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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장자스쿨] 자립을 넘어 자기 삶을 사는 철학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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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세경 작성일20-01-24 21:49 조회1,9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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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립을 넘어 자기 삶을 사는 철학하기



 1. 각자의 목소리로 노래 부르듯 철학하기 

 2. 욕망 기계들이여, 새로운 삶을 부팅하라

   1) 욕망의 재발견, 세상을 뒤흔든 목소리들
   2) 욕망 기계의 탄생, 두 괴짜의 횡단 실험
   3)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너 자신에게!

 3. 학생에서 철학 기계로

   1) 우리가 짊어져온 욕망의 오류들
   2) 욕망은 하나의 길을 가지 않는다
   3) 길은 계속 만들어져야 한다
   4) 감정은 무엇도 의미하지 않는다

 4. 자기 삶에 이르는 철학의 여행, 글쓰기



1. 각자의 목소리로 노래 부르듯 철학하기 


  읽을 수 없던 책, 『안티 오이디푸스』가 돌아왔다. 내게는 꽤 심란한 복귀였다. 3년 전에도 기회가 있었지만 이해하지 못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욕망 기계니 기관 없는 신체니 하는 개념들과 설명 없이 서술되는 방식이 너무 낯설었다. 그러나 익숙함 보다 도전이 되고 나만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책을 공부하라는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이 책을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책은 그때처럼 어려웠지만 그렇게 당혹스럽지는 않았다. 정작 문제는 이 책으로 무슨 이야기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건 글쓰기 공부 이후 계속된 고질병이다. 나는 친구들처럼 나만의 문제의식을 말하지 못했다. 예정된 합평시간까지 이런 상태였고 답답했다. 하지만 그때 친구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뭔가가 느껴졌다. 
  나는 문제의식이 없는 게 아니라 불편한 문제나 질문에도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며칠이 지나 10살 무렵의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는 정직한 성품에 마음이 고운 분이다. 그런 엄마가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아버지의 고향으로 내려와 철없는 아버지 때문에 고생하시는 것이 안쓰러웠다. 엄마가 외로워 보일 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걱정됐다. 나라도 엄마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 그 무렵부터 나는 뭔가를 요구하지도, 엄마가 걱정하실 만한 일도 말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엄마 마음의 무게를 더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3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어린 시절처럼 살고 있었다. 더 이상 아이도 아니고 누가 강요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때처럼 늘 별일 없다고 말하면서 내가 원하는 것보다 ‘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어떤 사건이 와도 나만 겪는 일이 아니라며 지나치고 내 의견을 말해야 할 때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주저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내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잊고 살았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모든 존재를 욕망 기계들의 복합체로 이해한다. 몸과 마음 할 것 없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모든 것이 욕망 기계다. 이들은 몸 안의 무수한 세포와 조직이 그러하듯 다른 기계와의 연결을 통해 무언가를 주고받으며 자기 식의 운동을 한다. 욕망 기계들은 의미가 아니라 오직 활동을 통해 살아왔다. 그러나 우리에겐 늘 의미가 중요하다. 무언가에 가치를 두게 되는 순간 “이래야 해!”를 믿고 받들며 그것을 위해 본래의 자신을 포기하기도 한다. 기꺼이 각자의 욕망 기계들을 억압하면서. 의미를 위해 사는 서글픈 인간이 된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정신분석은 삶의 노래여야 하리라. 그렇지 않다면 아무 가치도 없다. 실천적으로, 정신분석은 우리에게 삶을 노래하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하리라.”고 말한다. 삶을 노래한다는 게 뭘까? 언제가 빛날 내일 대신 특별하지 않은 오늘이 노래가 될 수 있다면. 남의 말을 되풀이하는 대신 자기 목소리로 우리와 세상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자기만의 음색과 멜로디로 부르는 노래가 다른 이들의 마음에 가닿고 다시 그들을 노래하게 하듯 진실한 노래는 나와 사람들을 연결시키고 깨운다. 의미에 짓눌려 사는 인간에게 삶을 노래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 그건 바로 철학이기도 하다.
  목소리도 없이 살던 내게 노래하는 법을 배우라 말하는 듯했다. 그렇다. 내 목소리를 찾아야 하는 이유는 나를 묶고 있는 의미들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이며,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해서이다. 또 노래가 사람들을 이어주듯 스승과 친구들을 찾아 노래를 배우고 함께 부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 책을 기쁨으로 썼다고 했다. 나 역시 이들의 책을 통해 마음속 무거운 지층들을 털어내며 기쁨으로 읽고 있다. 나의 욕망 기계들이 노래를 부르듯 도처에서 작동할 때까지 철학하기를 멈추지 않겠다. 포기하지 않는다. 욕망 기계들처럼.


2. 욕망 기계들이여, 새로운 삶을 부팅하라


  “모든 것은 욕망 기계들이다.” 정신분석학과 자본주의와 정면 대결하는 『안티 오이디푸스』는 ‘욕망 기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것도 윙윙 소음을 내고 서로가 서로에 연결되어 끊임없이 가동 중인 기계들. 세상의 모든 존재는 각자의 방식대로 움직이는 욕망 기계들이다. 수많은 분자들이 진동하고 있는 공기, 땅속에서 물을 길어 올리고 잎으로 광합성 중인 나무, 내부에서 핵융합을 하며 빛을 발하는 별들도.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인간 역시 셀 수 없이 많은 기계들로 이루어진 복합체이다. 따라서 중요한 건 겉모습에 불과한 인간이 아닌 이들 기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렇게 인간에게서 기계로 우리의 관점을 이동시킨다.
  여기에 정신분석학과 우리 시대, 즉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이 더해진다. 당시 정신분석학은 대중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가장 혁신적인 학문이었고, 전후 프랑스를 놀라운 경제 성장과 풍요로 이끈 자본주의는 이미 절대적인 시스템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두 사람은  현대인의 삶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정신분석학과 자본주의의 그림자를 감지하고 있었고, 이를  뒤집어버릴 기획에 착수한다. 이 기획의 핵심 또한 욕망 기계였다. 책은 대성공이었다. “욕망은 기계다”라는 선언은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욕망 기계가 세상에 왔던 이야기를 따라 이들의 모험을 다시 시작해 보자.


 1) 욕망의 재발견, 세상을 뒤흔든 목소리들


  “이 책은 그 5월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과타리의 말대로 『안티 오이디푸스』는 68혁명에서 시작되었다. 1968년 5월 프랑스는 권위적이고 위선적인 사회를 비판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로 들끓고 있었다. 학생들은 권위적인 대학과 열악한 교육 환경을, 노동자들은 노동자를 공장의 부속품으로 여기는 노동 환경을, 여성들은 가부장적인 가정과 사회 차별을 비판했다. 예술가와 동성애자, 이민자들도 제각각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처럼 68의 주인공은 혁명 조직이 아니라 하나로 수렴될 수 없는 거리의 목소리들이었다. 그곳에는 권력 투쟁도 이념 전쟁도 없었다. 대신 사람들은 학교와 극장, 거리에 모여 제각각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에 대해 토론하고 요구하며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고 있었다.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68은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혁명이었다.
  이제 혁명은 권력이나 이념 투쟁 대신 매일의 일상을 파고들었다. 큰 배움터인 대학은 왜 교수들의 권위주의에 절여 있는지, 노동의 주체인 노동자들은 왜 일터에서 소외되어야 하는지, 여성들은 언제까지 남성들의 지배 속에 머물려야 하는지. 이제 혁명의 대상은 정확하게 겨냥할 수 있는 악이 아니라 어디에나 있으며 일상 속에 스며든 모순과 불합리였다.  
  그러나 68의 뜨거운 목소리는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다. “5월의 사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드골 대통령의 말처럼 당시 정치권은 좌파와 우파를 가리지 않고 68을 이해하지 못했다.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고 전에 없던 풍요를 누리는 시대를 만들었더니 겨우 대학과 공장, 가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니. 정치권은 당혹스러웠다. 무엇보다 이런 소소한 문제는 그들 즉 정치의 주제가 아니었다.
  혁명은 길지 않았다. 두 달도 안 돼 사람들은 혁명 이전의 자리로 돌아간다. 위태롭던 드골 정권도 다시 자리를 잡는다. 성과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68이 제기한 문제들은 그대로였고 누구도 답하지 못했다. 사회 곳곳에 우글거리는 목소리가 잠재되어 있음과 혁명은 일상이 바뀌는 것이어야 한다는 깨달음이 유산이라면 유산이었다. 그리고 68을 온몸으로 겪은 들뢰즈와 과타리가 있었다. 두 사람은 68의 현장, 그 들끓는 사람들의 목소리 속에서 새로운 발견을 한다. 그것은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욕망의 진짜 얼굴이었다.


 2) 욕망 기계의 탄생, 두 괴짜의 횡단 실험


  68 당시 들뢰즈(43세)는 가르치던 학생들과 함께 시위 현장에 있었다. 리옹대학의 철학 강사였던 그는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던 참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철학을 공부했던 그는 학술적인 성과나 명성보다 ‘일상에서 철학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할까’를 고민하는 철학자였다. 그런 그에게 68에서 목격한 사람들의 뜨거운 열망과 빠르게 식어버린 마음은 너무나 흥미로운 주제였다. 이듬해 박사 논문이 통과되고 파리 8대학의 교수가 된 들뢰즈는 정신분석학 중심으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해보고 싶었다.
  여기에 딱 맞을 정신분석학자가 있었다. 펠릭스 과타리(38세). 그는 68의 도화선이 된 3월22일 반권위·반정부 운동의 주요 가담자였고, 15살부터 사회운동과 정신분석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활동가였다. 그 무렵 과타리는 마음이 복잡했다. 라캉의 제자였지만 학계의 명성만큼 권력화 되어 가는 인간 라캉과 욕망을 지나치게 의미화하고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위계화하는 그의 이론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욕망 기계’라는 새로운 개념을 구상 중이었지만 이론적인 체계를 갖추지도 68의 문제의식과도 연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68 이후 각자 문제의식을 품고 있던 두 사람은 1969년 6월 운명처럼 마주한다. 들뢰즈의 친구이자 과타리의 동료였던 정신과의사의 소개 덕분이었다. 철학자와 정신분석학자로서 전혀 다른 궤적을 살아온 두 사람은 68이라는 공통분모 속에서 서로가 품고 있던 문제의식을 읽어냈고 혼자라면 이르지 못할 수도 있지만 함께라면 가능할 길을 열었고 이후 둘은 평생의 동료가 된다.
  들뢰즈와 과타리의 만남은 철학과 정신분석학, 이론가와 활동가의 만남이기도 했다. 이렇게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68과 68이 남긴 “일상에서의 혁명은 어떻게 가능할까?”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다. 이는 “왜 인간들은 마치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싸우기라도 하는 양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울까?”에 대한 질문이기도 했는데, 결국은 현대인의 억압과 예속, 해방에 대한 탐구였다. 이 문제의 바탕에는 정신분석학의 오이디푸스와 이것을 “너무나 잘 용인하고 있는 우리 자본주의 사회”가 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두 사람은 욕망 기계를 제시한다. 욕망 기계가 겨냥하는 것은 두 가지 믿음이다. 첫 번째 적은 라캉의 구조주의 정신분석학이다. 당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주체론의 한계를 대신하여 사회란 언어처럼 내재된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인간 역시 이 구조의 산물이라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가 각광을 받고 있었다. 라캉은 이러한 대세적인 흐름을 정신분석학에 접목하여 성 본능 중심의 프로이트의 이론의 약점을 기표와 상징계 같은 복잡한 의미화와 구조로 보강했다. 이렇게 현대인은 프로이트-라캉이라는 이중 그물에 갇히게 되었다.
  두 번째 적은 모든 욕망을 가족 안으로 회귀시키는 오이디푸스와 영원히 부르주아를 꿈꾸는 노동/소비부품으로서의 현대인의 삶이었다. 오이디푸스와 자본주의는 엄마, 아빠, 아이 혹은 현대인이라는 이름을 붙여 규정될 수 없는 욕망을 가족과 돈으로 묶어 가족 기계, 돈 기계로만 작동하도록 한다. 욕망은 억압되고 일생동안 경험하는 수많은 관계도 모두 지워버린다. 또한 욕망은 결핍을 모르고 타자와 연결되고자 하는 힘이었지만 이를 결핍으로 규정함으로써 사람들은 결핍으로 인한 불안감과 동시에 이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강박을 내면화하게 되었다.


 3)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너 자신에게! 


구조주의와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에 꽁꽁 매인 현대인에게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욕망 기계이다. 모든 존재는 욕망 기계들의 복합체이다. 인간도 사회도 국가도 이념도. 무엇도 세팅된 채 태어나지 않았고 부분 기계들이 연결되고 작동함으로써 비로소 그 형상이 드러난다. 그러나 프로이트, 라캉, 맑스는 부분 기계들이 아닌 오이디푸스, 의미화된 구조, 계층 투쟁과 체제 개혁을 바라봤기 때문에 욕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당면한 문제들도 풀지 못했다.
  모든 것이 기계들이므로 기계 분석이 없는 구조나 사회 개혁은 무의미하다. 결국 혁명은 지금 내 기계들을 세팅된 대로가 아니라 다른 접속을 통해 새로운 작동을 시작할 때 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68은 더 이상 가족 기계, 돈 기계, 의미 기계가 되기를 거부했던 사람들의 외침이었다. 바로 이것이 들뢰즈와 과타리가 ‘욕망 기계들’에서 발견한 새로운 가능성이다. 동시에 이것은 욕망 본연의 모습에 대한 발견이기도 했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자신이 기계들인지 몰랐을 뿐 늘 같은 일을 하는 고정관념 속 기계보다 더 기계답게 살아왔다.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져 있던 의미와 사회가 기대하는 모습에 맞춰 살고자 기꺼이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스스로의 욕망 기계들을 억압하고 인생의 의미도 쇼핑하듯 이렇게 저렇게 소비했을 뿐이다. 결국 억압과 예속, 소외는 우리 자신이 기꺼이 이것을 받아들이고 이것들이 주는 안정감과 소비, 안락함을 즐긴 결과이다. 따라서 혁명은 어떤 좋은 제도나 장치로 가능하지 않다. 내 안의 기계들에 에너지만을 공급한 채 세팅된 프로그램대로 산다면 혁명은 영원이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혁명은 어떻게 가능할까? 들뢰즈는 우리가 하나의 인물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과 역사를 통과해 온 존재라고 말한다. 욕망 기계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다른 기계들과 끊임없이 만나고 연결된다는 것이다. 들뢰즈와 과타리라는 두 명의 만남은 우리의 사유과 행동을 새롭게 작동시키려는 제3의 철학기계로서 『안티 오이디푸스』를 만들어 냈다. 이 책은 익숙한 방식으로 욕망 기계를, 혁명을 설명해주지 않는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 책이 기존의 지식에 더해지는 또 하나의 정보가 되길 바라지 않았다. “그것은 도처에서 기능한다”처럼 명백한 주어도 설명도 없이 책이 시작되고, 수많은 철학자, 소설가, 예술가와 프루스트, 헨리 밀러 소설의 일부분이 본문 여기저기에 출현한다. 이들은 욕망 기계가 그러하듯 이런 접속들을 따라 우리도 자기의 기계들을 낯선 기계들에 연결시켜 보기를 바란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혁명가 커티스는 꼬리칸에서 머리칸으로 질주하는 계급혁명 끝에 머리칸에 다다르지만 동시에 그 순간 혁명의 길도 방향도 잃어버린다. 반면 삐딱하게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송강호는 하도 오래 닫혀있어서 문인지도 잊고 있던 옆문을 연다. 그 문을 열고 살아남은 두 아이가 17년 동안 금지되었던 대지를 걷는다. 두 아이는 이제 비참한 설국열차의 계급사회가 아니라 막막하지만 자유로운 눈의 대륙에서 곰처럼 새 길을 갈 것이다. 들뢰즈와 과타리가 꿈꾸던 혁명이 이런 것 아닐까. 자신의 작은 욕망 기계들을 자본주의 사회에 붙여서 질주하는 대신 지성이라는 전원을 켜고 본연의 내 기계들을 작동시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혁명이자 새로운 삶, 자기 해방이다. 이제 우리가 『안티 오이디푸스』라는 이 철학기계에 접속해 새로운 삶을 부팅할 차례다.


3. 학생에서 철학 기계로     
            
  “원하는 대로 살고 싶어!” “아니야, 욕망대로 사는 건 위험해. 지금의 안정마저 잃게 될 거야” 우리는 두 마음을 얼마나 오고 갈까? 68혁명 그 이후를 구상하기 위한 『안티 오이디푸스』는 수없이 되풀이되고 있는 이 마음들에 대한 분석이기도 하다. 68혁명을 겪으며 들뢰즈와 과타리가 주목하게 된 것은 혁명을 바라면서도 결국 같은 자리로 돌아가고 마는 사람들의 마음, 그 양면성이었다.
  일상의 권위주의, 열악한 노동환경, 소수자 차별과 같은 모순과 불합리를 타파하기 위해 거세게 일어났던 저항 운동은 두 달을 채우지 못한다. 새로운 삶을 외쳤던 사람들이 금세 일상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혁명의 실패를 분석하기 위해 파고들었고 거기서 욕망과 억압의 문제를 포착한다. 원하는 대로 살고 싶은 욕망과 사회적인 예속을 기꺼이 수용하는 더 강력한 억압.
  따라서 68혁명이 남긴 과제인 “새로운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는 적폐에 얼마나 격렬하게 저항하는가 혹은 이것과 저것 중 어떤 삶을 선택할까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욕망과 억압을 이해하고 그 역학 관계 안에서 어떻게 내 힘을 사용하느냐의 문제였다. 68혁명의 구호는 다시 읽혀져야 한다.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너 자신에게!’ 이렇게 『안티 오이디푸스』는 욕망과 억압의 관점에서 현대인의 예속과 해방을 이야기한다.
  대학 졸업 무렵 자립에 대한 열망이 컸던 나는 안정된 직장을 얻기만 하면 인생의 숙제도 끝날지 알았다. 그렇게 직장인이 되고 경제적으로도 자립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원하는 삶이 이런 것이었나? 이렇게 살다가 후회하지 않을까?’ 묻고 있었다. 일하며 얻는 보람과 즐거움도 적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일에 쏟으면서 매일을 사무실 모니터 앞에서 지내고 사람들과 스스로에게 드는 질문, 궁금한 것들을 내 일이 아닌 양 묻어버리고 사는 것이 공허하고 부자연스러웠다.
  자립만 하면 내 인생을 살게 될지 알았는데 아니었다. 안정된 삶을 노후까지 연장하기 위해 학교 대신 일터에 매여 있을 뿐이었다. 친구나 동료들은 “다들 그렇게 살잖아”, “더 나은 대안도 없어”라며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거나 더 가열차게 일했다. 나도 당장 뭘 해야 할지 몰랐지만 평소 별 관심 없던 인문학 책을 읽고 강의를 들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그때 나는 예속된 삶 너머 자기 해방을 원하고 있었다. 그렇게 감이당을 알게 되었고, 이곳에서 고전과 글쓰기를 배우면서 뭉쳐있던 질문들이 조금씩 풀리기도 하고 공부가 재미있었다. 내가 원하던 삶이 이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나도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서 ‘이 공부만 하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바람도 생겨났다.
  그러나 『안티 오이디푸스』는 “분열증의 과정은 창조하는 일을 할 수 있는 한에서만 자기를 해방하고, 자기 자신을 추구할 수 있고, 자기를 성취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내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인간은 자립을 원하고 그건 결국 자기 해방이어야 한다. 나는 자기 해방이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감이당 공부를 하고 있는 것만으로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창조할 수 없다면 자기 해방이 아니라고 한다. 자기 해방은 왜 ‘창조’여야 할까?


 1) 우리가 짊어졌던 욕망의 오류들 


  들뢰즈, 과타리가 68혁명의 실패를 욕망에서 찾아낸 것은 매우 본질적인 접근이었다. 68혁명 이후 많은 연구와 책이 쏟아졌지만 실상을 꿰뚫어 본 건 두 사람이었다. 혁명을 시작하고 끝낸 건 사람들의 마음, 정확히는 욕망이었다. 욕망은 무엇인가? 충동, 결핍, 무의식 아래의 어두운 것, 정신분석학적 해석과 치료가 필요한 것. 이는 프로이트의 계승자이면서 구조주의를 도입해 욕망을 더욱 이론화한 라캉의 관점이자 대중화된 욕망의 이해이기도 하다.

  그는 자연을 자연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정으로 산다. 더 이상 인간도 자연도 없다. 오로지 하나 속에서 다른 하나를 생산하고 기계들을 짝짓는 과정만이 있다. 도처에 생산적 즉 욕망적 기계들, 분열증적 기계들, 유적 삶 전체로다. 자아와 비-자아, 외부와 내부의 구별은 이제 아무 의미가 없다. (질 들뢰즈·펠릭스 과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24쪽)

  들뢰즈, 과타리는 욕망 기계들로써 기존의 인식을 뒤집는다. 이제 인간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세상 어디에나 있는 욕망 기계 덩어리이다. 욕망 기계는 욕망이 ‘기계’라는 뜻이다. 이는 라캉의 개념과 대비해 보면 이해가 쉽다. 라캉은 욕망을 구조로 이해한다. 다른 언어를 배울 때 문법을 알아야 해석이 가능하듯 문법처럼 어떤 것의 본질을 규정하는 원리가 구조다. 따라서 라캉의 욕망은 그 이면의 구조에 따라 ‘언제나 같은 패턴으로 해석되는 의미들’이었다.
  이론과 의미화로 무장한 구조에 대안적으로 제시된 것이 기계이다. 기계는 항상 작동 중인 것으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기계는 약학을 전공하기도 했던 과타리가 분자학과 진화생물학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개념이었다. 분자학 관점에서 인간은 원소, 분자, 조직, 기관으로 이루어진 물질들의 복합체이고, 진화생물학 관점에서 “우리들 각자는 우리 자신의 것과는 별개인 극미동물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라캉의 구조주의 정신분석학이 사상적인 이론에 중점을 해석학이었다면 들뢰즈의 기계는 물질적인 실재와 생리적인 상호작용이 고스란히 담긴 살아있는 욕망 그 자체였다. 욕망이 기계로 새롭게 이해하게 되면서 프로이트-라캉의 정신분석이 덧씌운 오해와 오명을 걷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믿음과 달리 욕망은 의미와 의도로 움직이지 않으며, 결핍 때문에 충족을 위해 내달리는 충동도, 어머니를 탐하고 아버지를 두려워하며 영원히 가족 안에 갇혀 사는 어두운 그림자도 아니다.
  욕망 기계는 우리 몸의 세포들처럼 매순간 주변에 연결되어 무언가를 주고받고 그 연결에서 얻은 에너지로 살아간다. 그렇더라도 아무런 반감이나 저항 없이 우리가 욕망 기계들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지금 당장 배가 고프고, 승진이나 성공을 바라고, 안락한 집과 노후를 바라는 욕망은 있었어도 작은 욕망 기계들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귀에 들리지만 않을 뿐 우리의 욕망 기계들을 늘 그렇듯 자기 식의 작동을 하며 가동 중이었고, 그런 셀 수 없던 작동 끝에 ‘피곤하다 쉬어야겠다, 목이 마르다, 배가 고프다’와 같은 메시지들 매일 같이 전달 중이다.
  다만 ‘그것이 갖고 싶다, 무엇이 되고 싶다’에 마음을 쏟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이런 작은 메시지들에 둔감해졌을 뿐이다. 하지만 욕망 기계 입장에서 우리의 욕망들은 많이 이상하다. 우리 몸 안의 작은 기계들이 어떤 물건, 지위를 원하고 있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우리에게 이런 욕망을 원하게 만든 건 이들 기계가 아닌 나라는 ‘주체’였다. 나는 이런 사람이니까, 즉 아빠, 엄마, 학생, 직장인 등등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이름들 말이다.
  정신분석학은 현대인을 주체로 길러낸다. 우리는 누구나 아이의 이름으로 시작해 아버지, 어머니가 될 운명이고 자라면서 다시 이런 저런 이름들을 부여받는다. 주체는 이름임과 동시에 명령이기도 하다. 너는 아이 혹은 아버지, 어머니이니 마땅히 이러이러해야 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 욕망 기계들 대신 주체가 바라는 욕망에 익숙해졌고 그것을 위해 달려야 한다고 굳게 믿게 되었다. 나 역시 착한 아이에서 자립한 사회인이 되기 위해 의심 없이 살았지만 해결되지 않은 물음들과 미묘한 공허감은 엷어지지 않았다.


 2) 욕망은 하나의 길을 가지 않는다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으며 그런 나 자신이 조금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원하던 대로 자립한 사회인이 되었다고 해서 해피엔딩으로 모든 이야기가 끝나는 것도 아니었고 해결되지 않은 질문들이 계속 쌓이고 있었다. 사람들의 말대로 생활이 안정되고 별일 없이 지내면 만족스럽게 살지 알았지만 매일 회사에 매여 지내는 생활이 갑갑하게 느껴지고 활동할 수 있을 때까지 일만 하다 죽는다면 후회하지 않을까라는 불안하기도 했다. 한때는 열심히 일해서 좋은 결과가 있을 때 ‘몇몇의 사람들에게라도 좋은 일을 한 게 아닐까’ 의미를 부여해보기도 했지만 그건 꼭 내가 아니어도, 꼭 그 일이 아니어도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나와 사람들에 대해 궁금하고 알고 싶었지만 몇 권의 책을 읽는다고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욕망 기계들은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고, 아무것도 의미화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한다. 수많은 기계로 살아가는 존재인 인간은 특정한 어떤 것이 될 수 없고 하나로 의미화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의미, 하나의 목표, 하나의 의도를 갖는 것은 거짓이라 말한다. 나는 늘 바람직한 누군가가 되고 싶었고 스스로에게 좋은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의 목표, 의미를 추구하는 삶은 존재의 본질에 어긋나기 때문에 실현될 수도 없을뿐더러 필연적으로 소외감을 일으킨다.

  분열-분석의 임무란, 자아들과 그 전제들을 끈기 있게 해체하는 것, 자아들이 가두고 억압하는 전-인물적 독자성들을 해당하는 것, 자아들이 방출하고 수용하고 또는 차단할 수 있을 흐름들을 흐르게 하는 것, 동일성의 조건들에 미치지 못하는 분열들과 절단들을 언제나 더 멀리 더 섬세하게 확립하는 것, 각자를 다시 절단해서 타인들과 묶어 집단을 만드는 욕망 기계 들을 조립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각자는 하나의 소집단이요, 또 소집단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같은 책, 598쪽)

  욕망 기계로 대변되는 새로운 욕망론은 현대인이 겪고 있는 소외와 우울증에 대한 대안으로 분열-분석을 제시한다. 몸 안팎의 수많은 기계들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하나의 목표, 의미는 무의미하다. 따라서 자신의 이름,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이 그저 믿음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경험하고 기계들처럼 다양한 연결과 관계를 경험하는 분열적인 경험이 필요하다.
  내게는 그런 과정이 감이당에서의 시간이었다. 우연히 읽은 책에서 알게 된 감이당에서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나는 하나로 고정될 수 없고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이야기를 듣고 굉장한 해방감을 느꼈다. 늘 무엇이어야 하고 이런 일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살아온 내가 처음으로 가볍게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한 번도 하나의 이름이 아니었다. 딸이자 누나이고 친구이자 회사원이었음과 동시에 익숙한 곳이 편하면서도 멀리 가보고 싶고 연구자는 아니었지만 과학이 알고 싶고 사람들의 마음이 궁금했다. 살면서 많은 사람들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그것들이 내 안에서 섞이기도 하고 누구나 하나로 말해질 수 없는 성향들을 지니고 있다. 들뢰즈의 말대로 우리는 이미 여럿의 이름들, 복수로 존재해왔다.
  좀 더 미시적으로는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6조개의 세로들과 심장, 폐, 위, 간과 같은 기관들도 나름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소통하며 기능한다.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각 기계들의 관계와 소통이 중요하듯 우리 삶에서도 중요한 것은 하나의 이름과 목표가 아니라 소집단으로서 내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 것인가이다. 감이당 공부 이후 공허한 회사원 대신 학생으로 살고 싶던 내게 이것은 또 다른 깨달음이었다.
  학생이 되어 좋아하는 공부만 하면 즐겁게 살 것이라는 생각은 사실 회사원에서 학생으로 이름만 바꾼 것이었다. 여전히 주체 중심의 인식으로 바람대로 학생으로 산다 하더라고 회사원일 때 느꼈던 소외와 공허감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학생으로 살면 이렇지 알았는데 이래야 하는데’와 수많은 변수들이 언제나 격차를 벌일 테니. 학생이란 이름보다 내게 필요한 것은 소집단으로 사는 욕망 기계가 하나의 길을 가지 않듯 학생이란 이름에 연연하기보다 내 소집단들을 공부하는 관계 속에서 사용하고 어떤 새로운 관계 속에 들어가더라도 배우고 공부하는 관계를 만들어내는 힘이 있는가였다.


 3) 길은 계속 만들어져야 한다


  언젠가 회사를 그만두고 학생으로 살기로 결심했을 때 나는 내 인생의 답을 찾은 줄 알았다.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길이었지만 감이당의 선생님과 학생들을 보면서 이렇게 살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수많은 길 중 내게 맞는 길을 선택해서 살면 된다고 생각했고 지금껏 내가 본 가장 좋은 길이니 그대로 살면 되겠지 싶었다. 다만 거기에는 몇 가지 전제들이 필요했다. 지금처럼 선생님이 계셔야 하고 감이당이 서울에 있어야 하고 등등.

  욕망이 억압되는 까닭은, 아무리 작은 욕망일리자도 일단 욕망이 있게 되면 사회의 기성 질서가 의문시되기 때문이다. 욕망이 비-사회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반대다. 하지만 욕망은 뒤죽박죽이다. 욕망 기계가 있을 수 있게 되면 사회의 모든 부문은 온통 요동친다. (중략) 욕망이 그 사회를 본질적으로 위협한다. 따라서 욕망을 억압하고 나아가 탄압보다 더 나은 것을 찾아내어 탄압, 위계, 착취, 예속이 그 자체로 욕망되도록 하는 것이 사회로서는 사활이 걸린 중대한 일이다. (같은 책, 208쪽)

  욕망 기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용하기 위해서는 사회 분석이 필수적이다. 무수한 타자들과 연결되며 살아가는 욕망 기계는 존재 자체가 사회적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는 그대로 사회의 역사이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원시사회, 전제군주국가, 제국주의, 자본주의로 그것을 구분한다. 사회에는 각각 고유한 지배체계가 있다. 욕망 기계의 관점으로 말하면 이것들은 욕망 기계를 통제하는 사회의 장치이다. “욕망을 코드화하는 것ㅡ또 탈코드화된 흐름들에 공포와 불안을 코드화하는 것, 이것 바로 사회체의 일이다.” 왜 그럴까?
  욕망 기계에게는 정해진 길은 없다. 우발적인 접속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이런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어떤 결과에 이를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게다가 어떤 의도도 계획도 없이 일어나는 일들이기 때문에 사회는 이런 움직임들을 계획적으로 통제할 수 있어야 체재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초기에는 폭력과 추방으로 제어되지 않는 욕망들을 잠재우려 했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욕망을 더 효과적으로 억압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는데, 그것은 바로 구성원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을 위한 이론적 받침대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무의식을 성과 결부시켜 타부시하는 정신분석학이었고, 모두를 폐쇄적인 관계 안에 몰아넣고 아이, 아버지, 어머니란 이름으로 거기에 맞게 자신을 억압하게 만드는 가족이 있었다.
  이렇듯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산다고 할 때 거기에는 자신의 의지, 힘 뿐 아니라 사회 분석이 필연적이다. 사회는 욕망 기계들의 길을 정해두었고(코드화) 우리들을 어떤 인식의 기반 위에서 살도록 한다(영토화). 자기 욕망보다 안정된 삶을 위해서 달리는 현대인들의 삶이 그렇다. 따라서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사려는 자는 필연적으로 탈코드화와 탈영토화 과정을 겪게 된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이들을 재코드화, 재영토화하는데 가장 유능한 체제이다.
  스스로 필요한 것을 만들어 쓰며 소비사회에서 자립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케아라는 소비 공룡이 나타나 그런 흐름을 다시 독점하고, 욕망 기계가 다양한 접속을 하며 살아가듯 새로워지고 싶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에게 매년 변화하는 패션 트렌드는 최신 유행을 따라가기만 하면 그렇게 살고 있다는 착각과 만족을 준다(신영복, 『담론』 중). 이렇듯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인생의 행로와 인식을 돈과 가족, 안정된 삶이라는 가치들로 전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기 해방은 “미리 존재하는 약속된 땅이 아니라, 자신의 경향성, 자신의 박리, 자신의 탈영토화 자체를 따라 스스로 창조하는 대지”이어야 한다. 내가 어디로 탈코드화하고 탈영토화되든 자본주의는 끈질기게 따라와서 그러한 시도를 좌절시키고 자신을 포기하도록 설득할 것이다. 돈을 포기함으로써 얼마나 큰 결핍과 불안, 불행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런데 자기 해방의 길을 세상의 있는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른 사람이라면 탈코드화는커녕 탈영토화까지도 가보지 못했을 테니 자본주의의 추격이 시작되기도 전에 실패할까 두려워 불안감에 흔들릴 것이고 어느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누군가에 이미 만들어 놓은 길 위에서 그것을 활용할 수는 있겠지만 나의 경향과 탈영토화 과정을 따라 새롭게 관계를 만들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는 수많은 과정을 겪지 않는다면 언제든 과거로 회귀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해방은 단순히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을 넘어서서 자기가 만들어 내는 만큼 가능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 “창조하는 일을 할 수 있는 한에서만 자기를 해방하고, 자기 자신을 추구할 수 있고, 자기를 성취시킬 수 있다”는 의미가 바로 그것이었다. 또한 이것은 몇 번으로 끝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회는 평생 나의 욕망과 의식을 코드화, 영토화할 것이기에 이러한 시도는 계속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자기 해방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좋은 길을 찾느냐가 아니라 사회와 나의 이런 관계를 이해함으로써 스스로 활동을 만들어가고 실패하더라도 계속 시도할 수 있는 가벼움이었다.


 4) 감정은 무엇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감이당을 오게 되기까지, 학생으로 살기를 바라게 되기까지 돌아보면 거기에는 늘 감정이 있었다. 감이당에 오기 전에는 ‘이것이 아닌 것 같은데’ 하는 공허감이 있었고, 감이당 공부를 계속 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처음으로 느껴본 유쾌한 생동감이 있었다. 매일 같은 일상을 반복하다 감이당에 와서 한의학과 명리, 과학과 철학, 문학과 역사를 가리지 않고 공부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제한 없이 지성과 접속하고 소통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강의를 들을 때면 몸 안 어딘가의 세포들이 즐거운 듯 움직이는 느껴졌다. 그때는 몰랐지만 욕망 기계들처럼 자유롭게 연결되고 소통하는 공부가 즐거웠던 것이다.
  공허감과 생동감이란 감정은 나를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과거에도 그렇기는 했지만 이 경험 이후 나는 감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부정적인 감정이 들었던 것은 더 피하게 되었고 잘 살고 있다면 좋은 감정도 더 많이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한 후배가 떠올랐다. 20대 후반의 자신감 넘치던 후배는 대화 중 갑작스레 자신이 불행하다고 했다. 평소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행복하지 않으니 불행하다는 말이었다. 그때 나는 굉장히 놀랐다. 큰 사건이 없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에서 행복감 뿐 아니라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그 때문에 불행하다니. 반대로 20대 회사원이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면서 지속적으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까?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렇다면 매우 비정상적인 상황일 것이다. 그 후배를 떠올리며 나도 크게 다르지 않구나 싶었다.
   현대인은 감정을 매우 중요시한다. 이는 나라는 주체가 강할수록 더욱 그렇다. 소비를 부추기기 위해 나는 마땅히 만족감과 행복을 누려야 한다는 광고 속에 살면서 이런 믿음은 더 커진다. 욕망 기계가 현대 사회에서 느끼는 근원적인 소외감과 이런 잘못된 믿음 속에서 현대인은 스스로 불행하다고 믿는다. 여기에 정신분석이 마음을 위로하는 대안자로 나선다. 정신분석학에서는 누구나 어린 시절의 상처가 있으며 사랑받지 못한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들뢰즈와 과타리는 현대인이 겪는 이런 감정의 문제를 역전시킨다. 욕망 기계들에게 있어 감정은 어떤 연결과 흐름들 후에 생긴 우발적인 잉여물이다. 그렇기에 이것을 과거의 상처나 트라우마 혹은 행복이나 불행의 증거로 삼는 것은 굉장한 오류이이다. 오히려 감정에 대한 이런 부적절한 의미부여 때문에 현대인이 더 불행해지고 우울증 같은 정신병에 생긴다고 말한다. “욕망은 그 자체로는 사랑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사랑하는 힘, 즉 증여하고 생산하고 기계 작동하는 덕이다.” 사랑받지 못해서 사랑하지 못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랑하는 힘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다.

  이 욕망의 인간들은 차라투스트라와 같다. 분열자들은 엄청난 괴로움들, 현기증들, 병들을 알고 있다. 분열자들은 자신들의 유령들을 지니고 있다. 분열자들은 몸짓 하나하나를 새로 발명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런 인간은 자유롭고 책임이 없고 고독하고 기쁜 인간으로, 마침내 누구의 허락도 구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고유 명사로 단순한 어떤 것을 말하고 행할 수 있는 인간으로 생산된다. 즉 그는 아무것도 결핍하고 있지 않은 욕망, 장벽과 코드들을 뛰어넘는 흐름, 그 어떤 자아도 가리키지 않는 이름을 말하고 만들어 낼 수 있는 자이다. (같은 책, 233쪽)

  들뢰즈와 과타리는 자기 해방을 위해 분투 중인 분열자들은 ‘엄청난 괴로움들, 현기증들, 병들’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 말한다. 니체가 그랬고, 고흐도 그러했다. 아마 들뢰즈와 과타리도 그랬을 것이다. 그것들은 자신의 일생을 거쳐서 사회로부터 주입받은 그 많은 전제들을 조금씩 끊고 새로운 곳으로 향할 때 겪을 내외부의 저항과 갈등들이다. 나는 글을 쓸 때마다 느끼는 저항감과 불편함 때문에 글쓰기를 그만 둔 적이 많았다. 그러나 이번에 내가 배운 것은 앞으로도 공부나 내가 원하는 새로운 시도를 할 때 이런 저항감이 많을 것이고 그것은 전에 없던 곳으로 가보기 위해 건너야 하는 장벽과 코드들을 뛰어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아픔이 신체의 손상을 방지하기 위한 반응이듯 감정이 특정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감정 그 자체는 유의미한 메시지가 아니다. 내가 느꼈던 세포들의 생동감에서 공부에 대해 확신을 가졌던 것처럼 감정을 어떤 지표로 사용해볼 수는 있겠지만 감정에 매몰돼서 그 자체로 성공이나 실패로 여기고 그에 따라 흔들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고흐의 그림을  본 적이 있었다. 생전에 단 한 점도 팔지 못한 그림이었지만 나 같은 문외한에게도 그림에 대한 사랑과 자기 일에 대한 열정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감명 깊은 것은 셀 수 없는 붓 터치들이었다. 하나의 그림 속에 담긴 그 많은 붓 터치를 통해 그는 자기만의 그림을 그리게 되었을 것이다. 앞으로 내가 어떤 현기증, 괴로움, 병들을 만날지 모르겠으나 그때의 감정에 머무르는 대신 어설픈 문장들이라도 계속 써보고 싶어졌다.


4. 자기 삶에 이르는 철학의 여행, 글쓰기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는 동안 내가 바라던 삶, 자기 해방의 길은 뜻밖의 길들로 이어졌다. 정신분석과 자본주의, 욕망을 말하는 이 책이 내 인생과 이렇게 연결되어 있을지 알 수 없었고, 내가 감이당에서 공부하며 느꼈던 즐거움과 해방감을 욕망 기계를 통해 이해하게 될지도 몰랐다. 아마 글쓰기가 아니었다면 이 모든 것은 경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글쓰기를 위해 이해되지 않는 글을 다시 읽고 들뢰즈, 과타리의 말처럼 의미에 연연하지 않고 되는 대로 상상하며 읽게 되었을 때 비로소 두 사람을 만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내 계획에 대해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감이당 공부를 좋아하기 때문에 계속 공부하고 싶었고 또 공부만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름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 내가 하는 것은 퇴직을 준비하여 생활비를 모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지금의 생활을 끝내는 것에 약간의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글을 써가면서 얼마나 피상적인 접근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내가 삶을 온전히 살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내가 회사원이라서가 아니었다. 원하는 대로 공부만 하고 산다 하더라도 바뀌는 것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혁명의 실패가 외부에 있지 않았듯 내가 바라는 삶도 환경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욕망 기계들에게 여전히 하나의 이름, 하나의 의미를 강요한다면 자기의 삶도 자기 해방도 가능하지 않다. 욕망 기계들의 무수한 길 위에서 이제껏 믿음에 불과했던 관념들을 걷어내고 다른 사람들의 해석으로부터 독립하는 과정 자체가 그동안 바랐던 나의 길이었다.
 
  분열증의 과정은 창조하는 일을 할 수 있는 한에서만 자기를 해방하고, 자기 자신을 추구할 수 있고, 자기를 성취시킬 수 있다. 그러면 무엇을 창조할까? 하나의 새로운 대지이다. 어느 경우건 옛 땅들을 다시 지나가, 그 본성, 그 밀도를 연구해야 하고, 어떻게 그 땅 하나하나 위에서 그 땅을 넘어설 수 있게 해주는 기계적 지표들이 결속될 수 있는지 탐구해야 한다. (같은 책, 528쪽)
 
  우리는 항상 여럿이고 수많은 관계 속이 있다. “욕망적 생산은 무엇보다도 사회적이며, 끝에서야 자신을 해방하는 데로 향한다고 말해야 한다.” 어릴 적부터 사회에서 규정된 것들을 의식화하면서 성장한 우리들은 이런 것들을 참을성 있게 차례로 해체하면서 비로소 자신을 사용하고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된다. 사회는 쉬지 않고 욕망 기계들을 코드화하기 때문에 이런 과정도 사는 동안 계속될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자기 해방은 전략과 지구력이 필요할 듯하다. 철학과 글쓰기라는. 이제껏 한 번도 철학을 나의 도구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세상에는 수많은 지혜들이 넘치기 때문에 그중에서 좋은 것, 내게 맞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존재하는 것 중에서 내 길이 될 수 있는 것은 없다. 내가 가진 수많은 관계들 속에서 유효한 것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뿐이다. 결국 자기 삶은 창조되어야 하는 것이고 자립과 자기 해방을 위한 지성의 사용이 철학이다. 그리고 들뢰즈의 말대로 글의 줄마다 뿌리 깊은 익숙한 믿음들을 박박 긁어내는 일은 글쓰기를 통해 가능하다. 자신의 내면을 파고들고 우리를 둘러싼 관계망 전체를 새롭게 인식하게 하고 전에 없던 사유를 만들어 내는 실험이 글쓰기이기도 하다.
  들뢰즈는 ‘내공 여행’이라는 흥미로운 여행을 제안한다. “그것은 방 안에서, 그리고 기관 없는 몸 위에서 움직임 없이 행해지며, 그것은 자신이 창조하는 대지를 위해 모든 대지를 해체”하는 여행이다. 기관 없는 몸이란 아직 사회가 코드화하지 못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다. 즉 사회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기 해방의 실험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언제나 욕망 기계들을 좇아 코드화하려 들지만 그 곁에는 늘 아무 것도 없는 공백이 존재한다.
  원하는 삶을 살고 자기를 해방시키는 것은 의지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자기 해방은 욕망 기계들이 우글거리는 이 무수한 관계망과 흐름 속에서 얼마나 나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다른 기계들의 힘이나 의도에 휩쓸리지 않고 계속 시도하기 위해서는 자기 사유가 필요하다. 자기 해방을 원하는 모두가 철학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혹 그 길이 막히더라고 사유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 사유가 멈추는 순간 욕망 기계들은 다시 관성으로 움직일 것이고 순식간에 나는 다시 사회 기계의 일부가 될 것이다. 들뢰즈, 과타리가 사유실험을 통해 정신분석과 자본주의에 가려진 현대인들의 예속을 밝혀냈듯 철학이라는 사유의 힘을 통해 더 멀리 가는 것 그것이 내공 여행이고 자기 해방의 길일 것이다. 멀리 간다는 것은 익숙한 것들을 너머 아직 규정되지 않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유의 가능성을 탐사하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기계들과 접속, 변형되면서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들을 자기의 언어로 말하고 행할 수 있을 때까지 가보기. 들뢰즈, 과타리의 말대로 때로 괴롭고 혹은 현기증이 날지라도 그렇게 가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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