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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금성] 모든 존재가 존중받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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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이트 작성일20-01-23 10:12 조회1,455회 댓글0건

본문



모든 존재가 존중받는 그 날까지

 

김지숙(금요 대중지성)


 

. 얼굴을 지워라


. 혁명은 계속되어야 한다

 1. 신자유주의의 도래, 얼굴의 탄생

 2. 자연철학에서 길을 찾다

 3. 다시 혁명의 고삐를 조여할 시간


. 취해 있지 말라

 1. 자발적 복종,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다

 2. 내 안의 인종주의

 3. 사랑 불능의 신체

 4. 주목받고 싶고 빛나고 싶다

 5. 결과 없는 행위 


. 양아치에서 왕으로



. 얼굴을 지워라

4년 전, 도덕경천 개의 고원을 횡단해서 글을 쓴 적이 있다. 남편의 사별로 한부모 가족이 되어 버린 내 상황을 불편하게 생각해오던 차에 저 두 책은 한 줄기 빛과 소금 같았다. ‘엄마, 아빠, 아이가 있는 가족이 정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가족의 수많은 형태 중 하나일 뿐이라는 얘기를 들려주어서였다.가족이라는 다양체를 생각하지 못한 탓에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며 분별하고 있었던 나에게 그것은 사건이라면 사건이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 이것과 저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그 사이를 사유하다 보면 모든 것들이 다양체로 되어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 그래서 생명에는 다수자-되기가 아닌 소수자-되기 밖에 없으며 위계나 서열 역시 없다는 노자와 들뢰즈의 주장에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올해, 고전을 리라이팅 하면서 천 개의 고원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한부모 가족이라는 언표에 얽매여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 머리에서 그것이 한시도 떠나지 않으면서 번뇌를 만들고 있었다. ‘아빠 없이 자란 아이라는 말을 듣게 될까 봐 노심초사하며 아이들의 사소한 행동에도 예민하게 반응했고, 과부라서 무시당할까 봐 특히 남자들에게 까칠하게 굴었다. 이런 나를 보고 한 지인은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그런 거에 신경 쓰느냐고 핀잔 아닌 핀잔을 주었다. 정말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경제적으로도 어렵지 않고 아이들도 잘 자라주고 있는데 뭐가 문제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저 언표가 힘든 것이 아니라 남편의 부재가 힘든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것으로 인해 내 자아가 타격을 받았다고 생각되어서다. 나에게는 삶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완벽함, 완전함같은 이데아 말이다. 이것에 맞춰 내 영토를 일구며 살아왔다. 거기에 흠집을 내는 사람들이 싫었고, 그런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다. 집을 나간 후 깡패가 되어 찾아온 오빠를 만나지 않았던 것도, 아토피가 심한 아이를 귀찮아하고 미워했던 것도, 직원들의 실수를 용납하지 못한 것도 다 그런 이유였다. 자상하고 똑똑한 남편은 내 영토를 촉촉하게 적셔주고 빛나게 해 주는 최고의 존재였다. 이런 남편이 없으니 마치 내 영토가 말라 비틀어져서 초라해진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남편이 중환자실에 식물인간처럼 누워 있을 때 빨리 보내자고 했던 사람이 누구인 줄 아는가. 바로 나다. 온전하지 못한 그를 감당할 자신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그로 인해 내 삶이 엉망진창 되는 게 싫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 나는 건강할 때의 남편만을 기억하며 아쉬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지독한 탐욕이다. 천 개의 고원과 재접속 하지 못했더라면 나의 이런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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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시피, 나는 나를 중심으로 놓고 모든 것을 대상화하면서 재단하고 있다. 나를 빛나게 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말이다. 이것을 들뢰즈와 가타리는 흰 벽()과 검은 구멍()’이라는 얼굴성으로 설명한다. ‘얼굴이란 타인에게 나를 전달하는 채널이다. 표정을 통해 내가 드러나는데 이는 얼굴성이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 내 안의 확고한 관념을 흰 벽에다 적어놓고서는 그것에 맞춰 사람들을 줄 세우고, 그런 다음 검은 구멍 안으로 빨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남편, 공부, 감이당은 yes! 깡패, 아토피, 불구는 no!’라는 식으로. 동일화하거나 배제하는 것, 이것이 얼굴성이 가진 실체이자 폭력이다.


그런데 얼굴성은 자의식을 발동시키기도 한다. 자의식이란 세상 사람들이 나(얼굴)를 보고 있다는 망상이다. 여기에 빠지게 되면 끊임없이 자신을 검열하고 인정 욕망에 시달리게 된다. 이제 알 것 같다. 내가 사람들의 반응에 촉각을 세우며 감정의 동요가 심했던 것도, 일이 잘못되었을 때 자책하며 나를 몰아세웠던 것도 모두 얼굴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명 에너지를 엉뚱한 곳에 낭비하고 있는데도 멈추지 못하는 어리석음!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의식을 깨뜨릴 것을, 다시 말해 나를 덜어내고 얼굴을 지울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한마디로 주체의 해체. 사실 이것은 천개의 고원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열다섯 개의 고원이 펼쳐내는 이야기가 모두 다른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각각의 고원은 얼굴성에 대한 변주곡임을 알게 된다. 즉 하나의 욕망만을 꿈꾸며 위계를 설정하는 수목적 삶, 무의식 안에 수많은 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엄마-아빠-나로 환원해버리는 정신분석, 고정관념들로 지층화되어 있는 몸, 의사소통이 아닌 명령어가 되어 버린 일상의 대화 등은 알게 모르게 주체를 상정하는 모습들이다.


그런데 들뢰즈와 가타리는 왜 이렇게까지 파고든 것일까. 그건 얼굴을 해체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것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것의 다름이 아니리라. 이제 나도 천 개의 고원을 무기로 삼아 얼굴을 지우는 전쟁에 참여하려 한다. 이것이야말로 나를 진정 배려하고 살리는 길이기에.

 


. 혁명은 계속되어야 한다

1972, 안티-오이디푸스가 처음 출간되었을 때 그것이 일으킨 반향은 엄청났다. 이제까지 듣도 보도 못한 철학 개념으로 주체에 매몰된 개인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서구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으며 68혁명을 이어간 책, 그것이 바로 안티-오이디푸스. 그런데 그것의 속편인 천 개의 고원1980년에 출간되었을 때 반응은 완전히 정반대였다. 철학계에서는 들뢰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평가절하했으며 독자들의 반응도 뜨뜻미지근했다. 더 놀라운 건, 이것을 예견이라도 했다는 듯 들뢰즈는 너무나 담담했다는 것이다. 그럴 줄 알면서도 천 개의 고원을 썼다고? 그렇다면 정말 궁금하다, 그것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대체 8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이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1980년 그즈음으로 돌아가 보자.

 

1. 신자유주의의 도래, 얼굴의 탄생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탄탄대로를 걷던 유럽 경제는 1973년을 정점으로 내리막길에 들어서고 있었다. 중동이 석유를 팔지 않겠다고 서구 사회에 으름장을 놓았던 일, 바로 오일쇼크때문이다. 물가와 실업률이 치솟고 소비가 얼어붙으면서 세계 경제는 휘청거렸다. 설상가상 6년 후 또 한 번의 오일쇼크가 덮치자, 그것은 불황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검은 장막으로 드리워졌다. 기존의 정책으로는 도무지 재건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특안의 대책이 필요했다.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의 등장1 미국과 영국세어 신자유주의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던 것이었다. 유럽 각국은 앞다퉈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며 자국의 경제 살리기에 온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란 모든 것을 경쟁체제로 만들고 거기서 살아남지 못하면 시장에서 퇴출해버리는 냉혹한 경제 원리다. 한마디로 돈이 되어라!’이다.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한층 업그레이드된 상품들이 출시되었고, 그것들이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돈을 쪽쪽 빨아들였다.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돈이 돈을 낳는 세상이 온 것이다. 자본이 욕망을 포획하고 사회체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최종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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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사물들만이 아니라 개인들도 스스로 상품이 되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드러내야 했다. 돈은 성과능력이라는 말로 둔갑했고, 모든 영역에서 그것들을 보여주는 얼굴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열정과 투지가 넘치는 청년의 얼굴, 권위가 넘치고 확신을 주는 의사의 얼굴, 공손하고 미소 가득한 점원의 얼굴 등등. 얼굴에 위계와 서열이 매겨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결국, 얼굴에 부합하기 위한 분투는 자의식만 비대하게 만들어버렸다.


사실 안티-오이디푸스를 쓸 때만 해도 이정도는 아니었다. ‘엄마-아빠-라는 가족 삼각형 안으로 밀려 들어가는 주체가 가장 큰 문제였다. 그래서 스위트 홈이라는 망상을 훌훌 털어내고 무엇과도 연결접속할 수 있는 욕망기계로 살라는 말이 먹혀들었다. 물론 68혁명의 열기가 남아 있던 격동기라는 것도 한몫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들어서자 욕망은 화폐 외에는 어떤 것과도 접속하지 못하는 극한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자본주의에 절대적으로 순응하는, 성과를 내는 얼굴이 되지 못하면 살아가기가 힘들어져 버린 것이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라는 분위기(들뢰즈·가타리, 천 개의 고원이탈리어판 서문)는 출구를 찾지 못한 개인들의 자포자기 심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들뢰즈가 신자유주의 상황에서 포착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들뢰즈는 자본이 탈주체화되어 사회체를 잠식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욕망의 해방을 외쳐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무기력한 개인들을 일깨우며 68혁명을 중단없이 이어가야 했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지 않은가. 천 개의 고원은 이런 시대적 소명에 대한 응답이었다.

 

2. 자연철학에서 길을 찾다

들뢰즈는 탈주체를 화두로 삼고 평생 그것을 탐구했던 철학자였다. 자본과 결탁한 막강한 얼굴, 즉 주체가 탄생했을 때, 한치의 머뭇거림 없이 천 개의 고원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오랜 시간 갈고 닦은 탄탄한 철학적 사상이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들뢰즈에게는 주체에 대한 문제의식이 일찍부터 있었다. 사적인 얘기를 거의 하지 않는 들뢰즈가 자주 회상할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일, 그것이 발단이었다. 들뢰즈의 가족이 도빌 해변에서 여름 휴가를 즐기고 있을 때 노동자들이 같은 장소에서 바다를 보며 감탄하는 일이 있었다. 이를 본 들뢰즈의 부모들은 저따위 인간들이 있는 해변에는 갈 수 없다며 흥분했다. 왜 그들은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일까. 부르주아의 민낯이 보여준 폭력성이라고? 그렇게 뭉뚱그려 일반화시키기에는 무리다. 모든 부르주아가 다 그런 것은 아닐 테니. 이유는 그들이 강고한 주체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부르주아는 이래야 하고, 노동자는 저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들뢰즈의 철학적 방향은 이때 정해졌는지도 모른다. 주체철학이 아닌 다른 철학으로.


그런데 막상 대학에 들어가고 보니 주체철학이라 불리는 관념론, 현상학, 실존주의 등이 학계를 주름잡고 있었다.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그것들이 파국을 맞이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건재했다. 주체철학의 대안으로 불리며 승승장구하는 정신분석은 어떤가. 들뢰즈가 볼 때 정신분석은 주체철학과 한통속이었다. 언제나 주체를 상정하고, 이분법으로 나누고, 의미를 부여하며 해석하고, 그래서 세계를 고정된 시각으로 바라보니 말이다. 들뢰즈는 정신분석이 유럽 전체를 초월성의 질병에 걸리게 했다고 맹비난하며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는다. 정말이지 들뢰즈는 정신분석을 포함한 주체철학이 지긋지긋했다. 다른 길을 찾고 싶었고 찾아야만 했다. 하여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고 내팽개친 철학사의 영역을 탐색하는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만난 것이 바로 자연철학이다.


자연철학은 과학철학이라고도 하는데 인간의 경험이 아닌 과학 혁명을 통해 발견한 우주적 앎을 바탕으로 세계를 인식한다. 우주적 앎이란 다름 아닌 자연학, 결국 모든 학문을 뜻한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 이전까지는 학문이라고 하면 자연학 딱 하나였다. 그런데 그것을 아리스토텔레스가 분과별로 나누면서 학문의 경계가 생기고 대학이 세워졌다. 들뢰즈의 방대한 지식에 놀랄 이유가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즉 들뢰즈가 음악, 미술, 문학, 영화, 지질학, 지리학, 사회학, 역사학, 수학, 통계학, 경제학, 생물학, 화학, 물리학, 유전학, 언어학 등 온갖 학문과 접속한 것은 자연철학의 입장에선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니란 뜻이다.



그런데 들뢰즈의 지적 호기심은 그것들을 대충 훑어보는 것으로 만족하게 놔두지를 않았다. 참으로 귀찮은 일이 될 수도 있었지만, 들뢰즈는 각각의 학문을 세세하게 그리고 깊이 파고들었다. 물론 자연철학자라고 해서 모두 들뢰즈와 같지는 않았다. 푸코가 들뢰즈를 높이 평가했던 것도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이었으리라. 전문가 못지않은 학문적 이해 덕분에 들뢰즈는 일상의 아주 사소한 영역에서조차도 자신의 문제의식과 공명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패턴을 정해놓지 않고 그때그때 배치를 바꾸며 조각천을 이어붙이는 패치워크’, 음악의 ‘변주곡’에서 탈주체의 모습을 읽어내는 것이 신통할 정도다. 이렇게 삶과 학문의 경계를 허물고 종횡무진 넘나들며 들뢰즈의 철학적 지평은 확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실천적인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자연철학의 길을 걷다 예상치 않게 얻은 소중한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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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성과가 있었다. 들뢰즈 사상의 기반이 될 루크레티우스, 스피노자, , 니체, 베르그송이라는 숨겨진 보물을 발굴한 것이었다. 스피노자와 니체는 지금이야 호평받지만, 당시 이들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인색했다. 왜냐? 주체철학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얘기를 하고 있어서다. 주지하다시피, 자연철학은 우주와 생명을 관통하는 이치에 대해 논한다. 하지만 그것은 서양인들에게는 익숙한 내용이 아니다. 동양적 사유인 역()의 원리에 가깝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주와 생명은 끊임없이 운동하기에 생성 변화한다는 것이 자연철학의 핵심이다. 그래서 자연 철학자들은 고정된 주체란 없으며, 주체는 운동하면서 계속 변한다고 주장한다.


들뢰즈가 듣고 싶었던 바로 그 얘기가 아닌가. 환희의 기쁨으로 들떴을 들뢰즈가 상상이 된다. 이것은 운동을 전혀 사유하지 않는, ‘영원불변을 테제로 하는 주체 철학 때문에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순간이자 들뢰즈의 유쾌한 작업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이제 들뢰즈는 운동의 철학자였던 저 다섯 명의 등을 덮쳐 아이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바로 그 유명한 무염시태(無染始胎)’! 사람들은 그 아이를 혐오스럽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그 아이는 철학사의 전통을 비틀고, 부수고, 거역하며 거기에서 미끄러져 나온 괴물이었기에. 그러거나 말거나 확실한 건, 그 아이는 주체철학과 맞짱 뜰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으며 자연철학에 천착하며 길을 찾던 들뢰즈 자신에 대한 보상이었다.

 

3. 다시 혁명의 고삐를 조여할 시간

아마도 이 세기는 들뢰즈의 시대라고 불릴 것이다.” 왜 푸코는 이런 얘기를 했을까.

자본주의가 계속되는 한 주체화의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고, 그것을 해결할 적임자로 들뢰즈만한 사람이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푸코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사실 주체화의 문제는 근대 이후 늘 있었던 것으로 그렇게 특별한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자 조금씩 곪기 시작하더니 신자유주의를 맞이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터져버렸다. 지금은 어떤가. 4차 혁명의 디지털 시대라고는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여전히 잘 나가고 있다. 서바이벌 방송 프로그램이 승승장구하는 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승자독식의 체제가 일상이 되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진화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말을 성과를 내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말로 바꿔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경쟁에서 살아남은 얼굴들이 곳곳에 떠다니고 있다. 각종 자격증과 화려한 스펙을 자랑하는 대학생의 얼굴, 재테크의 달인과 입시 박사로서 가정을 진두지휘하는 주부의 얼굴, 여러 개의 점포를 거느리며 대형화와 체인화에 열을 올리는 사장님의 얼굴, 족집게 강의로 유명한 1타 강사의 얼굴, 전 세계 팬들을 몰고 다니는 아이돌 스타의 얼굴 등등. 이런 얼굴이 되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아가고 있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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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정도면 차라리 다행이다. 얼굴에 빠져 변이 능력과 공감 능력을 잃어버린 무감각한 신체가 속출하고 신경증과 우울증이라는 불치병이 급속하게 퍼져나가고 있다. 세상은 연결되고 있는데 개인은 고립되어가는, 자본의 굴레에서 벗어났는가 싶더니 더 강력한 자본의 유혹이 기다리고 있는 역설과 모순의 시대. 한마디로 백척간두! 어디로 발을 내디딜 것인가.


그렇다. 다시 혁명의 고삐를 조여야 할 시간이 왔다.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자본이 쳐 놓은 미세한 그물망을 뚫고 어떻게 얼굴에서 빠져나올 것인가라고 절박하게 물으면서 들뢰즈의 해법에 귀를 기울여 보자.



. 취해 있지 말라

8년 전, 고향을 떠나 서울에 정착하게 되었다. 익숙한 것들과 헤어져야 하는 아쉬움 속에서도 기분은 이상하리만큼 들떠 있었다. 고향에서는 누구든지 삼촌으로 통하고, 아무리 멀어도 사돈의 팔촌으로 엮이는 경우가 많아 행동과 말을 조심해야 했다. 그랬음에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일이 생기곤 했다. 서울에서는 나를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으니 적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특히 남들을 의식하며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서울살이가 설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여전히 나는 타인의 시선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었다. 새로운 일터에서도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촉각을 곤두세웠으며, 공부의 장에서도 동문서답으로 웃음거리가 되지는 않을까 혹은 빈곤한 독서 수준에 창피당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이 따로 없었다. 공간이 바뀐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하면 나는 얼굴성에 붙들려 자의식의 나락에 빠져버렸다는 것이다. 얼굴성? 아니, 그것이 무엇이길래 나를 이토록 힘들게 만드는 것일까. 어떻게 하다 그것에 걸려들었을까.



1. 자발적 복종,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다

얼굴이라고 하면 보통 눈, , , 입이 모여 있는 판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것은 머리의 일부이지 얼굴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눈, , 입 등의 근육이 만들어내는 표정이 얼굴이다. 동물에게 얼굴이 없는 것은 표정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직립보행을 하면서 몸체로부터 머리가 빠져나와 얼굴이 생겼다. 그런데 그것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음식을 삼키는 신체기관이 아니라 의미생성과 주체화라는 기호체제로 비약해버렸다. ‘흰 벽()-검은 구멍()’체제의 얼굴성이라는 추상 기계로 말이다.


흰 벽에는 기호와 기표가 새겨지고 검은 구멍에는 의식과 정념이 머무는데, 이 두 조합에 의해 구체적인 얼굴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표정을 통해 생각과 의지, 감정이 드러난다는 것은 얼굴이 그려지고 있다는, 다시 말해 얼굴이 말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얼굴은 그 자체로 잉여이다.”(얼굴성, 338) 가령, 상사로부터 수고했어.”라는 말만 듣고 그것이 진심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상사의 표정을 살피면서 더 열심히 일하라고!” 또는 보고서가 마음에 들어!” 등등 그의 속내를 간파해야 한다.


이처럼 얼굴은 의도되고 계산된 것으로 자의식을 발동하게 만든다. 말하자면 얼굴성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상사가 어떤 의도도 갖지 않는다면? 부하 직원 역시 상사의 표정을 보고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당연히 얼굴성은 작동하고 있지 않다. 상사의 얼굴도, 부하 직원의 얼굴도 그리고 있지 않으니까.


결국,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남는다. 얼굴성이라는 추상적인 기계는 언제 작동하기 시작하는가? 그것은 언제 시동이 걸리는가?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수유를 하는 동안에도 얼굴을 통과하는 모성의 권력, 애무 중에도 연인의 얼굴을 통과하는 열정의 권력, 군중 행동 안에서조차 깃발, 아이콘, 사진 등 우두머리의 얼굴을 통과하는 정치의 권력, 스타의 얼굴과 클로즈업을 통과하는 영화의 권력, 텔레비전의 권력……(얼굴성,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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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얼굴성은 아무 때나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이라는 배치물이 있을 때 비로소 시동을 건다. “내 말 들어! 나한테 복종해!”라는 지배와 예속 관계를 상정할 때 말이다. 수유하는 엄마의 얼굴에서는 젖을 빨라, 영화나 TV에서 클로즈업된 스타들의 얼굴에서는 나를 따라 하라고 지속적인 명령어를 내보내고 있다. 이에 아기는 젖을 쪽쪽 빨며 엄마에게 화답하고, 대중들은 스타들을 추종하고 유행을 만들어내면서 그들에게 응답한다. 이런 효과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면 얼굴성은 작동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놓고 보니 얼굴성에 낚여서 자의식이 올라오는 당사자만 피해자인 것 같다. 과연 그럴까?


누군가의 표정을 읽어내고 그것에 맞춰 적절한 대응을 했을 때 잘했다는 칭찬을 받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있다. 내가 그랬다. 나는 타인의 얼굴에서 그들이 말하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렸고 그것에 맞는 행동을 했다. 그 결과 자랑스러운 딸, 싹싹한 며느리이자 올케, 일 잘하는 후배로 통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칭찬과 인정에 끌려서 말이다.


까놓고 말해 권력에 복종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다. 그런 일이 피곤하고 부질없다고 생각되면 얼굴성에 낚일 수가 없다. 당연히 자의식이 올라올 일도 없다. 내 언니와 동생만 봐도 단언할 수 있다. 그녀들은 나쁜 며느리가 되기로 작정한 사람들처럼 그들의 시어머니가 뭐라고 하든 말든, 남들이 욕하든 말든 그것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부당한 요구라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거절하고, 때로는 시댁에 발길을 끊기도 한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라는 권력 관계를 걷어차고 순종하는 며느리가 되는 것을 포기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나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권력이 주는 달콤함과 안락함의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내가 조금만 희생하고 노력하면 인정받는데 그것을 마다할 이유가 있겠는가. 내가 좋아서 사람들의 얼굴을 포착하고 그것에 희망을 품고 그것에 달라붙으려고(얼굴성, 336) 안달복달했던 것을 마치 재수가 없어서 얼굴성의 그물에 걸려든 것처럼 얘기하고 있다.


그렇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압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억압받기를 욕망해서 얼굴성의 그물망에 포획된 것이다. 한마디로 자발적 복종!



2. 내 안의 인종주의

얼굴성에 붙들리게 되면 끊임없는 자의식 속에서 얼굴에 맞춰 살아가게 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것이 참으로 피곤한 일인데도 남들에게 강요한다는 것이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다 보니 무조건 옳다고 생각해서다. 문제는 얼굴과 호응하지 못하는 사람을 일탈로 규정하며 자기 영토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즉 얼굴성은 적절하고 모범적인 얼굴을 상정해 놓고 거기에 부합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한 후, “반쯤 노망든 독재자가 승낙과 거부의 신호를 하듯 흡수하거나 내버린다.”(얼굴성, 339) 이것을 들뢰즈와 가타리는 인종주의라고 지적한다. 인종주의란 격차를 제시하며 얼굴을 걸러내는 것을 가리킨다. 이분법과 이항 논리를 충실히 가동하기에 이것 아니면 저것’, ‘그렇다 아니면 그렇지 않다밖에 없다.


몇 년 전, 자신의 항공사 일등석에 탑승하고 있던 부사장이 자기에게 땅콩을 봉지째 서비스한 것을 문제 삼은 적이 있었다. 부사장은 승무원에게 욕설을 퍼붓고 무릎을 꿇으라는 요구를 하다못해 나중에는 사무장을 비행기에서 내리게 했다. 항공기 지연뿐만 아니라 다른 항공기의 이착륙을 방해시키면서 국제 사회에서도 큰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항공사 오너 일가의 대표적인 갑질로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던 일, 일명 땅콩 회항사건의 전모다. 그런데 정말 땅콩 서비스가 잘못된 것 때문에 부사장은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질렀을까.


사건의 발단은 땅콩이었지만 부사장의 머리꼭지를 돌게 한 것은 다른 데 있었다. 사무장의 표정이 문제였다! 비행기 승무원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라. ‘입술은 살포시 닫혀 있으며 입꼬리는 올라가고 눈꼬리는 살짝 내려가 있는 미소 가득한 얼굴. ‘승객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모시고 최선을 다해 서비스를 하겠다는 마음이 표정에 담겨 있다. 이것이 바로 승무원의 얼굴이다. 그 항공사에서는 자사 승무원의 얼굴을 하늘의 미소라고 빗대며 광고에 열을 올릴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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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놀랍게도 사무장의 얼굴에서는 그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부사장의 질책에 자기는 매뉴얼대로 했는데 왜 자꾸 딴지를 거느냐고 사무장은 항변했다. 이런 말을 하면서 미소는 사라지고 대신 단호함이 그의 얼굴 전체를 덮어버렸다는 것은 짐작되고도 남는다. 사무장은 승무원의 얼굴에서 일탈을 감행해버린 것이다! 부사장은 자기한테 싹싹 빌어도 시원찮을 판에 사무장이 듣도 보도 못한 승무원의 표정을 보이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을 것이다.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얼굴을 보자 분노를 참지 못해 결국 그런 참극을 불러오고 말았다. 얼굴성에 갇힌 부사장의 인종주의다.


그런데 나 역시 그녀를 비난할 처지가 아니었다. 사실 땅콩 회항 사건으로 그 항공사의 이미지가 나빠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항공사의 열렬한 팬이었다. 안전한 것도 맘에 들었고 무엇보다 승무원들의 친절한 미소와 몸을 사리지 않는 서비스 정신에 뿅 갔었다. 그와 달리, 외국 항공기를 이용할 때마다 불만을 터뜨리는 것은 승객을 사무적으로 대하는 태도, 한마디로 무뚝뚝한 표정의 승무원 때문이었다. 기내식 서비스로 예정되었던 라면이 취소되었을 때 별로 미안해하지 않는 승무원을 보면서 불쾌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몇 번이라도 사과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서였다. 그런 승무원은 퇴출당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승객에게 무조건 굽실거리고 웃음 짓는 승무원의 얼굴을 그리고 있으니 그들이 못마땅한 것은 당연했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한 블록만 건너가면 학원가다. 그래서인지 버스 정류소 광고판에는 1타 강사들의 얼굴 사진이 실려 있다. 재미있는 것은 표정들이 비슷비슷하다는 것이다. ‘부드러운 듯하면서 초롱초롱한 눈빛, 야무지게 꽉 다문 입술을 보고 있노라면 나한테 강의를 들으면 수능 1등급을 맞는 건 누워서 떡 먹기야!”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사실 이런 얼굴이 아니면 학원가에서 퇴출은 시간문제다. 그러고 보니 아이의 과외샘을 소개받고 왜 그렇게 마음이 흔들렸는지 알 것 같다. 실실 웃는 것도 그렇고 흐릿한 샘의 눈에서 학원 강사의 얼굴이 1도 보이지 않아서였다. 그냥 사람 좋은 얼굴이었다. 고심 끝에 과외를 받기로 했지만,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기우였다. 샘의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인품도 훌륭했다. 애들과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지내시는 것은 물론 성적이 시원치 않으면 자기 탓으로, 성적이 좋으면 아이의 공으로 돌리는 샘을 보고 깜짝 놀랐다. 대개는 이와 정반대로 얘기하는데 말이다. 얼굴만 보고 판단한 것 같아 죄송스러웠다.


어디 이런 일이 한 둘이었겠는가. 직원을 채용할 때 비굴해 보인다, 표정이 어둡다, 되바라지게 생겼다, 띨띨해 보인다, 험상궂게 생겼다는 등등의 이유를 들며 상사의 선택을 뒤집는 일도 많았다. 내가 그리는 직원의 얼굴과 맞지 않는다고 한 사람의 인생을 좌절케 하는 폭력을 행사했다. 그렇다면 성형에 매달리는 것도 인종주의가 한몫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표정 때문에 취업이나 연애, 관계의 장에서 넘어지는 것이 일상다반사이다 보니 사회에서 요구하는 얼굴을 갖기 위해 의학적 기술에 의존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을 알지 모르니 성형에 미친 사회라고만 치부할 뿐 타인의 아픔 같은 건 눈여겨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인종주의의 관점에서 외부는 없다. 오로지 우리처럼 되어야 할 사람들만 있을 뿐이고 그들의 죄는 우리와 같지 않다는 것이다. (……) 그것은 동일화되지 않는 놈이 소멸될 때까지 동일자의 파동들을 퍼뜨린다.(얼굴성, 341)


3. 사랑 불능의 신체

보다시피, 얼굴성은 이분법과 이원화라는 구조 안에서 작동한다. 그래야 얼굴을 명확하게 그릴 수가 있다. 아빠의 얼굴을 그리려는데 흰 벽에 아기에게 젖을 물린다. 아이가 아빠라고 부른다. 아이 교육에 무관심한 것이 좋다. 산부인과에서 진료를 받는다. 서서 오줌을 싼다.’고 써버리면 아빠의 얼굴인지 엄마의 얼굴인지 헷갈려서 검은 구멍이 작동할 수가 없다. 해서 얼굴에는 모든 번역가능성의 조건으로서 단 하나의 표현의 실체만이 있어야 한다.”(얼굴성, 342) 쉽게 말해 아빠면 아빠여야 하고 엄마면 엄마여야 한다는 것이다. 엄마이면서 아빠, 어른이면서 아이, 남자이면서 여자, 신랑이면서 신부 같은 불명료하고 애매모호한 기표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얼굴성이 제일 그리기 어려운 얼굴은 아이의 얼굴이 아닐까.


아이들은 웃다가 울다가 찡그리다가 뾰료통하다가 놀라다가 등등 변전하기를 하루에도 수십 번 한다. 당최 그들의 표정을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다. 누군가는 맑다고 얘기하고 누군가는 분열증 환자 같다고 얘기한다. 이것은 단 하나의 표현의 실체, 즉 고정된 자아를 아이에게서 찾는 것이 하늘에서 별을 따는 일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그래서 프로이트 같은 정신 분석학의 대가에게도 분열증 환자 중에서 아이는 기피 대상 1호였으리라. 그를 엄마-아빠-라는 오이디푸스 삼각형으로 밀어 넣기가 여간해서는 쉽지 않아서다. 꼬마 한스가 딱 그랬다.


아이들은 스피노자주의자이다. 꼬마 한스가 고추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하나의 기관 또는 기관의 기능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하나의 재료, 즉 연결접속들, 운동과 정지의 관계들, 재료가 이루는 개체화된 잡다한 배치물들에 따라 변화하는 요소들의 집합을 가리킨다.(되기, 485)


한스에게 고추란 오줌을 내보내는 생리 기관이 아니다. 그런 배치에서 빠져나와 액체가 나오는 구멍은 고추라는 새로운 배치를 만들었다. 쉬 하는 계집애, 오줌을 갈겨대는 말, 수증기를 내뿜는 기관차, 긴 호스로 물을 쏘아대는 소방차가 고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래서 허언이 아니다. 한스는 여자이고 말이고 기관차이고 소방차이다. “아이들에게 하나의 기관은 천 가지 변전을 겪으며, “위치를 정하기도 어렵고, 식별하기도 어려우며, 때에 따라 뼈, 엔진, 배설물, 애기, , 아빠의 심장 등이 된다(되기, 485~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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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하겠지만 그것은 아이의 신체가 무엇과도 연결접속할 수 있는, 욕망이 끊임없이 흐르는 기관 없는 신체라서 가능하다. 스피노자의 말대로 아이들은 타자와 마주칠 때마다 자신의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바꿈으로써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 찰나 찰나 자기를 비워내면서 새로운 얼굴을 그리기에. 한마디로 아이들은 천 개의 얼굴을 가진 스피노자주의자들이다. 그래서 아이-되기는 생성이라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입이 부르트도록 말한다.


얼굴성을 얘기하다 아이의 얼굴에 대해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가. 고백하자면 나는 아이를 귀찮아한다. 아니 싫어한다. 아이들의 언어가 오글거려 대화하는 게 불편하다. 하나에 오래 집중하지 못하고 금방 싫증 내는 것도, 말도 되지 않는 얘기를 늘어놓는 것도, 자꾸 질문을 해대는 것도 못마땅하다 못해 짜증이 난다. 소아과 처방전이 들어오면 그것부터 처리하고 아이를 빨리 보낼 정도다.


그런데 아이를 싫어하는 것이 단순히 성격의 문제로 넘길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건 내 신체가 접속 불능, 소통 불능 상태라는 반증이었다. 어른들이 꼬마들을 보면서 동심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얘기를 하는데 그것은 나이 들수록 호기심이 사라진, 아집만 내세우며 감응하지 못하는 신체에 대한 한탄이자 부끄러움이다. 그래서 자신의 경직된 신체를 어떻게든 돌려보고자 애를 쓴다. 뜻대로 잘되지는 않지만. 이렇게 해도 모자랄 판에 나는 타자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내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고수하겠다고 만천하에 공표하고 있으니 심각해도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자아가 아주 견고하다는 지적은 틀린 얘기가 아니었다. 늘 체한 것처럼 속이 답답하고 어깨를 비롯해 온몸이 아팠던 이유가 있었다. 소통하지 않겠다고 용을 쓰고 있는데 몸이 딱딱하게 굳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소통 불능의 신체는 사랑 불능의 신체와도 직결된다.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서로의 분신이 되는 것? 그것은 집착이나 소유지 사랑이 아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와는 전혀 다른 주장을 한다. 상대의 고유한 다양체를 포착하고 그것을 내 것과 관통시키면서 새로운 배치와 다양체를 구성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랑은 동일화가 아니라 차이를 만들면서 서로를 촉발하는 것, 그래서 수많은 얼굴을 그리며 존재의 변용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하나의 표현의 실체만을 요구하며 얼굴성을 작동시키는 내가 배치의 전환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사랑 불능의 신체,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얼굴성의 업이다.



4. 주목받고 싶고 빛나고 싶다

이처럼 얼굴성은 인종주의와 사랑 불능의 신체를 양산하며 동일자의 파동을 퍼뜨린다. 자기가 그리는 얼굴처럼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상대하지 않겠다는 교만의 극치! 그런데 궁금하다. 얼굴을 분별하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얼굴에 맞지 않는다고 영토 밖으로 내쳐야 할 어떤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거기에는 나를 빛내고 싶은 마음이 숨겨져 있다. 그래서 멋지고 훌륭해 보이는 얼굴로 자기의 나와바리를 에워싸고, 그렇지 않은 얼굴은 얼씬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얼굴성이 풍경화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다. 풍경화? 그건 또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환경풍경이라는 말을 섞어서 사용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둘을 확실하게 구분한다. 다채롭고 이질적인 것들이 뒤섞여 있는 다양체가 환경이라면, 얼굴성이 그것에 단일한 코드를 부여해 절단 채취한 것이 풍경이라는 것이다. 얼굴이 있는 곳에 풍경이 솟아오르고, 풍경에서는 얼굴이 겹쳐지게 된다. 사물도 얼굴을 갖게 된 것이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의 얼굴이 떠오른다거나 타워팰리스에서 부자의 얼굴이 연상되는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풍경은 나를 돋보이게 하는, 다시 말해 나를 우월하게 해주는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나를 하찮게 하거나 보잘것없게 만드는 것을 굳이 풍경으로 부상시킬 필요가 있겠는가.


최근 종영된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 등장하는 제시카가 딱 그랬다. 그녀는 풍경화하는데 선수다. ‘풍성한 가슴, 가늘고 긴 손, 매끈한 팔다리, 광채 나는 피부, 찰랑거리는 머리카락등등이 제시카가 클로즈업하는 것들이다. 저런 몸을 갖기 위해 강박일 만큼 음식을 거부하고, 피부과에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고, 운동에 미쳐 산다. 어린 자식마저 내팽개칠 정도로 그것들 말고는 눈에 뵈는 게 없다. 몸 전체를 얼굴화하고 그것을 돋보이게 하려다 생긴 일이다.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는다. 스스로 잘났다고 우쭐거리는 그녀가 대체 뭐가 아쉬워서 저러는 것인지. ‘미세스 강종열이라는 그녀의 SNS 아이디에서 실마리를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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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열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야구 선수로 CF와 방송 섭외 1순위다. 여자들이라면 한 번쯤은 부러워할 만한 이 남자가 바로 제시카의 남편이다. 그러니깐 강종열은 제시카를 빛내 줄 최고의 얼굴이자 배경이었던 거다. 제시카가 열나게 몸을 가꾸는 것도 강종열의 부인이라면 저 정도의 몸매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이 찌면 강종열에게 빌붙어 편하게 산다고 사람들이 욕을 한다는 것이 또 하나의 이유다. 그렇다면 제시카는 미세스 강종열로 살면서 주목받고 싶고 빛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사실 이것은 애초부터 예견된 일이다. 얼굴성이 작동할 때 자의식을 발동하게 한다는 것을 떠올려 보자. 자의식이란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다, 다시 말해 세상의 중심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당연히 주목받고 싶고 빛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선 남들과 차이를 두어야 하니 우월하게 보이는 것이나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뭐든 풍경화하고 그것으로 자기 영토를 채워야 한다. 잘난 것 같고 강한 것 같아도 자의식 짱이었던 제시카로선 강종열에게 기대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 물론 자기를 빛낼 역량도 없다. 많고 많은 아이디 중 미세스 강종열을 선택한 이유다. 이혼을 요구받자 그녀가 울부짖으며 한 말도 나는 미세스 강종열로 계속 살고 싶다고!”였다. 강종열을 빼면 제시카는 시체다.


나는 제시카를 보면서 소름이 끼쳤다. 자신을 빛나게 하는 건 뭐든지 풍경화하는 모습이 꼭 나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남편은 물론 한술 더 떠 아이들마저도 나를 빛나게 하는 배경으로 삼았다. 글씨를 엉망으로 쓰거나 집안을 어지럽히거나 살이 찌면 폭풍 잔소리를 해댔다. 내 얼굴에 먹칠하는 것 같아서였다. 또박또박 쓴 글씨, 깔끔하게 정리 정돈된 집, 날씬한 몸, 정갈한 음식, 강남 아파트, 수입 자동차, 특목고, 일류대학 등이 풍경으로 들어오는 것은 이런 것들이 나를 돋보여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대한민국 주부들에게 설이나 추석 명절의 풍경은 부엌에 콕 박혀 음식 만들고 손님 대접하느라 종종거리는 모습이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명절은 그런 풍경이 아니었다. 정성 들여 음식을 만들어 상다리 부러지게 대접하고 옹기종기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가족의 정을 나누는 모습. 이건 상상이 아니다. 막내며느리였지만 실제로 나는 그런 풍경을 만들어내며 기뻐했다. 사람들의 칭찬에 내 얼굴이 빛나고 있으니 스스로 대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내 삶에 내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풍경으로 꾸민 삶, 그것은 빛나는 삶이 아니라 빈껍데기의 삶이다.



5. 결과 없는 행위

이렇듯, 우리는 알게 모르게 얼굴에 예속되어 살아가고 있다. 정녕 출구는 없는 것일까. 어떻게 해야 얼굴에 붙들리지 않고 내 삶을 주도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것을 질문하기 이전에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그토록 집착하는 얼굴이 있기는 한 것이냐고. ‘세상 어디에도 얼굴은 없다!’ 상황과 조건, 즉 배치가 바뀌면 얼굴은 달라진다. 무조건 미소 짓는 것이 승무원의 얼굴이 아니라 승객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한다면 그것에 단호함을 보이는 얼굴도 승무원의 얼굴이라는 것이다. 고정된 얼굴이란 없으며 생멸하면서 천변만화하는 것이 얼굴이다. 요컨대 얼굴이라는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 조건이 얼굴을 낳는 것이다. 그럼 여태껏 알고 있던 얼굴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모든 의미를 잘게 자르고 재단하고 해부하는 정신 나간 실험가의 사고의 산물이다.”(얼굴성, 328) 엄마의 얼굴은 이런 것이고 아빠의 얼굴은 이런 것이라는 식으로 누군가가 얼굴을 규정된 틀에 가두었고, 그것을 사람들이 자명한 것처럼 받아들이다 보니 어느새 하나의 통념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얼굴은 망상이자 이미지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자의식 역시 망상이 아닐까. 왜냐? 자의식은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사실 사람들은 내게 관심이 1도 없기 때문이다. 있다 해도 그때뿐이지 곧 잊어버린다. 이를 간과하게 되면 세상의 중심에 내가 있다는 자의식의 구렁텅이에서 헤맬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얼굴도 자의식도 모두 망상이라는 것을 아는 것, 얼굴에 들러붙어 있는 관념에 균열을 가하고 자의식을 깨뜨리는 것이 얼굴 지우기의 첫걸음이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몇십 년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하루아침에 바뀌겠는가. 하지만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분명 클 것이다. 알고 있을 때 얼굴에서 벗어나려는 능동성이 훨씬 크게 발휘될 수 있기에.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얼굴에 매몰되어 허우적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눈치챘겠지만, 그것은 주목받고 싶은 마음, 빛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마음을 내려놓으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마음을 내려놔야지 한다고 내려놓을 수는 없다. 그런 마음이 들 때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용수 스님 말씀대로 마음을 내려놓는다는 건 알아차리는 것이기에.  사실 주목받고 싶고 빛나고 싶을 때 십중팔구 잘하려 하고 성과나 성취에 매달린다.’ 이렇게 되면 원칙이나 본질은 사라지고 결과를 향해 질주하게 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낳고 그것에 빠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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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그러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직장에 출근하면 어김없이 매출기록부를 살피고 있는 나! 상사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그것에 신경 쓰고 있다니, 솔직히 깜짝 놀랐다. 공부하면서 이런 마음이 사라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성과에 연연하는 자본주의적 신체였다.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능력이 좋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약사 얼굴로 돌아가는 것이 다 이유가 있었다. 친절한 미소 속에서도 권위를 잃지 않고 확신에 찬 눈빛의 얼굴! 이런 표정을 짓는 날은 확실히 매출이 올라갔다.


돌이켜보니, 감이당에서 글쓰기 튜터로 활동할 때도 그랬던 것 같다. 튜터가 하는 일이란 학인들이 문제의식을 발견하고 글을 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물론 생각만큼 잘되지는 않는다. 몇 년 공부한 사람도 어려운데 처음 글을 쓰는 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 사실 자기의 문제가 뭔지 명확하게 아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나는 그것에 더해 비문, 맞춤법, 띄어쓰기 등등을 시시콜콜 지적하고 논리 정연한 글을 쓰라고 강하게 몰아붙였다. 어떤 학인은 나의 이런 모습에 열정이 넘친다는 얘기를 건네기도 했다.


열정? 스피노자가 그랬던가. 열정은 능동적 행위가 아니라 수동적 행위 그 자체라고. 말하자면 성과나 목적을 위해 사람을 들뜨게 하는 감정적 상태가 열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열정은 자본주의의 통치술에 자주 등장한다. ‘너의 열정을 불태워라! 그러면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다!’라는. 완성도 높은 글을 쓰게 하겠다는 나의 열정은 날카롭고 엄숙한 표정의 튜터 얼굴을 생산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열정 안에는 능력 있는 튜터라는 말을 듣고 싶은 사심이 숨겨져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표정을 지을 이유가 있겠는가. 나는 열정에 취해 학인들에게 글쓰기의 부담만 안겨 주었고 공부의 기쁨을 막아버렸다. 드라마 <미생>에서 오상식 차장이 부하 직원인 장그래에게 취해 있지 말라고 한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장그래는 검정고시 출신에다 스펙 하나 갖추지 못한 계약직 사원이다. 그런데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던 그의 말들이 영업 성과로 이어지는 놀라운 일이 생긴다. “정답을 몰라도 해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장그래라고 타부서 상사가 칭찬할 정도다. 장그래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원칙과 기본에 충실하고 성과나 결과에 연연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문제에 접근할 수가 있었다. 뒤집어 보고 옆으로 보고 거꾸로 보면서 스펙 짱짱한 동기들도 감히 생각하지 못한 탁월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일은 장그래에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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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장그래에게도 정규직으로 전환될 기회가 온다. 주변 사람들은 자기 일처럼 장그래를 위해 애써주고, 장그래 역시 자신에게 온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성과를 내겠다는 열정이 솟아오르는 것은 안 봐도 뻔하다. 그러나 오상식 차장은 열정과 기대에 잔뜩 부푼 장그래에게 취해 있지 말라는 말 한마디로 찬물을 끼얹는다. 그것들에 취해 있다 자칫 원칙이나 기본을 놓쳐 일을 그르칠 수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시야가 좁아지고 사고 역시 틀에 갇혀 버린다는 것을 오상식 차장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결국, 취해 있지 말라는 것은 오버하지 말라는 것, 결과에 얽매이지 말고 담담히 과정에만 집중하라는 것, 인도 성자들 말대로 결과 없는 행위’를 하라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주목받고 싶고 빛나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사심을 없애고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 즉 열정에도 결과에도 성과에도 취해 있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야 얼굴을 지우고 새로운 얼굴을 그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양아치에서 왕으로

나는 천 개의 고원언어라는 지층에 갇혀 얼굴을 생산하는 인간에 대한 비판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주장하는 혁명도 언어가 권력으로 작동하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전복시키는 것으로 이해했다. 자연스럽게 소수자-되기, 탈코드화와 탈영토화, 다양체, 리좀, 매끈한 공간, 리토르넬로, 전쟁 기계, 짧은 기억이라는 등등의 개념에 매료되었다.


그런데 이것조차도 이분법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얼굴을 지운다는 것에 꽂혀 개념을 당위로서만 받아들이고, 그래서 기호체제에 균열을 내야 한다는 원론적 얘기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글을 쓰면서 찜찜하고 답답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얼굴을 지워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에 대해서 깊이 탐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생성의 삶을 살기 위해서라는 둥, 권력에 복종하기 하지 위해서라는 둥 피상적인 답만 했지, 다수자-되기를 하면서 얼굴에 빠져 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세세하게 살피지 못했다. 이것을 알게 되자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칭찬받을 때 누군가는 야단맞고, 내가 인정받을 때 누군가는 무시당하고, 내가 빛날 때 누군가는 어둠의 그늘 속에 있다는 것 말이다. 내가 잘나서 혼자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으로 내 삶이 영위되고 있다는 존재의 법칙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야단맞고 무시당하고 어둠 속에 있는 존재들이 오히려 나를 살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이야말로 진정 존중받아야 할 존재가 아닐까. 살리는 것만큼 생명에게 더 중요하고 고귀한 일은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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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신문 칼럼에서 읽은 얘기다. 노동 인권 수업을 받은 한 중학교 3학년 학생이 학교 급식에 그토록 많은 이의 수고가 들어간 것을 몰랐다면서 자신을 양아치에 비유했다. 몇 분 후 이 된 기분으로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좀 전과는 다른 소감을 말했다. 양아치에서 왕이라니! 어떻게 이렇게까지 생각이 전환될 수 있을까.


그것은 우주의 온 존재들이 나서서 자신에게 밥을 먹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정도면 왕에 견줄 만하지 않은가. 왕은 존재에게 전하는 고마움의 절대적 표현이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 학생 역시 알게 모르게 누군가를 왕으로 만드는 일에 일조하고 있다. 밥을 맛있게 먹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가령, 농부로선 자신이 농사지은 쌀로 밥을 맛있게 먹는 존재만큼 감사한 존재가 없을 것이다. 그들이 농부를 왕으로 만들어 주고 있는데 양아치라는 말은 그래서 성립될 수가 없다. 사실 그 학생은 존재를 생산과 소비라는 주종 관계의 경제적 차원이 아니라 먹이고 살리는 위계 없음의 생명적 차원에서 이해했기 때문에 저렇게 말할 수가 있었다. 다시 말해 존재는 연결되어 있으면서 서로를 살리고 있다는 것, 그래서 존중받지 못할 존재란 없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얼굴에 빠져 있으면 그런 인식은 불가능하다. 자기를 왕으로 만들어 주는 존재에게 감사하고 존중의 뜻을 표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분법의 악순환 속에서 존재를 부정하고 차별하고 배제하고 경계 짓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 얼굴을 지워야 하는 궁극적 이유가 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하여 모든 존재가 존중받을 때, 그때 비로소 혁명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으리라. 그 날까지 얼굴 지우기를 멈추지 말라는 것, 이것이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 개의 고원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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