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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장자스쿨) 뭣이 중한디?
 글쓴이 : 고은비 | 작성일 : 19-07-19 19:52
조회 : 342  
   그로부터 도주선을 그렸습니다.hwp (43.0K) [5] DATE : 2019-07-19 19:52:48

 

뭣이 중 한디? 장자의 굳건한 자기 돌봄


고 혜경


 

『장자』에는 유달리 흔치 않은 외모를 지닌 이들이 대거 등장한다. 절름발이에 꼽추, 언청이인 인기지리무신,(闉跂支離無脤), 외발인 왕태, 신도가, 숙산무지, 위나라의 추남 애태타(哀駘它), 커다란 혹이 달린 옹앙대영 등. 나는 그들의 모습이 잘 상상되지 않아 종이에 그려 보려 했으나 완성하진 못했다. 표현기술의 부족도 문제지만 근본적으론 이런 형태를 한 사람들의 저항감이 컸다. ‘흉측하다’ ‘이상하다’는 표상이 그림의 완성을 방해한 것 같다. 현 시대 의 기준은 눈 크고 얼굴 작은 팔등신 미녀다. 이들이 살았던 시대도 지금과 기준은 다르지만 별로 다르지 않았다. 『장자』외에 동양고전 어디에도 비정상인(?)이 이렇게 많이 등장하는 곳은 없다. 그럼 장주가 이런 인물을 굳이 불러낸 까닭은 무엇일까?

 

. 장자의 시대.

장자는 이름이 주(周)이다. 그는 송(宋)나라 ‘몽(蒙)’사람이다. 생몰연대가 확실치 않으나 BC. 370년 쯤, 즉 전국(戰國)시기 중반을 살았던 인물이다. 이때는 주 왕조가 몰락(BC. 770년)후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인 진(秦. BC 221∼BC 206)이 세워질 때까지 각 지방 제후들이 세력다툼을 하던 시대 중에서도 가장 치열한 전국(戰國)시기이다. 특히 송(宋)나라는 여러 국경과 맞닿아 있어 사전지지(四戰之地)라 불렸을 정도로 사방으로 적과 싸워야했고 그만큼 전화(戰禍)가 심했다. 살육으로 들끓던 잔인한 역사의 현장에서 장주는 말발굽 소리, 칼과 칼이 부딪히는 소리, 비명 소리, 옆집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들으며 살았다. 한바탕 싸움이 끝난 들판엔 시체가 겹겹이 쌓이고 앞 싸움의 전사자는 벌써 해골이 되어 나뒹군다.

주 왕조는 완전히 사라지고 제후들의 시대가 되었다. 왕조가 붕괴된 주요 원인 중의 하나로 농업 혁명을 들 수 있다. 철기의 도래함과 더불어 출중한 농기구들이 생산된다. 땅을 깊게 팔 수 있는 보습을 비롯하여 괭이, 호미, 삽, 낫이 만들어졌고 생산력은 놀랍도록 증가했다. 농사에 소를 이용하고 분뇨를 비료로 쓰는 방법도 알아냈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이모작의 방법도 터득해 농업의 생산력은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고대 동북아 지방의 부자는 부농을 의미했다. 그들은 잉여가치를 세금으로 내며 신분세탁을 했다. 반면 이런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한 사람은 소작농이 되고 더욱 몰락하면 힘이 센 자들은 도적이 된다. 내, 외부적으로 허약했던 주 왕조는 이런 사회 혼란을 수습할 힘이 전혀 없었다. 더 이상의 역사는 이어지지 않았고 몰락의 때를 맞이한 것이다.

농업 생산량의 증가와 비례하여 소인도 증가했다. 당연히 기존 질서는 심하게 흔들렸다. 혼돈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사회는 복잡해지고 문제들은 자꾸 발생했다. 맞물려 몰락한 주의 왕족, 귀족, 관료들. 즉 글을 아는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살 길을 찾아 나섰다. 제후들도 통일제국에 대한 열망이 강했으므로 이들의 지식이 필요했다. 또, 세력이 큰 나라, 작은 나라가 서로 먹고 먹히는 살벌한 시기이므로 살아남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사유능력과 그것을 표현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각자 나름대로 시대에 응답했다. 이들을 제자백가(諸子百家)라 한다. 공맹으로 대표되는 유가(儒家)·묵가(墨家)·명가(名家)·법가(法家)·도가(道家)등이 있다. 무겁고 참혹한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자 인간과 운명에 대한 연구가 꽃을 피운 결실이다. 생존을 향한 열망이 인간의 창조성을 가장 뜨겁게 자극했던 경이로운 시대였다.

전국시대 말기의 ‘사공자’인 맹상군, 춘신군 등은 인재를 많이 모으고 후하게 대접하는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들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축적된 부가 기반이 되었다. 인재를 찾고 초빙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장자에 대한 사료는 사마천의 <노장신한열전>이 거의 유일하다. 『사기』에는 초나라 위 왕이 장주에게 인재영입 시도를 한 이야기만 짧게 소개되어 있다. 위 왕은 사신을 보내 후한 예물을 주고 재상으로 맞이하려 했다. 장주가 현명하다는 소문이 그곳까지 퍼졌나보다. 장주는 “나는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 노닐며 스스로 즐길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들에게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오.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 뜻대로 즐겁게 살고 싶소.”하며 거절한다.

이 때 글을 다루는 사(士)들은 제후에게 기용되어 뜻을 펼쳐 이름이 나고 부귀와 공명을 이루는 것이 꿈이었다. 공자도 이것을 성취하려 몇 십 년을 떠돌며 유세를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장자는 축구로 치자면 공을 차지도 않았는데 골대 안에 공이 들어왔고 그 공 을 내친 꼴이다. 벼슬을 하기엔 장자의 시야가 너무 넓고 깊고 근본의 근본을 살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자연의 이치, 삶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그에게 부국강병, 통치술, 출세는 생명력을 갉아먹는 일이었다.


장자/맹자

맹모삼천(孟母三遷)의 고사(故事)로 유명한 맹자는 장자와 동시대 인물이다. 양혜왕(梁惠王), 제선왕(齊宣王) 시대에 활동하였다. 공자 사후 약150년이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두 인물은 어떤 사유를 하였으며 무엇을 주장했는가? 『맹자』 ‘양혜왕장구’ 첫머리에 먼 길을 온 맹자를 양혜 왕이 맞이하며 ‘장차 내 나라에 무슨 이로움이 있습니까?’하니 맹자가‘ 왕께서 하필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단지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라고 답한다. 이 대화에서 알 수 있듯 그가 추구했던 것은 인의정치였다. 양혜 왕은 거금을 들여 초청했는데 ‘하필왈리(何必曰利)가 나오면 곤란하지 않을까? 너무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것일까? 맹자는 왜 초청에 응했을까?

맹자도 공자 못지않게 열국을 전전하였다. 그러나 공자의 문제의식과는 많이 다르다. 맹자는 벼슬자리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전국시대는 이미 벼슬과 분봉을 받은들 의미가 없었다. 그것이 어느 순간 잿빛 무덤이 되는 일은 너무 자주 일어났다. 그는 진정으로 자기 말을 들어줄 수 있는 군주를 만나기 위해 천하 주유를 한 것이다. 그의 진정은 무엇인가? 민중의 처참한 삶을 구하고 싶었다. 그들은 일상에서 기근. 홍수, 한해 등에 시달린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노동에 전력을 다해도 군주의 학정에 무너진다. 청장년의 힘 있는 농부들은 노역에 끌려가고 노인과 아녀자만 힘든 행보를 한다. 기근이 들면 도랑에 시체가 뒹굴고 여우와 이리떼가 달려든다. 군주와 측근들은 곳간에 고기가 걸려있고 산해진미를 먹는다. 이런 학정에 시달리는 민중은 폭군을 타도하는 해방자가 나타나주기를 학수고대한다. 맹자의 혁명론이다. 그만큼 민중의 삶을 구원해야 한다는 시급한 사명감이 있었다.

전국시대(戰國時代. BC 403~221)는 더 많은 백성, 더 많은 땅을 차지하여 부국강병 하겠다는 욕망이 천하를 뒤덮은 때였다. 각국의 제후들은 재사, 책략가를 초빙하여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고자하였다. 장의, 소진과 같은 유세가들이 환영받는 때였다. 자연스럽게 병가. 법가들이 활약하였다. 효과가 빨리 증명되기 때문이다. 유가는 썩 환영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자는 자신의 주장이 가장 현실적이라 생각했다. 국가의 기본은 인간이며 인간의 기본은 가족윤리이고 가족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도덕심을 함양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단위다. 이 기본이 무시되면 인간다운 삶을 수 있는 국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맹자의 도덕주의는 민중의 소망은 민생이며 민생은 한 가정의 안락한 삶이라고 역설한다.

유가사상의 핵심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이다. '자기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천하를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삼는' 학문이다. '자기(己)를 수(修)한다'함은 개개인의 도덕성을 신뢰하여 그것을 신장(伸長)하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은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유가에서는 자기 도덕성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사람을 군자라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소인이라 한다. 소인도 교육을 통하여 군자에 이를 수 있다.

유학은 '치자(治者)'를 위한 학(學)이다. '치자'는 황제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관료를 포함한다. '사람을 다스리는' 일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유가는 현실에 존재하는 국가권력에 적극적이다. 유가사상은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전국시대에 있어서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인간의 도덕성에 신뢰의 기초를 두는 학설은 군주권력의 일원적 강화(一元的 强化)를 지향하는 법가(法家)에 의하여 배격되었다. 또 '치자'의 일원이 되어 이상적 정치 실현에 광분하는 태도는 인위적인 노력의 한계나 허무함을 깨달은 도가로부터 조소를 받았다. 그러한 비판이나 조소 속에서 전통과 중용(中庸)을 지키려고 노력한 것이 유가였다고 할 수 있다.

장주는 한 때 칠원(漆園)에서 관리로 일한 적도 있었으나 이후 평생 벼슬하지 않았다. 대신 가난을 택했다. 장자는 심(心)의 영역을 제외한 인간사의 모든 것이 운명에 달렸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인식과 도(道)의 무위(無爲)성이 결합하여 장자는 안명론(安命論)에 이르게 된다.

‘안명’은 ‘제물(齊物)’과 ‘자아 없애기[无己]’를 통하여 달성된다. ‘제물’의 타당성을 논증하는

근거로서 장자는 ‘현실적 가치 기준의 타당성 없음’과 만물의 근원인 ‘도(道)에 경계가 없음’

을 들고 있다. 장자는 운명을 실존하는 인간에게 터무니없이 나타나는 사건이며. 회피할 수도 없는 필연성’으로 보았다.

『장자』 내편 <인간세>와 <덕충부德充符>엔 몸의 형태가 기이한 존재들이 등장한다.

 

“‘지리소’라는 사내는 턱이 배꼽에 가려지고 어깨는 정수리보다 높으며 두 넓적다리가 옆구리에 닿아 있다. 옷을 깁거나 빨래를 하면 충분히 먹고 살아갈 수 있고 키질을 해 쌀을 고르면 열 식구는 먹여 살릴 수 있다. 위에서 군인을 징집하면..........저 육체가 온전하지 못한 자도 그 몸을 보양하여 천명을 다할 수가 있는데 하물며 그 마음의 덕이 온전하지 못한 자야 더할 것이 아닌가?”(인간세)

 

장주는 언제나 우리 인식의 틀을 깨뜨린다. 장애인, 비정상인, 소수자는 쓸모없을 것이란 표상을 확 부순다. 자신의 모습 때문에 앞가림은 물론 전쟁터에 나가 비명횡사하는 일도 없다.

지리소가 장군이 되거나 큰 부자가 되는 일은 없겠지만 장주는 그것을 결핍으로 보지 않는다. 장주의 시선은 삶이다. 그는 외형 때문에 온전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 ‘예쁘다. 정상이다.’기준은 누가 만들었고 왜 그것을 따라야 하는가? 모든 존재는 구별되지만 차별할 수는 없다. 비교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원래 그런 것은 없다.

인기지리무신과 옹앙대영은 덕이 뛰어나 제후들이 기뻐한다. 제후들이 이들의 모습에 매료되자 정상이라고 여기던 다른 이들의 목이 가늘고 여위어 보인다. 장주는 뒤틀어진 외형을 극대화하고 그들에게 충만한 덕을 넣어준다. 통념에 갇힌 우리의 시선을 뒤집기위해서다. 내편을 통해서 장자는 우리의 시선을 확장하고 조율하는 변주를 다양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라는 안명(安命)을 이야기한다. 왕태는 외발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는데 빈손으로 왔다가 가득차서 돌아간다. 삶의 폭풍을 견딜 수 있는 의연함과 담담함이 그들의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장주가 이들을 불러낸 연유는 세상의 주류적 기준에 맞추어 기필코 결핍을 만들어내는 우리들에게 운명을 긍정하는 자세가 어떤 것인가? 보여주기 위함인 듯하다.

 

그 후

『장자』나 유가는 발생당시 즉 제자백가 시대에는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교는 한 무제가 국교로 삼은 후 이천여년을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사회 체계와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유가 사상은 시대에 따라 계속 다른 사상들과 융합하였다. 송대(宋代)에 이르러 불·노의 장점을 취하여 신유학(新儒學=성리학 性理學)을 성립시키며 오늘에 이르렀다. 중국에선 흔히 ‘사회적 관계는 유가로 양생은 노장으로’라는 말이 있다. 『장자』는 정정(政情)의 불안정이 계속된 위진남북조시대(魏晋南北朝時代)에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졌다.

모든 사상은 자신의 시대를 조건으로 태어난다. 동시에 그 사상이 얼마나 그 시대를 넘어서 있느냐가 그 사상의 생명력이다. 백가쟁명의 시대에 그 시대에 대한 응답으로 태어난 사상들이 지금껏 회자되고 있다. 장주는 그 시대 활동했던 제자백가들처럼 현실적 방안을 강구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 방안은 그 시대가 지나면 폐기되기 쉽다. 장주는 언제나 생각의 근본을 보려 했으며 비틀어보기도 하며 파고들었다. 통찰의 태도가 인식과 판단을 이끌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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