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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장자스쿨] 통쾌한 삶을 향한 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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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수리 작성일20-01-24 09:23 조회1,967회 댓글0건

본문

통쾌한 삶을 향한 발걸음
한성준

<목차>
1.‘사심’에서 ‘양지’로

2.만가성인(滿街聖人), 모두에게 성인의 길을 열다
  청년 양명의 주자학으로 성인되기
  심(心)학의 탄생, 누구나 성인에 이르는 길
  태산은 평지의 광대함만 못하다

3.잃어버린 양지를 찾아서
  질문이 없는 자의 질문
  나의 질문은 어디로?
  편안함이라는 사사로움
  사심은 어떻게 양지를 가리나
  천지를 한 몸으로 여기는 대인의 마음
  다시 한번 사심에서 양지로

1.‘사심’에서 ‘양지’로

내가 사랑하는 책 『전습록』은 내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 책과 진하게 만날 때쯤 나는 남편이 되었고 아빠가 되었다. 아빠가 된다는 사실에 설레고 기뻤지만 동시에 걱정도 함께 찾아왔다. 공부하는 백수였기에 버는 돈도 많지 않았고 모아둔 것도 별로 없었다. 점점 ‘생계’가 고민되기 시작했고 내 글은 걱정으로 채워졌다. 걱정한다고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진 않았지만 나는 그 문제를 놓지 못했다. 그해 마지막 학기에 『전습록』을 만나서야 내가 왜 놓지 못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전습록』은 명나라 시대의 유학자 왕양명과 제자들이 주고받은 문답을 모아놓은 책이다. 양명은 우리의 마음에 이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마음의 본체인 ‘양지’는 배우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사사로운 마음이 양지를 가리기 때문에 이 사심을 제거해야만 이치가 드러난다. 사심만 제거하면 된다니 아주 간명하고 쉽다. 그런데 이 사심은 뭐란 말인가? 양지라는 마음과 사심이라는 마음은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양명학을 만나고 나니 생계를 걱정하는 글을 쓰던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애를 보고 돈을 벌며 공부까지 할 자신이 없었다. 아니 그렇게까지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참에 끊임없이 해야 하는 공부와 연구실 활동을 좀 쉬고 싶었다. 하지만 연구실의 좋은 관계나 생활들은 그대로 누리고 싶었다. 생계라는 핑계를 대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라고 정당화하려 했다. 그렇지만 양지는 스스로도 속일 수 없었다. 내 마음의 깊은 곳에서는 그것이 거짓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스스로에게도 남들에게도 당당할 수 없었다. 그 거짓을 감추고 정당화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변명하고 눈치 보느라 기력을 다 소진하여 점점 왜소해져갔다. 『전습록』을 공부하니 이런 마음과 태도로 살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통쾌한 마음으로 살고 싶었다. 
  그래서 나를 움츠러들게 하는 힘든 척, 못하는 척하던 사심을 내려놓고 일단 해보기로 했다. 매주 힘들게 주역을 외우고 진하게 글을 써야 해서 피하고 싶었던 장자스쿨에 도전했다. 마음이 바로 잡히니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그렇게 힘들지 않았고 먹고사는 문제도 어떻게든 해결이 됐다. 오히려 마음은 경쾌해졌고 일상을 번잡하게 만들던 불필요한 웹서핑이나 아내와의 감정싸움 같은 것들이 훨씬 줄었고 삶의 밀도가 높아졌다. 그러한 마음과 생활은 이전보다 나를 생기 있게 만들었다. 
  양명은 항상 제자들에게 “이것은 반드시 자기의 마음으로 체득해 내야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양지가 무엇인지, 사심이 무엇인지 생각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혼자만이 아는 그 마음, 스스로도 속일 수 없는 그 마음을 기준으로 삼아서 매 사건마다 상황마다 행동해가며 직접 체험하며 알아가라고 한다. 나는 이번 사건을 통해서 외부의 시선이나 기준에 흔들리지 않고, 이익과 결과에도 연연하지 않으며 단지 내 마음에 부끄럽지 않게 살았을 때, 그 무엇보다 통쾌하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어떨까? 여전히 많은 사건과 상황 속에서 작은 틈만 생기면 나의 사심은 작동한다. 그리고 사심은 나를 이전에 살던 방식으로 돌아가게끔 유혹한다. 단지 한 푼의 인욕(人慾)이 사라졌을 뿐 아직도 나의 양지는 훤히 밝게 드러날 때보다 어둡게 가려질 때가 더 많다. 그래서 나는 지난번에 느꼈던 ‘통쾌한 마음’을 바탕으로 다시 한번 『전습록』을 지침서 삼아 내 마음과 사심에 관한 탐구를 해보려 한다. 매 순간 사심으로부터 벗어나 양지를 향하여! 

2.만가성인(滿街聖人), 모두에게 성인의 길을 열다

  어느 한 소년이 스승에게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합니까?”라고 묻는다. 스승은 “과거에 합격하여 높은 벼슬에 오르는 것이다. 그러면 자네뿐만 아니라 부모의 명성도 높아지기 때문이지”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소년은 “그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학문을 하여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라며 맞받아쳐 선생을 당황시킨다.
  이 당돌한 소년은 바로 왕양명이다. 그는 소년시절 자신의 주장처럼 평생 성인이 되기 위해 살아간다. 그리고 명나라 최고의 장군이자 시대를 뒤흔든 철학자라는 어울리지 않는 타이틀을 동시에 가지게 된다. 그는 어떤 삶을 살았고 철학을 하였기에 그런 독특한 이력을 가지게 되었을까? 또 그가 말하는 성인은 무엇일까?
 
청년 양명의 주자학으로 성인되기

  왕양명이 살던 명나라 시대는 유학, 정확히 말하면 주자학이 국가의 학문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관리가 되고 싶든, 성인이 되고 싶든, 사대부라면 누구나 주자의 학문을 공부해야 했다. 그런 주자학은 사대부들이 단지 관리가 되기 위해 유학을 공부할 뿐, 삶의 문제는 불교의 선(禪)이나 도교의 양생술에서 답을 찾는 경우가 다반사였던 남송시대에 탄생한다. 이렇게 삶과 공부가 분리된 지점에서 주자는 이 두 가지를 일치시키기 위해서 고민하다 그 답을 ‘앎’에서 찾는다. 그는 단지 오직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방법에 대한 윤리론이었던 유학을 만물과 우주에 대한 앎에 대해 탐구하는 형이상학으로 확대시킨다. 그가 생각하기에 인간의 이치는 우주의 이치와 떨어져 있지 않기에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만물과 우주의 이치를 알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핵심은 그가 『대학』이라는 책에서 발견한 ‘격물(格物)’에 있다. 격물이란 ‘물(物)에 이른다(格)’는 것이다. 사물을 하나하나 탐구해가다 보면 앎이 쌓여서 지극해지고 결국에는 우주의 이치인 천리(天理)를 통달할 수 있게 된다는 것! 
  주자는 사대부들에게 이 ‘격물’을 통해 성인에 이를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길을 열어 준다. 공부와 배움을 통해 이치를 터득한다면 누구든지 올바르게 살아가는 성인이 될 수 있었고 죽음의 문제마저 넘어 설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새로운 비전과 방법은 유학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 넣었고 많은 사대부들의 지지를 받는다. 세상천지에서 얼마나 많은 제자들이 몰려왔는지 한 때 그의 제자가 3000명에 이른 적도 있다. 하지만 그의 혁명적인 학설은 주류 학자들에게 미운 털이 박혔고 사이비 학문으로 낙인 찍혀 위협을 받게 되어 그가 죽은 후 백여 년이 지나서야 국가로부터 정식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주자학은 관학이 되면서 생기를 점점 잃기 시작한다. 사대부들은 국가의 관리가 되기 위해서 주자의 말들만을 외우고 이해해야 했다. 그러면서 주자와 다른 의견들은 배척하고 무시 하며 점점 새로운 학문을 억압하며 도그마가 되어버렸고 성인이 되기 위한 학문으로서의 생명력도 잃어 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일부 사대부들은 주자학이 관학을 넘어 ‘성인-되기’ 학문으로 부활하기를 꿈꾼다. 양명도 그런 사대부 중 한 사람이었다. 청년이 되어서는 친구와 함께 대나무에서 시작하여 우주의 이치를 터득해보려 대나무 격물을 시도 하지만 열흘 넘게 대나무와 씨름만 하다 쓰러져 병을 얻게 된다. 그 이후 경전을 통해 이치를 터득해보려고도 하고, 친구와 스승을 찾아보기도 하지만 그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그러다 불교나 도교에 빠졌다가 할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끊지 못하고 결국 다시 유학으로 돌아와 ‘성인-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심(心)학의 탄생, 누구나 성인에 이르는 길

  양명은 주자의 학설에 따라 내 마음 바깥에 있는 이치를 배우고 궁구해서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그런 그에게 불현 듯 깨달음이 찾아온다. 양명은 35살 때 황제를 이용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환관 유근의 횡포를 보다 못해 상소를 올린다. 양명의 상소에 분노한 유근은 죽을 수도 있는 장형 30대를 때린다. 그것도 모자라서 중국의 오지 중의 오지인 귀주의 용장으로 귀양을 가게하고 난 후 자객을 보내 죽이려고 까지 한다. 양명은 자객을 피해 겨우 용장에 도착하지만, 그곳의 상황도 여의치 않았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고 뱀, 독충 같은 것들이 우글거렸으며 풍토병과 자객까지 끊임없이 그를 위협하였다. 거기다 먹고 마시고 잘 곳조차 제대로 없어 자급자족해야 했다. 
  양명은 유배를 와서 모든 영광과 치욕, 희망과 절망을 버렸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두려움으로부터는 도망칠 수 없었다. 그는 돌로 만든 관을 만들어 놓고 밤낮없이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고, 성인이었으면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했을지 계속해서 고민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에 크게 소리치며 벌떡 일어난다. “나의 본성은 성인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여태까지 마음 밖에 있는 사물에서 이치를 구하는 실수를 범하였다.” 어찌나 크게 소리를 질렀는지 같이 있던 시동들도 모두 깜짝 놀랐다. 그날 밤의 번개 같은 깨달음은 양명의 심(心)학을 탄생시킨다.
  그는 그날 밤 이치가 마음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이치임을 깨달았다. 우리 마음속에는 배우지 않고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고 있는 양지라는 이치가 이미 있기에 ‘성인-되기’는 이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치를 구현하는 것이다. 양명은 성인이란 모든 이치를 알아서 행하는 존재가 아니라, 매 순간 사욕에서 벗어나 자신의 양지에 부끄럽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존재로 규정한다. 그렇기에 공부 또한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사욕을 덜어내는 것이었다. 그런 공부는 길 위나 전쟁터, 어디든 가리지 않고 가능하기에 양명은 장군이자 동시에 철학자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양명의 깨달음은 개인적인 것이면서 시대적인 것이었다. 명나라 중기로 오면서 기술이 점차 발전해서 개간 할 수 있는 땅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잉여생산물이 점점 많아졌고 자연스럽게 상업과 공업이 활성화되었다. 농업 위주의 경제가 흔들리고 상인과 기술자들의 힘이 강력해지면서 사농공상의 구별이 약화된다. 단지 주어진 삶을 살아가기만 하던 그들에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일어났다. 하지만 주자학에서는 백성들이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들은 배울 수 있는 환경과 계급이 아니었기에 성인이 되는 길에서 배제되었다. 백성은 단지 사대부들에 의해 교화되어야 할 대상이었을 뿐이다. 양명학은 그런 사람들에게 성인에 이르는 길을, 삶의 주인이 되는 길을 열어 주었다. 누구나 각자의 자리에서 만난 사건 속에서 사사로운 욕심을 덜어내고 양지를 실천하여 바름을 구현하기만 하면 성인이 될 수 있는 길을!

태산은 평지의 광대함만 못하다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듯, 누구나 양명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 양명의 제자 중에는 사대부는 물론 소금 장수, 협객, 나무꾼, 옹기장이, 농사꾼 등 직업과 신분의 경계가 없다. 그들은 길 위에서 양명을 만나 배우고 또 전파해 나간다. 그들에게 성인이 된다는 것은 벽을 보고 좌선을 하거나, 책상에 앉아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과 만나서 어울리며 양지를 밝혀 나가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스승 양명은 물론, 제자들 역시 길 위에서의 강학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제자들의 강학은 단지 스승의 말을 되풀이하는 활동이 아니다. 각자가 스스로 깨닫고 실제로 체험한 만큼만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의 학문은 스승의 학문이면서 동시에 각자의 학문이다. 그들은 양명이라는 평지를 거침없이 달려 나가 자신들의 철학을 만들어나간다. 그중에서도 전서산, 왕용계, 왕심재 이 세 제자가 특히 그러했다. 전서산은 구체적인 사건 속에서 마음을 바로잡는 공부를 핵심으로 삼았고, 왕용계는 마음의 본체 상에서 깨닫는 수양을 중시하였다. 사람들은 나중에 전자를 양명 우파라 부르고 후자를 양명 좌파라 부른다. 공부를 중시한 우파는 주자학과 연결이 되고, 깨달음을 중시한 좌파는 불교와 가까워진다. 소금 장수라는 가장 독특한 이력을 가진 왕심재는 실천을 중시한다. 
  왕심재는 어렸을 적 가난하여 마음껏 공부할 수 없었다. 나이가 들어 혼자 경전들을 읽기 시작했고 깨우친 바가 있었다. 그러다 양명을 만나 양지를 배우고 나서 크게 감복하여 그의 제자가 된다. 그는 “이 세상에 이것을 듣지 못한 사람이 있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직접 만든 수레로 거리와 산골짜기를 누비며 학문을 전파해 나간다.
  양명은 자신을 태산에 비유한 제자에게 “태산은 평지의 광대함만 못하다”라고 말한다. 그는 항상 평지가 되려 하였다. 태산은 어디에서든 중심이 되려 하지만 평지는 중심이 없다. 단지 넓게 펼쳐져 있어 어디로 달리든 스스로 기준이 되어 길을 만들어나가게 한다. 성인이 되는 길은 결국 단 하나가 아니라 각자의 길을 만들어 가는 것. 그랬을 때 모두가 성인에 이르는 길이 열린다.


3. 잃어버린 양지를 찾아서


질문이 없는 자의 질문

  매 순간 자신의 양지를 따라서 스스로에게 떳떳한 삶을 살았던 양명과 그의 제자들이 보여준 생생하고 유쾌한 공부를 만나서 나는 통쾌함을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내가 확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 이전보다 나의 일상은 훨씬 좋아졌다. 딴짓을 하는 시간도 줄었고, 아내와 작은 일로 다투는 일도 적었다. 아이를 돌보는 게 힘들고, 매번 주역을 외우고 글을 써나가는 게 힘들었지만 내 마음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주역을 좀 외우지 못해도 덜 안절부절 하게 되었고 남들보다 글쓰기를 못해도 마음이 덜 불편했다. 그래서 공부가 많이 된 줄 알았다. 그러던 중 4학기에 이상한 기미가 보였다. 글쓰기에서 질문이 생성되지 않았고 나의 사유가 흐르지 않았다. 곰샘이나 도반들은 나에게 문젯거리들을 이것저것 던져줬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고 질문이 되지 않았다. 조원들은 내가 너무 무감각해져 버린 것 같다고, 청년인데 중년이 되어버린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내가 더 생생해지고 떳떳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돌아보니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공무원처럼 단지 해야 하는 것과 하라는 것에 맞춰서 공부와 생활을 해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단지 육아가 힘들어서라고 생각해보려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결국 나에게는 문제가 없는 게 문제가 되었고, 질문이 없는 게 질문이 되어버렸다.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 내 공부가 왜 나를 이렇게 무기력하게 만든 것일까?

나의 질문은 어디로?

  주자의 ‘격물’은 외부에 있는 사물에 다가가 그것에 대한 이치를 탐구하여 하나하나의 이치를 쌓다보면 활연관통하여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양명의 격물은 사물과 내가 만나 이루어진 사건 속에서 내 마음의 바름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치는 내 마음의 바름에서 나오는 것이지 외부에 따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양명학은 매 순간 사물과 타자와의 만남이 사건화가 된다. 사건화가 된다는 것은 그곳에 질문이 생성된다는 것이다. 나도 내 일상을 사건화시키며 질문을 해나갔다. ‘야식을 먹으면 안 좋다는 걸 아는데 왜 먹을까? 운동을 하면 좋다는 걸 알면서 나는 왜 못할까? 글을 써야 하는데 왜 이렇게 딴짓을 하고 싶고 딴짓을 하게 되는 걸까?’ 와 같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내 삶에 중요한 부분들이 아니었고 나에게 절실하게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나의 사유가 넓어지고 깊어지는 질문이 될 수 없었다. 나의 질문의 태도는 왜 그랬을까? 나에게는 왜 이런 질문들밖에 안 나온 것일까?
  나에게는 양명의 공부가 너무나 간명하였다. 아니 양명의 공부 자체가 간명하다. 그는 끊임없이 사욕을 제거하고 양지를 밝히라고 말한다. 욕심을 제거하면 된다니 얼마나 간단한가. 내 마음을 따르라니 얼마나 단순한가. 그런데 내 마음이라는 이 양지란 무엇이란 말인가?  

양지는 다만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이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은 다만 (옳음을) 좋아하고 (그름을) 싫어하는 것이다. 단지 (옳음은) 좋아하고 (그름을) 싫어하기만 한다면 곧 옳고 그름의 분별을 다하게 된다. 단지 옳고 그름을 분별하기만 한다면 곧 온갖 일의 모든 변화를 다하게 된다. 또 말씀하셨다. 시비 두 글자가 하나의 커다란 표준이다. 그것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달려 있다.
-왕양명 지음, 『전습록2』 황성증의 기록 288조목, 766쪽, 정인재·한정길 역주, 청계, 

  양지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앎으로 마음의 본체이다. 이것은 옳고 그름을 알고 더 나아가 옳음을 좋아하고 그름을 싫어하는 마음이다. 누구에게나 배우지 않고도 사려하지 않고도 이미 갖추고 있는 마음이다. 사욕을 제거하기만 하면 이 양지가 밝아져 외부의 어떤 기준이 없어도 내가 옳은 것을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이 옮음이란 참 추상적이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일이나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해주는 것은 너무나 옳고 그름이 분명하지만 우리의 일상사가 어찌 그런 일들로 구성되어 있겠는가? 아픈 와중에도 글을 완성해야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이를 키우면서 어떤 집에 살고 어떤 일을 하고 돈을 얼마나 벌며 살아갈 것인가 결정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러한 고민과 결정 속에서 옳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나에게는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었다. 

한 학생이 눈병이 났는데 심하게 근심을 하였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눈은 귀하게 여기면서 마음은 천하게 여기는 구나.
-『전습록1』, 설간의 기록 123조목, 332쪽

  이 짧은 두 줄의 글귀가 나에게 팍 꽂혔다. ‘아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마음을 괴롭게 하지 않는 것이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양지의 옮음이구나!’ 하구. 그렇게 생각하니 참 편해졌다. 주역을 다 외우지 못해도, 글쓰기를 잘하지 못해도 내 마음만 편하게 먹으면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냥 편해질 수는 없다. 그러려면 최소한 내가 납득이 되어야만 했다. 내가 납득하기 위해서 나는 공부를 해야 하는데 나를 방해하는 만화나 드라마 짜투리 영상, 조국 사태의 뉴스 같은 딴짓을 하는 사욕들과 매일 싸워나가야 했다. 나에게 사욕은 그런 것들이었고 나는 그것들을 이겨 나갔다. 물론 그것들도 쉬운 일은 아니었고 그만큼 내가 떳떳해지고 생생해졌지만 딱 그만큼 뿐이었다. 내 마음이 편안할 수 있게 물리적인 시간을 잘 사용했을 뿐이다. 
  그렇게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으면 됐다. 잘하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세요’가 아니라 아예 잘하려고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잘하려고 하면 내 마음이 불편해지니까. 아내가 내 글에 대해서 걱정할 때면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되지 뭐”라며 대충 넘어갔고 그렇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을 한계지어 놓았다. 편안함에 안주하려니 진짜 중요한 문제들은 문제화시키지 않고 넘겨 버렸고 나의 질문들은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편안함이라는 사사로움

제자 육징 : 지금 저는 편안함과 고요함을 구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편안하고 고요하지 못하며,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할수록 생각이 더욱 일어납니다.

스승 양명 : 편안함과 고요함을 구하고자 하거나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자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스스로 사사롭고 이기적이며, 보내고 맞이하며, 의도하고 기필하는 병이다. 그래서 생각이 더욱 일어나게 되고, 더욱 편안하고 고요하지 못하게 된다. ... 양지의 본체는 본래 편안하고 고요한데도 지금 도리어 또 하나의 편안함과 고요함을 구하려는 것을 덧보태고, 본래 저절로 낳고 낳는데도 지금 도리어 또 어떤 생각도 일으키지 않으려는 것을 덧보태니, 비단 성인 문하의 양지를 실현하는 공부가 그와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교의 학문일지라도 역시 그처럼 보내고 맞이하여, 의도하고 기필하지 않는다. 오직 일념의 양지가 철두철미하여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면 앞 생각이 없어지지 않고 뒷 생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전습록1』, 육원정에게 답하는 글 162조목, 487쪽

  나와 같이 편안함과 고요함을 추구하는 제자 육징에게 스승 양명은 그런 것을 구하고자 하는 자체가 사욕이기에 더욱 불편해질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양지란 본랜 편안한 것이어서 양지를 밝히면 그것을 얻게 되지만 편안해지는 것이 양지를 밝히는 일은 아니다. 내 마음이 평화로워지려 하면 나의 안위만을 생각하게 되고, 그것은 사욕이 되기에 양지는 밝아질 수가 없다. 결국 내가 생각했던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것이 옳음이란 것은 잘못되어졌다. 옳은 일을 하기에 편안해지는 것일 뿐 편안한 게 옳은 것은 아니다. 
  내 한몸을 위하는 사욕은 양지를 더욱더 가리기에 스스로를 편안하게 할 수 없다. 편안해지는 것은 사욕을 없애고 양지를 밝혀서 얻어지는 효과일 뿐이지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참 어렵다. 편안해지긴 하는데 편안해지려고 하면 안 된다니... 어쩌란 말인가. 결국 다시 돌아가서 내 한 몸을 위한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왜 사욕을 없애야만 양지가 밝아지는 것일까. 그리고 밝아진다는 이 양지는, 옳고 그름을 안다는 양지는 정말 뭐란 말인가? 왜 그렇게 사사로움을 없애야 한단 말인가? 

사심은 어떻게 양지를 가리나

  양지의 개념을 처음 말한 맹자는 모든 사람들이 맛을 느끼고, 소리를 듣고, 사물을 보고 공유할 수 있는 것처럼 마음의 느낌과 인식, 판단도 당연히 공유될 수 있다고 한다. 내가 저 멀리 있는 새를 볼 수 있는 것처럼 남들도 그 새를 볼 수 있고, 내가 초콜릿이 달다고 느끼는 것처럼 사람들도 달다는 것을 느낀다. 이처럼 우리가 여러 감각을 공유할 수 있는 공통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마음도 마찬가지다. 남이 내 물건을 훔쳐 가면 내 기분이 안 좋은 것처럼, 내가 남의 물건을 훔치면 그 사람의 기분이 안 좋을 것이란 걸 알 수 있고, 내가 도움을 받았을 때 고마움을 느끼고 기분이 좋은 것처럼 타인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마음의 작용이 사람마다 다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배우지 않고도 생각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옳은 행위와 그른 행위를 분간 할 수 있다. 
  또한 양지는 그 상황에 적합한 판단을 하는 힘이기도 하다. 아무리 많은 정보와 지식이 있어도 모든 상황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바른 판단은 우리의 마음이 내릴 수밖에 없다. 그 상황을 보고 인식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게 하는 바로 마음이기 때문이다. 양명은 이러한 마음을 거울에 비유한다. 
  마음의 거울은 자기 앞에 다가오는 사물을 비추어 낸다. 하지만 그 거울에 때가 묻어 있으면 어떻게 될까? 거울은 형상을 왜곡한다. 양명은 그 거울의 때를 사심이라고 하고 때가 묻어 있지 않은 맑은 거울의 상태를 마음의 본체라 말한다. 거울이 맑아서 제대로 비추기만 하면 우리는 바르게 보고 느끼고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고 적합한 행위를 할 수 있다. 문제는 거울의 때인 사심이다.  
  사심은 나에게 따로 있는 마음이다. 양명은 이것을 ‘내가 있음’과 ‘물욕’으로 구분한다.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있는 공통된 마음이 아니라 내 마음이라는 것이 따로 있어서 전체와 구분되어 내가 분리돼 있고, 내 것이 따로 있다는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은 집착을 만들어 낸다. 내가 따로 있으므로 나를 지키기 위한 마음, 내 것을 지키기 위한 마음은 외부를 적으로 설정하고 공격성을 만든다. 또한 무언가를 가지려고 안달복달하면 가지지 못할까 봐 불안하고, 가졌을 때는 잃을까 봐 불안하다. 그러한 공격성과 불안은 우리 신체의 교감 신경을 활성화 시킨다. 
  우리 신체에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인 교감신경과 부교감 신경이 있다. 교감신경은 우리가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신속하게 반응 할 수 있게 하는 장치이고 부교감 신경은 우리가 안정적인 일상에서 편안함을 느끼게 하고 소화를 시켜 에너지를 생성하는 생명활동이다. 이 두 장치는 서로 협력하고 제어하며 균형을 통해서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게 한다. 하지만 사심이 발동하면 실제로 위급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 신체는 사이렌을 울린다. 공격성과 불안이라는 집착이 사이렌을 울린 범인이다. 공격성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불안은 그 두려운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서다. 그러면 그때부터 신체는 전투태세를 취하고 일상에 필요한 에너지들을 공격과 방어에 쓰게 한다. 심장을 빨리 뛰게 하며 소화를 억제하고 맹렬히 머리를 굴리게 만든다. 실체가 없는 공격과 불안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해결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야생에서 곰을 만나면 우리의 신체는 교감신경이 활발해져서 우리가 곰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힘을 준다. 하지만 실체가 없으면 거기에서 도망칠 수가 없다. 나를 지키기 위한 가상의 시뮬레이션이 커지면서 점점 더 공격성과 불안을 키워나간다. 
  사심은 교감신경을 오버하게 만들고, 우리의 거울과 같은 마음을 왜곡시켜서 현실을 그대로 보고 인식하고 느끼지 못하게 만들며 불편한 긴장 상태를 유지하여 몸이 편안할 수 없게 만든다. 이것이 사심을 일으키고 행동했을 때 우리를 찝찝하게 만드는 이유다. 또 뇌에 가야 할 혈액들이 긴장 상태를 유지하느라 다른 근육들과 장기에 가 있어서 뇌가 제대로 힘을 쓰지도 못하고 가짜 정보들을 처리하느라 제대로 된 판단을 할 능력까지 잃는다. 그러니 절대 그 상황에 맞는 적합한 판단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사심이 작동하면 공통감각을 통한 옳고 그름도, 상황에 적합한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잃게 하며 우리의 양지를 가려 버린다.

천지만물을 한몸으로 여기는 대인의 마음

  사심을 제거하고 양지를 밝히면 상황에 따른 올바르고 적합한 판단을 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만 한다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 우리 마음은 이미 알고 있다. 이치는 외부에 있지 않고 내 마음 자체가 이치다.
  양명은 뱀과 독충, 풍토병과 자객이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용장의 유배생활에서 그것을 깨닫는다. 끊임없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그것과 대면하며 성인의 길을 끊임없이 묻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내 마음이 곧 이치’임을 깨달은 후 정신과 육체에 생기가 가득 차서 고통스럽고 힘든 유배 생활을 즐겁게 생활해 나간다. 말이 통하지도 않고, 학문에 무지한 원주민들과도 교감을 나누고 학문을 가르치며 그들과 함께 살아간다. 단지 ‘마음이 이치’임을 깨달았을 뿐인데, 무엇이 그를 그렇게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고, 생기 있고 그 누구와도 교감을 나눌 수 있게 한 것일까?
  스스로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자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기에 거기에는 갈팡질팡하는 두 마음이 없이 온 마음을 다해 행동하게 된다. 거기서는 자기에 대한 소외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믿고 긍정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스스로를 믿으니 생기가 생길 수 있고, 어떤 상황에 놓여도 누구를 만나도 떳떳하기에 두려울 것이 없다. 내가 매 순간 내 마음을 다해서 살기에 과거를 후회할 일도 미래를 불안해할 일도 없으며, 죽음조차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한 마음은 나에게 사로잡혀 있지 않기에 누구와도 교감을 나눌 수가 있다. 
  양명은 말한다. 이것이 특별한 게 아니라 원래 우리의 마음은 이런 것이라고. 본래 우리의 마음은 대인과 같아 천지만물을 한몸으로 여기지만 다만 스스로 작게 만들기 때문에 나와 네가 따로 생겨 다투고 싸우는 소인의 마음이 되어버렸다고. 하늘과 땅을, 세상의 모든 존재를 내 한몸처럼 여겨 연결된 마음은 얼마나 크고 무한한가. 그것이 내 마음이라면 그런 존재를 어찌 긍정하지 않을 수 있고, 무엇을 두려워하며, 누구와 교감을 나누지 못하겠는가?
  다만 문제는 내 마음이 정말 대인의 마음인가 하는 것이고, 소인의 마음을 벗어나 대인의 마음이 될 수 있는가 이다. 나도 타인을 내 한 몸처럼 여기긴 한다. 하지만 그것은 겨우 내 가족 정도다. 내 아이가 아프면 그것은 정말 한 몸인 것처럼 내가 아프고, 내 아내가 힘들면 내가 힘든 것 같지 가족을 벗어난 누군가를 보고 내가 아프고 힘든 것처럼 절실하게 느끼지는 못한다. 하지만 여기서 그 큰마음일 수 있는 단서를 볼 수 있다. 아니 정확히는 양명이 말한 작아지는 마음이다. 그렇게 내 한 몸 같던 내 아내도 조금만 사이가 틀어져서 내가 나를 고집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힘들건 말건 내가 힘든 것밖에 보이지 않기 시작하며 내 마음은 작아진다. 그렇게 양명의 말처럼 커졌다 작아지는 나의 마음을 보면 스스로 작게 만드는 그 마음만 없앤다면 내 마음도 나와 가족이라는 틀을 벗어나 얼마든지 커질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제 남은 마지막 문제는 과연 내가 정말 나의 사사로움에서 벗어나 그렇게 큰마음이 되고 싶은가 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사심에서 양지로

  4학기 마지막에 이 글을 쓰기 전까지 나에게 사심이란 단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었고 양지는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었다. 양명은 단 한 번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건만 『전습록』을 나 혼자 완전히 오독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된 걸까? 그것은 나에게 공부란 ‘나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내게 물어야 할 것이다. 지금 내게 사심을 제거하고 양지를 밝힌다는 것이 무엇인지, 나에게 공부란 무엇인지. 
  이제 내가 이겨내야 할 사심은 ‘편안하고자 하는 마음’이며 이 정도면 됐어 하는 ‘한계 짓는 마음’이다. 그러면 양지를 밝히는 일은 자연스럽게 ‘나를 넘어서는 더 큰 마음’이 되는 것이고 ‘내 마음을 다하는’ 일이 된다. 공부는 더이상 나를 편하게 하는 것일 수 없다. 매 순간 나를 넘어서서 두려움을 벗어나 생생해지고 누구와도 교감을 할 수 있는 대인의 마음이 되어가는 과정이 나의 공부가 될 것이다. 통쾌한 삶을 향한 발걸음은 이제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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