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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금성] 쾌락과 고행 너머, 길을 찾다
 글쓴이 : 후후연 | 작성일 : 19-07-19 18:57
조회 : 267  

쾌락과 고행 너머, 길을 찾다

 

이윤지 (금요대중지성)

붓다가 열반에 들고 난 후 두 달 뒤. 당시 가장 번성한 도시 중 하나였던 마가다국의 라자가하시의 산 중턱에는 커다란 가건물이 서둘러 완공되었다. 아자타삿투 왕의 보시로 세워진, 꽃과 보석으로 장엄된 아름다운 건물. 이곳에 아라한을 성취한 붓다의 제자들 중 특별히 선발된  5백 명이 모였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그들은 스승을 보낸 크나큰 슬픔을 추스르고, 스승이 45년간 펼쳤던 가르침을 결집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인 것이었다.


처음 초기 경전을 만났을 때 가장 놀라웠던 점은
 그 방대한 가르침이 문자가 아닌 운율을 띈 노래의 형태로 수 백년간 전승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붓다의 최측근이자 시자였던 아난다는 뛰어난 천재성으로 스승의 가르침을 모두 암기하고 있었고 그가 결집에서 대표로 앞에 나가 외우고 있던 내용을 송출하면 다른 제자들은 이를 확인하고 합송했다. 율장과 논장 역시 대표 제자가 송출하고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5백 명의 아라한들이 모여 열반에 드신 스승의 가르침을 위해 7개월을 함께 합송하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숭고하고 감동적이지 않은가! 

이렇게 송출된 가르침 중 중간 길이의 가르침을 편집해서 모아 전승된 것이 초기 경전 중
맛지마니까야이다. 내용이 길고 당시 다른 사상들을 비판하며 불교의 교리를 천명한 디가니까야나 불교의 핵심 교리를 주제별로 전달한 쌍윳다니까야와 달리, 맛지마니까야에는 붓다의 제자들은 물론, 각국의 왕들, 브라만과 장자들, 당대의 사상가 등 수많은 사람이 붓다를 찾아와 다양한 상황 속에서 질문하고 가르침을 듣는 장면들이 생생하게 포착되어 있다. 연령대도 다양하다. 10대의 젊은 청년부터 120세의 유명 인사까지. 그들은 붓다를 탐색하고 공격하기도 하지만 결국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깊이 감동하며 기뻐한다.

스승은 비록 돌아가셨지만, 그 모든 상황에서 스승이 설법한 가르침을 빠짐없이 기억해 세상에 널리 알리고 후대에 전승하고자 했던 제자들의 마음은 얼마나 지극하고 간절한 것이었을까?



혼란의 시대, 진리의 나침판을 찾는 사람들


경전을 결집할 때 제자들은 당대의 외도 사상가들을 논파했던 붓다의 가르침을 가장 앞서 편집했는데, 이것은 붓다의 시대가 그만큼 수많은 사상이 출현해 혼란스러웠던 시기임을 반증한다. 붓다는 생전에 무려 62가지의 사상적 견해들을 하나하나 논파하고, 그중에서도 당대에 영향력이 컸던 여섯 가지 사상을 비판했었다. 62가지 사상이라니! 현대의 주요한 종교나 철학도 기껏해야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인데 대체 당시 인도는 어떤 시대였길래 그토록 많은 사상이 혼란스럽게 등장했던 것일까?


기원전 6세기, 인도 북동부지역 갠지스강 유역의 국가들은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마가다, 코살라 같은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한 나라들은 정복 전쟁을 통해 제국의 부와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다. 전쟁으로 패배한 왕과 귀족은 노예로 전락하기도 하고 제사를 관장하던 브라만 계급의 권위는 상대적으로 실추되며 견고하던 카스트 계급이 흔들리고 있었다. 한편 새로이 등장한 철기의 테크놀로지는 이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물질과 부를 축적할 수 있게 했다. 당시 500개의 쟁기가 소요되는 대규모 농장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부족 단위의 소규모 공동 경작에 익숙하던 사람들에겐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새로운 변화였다. 그러나 이런 소유와 부의 증식은 물론 일부 계층에 한정된 것이었다. 대부분의 하층 계급들은 여전히 매일의 생존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맛지마니까야에 등장하는 부유한 귀족과 고용된 하인의 선명한 대비는 당시 부와 계급의 양극화가 첨예했음을 보여준다.


권력자들은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논리로 정복 전쟁을 일으키며 재물과 군사를 늘려갔지만 그들의 마음은 쾌락과 불안 사이를 끊임없이 오갔다. 약육강식의 세계라면 자신도 언제든지 밀려날 수 있는 법. 그들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자신들의 안위를 보장받기 위해 전통적으로 짐승을 잔인하게 죽이는 대규모 희생제의에 의존했고 한편으론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며 불안을 회피하곤 했다. 그러나 희생제의가 다 무슨 소용인가. 그치지 않는 폭력과 전쟁으로 죽음은 도처에 있었으며 도시 근교엔 시체들이 널브러져 썩어가면서 악취를 풍겼다. 나병은 흔했고 하층민들은 전염병, 기아와 싸우면서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윤회를 통해 고통스런 죽음을 반복해야 한다는 공포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공통된 정서였다. 죽음은 언제나 인간 삶에 모순을 드리웠지만, 이 시대 사람들이 고통에 특별히 더 민감했던 것은 질병과 죽음이 바로 가까운 주변에서 쉽게 감지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평범한 일상의 동선에서 오며 가며 썩어가고 부패해가는 시체를 보게 될 때, 인간은 삶과 죽음에 대해 다른 감각을 구성할 수밖에 없다. 한편에선 물질적 부가 쌓이며 도시의 화려한 쾌락을 구가하는데 다른 한편엔 잔인한 폭력과 죽음이 공존할 때 인간은 자연스레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게 아닐까?


중도
, 쾌락과 고행을 넘어


붓다가 젊은 시절 궁전의 문밖에서 '사문유관'이라는, 생로병사의 충격과 맞닥뜨려 질문을 품게 되었을 때 그는 더는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었다. 청년 붓다만이 아니었다. 전통적 바라문 사상에 반감을 느끼거나 삶의 모순을 감지한 사람들은 숲으로 들어가 사색하며 존재와 세계를 탐구했고 이로부터 새로운 철학들이 쏟아져 나왔다. 바라문교의 범아일여 사상은 브라만이 변해서 만물을 이루고 그 안에 상주 불변하는 아트만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비판하는 신진 사상가들은 다양한 요소가 모여 세상을 이룬다는 유물론적 견해들을 내놓았다.  여러 사상은 서로 다른 견해를 피력했다. 그러나 아트만과 같이 육체에서 분리되어 영속하는 주체이건, 육체가 존속하는 동안 요소들의 결합으로 인한 일시적 현상이건 자아를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유물론적 세계관은 삶이 우리의 것일 때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겨야 한다는 쾌락주의로 치달았다. 또 다른 한편에선 내면의 고귀한 자아를 해방시키기 위해 자신의 육체에 극단적 폭력을 행사하는 고행주의가 성행하고 있었다.


쾌락과 폭력. 이 둘은 육체를 지닌 인간이 자신의 욕망에 휘둘릴 때 나타나는 두 가지 극단적 경향성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탐하는 쾌락과 그것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드러나는 분노와 폭력성. 때문에 탐욕은 분노를 내재하고 분노는 그것을 폭력적으로 터뜨릴 때 쾌락을 동반한다. 따라서 탐욕과 분노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인간의 역사는 탐욕과 폭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지만, 기원전 6세기 인도는 정복 권력과 급격한 부의 팽창으로 인간의 탐욕이 더욱 노골적이고 적나라하게 드러나던 시기였다. 유물론적 쾌락주의 사상은 이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해주고 있었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을 향한 폭력도 용인될 수 있다는 도덕 부정론까지 등장해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한몫 거들었다. 반면 내면의 자아를 해방시킨다는 목적으로 자신의 몸을 극단적 고행에 내맡기는 행위는 욕망을 제어하기위해 자기 자신을 향해 폭력을 가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니간타의 자이나교는 이러한 고행주의를 뒷받침하는 당대의 주류 사상이었다.


붓다는 출가 이전, 아버지 숫도다나 왕이 제공한 왕궁의 삶에서 충분히 쾌락주의를 경험했다. 세 개의 궁전, 아름다운 무희들과 최고급 옷과 음식. 그러나 쾌락과 쾌락 사이, 깊은 심연의 공허와 불쾌를 간파한 순간 그는 그 세계를 박차고 나온다. 붓다는 스승을 찾아 요가와 선정을 배우지만 그 선정 또한 정신적으로 일시적인 쾌락의 상태에 머무는 것일 뿐이었다. 남은 것은 고행이었다. 뾰족한 가시가 있는 잠자리, 머리카락으로 만든 옷, 쌀알 한 톨의 식사, 자신의 배설물까지 먹는 극단의 고행을 감행하지만, 그의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까지 자신을 몰아세운 후 그는 끝내 고행을 접는다.


고행을 포기했지만, 아직 새로운 길이 보이지 않았을 때 그의 심연은 얼마나 적막했을까? 모든 것을 다 해보았으나 여전히 해법이 보이지 않을 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나 여기에 붓다의 놀라운 힘이 있었다. 구도의 막다른 골목에서 그는 깨달음을 향한 다른 길이 있을 것이란 확신과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그는 철저히 혼자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찾는다. 그리고 문득 어린 시절 농경제 행사 때 고요하고 시원한 나무 아래서 자비의 마음을 일으켜 자연스레 선정에 들었던 경험을 떠올린다. 감각적 쾌락이 아닌 그런 순수한 기쁨의 상태를 억압할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그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단서가 아닐까? 붓다는 부드러운 죽을 먹고 죽어가던 몸의 원기를 회복하자 사유과 관찰을 통해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증과 억압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리고 선정과 지혜를 깨우쳐 마침내 깨달음에 이른다. 그는 자신이 깨달음을 얻은 길을 쾌락도 고행도 아닌 중도’(Majjhima patipada)라고 명명했다. 쾌락과 고행의 양극단 너머의 가운데 길!


맛지마니까야에 나오는 붓다의 모든 설법은 결국 이 중도의 길을 다르게 변주해 상대의 수준에 맞게 깨달음에 이르는 가르침을  준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감각하는 것들에 대해 쾌락을 추구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것에 걸림돌이 되면 분노하며 자신과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방식을 취하는 데 익숙하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크고 작은 쾌와 불쾌의 문제뿐 아니라 더 나아가 폭력과 전쟁, 살상에 이르는 인류의 큰 문제들도 유래한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붓다가 가르쳐주는 맛지마의 길(Majjhima patipada, 中道)을 맛지마니까야에서 배워보지 않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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