일19-07-19 18:44 조회1,7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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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주의에 맞서다,『안티오이디푸스』 

                                                                                          
                                                                    신혜정(금요대중지성) 
             

『안티오이디푸스』는 ‘프랑스 68혁명’의 결과물이다. 들뢰즈, 가타리는 “당시 우리는 모르고 있었지만, 지금 와서 보면 이 책은 그 5월로부터 나온 것”(『대담』,41쪽)이라고 밝혔다. 프랑스의 낭테르 대학에서 시작된 혁명은 기존의 사유 방식과 일상의 구석구석에 균열을 내며 흔적을 남겼다. 당시 절정을 맞았던 구조주의가 막을 내리고 포스트구조주의, 해체주의가 길을 열었는가 하면 대학의 서열을 매겨 엘리트를 양산했던 교육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불같이 일어나 세상을 뒤흔들며 퍼져나가던 혁명은 무슨 일인지 두 달 만에 사그라진다. 이유가 뭘까? 변혁을 외치던 이들이 모두 질서를 찾아 제자리로 되돌아가 버린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혁명의 과정을 지켜보며 질문을 던졌다. “왜 대중은 자신의 권력을 욕망하듯 예속을 욕망하는가?”『안티오이디푸스』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 책이다.
 
관리 받는 삶, 억압당하는 욕망

2차 세계 대전 후 프랑스는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1958년 드골의 집권과 함께 시작된 경제적 번영은 매 년 평균 5%라는 놀라운 성장률을 기록하며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전례 없는 호황과 지속적인 경제 발전을 통해 노동자와 부르주아 간의 소비 격차가 상당 폭 줄어들었고, 평등 사회에 대한 희망적인 해석도 나오기 시작했다. 대형 유통업체가 생기고 노동자의 절 반 이상이 자가용을 갖게 되는 등, 바야흐로 ‘소비 자본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드골 정부는 이러한 안정기를 이어가기 위해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완성해나간다. 당시 기성세대는 드골의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통치 방식에 이의를 갖지 않았다. 왜일까? 그들 역시 체제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삶을 통해 지금의 풍요를 유지하고 싶은 욕망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후 세대인 젊은이들은 달랐다. 그들의 눈에 비친 기성세대는 고리타분한 속물에 불과했다. 자신들의 일상이 자본에 저당 잡힌 채 관리되고 속박 당하는 것도 모른 채 살아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자신들의 경험과 이데올로기를 무조건적으로 강요하는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태도에 젊은 세대는 마침내 폭발하고 만다. “금지하는 모든 것을 금지한다.”, “부르주아 사회를 충직하게 지키는 개가 되느니 자유로운 삶을 살겠다.”는 슬로건을 앞세우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젊은이들은 억눌린 욕망의 해방과 일상의 혁명을 외쳤다. 68혁명은 종전과는 다른 양상 속에서 펼쳐진다. 어떤 점에서 그럴까? 국가 체제의 전복이나 정권의 교체가 아닌 주체적인 삶,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보장받는 것. 가부장적 기성 질서가 가지고 있던 구조적 모순에 저항했다는 면에서 그렇게 평가할 수 있다.

인간주의에 갇혀버린 무의식

세대 간의 이토록 첨예한 갈등의 원인은 도대체 뭐였을까? 그것은 결국 ‘욕망’의 문제였다. 욕망을 억제하고 숨겨야 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한 기성세대와 욕망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맘껏 발산하고 싶어 하는 젊은 세대와의 대립. 들뢰즈, 가타리는 이와 같은 문제의 중심에 ‘정신분석’이 있다고 보았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프로이트와 그의 이론을 계승한 라캉의 정신분석에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인간에게는 언어로 표현되는 명료하고 정교한 의식이 아닌 좀 더 근원적인 것으로서의 무의식이 있다는 걸 알아냈다. 그리고 그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가져와 무의식을 해석하고 설명한다. 어머니를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의 대결에 실패한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는 법, 금지와 태생적 결여에 대해 학습하게 된다는 것이다. 

무의식은 그래서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이제 아들의 아버지를 향한 불가피한 동경은 신이나 사회 조직 자체의 형태로 아버지를 재창조하기에 이르고 자신을 끊임없이 동일시하게 된다.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통해 주장하는 것은 결국 개인이 성장해 어른이 된다는 것, 사회화가 된다는 건 무의식을 억압하고 금지를 배우는 것. 성숙한 사회적 자아란, 자신의 욕망을 하나하나 거세하면서 완성된다는 거였다. 아버지로 대표되는 신, 법, 도덕, 권위를 지키고 따르는 것이다. 

이렇게 무의식을 의인화하는 방식은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는 유순하고 수동적인 인간들을 만드는 데 아주 유용했다. 한층 교묘해진 현대 자본주의는 정신분석의 인간주의를 도구로 이용해 공리체계를 완성한다. 그리고 국가 체제뿐 아니라 개인의 일상과 사고방식까지 촘촘히 관리하고 포획해나간다. 68혁명은 바로 이런 억압과 금지, 당연시 됐던 사회적 가치를 무너뜨리는 돌파구였다. 특정 이념이나 사상을 채택하고 실현하려는 움직임과는 달랐다.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흐름이었다. 

들뢰즈, 가타리의『안티오이디푸스』 역시 그 흐름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인간의 가치를 자본이라는 등가물로 교환하고 빨아들여버리는 자본주의를 맑스의 이론을 통해 비판하고, 분열분석으로 정신분석에 대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고아다

『안티오이디푸스』의 서문을 살펴보면, 당시 들뢰즈, 가타리가 무엇에 대해 비판하며 넘어서려고 하는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정치적 금욕주의자들”, “정신분석가 및 모든 기호학자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안에 있는 파시즘”. 이들은 모두 하나의 방향성을 띠고 있는 자들이다. 가타리를 만나기 전 들뢰즈는 이미 『차이와 반복』, 『의미와 논리』등을 통해 당시 주류학자들의 이론인 고정된 주체, 의미의 재현, 구조주의 등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했다. 들뢰즈가 보기에 그것은 “하나의 거대 담론에 주석달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표현하는 방식은 조금씩 달라도 결국 외부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 외에는 그 무엇도 아니라는 거다. 

들뢰즈는 우리가 따라야 하는 외부 원인을 규정하는 것은 ‘방향성’이 고정될 수밖에 없고, 하나의 방향성이 생기면 권력이 생기고 이건 결국 파시즘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가타리는 들뢰즈의 이런 사유에 관심이 많았다. 가타리 역시 당시 주류적 담론인 정신분석을 극복하기 위해 맑스의 이론을 접목하려는 시도를 해왔기 때문이다. 라캉 밑에 들어가서 공부도 한다. 하지만 욕망을 언어라는 구조로 분석할 수 있다고 본 라캉에게 한계를 느끼고 그와의 관계를 단절한다. 그 후 들뢰즈와 만나게 된 가타리는 공동 작업을 통해 자신들의 이론을 연결, 접속하고 종합해낸다. 68혁명이 막을 내린 1년 후, 1969년에 처음 만난 두 사람은 그로부터 3년 후인 1972년 『안티오이디푸스』를 발표한다.
 
『안티오이디푸스』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에 대한 해석을 담지하고 있다. 그들이 본 욕망은 정신분석학자들에 의해 거세되고, 억압돼야하는 것과는 다르다. 구조주의적 이론으로도 설명 불가능한 것이다. 오이디푸스 삼각형이라는 틀의 꼭짓점을 통과해 흘러넘치는 생생한 욕망. 이런 욕망의 해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게 바로 들뢰즈, 가타리의 분열분석이다. 이들에게 “무의식, 즉 욕망은 고아다.” 욕망은 동일화되는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자기의 원인이라는 의미이다. 자신이 움직이기 위한 어떤 선행의 원인도 가지지 않는다는 뜻. 이것은 존재 이전에 무언가를 상정하는, 인과적 사슬 자체를 부정해버린 말이다.

안티오이디푸스적 삶

들뢰즈와 가타리는 “정신분석이 상징적이라면, 분열분석은 현실적이고, 정신분석이 구조적이라면 분열분석은 기계적”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기계적이란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들이 말하는 기계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기계와는 많이 다르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 가타리는 ‘기계론적’인 것과 ‘기계’를 구분한다. 기계론적인 것은 미리 설계된 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형성된 통일체, 지극히 인간중심주의적 견해라고 볼 수 있다. 최초에 설계된 목적에 맞게 한 방향으로만 작동하는 것. 들뢰즈, 가타리가 말하는 기계는 그런 게 아니다. “이질적인 것들이 섞여 언제나 변형될 수 있고 배치와 접속을 통해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는 잠재적이고 우연적인 다양체”가 바로 그들이 말하는 기계 개념이다.

또, 기계는 반복을 통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존재이다. 반복 속에서 삶의 흐름을 형성하는 모든 존재들이 기계이다. 들뢰즈, 가타리는 ‘등록, 연결접속, 소비’라는 과정으로 이를 설명하고 있다. 기계는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하면서 주체를 생산하는데, 여기서 주체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매 번 새롭게 탄생한다. 결국 반복이라는 행위를 통해 주체를 해체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사상과 연기론이 떠오른다. ‘나’라는 주체는 없고, 어떤 것과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존재의 구성방식.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반복은 이와 같이 차이를 설명하는 단어와 다르지 않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이 개념은 강박적으로 같은 회로를 반복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다시 돌아올 때마다 뭔가를 새롭게 창조하고 생성하는 흐름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 기계'에 대한 해석을 통해, 우리에게 ‘안티오이디푸스적 삶의 방식’을 제안하고 있다. 그들이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욕망'이란 그 자체로 자유롭고 혁명적이다. 어떤 틀이나 의미화로 해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러한 욕망을 긍정하고 끊임없는 연결, 접속을 실행하며 자신을 무한히 확장해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안티오이디푸스적 삶'의 모습이다. 인간주의적 해석으로 억압하고 오이디푸스 삼각형이라는 블랙홀 속에 가둘 수 없는 우주적인 흐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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