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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금성] 우리는 어떻게 고(苦)에서 벗어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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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짱숙 작성일20-01-23 16:52 조회2,0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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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고(苦)’에서 벗어날까


Ⅰ. 선정과 지혜로 만나는 둘 아닌 세상
Ⅱ. 유식(唯識), 식의 시대를 열다
  1. 유식무경의 세상
  2. 부파불교의 ‘유’와 용수의 ‘공’
  3. 유식, 공이 아닌 식을 이야기하다
  4. 심층의식을 체계화하다
  5. 우리시대 왜 ‘유식’인가?
Ⅲ. 우리는 어떻게 ‘고’에서 벗어날까 
  1. 존재와 인식 사이, 그 이름
  2. 심층의식이 그려낸 세상
  3. 언어는 욕망이다
  4. 존재와 언어 사이, 고(苦)
  5. 고에서 벗어나는 힘, 자각(自覺)
  6. 집중하여 통찰하라
Ⅳ. 지금여기에서 자각하는 삶


Ⅰ. 선정과 지혜로 만나는 둘 아닌 세상

10여년전 지인의 권유로 『금강경』을 사경했다. 사경은 경전을 필사하는 것이다. 작은 붓을 가지고 처음 보는 『금강경』의 한자를 베껴 썼다. 사경하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부처님이 역사적으로 살아있었던 분이라는 것이었다. 식사 때가 되면 밥을 빌어 식사를 하고, 발을 씻고, 결가부좌를 하는 부처님. 부처를 절에서 금박의 동상으로만 만났으니 이 놀라움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다음 가장 인상에 남은 것은 ‘시명(是名)’이라는 말이었다. 시명은 ‘그 이름’이란 뜻이다. ‘부처는 부처가 아니라, 그 이름이 부처다’, ‘많은 것은 많은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많다’는 등의 문구 속에 시명이란 말이 반복되었다. ‘그 이름’이라니? 이는 마치 우리가 사는 세상이 모두 이름으로 되어 있다고 말하는 듯 했다. 사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남편은 남편이지 그 이름이 남편이라니. 하지만 의문은 깊어졌고, 처음으로 세상은 수많은 이름들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세상은 ‘이름’ 자체였다. 그 놀라움과 충격이라니. 

그 무렵 조금씩 명상을 하고 있었는데, 명상 중에도 일상 중에도 이름 속의 세상을 사유하는 집중상태가 멈춰지지 않았다.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다녔던 기억이 있다. ‘남편은 남편이 아니라, 그 이름이 남편이다.’ ‘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그 이름이 나무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예상치 못한 큰 기쁨이 몸에서 일어나면서 마음이 밝아지고 자유로워지는 것을 경험했다. 툭 터인 허공과 같이 마음이 확장되는 경험. 


자유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작년, ‘유식(唯識)’을 공부하면서 다시 ‘그 이름’을 만났다. 유식에서는 ‘명언종자(名言種子)’란 이름으로 그 뜻을 사용하고 있었다. 명언종자는 ‘관념(생각)과 언어의 씨앗’이라는 뜻이다. 유식은 우리 의식의 심층엔 ‘아뢰야식’이라는 식(識)이 있는데, 거기엔 명언종자와 업종자(행위의 씨앗)가 저장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종자들이 수많은 인연의 결합에 의해 전변(轉變)하여 ‘나의 몸’과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며,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은 내 심층의식의 종자가 펼쳐낸 모습이라는 것. 이것이 유식의 핵심이었다. 명언종자는 경험하는 현실의 세상을 펼쳐내고, 이름은 그 현실의 모든 것에 붙여진다. 둘 다 실재하지 않는 것임에도 현실은 명언과 이름의 영향 아래 있다. 심층의식으로부터 세상을 펼쳐내는 명언종자도, 펼쳐진 세상에 붙여진 이름도, 사유하여 분별한 것에 별도의 자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분별경향성 때문에 생긴 것이니까. 그러니 세상은 우리의 분별경향성이 만든다고도 할 수 있다. 『금강경』의 ‘그 이름’을 사유하며 경험했던 신체적 감각은 처음으로 그러한 분별경향성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을때의 느낌이었을까? 

하지만 체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다보니 내가 경험한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무엇인지 모른 체 그냥 ‘특이한 경험’으로 의미화하고, 그 체험을 재현하고 싶어 했다. 사실 나도 내가 그러고 있다는 걸 몰랐다. 감이당을 다니면서, 서울-창원을 오가는 일정과 매주 감당해야하는 공부의 양 때문에 일상에서 유지하던 고요한 집중상태가 사라지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때 처음으로 고요한 집중상태에서 생기는 희열과 같은 감각에 연연해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고요함과 희열을 ‘좋은 상태’로 분별하고, 이를 연장하고 유지하려는 내 마음의 습(習)을 봤다. ‘집중상태가 사라져도 할 수 없다.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을 분별하는 내 마음의 습을 바꿀 수 없다면 희열은 공허한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명상시간(좌선)이 줄어들었고 못하는 날도 많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명상시간은 줄었는데 집중상태는 더 잘 유지되는 것이었다. 따로 노력하는 것도 아닌데 세상은 그냥 그대로 기쁘게 청정했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유식’을 공부하면서 그 이유를 알았다. 감이당에서의 공부는 그 자체로 하나의 명상이었던 것이다. 좌선이 선정수행이라면 공부는 지혜수행에 해당되었다. 감이당에서 수년 동안 읽었던 동, 서양 고전과 역사, 동의보감, 사주명리 등은 내 마음과 느낌, 몸 그리고 그것이 존재하는 세상을 세밀하게 통찰하게 하였다. 이러한 통찰로 나와 나 아닌 것,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으로 나누고 분별하는 내 마음의 경향성을 뿌리깊이 봤던 것이다. 그리고 그 통찰의 자리에서 분별경향성은 조금씩 해체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경향성이 해체된 자리에 지금여기에 오롯이 존재할 수 있는 집중의 힘이 생긴 것이다.    

마음은 얼마나 클까? 『유식』은 모든 것이 내 마음이라고 한다. 이는 내가 보고 내가 알고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 그 만큼이 내 마음이라는 것이다. ‘유식’은 선정과 지혜를 통해 이 마음을 더 크게 깨울 수 있다고 한다. 선정의 힘으로 마음의 분별경향성에서 벗어나 고요해지고, 지혜로 그 마음이 만들고 있는 세상의 무상함을 통찰한다. 선정과 지혜 이 둘의 작용으로 나와 너, 이것과 저것, 여기와 저기로 작게 분별되고 분리된 세상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연결되어 있는 둘 아닌 한 생명공동체로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깨달음만큼이 내 마음이다. 그러니 유식을 공부해서 내가 살아보고 싶은 세상은 선정과 지혜로 들어간 둘 아닌 세상이다. 나와 나 아닌 것, 좋은 것과 좋지 않음을 분별하지 않는 한생명의 세상이다. 


Ⅱ. 유식(唯識), 식의 시대를 열다

1. 유식무경(唯識無境)의 세상

유식(唯識)은 ‘오로지 식만 존재한다.’는 뜻이다. ‘유식무경(唯識無境)’은 유식사상을 한마디로 설명하는 것으로, 경계(境)는 없고 오로지 식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경계는 없고 오로지 식만 존재한다니? 마치 모든 것은 마음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일체유심조’와 비슷한 말 아닌가. 맞다. 유식무경은 일체유심조와 비슷한 말이다. 그러니 유식에선 ‘마음’이란 말 대신 ‘식’으로 세상을 설명하는 셈이다. 유식에는 ‘일수사견(一水四見)’이란 말이 있는데, 하나의 물(水)을 네 가지로 본다는 뜻. 인간은 마시는 물로, 물고기는 사는 집으로, 아귀는 피고름으로, 천상에서는 세계를 장식하는 보배로 본다는 것이다. 어릴 적에 날아다니는 벌레를 보며 궁금할 때가 있었다. 내게는 이렇게 형형색색으로 보이는 세상이 저들에겐 어떻게 보일까? 저들에겐 마치 사막처럼 황량하게 보이는 건 아닐까. 같은 세상이라도 누가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보인다면, 우린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일까?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일까?


곤충이 본 세상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유식은 대승불교의 한 학파이다. 정화스님이 쓰신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로 유식을 처음 접했는데, 이것은 『유식삼십송』이란 책을 해설한 것이다. 『유식삼십송』은 유식의 사상을 30개의 게송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 게송은 서기 400년~480년경 인도 북서 간다라국의 푸루사푸르에 사는 ‘세친’이라는 사람이 썼다고 한다. 그럼 세친이 유식사상을 처음 생각해낸 걸까? 그건 아니다. 유식학파의 실제 개조는 ‘무착’이라고 할 수 있다. 왜 ‘할 수 있다’라고 표현하냐면 무착 이전의 유식의 맥은 애매하기 때문이다. 세친과 무착은 형제관계이다. 무착이 형. 그런데 우리는 불교는 ‘공(空)’사상이라고 알고 있지 않은가. 불교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일체는 모두 공(一切皆空)’이라는 말을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그런데 대승불교의 한 학파인 유식은 ‘일체개공’이라는 말은 하지 않고 ‘유식무경’이라고 한다. 왜 그럴까? 이것을 알려면 유식사상이 나오기까지 인도의 불교의 상황을 알아야 한다.   

2. 부파불교의 ‘유(有)’와 용수의 ‘공(空)’

불교는 부처님 열반 후 100년 무렵 근본 분열을 하게 된다. 그 이유에 대해 남방 불교와 북방불교는 각자 다르게 말하지만, 어쨌든 상좌부와 대중부로 분열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무렵 마우리야 왕조의 아쇼카왕이 인도를 최초로 통일하게 된다. 불교의 전파에 있어서 아쇼카왕의 역할은 아주 중요하다. 아쇼카왕은 통일제국을 세운 후, 제국의 통치권을 확립하고 왕의 권력을 제약하고 있는 브라만 세력을 극복하기 위해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그러면서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불교를 인도 전역에 전파하고 사찰에는 많은 토지를 하사하게 된다. 그런데 사찰이 부유해지자 승려들은 걸식을 멈추고, 경제적으로 윤택해진 승원에 머물며 불교에 대한 각종 이론을 만들어 논쟁을 일삼는데, 이 시기 불교를 ‘아비달마불교’ 또는 ‘부파불교’라 한다.  

승려들은 더 이상 대중과 만날 수 있는 걸식은 하지 않고 ‘법’에 대한 이론과 논쟁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대중의 구제보다 ‘아라한’이라는 개인적 열반을 최고의 가치로 두게 되었다. 대승불교는 대중을 외면하고 부처님의 ‘법’을 독식하는 승려들에 대응하여 일어난 새로운 불교 운동이었다. 이들은 부처님 사리를 보관한 불탑을 예배하거나 부처님을 찬양하는 불전(佛傳) 문학을 통해 부처님을 숭배했는데, 재가신도와도 다르고 승도 속도 아닌 제3의 성격의 집단이었다. 이들 집단의 신앙적 성격은 부파불교의 ‘법(法)’ 중심에서 부처의 깨달음을 체험하려는 ‘불(佛)’ 중심의 불교가 형성되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어쨌든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이 ‘공(空)’을 이야기하는 각종 대승경전들이 편찬되자, ‘공’에 대한 이론적 체계를 마련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부처님이 깨달았다는 ‘공’은 무엇이며, 그것의 이론적 근거는 무엇인가? 

이때 공의 철학적 근거를 마련한 사람이 ‘용수’(나가르주나, 150년~250년)이다. 용수는 『중론』을 통해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인 ‘공’을 이론적으로 이해시키고, 아비달마불교를 비판한다. ‘세계는 무엇이며, 자아는 무엇인가?’에 대해, 초기불교(아비달마 이전 불교)에서는 ‘세계는 경험된 것이며, 자아는 그 같은 경험을 통해 드러나는 가설적 존재’라고 했다. 그런데 아비달마불교에서는 이러한 경험을 구성하는 온갖 원인과 조건들을 ‘실재하는 것’(實有)으로 해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세계를 구성하는 구성성분들(法)에 자성(自性)이 있다는 것. 이에 용수는 아(我)와 법(法)엔 고유한 본성이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의 언어적 분별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일체의 모든 존재는 ‘공’임을 천명한 것.   

3. 유식, ‘공(空)’이 아닌 ‘식(識)’을 이야기하다

‘공’은 연기(緣起)를 의미한다. 이 현상계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여 연기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자성이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체가 공이라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다 무엇인가? 불교의 ‘공’이란 말을 처음 접했을 때 누구나 한번쯤은 가졌을 의문이다. ‘공’이란 비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일체가 공이라는 것은 일체가 비어있다는 뜻이다. 일체가 비었다니? 그렇다면 이 존재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유식사상은 용수의 공사상이 체계화 된 후 생겨났다. 현상계는 연기적으로 존재하고 별도의 자성은 없다고 해서 모든 존재가 아예 없는 것이 아니다. 일시적이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사람도 있고 산도 있듯이, 어떤 형상과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우리의 마음(식)은 존재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공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공을 실체화하여 붙잡거나, 모든 것은 허무하고 공허하다는 염세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일시적이긴 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것, 즉 우리의 인격과 우리가 행한 행위의 유전(業)에 관한 문제가 연구되어야 했다. 

유식은 ‘유가사(瑜伽師)’들에 의해 연구되었다. 유가사는 ‘요가를 실천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요가수행 중 각종 선정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마음속에 나타나는 갖가지 영상은 다만 식(識)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정을 통해서 ‘나타나는 대상은 모두 마음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는 자각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경험은 우리의 일상 경험도 마음이 나타난 것이라는 자각으로 이어졌다. 유식의 소의경전인 『해심밀경』에 ‘아타나식’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는데, 아타나식은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식’을 의미한다. 우리의 표면 의식이 잠자고 있을 때도 아타나식은 계속 활동하면서 호흡, 심장의 활동 등을 유지한다고 생각했다. 표면 의식에 가려져 있지만 우리의 모든 활동을 주관하는 심층의식. 이 ‘아타나식’이 유식에서는 ‘아뢰야식’으로 불러지며 ‘인격이나 경험의 주체 또는 인식의 주체’로 설정된다. 


명상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유식에 의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심층의식인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가 현행(現行)하여 나타난 것이다. ‘아뢰야식’이라는 깊은 의식에 저장되어 있던 종자가 전변(轉變)을 거쳐 드러난 것이 이 세상인 것이다. 그러니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는 종자가 무엇이냐에 따라 존재가 달라지고, 어떤 인연을 만나느냐에 따라 하나의 물(一水)이라도 사람에게는 물로, 아귀에게는 피고름으로, 물고기에겐 집으로, 천상에선 보배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는 것(四見).  

4. 심층의식을 체계화하다 

유식의 사상가로 미륵, 무착, 세친을 들 수 있다. ‘무착’은 서기 395년~470년 경 북인도의 사람이다. 상좌부 계통에 출가하여 선정을 닦아 공관(空觀)을 체득했다. 하지만 공을 체득했음에도 여전히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 등의 마음의 동요가 있었다고 한다. 그 무렵 인도엔 미륵신앙이 유행했는데, 무착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륵보살을 만나고자 했고, 마침내 선정 상태에서 도솔천에 올라 미륵보살을 친견하고 유식의 교리를 듣게 된다. 그리고 돌아와 그 내용을 대중에게 전하게 되는데 이것이 유식의 시작이다. 그런데, 무착이 실제로 미륵보살을 만났을까? 그건 알 수 없지만, 무착이 만난 ‘미륵’이란 도솔천에 있는 미륵보살이라기보다 무착 이전에 유가행파의 논사들을 ‘미륵’이라는 이름으로 통칭하여 부른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무착은 미륵에게 들은 유식의 교리로 『유가사지론』을 짓는데, 『유가사지론』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논서는 요가를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인 ‘유가사’들이 현실에서 닦은 마음의 경지를 설명한다. 

마음을 ‘심,의,식(心,意,識)’으로 나누어 부르는 것은 초기불교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초기불교에서는 심, 의, 식 각각의 차이를 뚜렷하게 분석하진 않고, ‘심,의,식’ 전체를 그냥 ‘마음’이라고 부른다. 마음을 세분하여 나누어 연구하는 것 보다 자기와 세계를 연기적으로 인식하는 실천수행이 ‘고(苦)’를 해결하는 더 큰 방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착은 공을 체득하고도 마음의 불안이 계속되는 것을 계기로 마음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했고, 표면의식에 영향을 주는 심층의식(잠재의식)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심층의식이 표면의식에 주는 영향과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체계화시켰다. 무착이 겪은 마음의 동요는 표면의식은 공성을 체득했지만, 심층의식 속에 종자로 저장되어 있는 마음의 기질(습)까지는 바꾸지 못한데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5. 우리시대 왜 ‘유식’인가?

인도에서의 불교는 유식을 끝으로 중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용수의 공사상은 티벳에 영향을 미쳐 ‘티벳불교’가 탄생하고, 중국으로 가서는 ‘선불교’로 발전한다. 그리고 서양으로 건너가서는 심리학과 만난다. 심리학은 식(識)의 학문이다. 우리의 고통(苦)이 어디서 오는지 마음을 탐구하여 해법을 얻고자 한다. 특히 심층의식을 분석하여 현실의 고통에 영향을 미치는 원인을 찾는다. 불교에서는 연기법, 즉 공을 체득하는 것이 고통에서 해방되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한다. 하지만, 화려한 물질로 정신을 현혹하는 이 시대에 ‘나도 없고, 대상도 없다’는 공은 어렵고도 모호하다. 오히려 ‘마음속에 나타나는 갖가지 영상은 다만 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이해하는 것이 더 쉬운 세상이 되었다. 




컴퓨터가 세상을 하나로 연결하며, 우리는 ‘하나’로 그리고 ‘각자 다른 세상’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대한 세상과 마주했다. 앞서 일수사견을 얘기했다. 물(水)은 물로써 절대 변하지 않는 자성이 있는 아니다. 무엇을, 언제,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물은 수많은 모습을 한다. 그 수많은 모습은 물과 만나는 주체의 식(識)의 상태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니 내가 경험하는 세상은 나의 식이 반영된 세상이다. 이 시대 SNS를 통해 볼 수 있는 형형색색 다양한 세상은 그 세상마다 각자 다른 식이 반영된 다른 세상이다. 분리되고 작은 세상이지만 하나이면서 거대한 세상을 이루며 연결되어 있다. 유식은 우리의 식이 심층의식까지 전의(轉依)되었을 때 이 거대한 하나의 세상과 마주할 수 있다고 한다.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호흡하는 한생명의 세상. 무착이 발견한 그 세상이 궁금하다.


Ⅲ. 우리는 어떻게 ‘고(苦)’에서 벗어날까

1. 존재와 인식 사이, 그 이름(名言) 

10여년전 『금강경』을 읽었을 때 ‘시명(是名)’이란 말이 가장 와 닿았다고 했다. ‘부처는 부처가 아니라 그 이름이 부처 이다’, ‘크다는 크다가 아니라 그 이름이 크다 이다’ 등의 문구에 반복적으로 이름(名)이란 말이 있었다. 그 때 세상은 수많은 이름으로 둘러싸여 있음을 처음 알았다. 아니 세상은 이름 자체였다.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냄새 맡는 것도, 심지어 맛보는 것조차 이름이 개입하고 있었다. 본다는 듣는다는 인식에는 이미 ‘무엇’이라는 이름이 개입하고 있었다. 그냥 본다고? 그냥 듣는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무엇을 감각하는 것과 그것을 인식하는 사이에는 이름이라는 거대한 환영이 끼어 있었음을 『금강경』의 ‘시명’을 통해 처음 알았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세상이 이름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안 것뿐인데 내 몸과 마음은 여태 경험해보지 못한 큰 기쁨과 자유로움을 느꼈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었다. 돈을 더 번 것도, 명예를 더 얻은 것도, 자식이 더 잘된 것도, 고민하던 일상의 문제에서 벗어난 것도, 심지어 날씨조차 그대로였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는데 기쁨과 자유의 느낌은 몇 주가 지나도록 지속되었다. 그때 직감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고(苦)에서 해방되는 길은 외부에 있지 않음을. 무엇을 어떻게 바꾸는 것과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은 직접적 관련이 없음을. 자식은 자식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자식일 뿐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자식과 관련된 많은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음을. 다른 수많은 고통도 그러함을.

2. 심층의식이 그려낸 세상

유식에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유식을 한마디로 설명하는 말이다. 오로지 식만 있고 외부의 대상은 없다는 뜻. 처음 ‘유식무경’이란 말을 들었을 때 정말 이상했다. 분명 나도 있고, 내가 보는 사물도 있는데, 오로지 식만 있고 외부 대상은 없다니. 그렇다면 내가 보는, 듣는, 냄새 맡는, 맛보는, 만지는 이것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불교경전엔 이 세상을 꿈에, 포말(泡沫)에, 환상에 불과하다는 말들이 있다. 비유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이 말들이 사실이란 말인가. 그런데 유식에서 말하는 ‘외부 대상이 없다’는 말은 ‘식과 별개로 따로 존재하는 외부 대상이 없다’는 것이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는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식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느냐에 따라 달리 보인다는 말이다. 우리가 눈앞에 있는 책상을 ‘책상’으로 여기는 것은 보고(眼), 듣고(耳), 냄새 맡고(鼻), 맛보고(舌), 감촉하는(身) 다섯 감각기관이 감관한 것을 의식(意識)이 종합하여 ‘책상’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각기관이 감관할 수 있는 영역이 달라진다면 눈앞에 있는 책상은 어떻게 보일까? 어떻게 느껴질까? 아니 보이기나 할까? 우린 감각기관이 접촉(觸)하여 인식(受)할 수 있는 영역의 것들만 ‘있다’라고 하고, 그 대상들만 감각할 수 있다. 인식 영역을 벗어난 것들은 아무리 있더라도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니 우리가 ‘있다’라고 하는 것들은 우리의 감각기관에 의존하여 있는 것들이다. 보고, 듣고, 냄새만 맡을 수 있는 생명체나 맛만 볼 수 있는 생명체에게 책상은 어떻게 느껴질까? 그들에게 보이는 세상은 우리가 보는 세상과 다를 것이다. 그러니 모든 세상은 그것을 식과 별개로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유식무경. 


유식무경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그렇다면 식은 무엇인가? 유식에서는 여덟 개의 식을 얘기한다.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말나식, 아뢰야식. 안식부터 신식은 감각만하는 식이고, 우리가 흔히 ‘마음’이라고 할 때는 의식(識), 말나식(意), 아뢰야식(心)을 합쳐서 말한다. 식의 기본기능은 ‘안다’는 것이다. 이때 ‘안다’는 ‘누가 무엇을 안다’는 그 안다가 아니다. 그냥 ‘아는 기능’을 의미한다. 그러니 모든 식은 그 자체로 아는 기능이 있다. 아뢰야식(阿賴耶識)은 식의 기본기능인 아는 기능과 종자를 저장하는 기능을 가진 식이고, 말나식(末那識)은 식의 기본기능인 아는 기능과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나’라고 인식하는 기능을 가진 식이고, 의식(意識)은 식의 기본기능인 아는 기능과 전오식(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이 감각한 내용을 종합하여 사물을 분별하는 기능을 가진 식이다.

유식은 식이 세상을 현현(顯現)해 낸다고 한다. 즉 만든다는 것이다. 이때 세상은 창조주 하느님이 만들었다는 세상처럼 나와 떨어져 따로 존재하는 세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유식을 이해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이 인식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그 자체의 본성을 가지고 따로 존재하는 세상을, 그와 별도로 따로 존재하는 내가, 감각기능을 이용하여, 객관적으로 사물을 인식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인식이라는 것이다. 과학은 이러한 인식방법을 극도로 사용하여 발전해 왔다. 그런데 유식은 식의 ‘안다’는 기능 자체가 세상을 만들고, 그렇게 만든 세상을 식의 안다는 기능으로 다시 인식한다고 한다. 즉, 식 스스로가 자신(見分)과 대상(相分)을 산출시키고, 그 산출한 것을 자신이 다시 인식한다는 것. 이것이 식이 세상을 만드는 방식이다. 이에 의하면 우리가 감각하는 세상은 우리의 식이 만들어 낸 것이다. 식 자체가 ‘나’도 ‘대상’도 만들어 냈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세상’이라고 하는 것의 실체. 정말 일체유심조이다. 

식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하면 ‘하느님’의 자리에 ‘식’을 갖다놓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유식은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자리를 식으로 대체한 것일까? 한마디로 그렇지 않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초월하여 존재하며, 이 세상을 창조하고 관리하는 신이지만, 유식의 식은 그러한 창조주처럼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식은 어떻게 세상을 만들고 있는 것인가? 


세계창조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유식은 구체적으로 ‘아뢰야식’이라는 우리의 심층의식 속에 저장된 종자가 세상을 만든다고 한다. ‘아뢰야’는 저장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아뢰야식은 무언가를 저장하는 식이다. 무엇을 저장하는가? 종자(種子)이다. 종자는 씨앗이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바로 그 씨앗이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조그마한 것(씨앗)을 땅에 심어 물과 햇빛을 주면 어느새 콩이 되고 팥이 된다. 아뢰야식엔 그와 같은 기능을 하는 종자들이 저장되어 있는데, 이 종자들은 인연의 세력에 따라 자신을 전변(轉變)시켜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 나의 몸 그리고 다른 식들(즉, 대상을 감각하는 다섯 감각식인 ‘전오식’, 감각된 것을 종합하여 사유 분별하는 ‘제6의식’ 그리고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나’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말나식’)을 만들어 낸다. 여기서 ‘종자’는 현실로 현현되기 전에 잠재되어 있는 잠재태(態)를 의미한다. 이 잠재된 것이 인연을 만나면 잠재된 모양과 인연 세력에 따라 그 모양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뢰야식이 세상과 몸 그리고 다른 식들로 전변하는 과정, 즉 세상을 그려내는 과정을 아뢰야식의 ‘현행’이라 한다(종자생현행). 이렇게 현행된 세상을 전오식 등의 식들이 다시 인식하여 그 정보를 아뢰야식에 저장하는데, 이 과정을 ‘훈습’이라고 한다(현행훈종자). 그러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심층의식인 아뢰야식에 저장된 잠재태가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그려낸 세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구’라는 같은 세상에서도 서로 다른 각자의 세계를 살아간다. 유식에선 그 이유를 아뢰야식에서 찾는다.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가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는 것. 종자를 크게 공(共)종자와 사(私)종자로 나눌 수 있는데, 공종자로는 우리가 사는 공통의 세상을, 사종자로는 각자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아뢰야식의 사(私)종자가 다르면 경험하는 세상도 다르게 된다. 집이 산이 나무가 똑같은 모양으로 인식되는 것은 공종자 덕분이다. 그러나 집을 산을 나무를 각각 다른 느낌으로 인식하는 것은 사종자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세상에 살아도 우리는 다 다르게 살 수 있다. 그러니 각자의 세상을 그려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는 종자이다. 

아뢰야식엔 명언(名言)종자와 업(業)종자가 있다. 명언은 관념(생각)과 언어를 의미하고, 업은 행위를 의미한다. 이 말은 우리가 생각한 것, 말한 것 그리고 행동한 모든 것이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들이 잠재 태 모양으로 저장되어 있다는 것. 행위가 저장된다는 것은 이해가 된다. 어떤 행위를 반복하게 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은 무의식적으로 행위를 낳으니 인연이 닿으면 언제라도 현행하게 된다. 예컨대 공을 던지는 야구선수는 ‘던지는 행위’를 반복한다. 이 반복된 행위는 심층의식에 저장되고, ‘공을 던진다’는 것과 똑같은 행위는 아니지만 팔을 휘둘러 멀리 내보내는 행위는 잠재 성향으로 있다가 어떤 인연 장(場)을 만나면 그와 비슷한 행위를 행하게 된다. 우리의 모든 습관은 이렇게 형성된 것. 그런데 생각과 언어가 저장된다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생각 하나하나, 말 하나하나가 모두 저장된다는 것일까? 종자는 잠재 태이다. 잠재 태는 경향성이다. 그러니 생각 하나하나 말 하나하나가 그대로 저장된다는 것 보다는 생각의 경향, 말의 경향이 저장된다는 것일 것이다. 어쨌든 종자는 인연 세력에 따라 자신을 전변시켜 세상을 만들어낸다.   

3. 언어(名言)는 욕망이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직접 보지도 직접 듣지도 못한 것, 즉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을 관념적으로 생각해내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얘기할 수 있는 사유와 언어능력이 있다. 이 능력으로 인간은 그 누구도 보지 못한 ‘내일’이라는 것을 탄생시켰다. 동물은 지금 이순간만을 산다. 그들에겐 이다음 순간을 의식적으로 사유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동물에겐 눈앞에 닥친 것들에 대한 공포는 있으나 앞으로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미래에 대한 불안은 없다. 사유와 언어능력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만든 능력이다. 수많은 도구를 만들 수 있었고, 법과 제도를 만들어 인류를 문명화시켰기 때문이다. 몇 만 년 전에 비해 인간은 얼마나 문명해졌는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문명화될수록 인간은 더 외롭고 더 괴롭다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유와 언어능력을 극대화하여 문명화한 인간과 그 인간의 괴로움에는 분명 어떤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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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만여년 전 어느 날 인간이 ‘내일’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유식으로 보면 아뢰야식의 종자들 중 명언종자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관념(생각)과 언어 능력이 발달하기 시작했다는 것. 이로써 인간의 삶은 동물과 달라졌다. 동물은 아뢰야식의 종자가 현실을 만들고, 그 현실을 단순히 인식하여 다시 아뢰야식에 저장하는, 종자의 무한 반복 회로를 산다. 동물들의 운동 신경, 자신 보존 능력은 이러한 종자의 무한 반복 회로 덕분이다. 그런데 인간은 달라졌다. 생각하는 능력과 언어를 다루는 능력이 생긴 것. 즉 명언종자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에겐 자신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는 것이다. 생각하고 말한 것은 아뢰야식에 종자 형태로 저장되고, 그 종자들은 현실을 만든다. 그러니 나의 현실은 내가 생각하고 말한 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 즉, 인간은 동물과 같이 종자가 무한히 반복되는 삶이 아니라 생각하고 말한 대로 현실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사유능력은 괴로움(苦)도 함께 만들었다. 동물은 눈앞에 마주친 것에 대해서만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인간은 경험하지 않은 수많은 것에도 괴로움을 느낀다. 보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내일’을 만들어 낸 그 능력이, 만나면 떠날까 괴롭고, 얻으면 잃을까 괴롭고, 태어나면 죽을까 병들까 늙을까하는 괴로움도 만들어냈다. 그러니 생각하고 말하며 자신의 현실을 창조해내는 능력은 문명화된 이 세계를 만들었지만 모든 것이 고(苦)인 세계도 만들었다. 

2,500년 전, 부처는 인간이 처할 이 상황을 꿰뚫어 본 것 일까? 그는 인간이 고에서 해방되는 길(道)을 찾아 나섰다. 부처가 찾은 길은 뭘까? 명언종자가 고(苦)를 만들고 있으니 아뢰야식에 있는 종자를 모조리 없애는 것일까? 그러면 인간은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그런데 종자가 없다는 것은 우리 삶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초점은 종자를 없애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종자의 기능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있다.  

그런데 아뢰야식에 저장된 명언종자와 업종자 중 어떤 것이 우리에게 더 많은 고통을 일으킬까? 업종자는 행위를 의미한다고 했다. 행위란 작게는 내가 한 행동 그 자체이지만, 크게는 세상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움직임들이다. 그 모든 움직임이 업종자란 형태로 아뢰야식에 저장된다. 반면 명언종자는 우리의 생각과 언어이다. 사실 업종자도 종자로 저장되기 위해선 대부분 생각과 언어가 사용되어야 한다. 우리 주변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수많은 행위 중 종자로 저장되기 위해서는 인식되고 반복된 것이어야 한다. 인식되고 반복된다는 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언어라는 기호체계를 동반하여 해석한 것이다. 그러니 업종자도 결국 생각과 언어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명언이다. 


관념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관념은 어떻게 생기는 걸까? 그리고 언어는 어떻게 생기는 걸까? 관념은 언어 이전의 생각이다. 무엇이든 언어로 내뱉어지기 위해선 먼저 관념(생각)이라는 형태로 머물러야 한다. 우리가 언어화한 것은 모두 관념화 된 것이다. 그러니 관념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면 언어가 생기는 원리도 알 수 있다. 여기서 유식에서는 식의 변계소집성(遍計所集性)을 얘기한다. 식에는 세 가지 성질이 있는데,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이 그것이다. 변계소집성은 이리저리(遍) 헤아려서(計) 실재한다고 집착(所執)하는 성질이라는 뜻이고, 의타기성은 다른 것(他)에 의지(衣)하여 일어난다(起性)는 뜻, 원성실성은 그 자체로 원만하고 여여(如如)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식은 그 자체로 여여한 상태로 다른 것에 의지해서 일어나는데 그것을 실재한다고 집착하는 성질이 있다는 것이다. 이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성질이 관념을 만들고, 언어를 만들게 한다. 실재하지 않은 것을 실재한다고 착각하면서 잡아두고자 하는 욕망이 그것들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욕망하지 않는 것에는 이름을 짓지 않는다. 우리 주변의 각종 이름들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각종 나무에는 따로 이름들이 있지만, 그 나무의 두 번째 가지의 10번째 나뭇잎에는 따로 이름이 없다. 감나무 두 번째 가지의 10번째 잎의 이름을 아는가? 다른 모든 잎과 마찬가지로 그저 감나무 잎일 뿐이다. 하지만 만약 감나무 잎의 두 번째 가지의 10번째 나뭇잎이 정력에 좋다는 연구결과가 밝혀지면 어떻게 될까? 그 나뭇잎에는 수많은 이름이 지어질 것이다. 그런 식으로 우리가 욕망하는 것에는 다 이름이 붙여진다. 그러니 이름은 곧 욕망이다. 그리고 그 이름들은 사용하는 언어 또한 욕망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는 우리의 욕망을 얘기해주고, 내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내 욕망을 드러낸다. 성도착증 환자는 하루 종일 성과 관련된 생각과 언어에 둘러싸여 있고, 싸움에 대한 욕망이 큰 사람은 전쟁이라든가 무기, 투쟁 등 싸움과 관련된 생각과 언어에 둘러싸여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언어는 내 욕망을 보여주고, 나는 그 욕망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살아간다. 이런 식으로 보면 우리는 하나의 세상에서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각자의 욕망들로 나누어진 작은 세상들에서 살아간다. 각 세상엔 자신들의 욕망을 표현하는 언어들로 둘러싸여 있다. 세상엔 사람의 수만큼 그리고 생명의 수만큼 잘게 나눠진 욕망의 세계가 존재하며, 이들 작은 세계들이 서로 중첩되어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우리의 세상이다. 『금강경』을 사경하며 처음 ‘이름’이란 것에 집중했을 때, 나는 이 욕망의 원리를 봤을 것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름들이 내 욕망에서 비롯되었음을. 나는 그 작은 욕망의 세계에서 거대한 세계와 분리되어 왜소하게 살고 있음을.  

4. 존재와 언어(名言) 사이, 고(苦) 

그런데 아뢰야식이 현현해낸 것이 이 세상이고 이를 식이 다시 인식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 세상은 꿈과 같다는 말이 아닌가. 꿈이 그렇지 않은가. 꿈을 꿀 땐 모든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사실 꿈은 무의식이 그려낸 세상일 뿐이다. 그래서 깨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것. 우리의 세상이 그렇다는 것인가? 너무 황당하지만 유식은 그렇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꿈을 꿀 때 왜 꿈이라고 생각 못하는가? 그건 꿈 속 세상이 너무 리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의식이 그려낸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뢰야식이 현현한 것뿐인 이 세상을 식과는 별도로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음이 그린 세상이 너무 리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식과는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 

꿈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사실 현실은 리얼하지 않다. 리얼하다는 것은 실재하여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은 매순간 변하고 있다. 매순간은 모든 인연의 화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나’라고 하지만 사실 어제의 나는 어제의 인연의 화합으로 이루어졌고, 오늘의 나는 오늘의 인연의 화합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같은 나라고 생각하지만 매순간 수억의 인연의 화합으로 이루어진 순간순간 다른 나이다. 과학으로도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는 10년이 지나면 모두 바뀐다하지 않는가. 그에 의하면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비유적으로만 아니라 실재로도 완벽히 다른 나이다. 그것이 붓다가 말한 인연법. 인(因)은 직접적인 원인이라 하고, 연(緣)은 간접적인 원인이라 한다. 그러니 모든 존재는 직접적인 원인과 간접적인 원인이 화합하여(인연화합) 그 순간 생기(生起)한 존재라는 것. 유식에서는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를 말하고, 간접적인 원인은 그 종자가 현행할 때 만나는 수많은 변수들이다. (물론 현행하기 위해선 일차적으로 아뢰야식 내에서 먼저 그 인연세력이 형성되어야 한다.) 세상은 하나의(즉 ‘나’의) 아뢰야식만으로 생성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건 정말 꿈일 뿐이다. 수많은 다른 아뢰야식의 현행이 중첩되어 세상을 만들고 있다. ‘나’라는 존재는 내 아뢰야식의 종자(因)뿐만 아니라 다른 아뢰야식의 종자의 마주침(緣)이 인연되어 지금 여기 생기하는 존재이다. 그러니 이 세상을 꿈이라 생각하고 깨어나기 위해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어리석은 짓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매순간 다르게 존재하는 것을 우리는 ‘같은’ 나라고 생각한다. 왜 그럴까? 식의 변계소집성이 순간순간 존재하는 나와 세상을 실재하는 것으로 집착하고, 그기에 ‘나’, ‘세상’이라는 언어(名言)가 그 집착한 것을 ‘계속 존재하는 것’으로 고정시키기 때문이다. 언어는 제6의식과 말나식에서 생성되는데, 아뢰야식에 인연 소생하여 생기는(依他起) 세상을 실재한다고 집착하는 변계소집성은 제6의식과 말나식에만 있는 성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언어는 대상을 분별하여 그리고 ‘나’와 아닌 것으로 사량하는 마음에서 생성된다는 것이다. 

언어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수적이다. 언어가 없으면 다른 세상을 알 수 없다. 알 수 없었던 것을 알게 되는 데는 언어가 많은 역할을 한다. 수많은 정보가 언어로 전달되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는 언어를 통해 우리의 세상을 확장시킬 수 있다. 인간이 동물과 달리 문명한 세상을 만들 수 있었던 것에는 언어의 역할이 크다. 정보를 대대로 전하고 그것을 수신하여 습득하는 능력이 없었다면 인류 문명은 존재했겠는가. 그런데 언어는 세상을 작게 분리하여 서로 통하지 않게 하는 원인도 된다. 식의 변계소집성이 언어를 만들었지만, 매순간 연기(緣起)하며 변해가는 세상과 달리 언어는 변하지 않는다. 이름이 지칭하는 ‘것’은 사라져도 이름은 사라지지 않고 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름이 지칭하는 ‘것’은 변해가도 이름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라는 것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같았던 적이 없었지만, ‘나’라는 명칭과 실재 사용하는 ‘00’이라는 이름은 태어나서 바뀐 적이 없다. 변하지 않는 이름은 변하지 않은 욕망 속에 우리를 가둔다. 욕망이 이름을 만들었지만, 이름에 의해 우리의 욕망은 고정된다. 이 속에서 우리는 고통스럽다. 욕망 자체가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름으로 고정된 욕망과 매순간 연기하는 우리의 존재 사이, 그 사이의 괴리가 고통을 만드는 것이다. 남편은 매순간 연기하며 변하는 존재이지만 ‘남편’이라는 이름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남편이라는 이름’일 뿐인 대상을 향해 ‘남편이라는 존재’를 욕망한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고통스럽다. 욕망은 이름을 만들고 이 이름은 아뢰야식에 종자로 저장되었다가 다시 그 이름에 맞는 세상을 만들어 낸다. 그렇게 우리 각자는 자신이 저장한 이름 속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니 이름의 실체 없음을 보지 않고서는 고에서 해방될 길은 없다. 

5. 고에서 벗어나는 힘, 자각(自覺)

유식은 유가사(瑜伽師)들이 만든 학파이다. 유가사는 요가를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요가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동작 위주의 요가가 아니다. 어떤 대상에 마음을 매어 정신을 집중하는 수행을 말한다. 유가사들은 요가 수행 중 선정의 상태에서 나타나는 영상(映像)이 모두 식이 작용한 환상이란 것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세상도 식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하고 의심했다. 그리고 현실이 심층의식인 아뢰야식의 현행(現行)이란 걸 알았다. 그런데 그들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어디에서 찾았을까? 아뢰야식이 현행하며 매순간 인연 화합하여 만들어진 우리라는 존재와, 제6의식과 말나식의 분별로 만들어진 관념과 언어(名言), 사이에서 발생한 고(苦). 그것에서 해방되는 길을 어디에서 찾았을까?  



그들은 유식성(唯識性)에 머물기를 구(求)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고의 굴레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고 한다. 유식성의 자각(自覺)을 구하는 것이 고에서 벗어나는 첫 걸음이라는 것. 유식성의 자각이라니. 무엇을 말하는 걸까? 유식성은 우리의 세상은 심층의식인 아뢰야식에 의존하여 생겨난 것(依他起)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유식성을 자각한다는 것은 이러한 것을 확실하게 아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고에서 벗어나는 길이 먼저 세상이 어떻게 형성되고 사라지는지를 확실하게 아는 것, 모든 것이 마음이 그린 영상임을 확실히 아는 것이라는 것. 그런데 구체적으로는 무엇을 안다는 것일까? 먼저는, 우리가 항상(恒常)하고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相)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실체가 없음(無性)을 여실히 아는 것이다. 여기엔 보이는 세계뿐 아니라 생각(관념)이나 언어로 된 모든 것이 포함된다. 식의 변계소집성은 보이는 세상이 실재한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일으킨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 다음으로, 세상의 어떤 것도 그 스스로의 본성을 가지고 스스로 생겨날 수 없음(無自然性)을, 즉 모든 것은 서로가 서로에 의지하여 생겨남을 아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을 현현시킨다는 아뢰야식조차 현실 속으로 종자를 현행시키기만 하는 일방통행의 초월적 존재가 아니다. 아뢰야식도 끊임없이 제6의식과 말나식에서 분별 사량하여 형성한 명언과 전오식에서 감각한 것을 받아들여(훈습) 바뀌지 않는가. 그러니 유식성을 자각한다는 것은 세상엔 그 자체로 고정된 실체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모든 것은 식에 의지하여 생성된다는 것을 여실히 아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자각하여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린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세상엔 그 자체로 생겨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 자체로 고정불변한 채로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나는 부모가 없으며 생겨나지 못하고, 생겨난 후에도 음식이나 공기, 사람 등 수많은 인연의 도움이 없으면 유지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않은가. 이렇게 알고 있음에도 우리는 아직 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가 아는 것은 ‘자각하여 아는 것’이 아니다. 자각은 스스로 깨닫는다는 뜻이다. 스스로 깨닫는다는 것은 들어서(聞) 아는 것과도 다르고, 사유해서(思) 아는 것과도 다르다. 물론 들어서 아는 것과 사유해서 아는 것은 상당히 도움이 된다. 하지만 자각은 아니다. 듣고(聞) 그것을 깊이 사유(思)한 다음, 수행으로(修) 체득하여 아는 것이다. 그것이 자각하여 아는 것이다. 

6. 집중하여 통찰하라

이 자각의 앎을 위해 유식에서는 선정(사마타)과 지혜(위빠사나) 수행을 강조한다. 선정과 지혜 수행이란 집중(定)하여 통찰(慧)하는 수행을 의미한다. 우리는 생각을 멈추고 어딘가에 집중하는 것을 수행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유식은 거기에다 통찰을 더해야 한다고 한다. 멈추어 집중한 상태에서 나를, 세상을 통찰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유식에서 말하는 수행이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  


명상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생각을 멈추고 어떤 대상에 집중하는 선정 수행으론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대표적으로 호흡에 집중하는 것이다. 생각은 그냥 멈추어지지 않는다. 반드시 어딘가에 집중할 때만 멈추어진다. 생각을 멈춘다는 것은 기존에 생각하던 대로 생각하는 것에서 한 발짝 물러난다는 것이다. 호흡에 집중해보면 우리의 생각을 얼마나 제멋대로 올라오는지 알 수 있다. 이 생각을 그대로 놔둔다는 것은 아뢰야식에 저장된 명언종자대로 생각한다는 것. 호흡에 집중하는 행위는 그러한 생각에 제동을 거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습(생각하는 대로 생각)에 거대한 브레이크를 거는 것. 그것이 집중의 힘이다. 그때 우리는 고요함과 평안함을 느낀다. 시끄러운 생각의 흐름에서 놓여날 때의 고요함. 통찰 수행은 그 상태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우리가 통찰하여 보는 것은 몸(身), 감각(受), 마음(心) 그리고 마음의 작용(法)이다.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는 매순간 우리의 몸, 느낌, 마음, 마음의 작용을 통해 자신을 현현시킨다. 생각을 멈추고 이것들을 본다는 것은 아뢰야식이라는 심층의식으로부터 현행 작용이 생겨나는 순간의 몸, 느낌, 마음, 마음의 작용을 본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다 보면 항상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몸도, 느낌도, 마음도 그리고 마음의 작용도 매순간 변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음이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알게 하고, 더하여 ‘나’라는 이름도 허망함을 알게 한다. 이름의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되면 그 이름에 붙들려 있던 욕망도 실재하지 않음을 안다. 이것은 곧 고에서 해방을 의미한다.  


Ⅳ. 지금 여기에서 자각하는 삶

앞서 『금강경』을 읽었던 얘기를 했다. ‘부처는 부처가 아니라 그 이름이 부처 이다’, ‘크다는 큰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크다 이다’는 말에서 처음으로 세상과 인식 사이에 이름이라는 환영이 끼어 있었음 알았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남편은 그저 남편인 줄 알았지 어떻게 그것이 이름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겠는가. 그런데 생각해보니 너무나 이상했다. 어떻게 단 한 번도 남편을 다른 이름으로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그는 수많은 이름으로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만큼 이름의 환상은 뿌리 깊다. 우린 태어날 때부터 수많은 이름들에 노출된다. 그리고 그 이름들로 너무나 견고하게 자신의 세상을 유지하고 있다. 마치 평생을 봐도 변하지 않는 하늘과 땅처럼 이름도 그렇게 변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름의 실체가 없음을 아는 것은 그 견고한 세상에 균열을 내는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그 이름에 메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그 이름과 함께 존재한 욕망에 메이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남편’이라는 또는 ‘자식’이라는 이름에서 비롯되는 수많은 고통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이럴 때 우리 삶은 어떠한가. 




우리는 어떻게 고(苦)에서 벗어날까? 유식은 매순간 집중하여(定) 보라(慧)고 한다. 집중하여 본다는 것은 지금여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자각하여 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여 끊임없이 변하고 있을 뿐이다. 나라는 것도, 세상도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이것을 매순간 자각할 때 비로소 식은 전의(轉依)되기 시작한다. 식이 전의된다는 것은 의식과 말나식의 변계소집성이 사라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변계소집성은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집착하는 성질이다. 그러므로 변계소집성이 사라지기 시작하면 의식은 아뢰야식이 전변하여 만든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 마음이 더 이상 작은 세상에 머물지 않고 지금여기의 여여(如如)함을 그대로를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 인식의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은 매순간 자각하며 사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자각의 길로 들어서는 첫발자국은 세상이 진정 그러함을 듣고 깊이 사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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