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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장자스쿨] 차라투스트라의 즐거운 복음, 연민을 극복하고 삶의 주인이 되어라
 글쓴이 : 승차라 | 작성일 : 20-01-24 22:20
조회 : 889  

차라투스트라의 즐거운 복음, 연민을 극복하고 삶의 주인이 되어라 

              

한 승 희 (감이당 장자스쿨)

 

- 목 차 -

Ⅰ. 차라투스트라의 눈으로 본 연민

Ⅱ. 니체, 질병을 극복하는 건강한 철학자

1. 철학,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무기

2. 걷고 쓰며 삶의 주인이 되다

3. 즐거운 언어로 노래하는 철학책, 차라투스트라의 탄생

Ⅲ. 연민을 극복하고 창조의 길로

1. 지배적 가치에 던지는 질문

2. 연민의 늪을 탐사하다

1) 연민, 삶의 기쁨에 대한 무지

2) 사목권력의 연민, 학교에 침투하다

3. 연민을 파괴하는 철학적 무기

1) 삶은 힘들의 투쟁이다

2) 신체, 자기 구제의 길을 여는 개념

4. 새로운 신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삶

Ⅳ. 차라투스트라의 즐거운 복음, 철학하라! 

 

Ⅰ. 차라투스트라의 눈으로 본 연민

   책을 읽는 건 하나의 만남이다. 사람과 만나며 섞이는 과정에서 내 삶에 변화가 생기듯이, 책과의 만남 또한 사유에 변화를 일으킨다. 그 중 삶과 세계에 대한 깊은 지혜를 담고 있는 책들은 그동안 내가 갖고 있던 인식을 다르게 보게 하는 새로운 ‘눈’으로 다가온다. 이 과정은 내 신체에 정말 새로운 눈이 하나 더 생기는 것처럼 낯설고 고통스러운 감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내게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그랬다. 이 책을 읽는 과정은 그동안 내가 의심 없이 믿으며 따르던 세상의 가치들을 다른 관점으로 보는 차라투스트라의 눈과 만나는 시간이었다. 그의 관점으로 나 자신을 보기 시작하면서, 나는 드디어 내 인식을 다르게 보는 새로운 눈들의 생성을 강렬하게 욕망하게 되었다. 나에 대한 새로운 눈이 생기면, 그동안 당연하다고 여긴 것들이 낯설게 보이기 시작하며 질문이 생긴다. 나는 그동안 선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약자에 대한 연민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내가 일하는 학교 현장에서 언제나 보호받는 존재로 인식되는 ‘학생’에 대한 연민. 이 가치는 그들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데 어떤 도움이 되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하기까지 나는 약자에 대한 연민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곳은 내가 작년까지 4년간 일한 곳으로, 학교폭력 가․ 피해 학생들을 위해 설립된 대안 특성화 고등학교이다. 이곳의 교사로서 어떤 학생도 차별받지 않고 행복한 교육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바람과는 달리, 개교 초기부터 온갖 폭력 사건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사건이 생길 때마다 교사들은 밤늦게까지 회의를 하며 해결 방안을 논의했다.

   그런데 회의 과정에서 교사들 사이에 의견이 대립되어 강하게 부딪치는 일이 자주 생겼다. 학생이 안전하게 교육받을 권리가 폭력 가‧피해 학생 모두에게 평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문제였다. 사건 직후, 가해 학생을 집으로 귀가시키는 것부터 찬성과 반대가 갈려 좀처럼 결정이 나지 않았다. 가끔은 학생과 교사 간에도 폭력 사건이 났기에 가해 학생과 피해 교사 중 어느 쪽의 인권을 보호할 것인가의 문제도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나는 폭언이나 폭행을 당한 피해자의 편에서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가해 학생 또한 약자이기에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사들도 많았다. 가정 결손, 정신 질환 등여러 문제를 겪으며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게 된 학생들을 이해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약자를 보호하는 선한 자라 믿는 교사들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우고 있을 때, 싸움의 바탕에 깔린 연민들은 과연 누구에게 어떤 도움이 되었을까? 가해 학생들은 자신을 연민하는 선생님들을 이용하여 사건의 책임을 피하려고 했고, 피해 학생들 역시 위로와 휴식의 시간을 계속 보장받고 싶어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건의 당사자인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의견이 대립되었던 교사들까지 서로 감정이 남아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기도 했다.

   회복적 생활교육이라는 체계를 도입하면서 학교에는 사건을 해결하는 매뉴얼이 생겼으나, 내 답답함은 여전했다. 때마침, 일주일에 한 번씩 꾸준히 참여하던 춘천의 공부 모임에서 니체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니체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드디어 내 속의 답답함을 언어로 구체화하여 나 자신을 비춰볼 수 있었다. 특히 연민을 비판하는 차라투스트라의 말이 내게 새로운 관점이 되어주었다. 약자에 대한 ‘연민’에 흔들려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소모적인 싸움만 했을 뿐, 폭력과 고통을 이해하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했다는 사실. 이런 내가 문제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내게 선물한 새로운 관점은 무엇이었나? 그는 연민을 극복하지 못한 사랑은 고통을 겪고 있는 자에게도, 그를 사랑하는 자에게도 더 많은 고뇌를 가져다줄 뿐이라고 말한다. 약자를 연민하며 그에게 위로와 도움의 손길만을 준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게 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선하다고 믿는 이 가치는 사실 고통을 극복하고 삶을 긍정하는 지혜, 즉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길을 가지 못하도록 붙잡는 안락한 늪과 같다. 따라서 차라투스트라에게 연민은 극복해야 하는 마음이다. 보다 위대하게 사랑하고, 창조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자라면 누구든!

   고통스러워하는 약자를 연민한다는 건, 언제든 나 또한 상처 입는 사건을 겪게 되면 스스로를 약자의 위치에 놓고 연민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학생을 연민하는 것뿐만 아니라, 삶이라는 생생한 변화 속에서 나 자신도 약자로 보는 연민의 눈들을 나의 안과 밖에서 발견해내야 한다. 나를 붙잡는 ‘연민’이라는 가치의 중력. 나는 차라투스트라와 함께 이 힘의 역사를 샅샅이 살피며 이를 극복하는 나의 길, 나의 눈을 창조해보려 한다.

 

 

 

 

 

 

Ⅱ. 니체, 질병을 극복하는 건강한 철학자

   니체에게 자신의 삶을 한 마디로 말해달라고 한다면, ‘극복하는 과정 뿐’이라고 답할 것이다. 실제로 그의 삶은 자기 자신의 질병을, 동시에 서구 유럽의 근대라는 시대적 질병을 극복하며 건강한 철학을 창조하는 과정이었다. 그 안에서 1883년~1885년, 삶을 긍정하는 그의 철학이 세상에 음악으로 울려 퍼지는 시간이 찾아왔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이 때 탄생했다.

   이 책은 니체의 삶에서, 그가 살아간 시대에서 어떤 질병을 극복하는 건강한 철학이었을까? 당시 서구 유럽의 근대인을 지배한 전통 형이상학과 기독교는 인간에게 삶의 모든 길을 정해주는 명령자와 같았다. 19세기 새로 등장한 부르주아 문화, 민주주의 정치, 제국의 탄생,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학문과 함께 시대는 나날이 앞으로만 발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니체가 보기에 근대인의 삶은 겉모습만 그럴듯할 뿐, 전통 철학과 종교의 명령을 정교하게 발전시키며 그에 편안히 굴복하는 왜소한 노예의 삶이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시대를 ‘질병’으로 파악했다. 문화와 제도가 아무리 세련되게 발전한다 해도, 인간 스스로 자신의 삶에 필요한 가치를 새로이 창조해내지 못한다면 그 시대는 병든 것이다.

   시대의 한계 안에서 니체 역시 신체의 질병을 한계로 안고 태어났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인지, 너무 예민한 성향 탓인지 어릴 적부터 신경증적인 증상들이 있었다. 두통과 눈 통증, 우울증이 그것이었다. 특히 30대 중반이 된 1877년과 1880년 사이, 질병이 급격히 심각해진다. 규칙적으로 오는 심한 두통과 발작, 탈진, 며칠 동안 위액을 힘들게 토해내는 구토, 눈 통증, 거의 실명에 이를 정도의 시력 약화, 불면……. 그와 그의 시대는 질병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삶을 긍정하는 길을 찾아야하는 운명으로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니체는 이 운명을 연민하지 않고 철학을 통해서 한 걸음씩 창조의 길로 나아갔다. 이 길 위에서 태어난 『차라투스트라…』가 그의 삶과 시대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책인지 살펴보자.

 

1. 철학,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무기

   이성으로 대표되는 관념론적 형이상학,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기독교 도덕의 심리적 억압, 그리고 이 지반 위에서 세워진 모든 근대 문명의 발전. 니체에게 이것은 실재하는 삶과 살아 숨 쉬는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게 하는 허위에 불과했다.

   니체에게 실재하는 삶이란 것은 무엇이었을까? 자유? 행복? 아니다. 고통이었다. 어릴 적부터 끊임없이 따라다닌 신경증적인 증상들. 그는 아팠다. 특히 30대 중반이 된 1877년과 1880년 사이, 질병이 급격히 심각해진다. 규칙적으로 오는 심한 두통과 발작, 탈진, 며칠 동안 위액을 힘들게 토해내는 구토, 눈 통증, 거의 실명에 이를 정도의 시력 약화, 불면……. 자신의 아버지가 사망한 나이인 36살이 되던 때 1879년, 그의 생명력은 가장 낮은 지점에 이르게 되었다. 1년 동안 그는 118일이나 심한 발작을 겪었다고 한다.

   결국 그는 병가를 제출하며 근근이 이어가던 바젤 대학 교수직을 사임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맞는 영양섭취, 장소, 풍토를 스스로 선택하여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위스의 여러 지역을 여행하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 정상적인 사회생활, 사람들과의 사교적 관계 등의 일반적인 일상으로부터 그는 물러나야 했다. 이때의 니체는 자신의 삶을 ‘끔찍한 짐’으로 느낀다. 뇌 연화증으로 사망한 아버지와 같은 나이인 자신 역시 뇌에 문제가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강했다. “인생의 중간 지점에 있는 나는, 언제라도 나를 데려갈 수 있는 ‘죽음에 둘러싸여’ 있네.”(1879년 9월 11일 가스트에게 보내는 편지)

   삶은 그에게 악의 없는 동심의 장난 같은 고통도 선물로 주었다. 천부적인 예술적 감수성과 창조성, 자유정신의 사유 능력은 그가 시대에 잘 적응하며 편안하게 살아가는 데에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가 철학을 진전시키는 과정에는 언제나 자신이 뜨겁게 빠져있던 것과의 단절이 발생했다.『비극의 탄생』(1871)은 그의 학문적 정체성이었던 고전문헌학을,『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876)은 그가 존경했던 음악가 바그너를 비판하고 떠나가는 과정이었다. 니체의 고유한 사유 능력은 질병 못지않게 그를 안전한 사회적 관계망으로부터 떠나가게 하는 요인이 된다. 시대의 심연을 파 내려가는 철학을 단호한 확신으로 ‘위대한 과업’이라고 인식했던 그였지만, 인간으로서 느끼는 감정의 고통을 속일 수는 없었다. 1882년 친구 파울 레, 지적인 젊은 여성 루 살로메와의 삼각관계에서 겪은 수치심은 어떤 수면제로도 잠을 잘 수 없는 극심한 고통으로 그를 밀어 넣는다.

 

2. 걷고 쓰며 삶의 주인이 되다

   철학을 하는 삶. 니체도 20대 젊은 나이에는 이 삶에 기대를 걸고 있었을까? 철학을 하는 그의 온 삶에는 사유 뒤에 찾아오는 발작, 과업을 완성시키는 과정에서 더 깊어지는 시대와의 불화가 있었다. 어디에도 좀 더 나아지거나 좀 더 조화로워지는 모습은 없다. 30대 이후 그가 본격적으로 자유정신으로서의 철학을 하는 중에 쓴 편지글들을 보면, 니체에게는 그런 것들에 대한 욕망이 없어 보인다. 결핍의 비탄에 빠져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자신만만한 자기 인식을 분명히 보여준다.

 

     제 인생의 과업과 거기에서 생기는 끝없는 요구들을 조금이라도 꿰뚫어 보는 사람은 저를 가장 행복한 사람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제부터는 제가 직접 제 몸을 살피는 의사가 될 생각입니다.                                                                        -1881년 질스마리아에서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 中

 

   모든 고통과 절망을 극복할 수 있다고, 자신은 최상의 상태라고 하는 니체. 이는 단순히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한 말은 아니었다. 지적 ‧ 도덕적 영역에서의 사유 실험이 아니었다면 자기 존재를 진작에 내던져 버렸을 거라고 했던 질병과 고독의 시기. 니체는 이때를 자기 본성이 원하는 요구들을 알아차리는 배움의 시기, 온갖 증상에 맞서 싸우는 전투의 시기로 만들어낸다.

   그는 무엇을 하면서 배우고 싸웠을까? 하루 여섯 시간에서 여덟 시간에 걸친 걷기, 그리고 걷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건강한 문체로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병이 완치될 거라는 기대는 갖지 않았다. 니체에게 아프다는 것은 자신의 몸을 ‘느낀다’, ‘알아차린다’는 것에 지나지 않았고, 그 신호를 예민하게 포착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근육을 움직이는 신체 활동이 자신에게 가장 좋다고 생각한 그는 될 수 있는 한 많이 걸었다. 그래서 병이 있었음에도 겉모습은 근육이 거의 군인 같았다고 한다. 또한 위장 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자기 몸이 원하는 만큼 음식을 매우 적게 먹었다. 오랜 시간 사유하고 글을 쓰는 것은 두통과 발작, 시력 악화를 더 심하게 만들었지만, 사유 실험의 기쁨 없이 육체만 보존하는 삶은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는 1880년~1882년 사이에 도덕에 대한 전쟁을 개시하는데, 그 책이 바로『아침놀』과 『즐거운 학문』이다. 이 두 책은 현대 독일어가 하나의 새로운 목소리를 냈다고 할 정도로 문체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한다.

   『차라투스트라…』의 핵심 사상인 영원회귀 역시 걷다가 잉태한 것이다. 많은 지역을 여행하며 자기 몸에 맞는 풍토를 찾던 니체는 스위스의 질스마리아를 자기 본성에 가장 잘 맞는 곳으로 발견한다. 산과 숲으로 둘러싸인 알프스 산맥의 한 마을, 고원지대의 좋은 공기, 감정적인 흥분을 일으키는 유난한 더위, 이방인이자 여행자로서 완전히 혼자인 시간, 그 시공간을 걸으면서 사유하는 한 사람. 자신의 삶을 온전히 긍정하는 위대한 사상이 찾아오기에 적합한 순간. 1881년 여름이었다.

 

3. 즐거운 언어로 노래하는 철학책, 차라투스트라의 탄생

   니체가 마흔 살이 되던 1883년 2월, 그는 구릉 지대 사이에 끼어 있는 조용한 바닷가 라팔로에 있었다. 더위의 흥분으로 기억되는 질스마리아와 반대로 이곳은 비가 많이 내리는 추운 겨울이었다. 그는 육체적으로 많이 지쳐있었다. 더구나 멈추지 않는 파도소리는 불면을 겪는 그에게 더없는 악조건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그는 매일 오전 오후로 산책을 한다. 오전에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소나무 길을, 오후에는 상태가 좋을 때마다 라팔로만 전체를. 그리고 이 산책길에서 드디어 『차라투스트라…』1부 전체가 떠오른다.

   시대의 모든 허위성을 강렬하게 비추는 고도의 지성, 온갖 불화 속에서 겪은 감정적 혼란과 갈등, 도저히 잠을 잘 수 없는 몸과 마음의 고통. 니체는 병을 앓는 고독한 철학자였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는 혼란과 질병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기 삶을 긍정할 수 있는 개념을 스스로 창조해야 했다. 동시대의 그 어느 위대한 철학, 예술에도 자기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긍정할 수 있는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위대한 건강이라는 개념을 삶으로 창조했다. 삶의 근본적인 문제인 사소한 사항들, 즉 영양 섭취, 장소, 풍토, 휴양, 이기심을 선택하는 것에서부터 ‘다시 배우기’ 시작하면서 말이다.

   『차라투스트라…』의 위버멘쉬, 힘-의지, 영원회귀 사상은 니체가 지속적으로 획득한 건강과 나란히 함께 걷는 철학이다. 이 책을 쓰는 니체의 모든 과정은 이성으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세상을 만들고 있다고 확신한 19세기 유럽인들과 지금의 우리에게 커다란 질문으로 다가온다. 인류의 위대함, 발전, 미래, 성공, 진리, 돈……. 이 모든 ‘이상’이라는 빛을 따라가느라 정작 자기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비춰보는 자신의 빛은 모두 꺼버린 것은 아닌가? 시대의 삶에 적응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며 막상 자기 삶의 사소한 사항들은 경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당신은 자기 삶의 모든 사소함을 영원히 긍정하는 ‘운명애’를 노래할 수 있는가? 니체의 책이자 벗 차라투스트라. 그는 우리가 고통을 전도시키고 새로운 삶의 가치를 창조하도록 투쟁의 힘을 끊임없이 북돋는 질문을 던질 것이다.

 

 

 

Ⅲ. 연민을 극복하고 창조의 길로

1. 지배적 가치에 던지는 질문

   사람을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의 교량으로 보는 자, 차라투스트라. 그에게 있어 사람은 너무나 인간적인 시대적 가치에 지배당하고 있는 ‘대지의 피부병’, 즉 질병 자체이다. 따라서 사람이라는 존재는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직시하고, 그것을 파괴하며 스스로 극복해가야 하는 끊임없는 ‘건강’의 과정일 뿐이다. 지금까지 선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삶의 가치들을 파괴하고, 자기 스스로의 취향, 건강, 가치를 세우는 입법자. 이런 자를 차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라고 부른다.

   나는 1년간 이 책을 읽으면서, 과연 학교 교육에서 사람을 이와 같은 존재로 연습시킬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길을 교사와 학생이 함께 연습할 수 있을까? 10년간 교직에서 보고, 듣고, 겪은 바로서는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다. 현재 학교 교육에는 위버멘쉬의 창조적인 삶의 길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연민’이라는 가치가 지배적인 담론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민은 삶에서 고통을 겪는 약자의 나약함을 보존하려는 마음으로, 가치 창조를 위한 파괴와 몰락으로 가는 길을 망설이게 한다.

   학교에서 학생은 언제나 보호받아야 하고, 쉽고 재미있는 수업을 받을 권리를 가진 학습자로서 존재한다. 교사, 친구들 간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아서는 안되며, 혹시나 고통스러운 사건을 겪게 되면 학교는 그 상처를 회복시켜야 하는 의무를 가진다. 이와 관련된 생활교육 매뉴얼과 수업혁신 이론들이 수두룩하다. 나 역시 현 교육 철학과 정책을 지배하는 이 가치를 내면화했으며, 어떻게 하면 이 일을 잘할 수 있을지 만을 고민해왔다.

   그러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교육과 삶의 새로운 창조를 위해 바로 이 ‘연민’이라는 것을 파괴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나의 현장에서, 그리고 나의 삶에서 너무나 인간적인 이 가치는 어떻게 작동해왔는가? 삶의 주인으로서 창조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이 가치는 어떻게 방해하는가? 이 과정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며 연민의 늪으로부터 한 발짝씩 걸어 나오려 한다.

 

2. 연민의 늪을 탐사하다

1) 연민, 삶의 기쁨에 대한 무지

   학교 교육 이외의 일상에서도 우리는 연민을 ‘따뜻한 미덕’으로 여기며, 좋은 사람일수록 이를 잘 실천한다고 믿고 있다. 사실 나는 대화의 기술이 뛰어난 편은 아니라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의 말을 듣고만 있을 뿐, 그에 맞는 좋은 위로를 건네는 걸 잘 못한다. 섣부르게 해결책을 제시했다가 공감을 못한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이런 나를 대인관계에 큰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 곳이 있는데, 2015년부터 4년간 근무한 대안 고등학교이다.

   그곳은 어린 시절부터 가정과 학교에서 온갖 상처를 받아 돌봄과 치유가 필요하다는 학생들을 위한 학교였다. 담임을 맡아 학기 초 상담을 해보면, 가정 결손부터 폭력과 중독, 정신질환 등 평소에 쉽게 들어보지 못한 삶의 경험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얘기들을 들으며 나는 이들에게 어떤 ‘좋은 말’을 해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학교에서 같이 열심히 지내보자는 말밖에. 그러나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학생들은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어보였다.

   그들은 자신이 겪은 온갖 상처를 쏟아내면서, 자기는 마음이 아픈 사람이므로 어떤 행동을 하든 이해하고 용서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렇게 해주는 학교라고 해서 지원했다는 게 그들의 무기였다. 수업 시간에도 교실 바깥을 수시로 배회하고, 서열 정하기와 뒷담화로 인한 폭력 행동이 1년 내내 이어지는 상황임에도 교사들은 그 행동들을 ‘받아냄’으로써 그들을 순화시키려 했다. 그런 와중에도 학교의 일상인 ‘수업’으로 중심을 잡아야 하기에, 학생들이 수업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수없이 많은 시도들을 했다.

   나는 학생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관계와 대화의 기술을 익히기 위해 비폭력대화, 회복적 생활교육 등의 연수를 열심히 받았다.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무엇인지 정말 많이 고민한 시간이었다. 그러면서 수업에서는 어떻게든 책을 읽히려고 노력했다. 사실 대안학교에 지원한 첫 동기가 다양한 욕구를 가진 학생들과 수업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자율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삶의 상처 이외에도 ‘공부 상처’라는 걸 가진 약자 중의 약자였다. 매 수업시간마다 의자에 앉아있는 자세 자체를 고통스러워하고, ‘책’이라는 걸 자기에게 고통을 주는 혐오 대상으로 보며 분노와 짜증으로 반응했다. 책 한 장을 소리 내어 읽는 활동조차도 혐오하는데, 그 내용에 집중을 하라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이 앞에서 나는 늘 ‘내가 더 잘할게’하는 마음을 가졌다. 연수를 열심히 받아 대화기술을 익히고, 더 쉽고 재미난 활동으로 책에 관심을 갖게 하려고 했다. 그토록 상처가 많다는데 내가 상처를 더 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내가 노력하면 할수록 학생들은 대화를, 수업을 더 재미없어 했다. ‘거부 반응’을 일상적으로 겪으면서 나는 점차 나 자신에 대한 연민까지 느끼게 되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존재한 이래, 사람은 너무나도 적게 기쁨을 맛보았다. 형제들이여, 이것만이 우리의 원죄 렷다! 우리가 보다 기뻐할 줄 알게 된다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준다거나 다른 사람들을 고통스럽 게 할 궁리를 어느 때보다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 니체,『차라투스트라…』, 제2부 ‘연민의 정이 깊은 자들에 대하여’ p.146

 

   사명감과 의무라는 짐을 짊어지고 사막으로 달려가는 낙타처럼, 스스로 삶의 어떤 기쁨도 느끼지 못하는데 학생들에게 어떤 재미가 전해질 수 있을까? 삶의 경험에서, 수업을 준비하는 공부에서 스스로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기쁨이 없는데 어떤 생기가 전해질 수 있을까? 상처를 가진 학생들을 가엾게 여기는 나의 연민은 ‘고통’을 새롭게 보는 시선이 없는 무지일 뿐이었다. 공부를 통해 삶을 창조하는 기쁨을 모르는 상태였으므로, 온갖 상처의 고통에 빠진 학생들을 그 자리에 남겨둔 채 어리석은 도움의 손길만을 보내려 한 것이다. 

 

2) 사목권력의 연민, 학교에 침투하다

   인류의 역사에도 나처럼 고뇌와 비애에 빠진 채로 선민의식을 가지고 어린 양들에게 연민의 손길을 뻗치는 자들이 있었다. 바로 기독교 사제들이다.

 

     저들의 정신은 저들이 느끼는 연민의 정 속에 빠져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 저들은 고함 을 질러대며 열심히 저들의 양 떼를 저들의 좁은 길로 내몰았다. (…) 후텁지근한 가슴과 차가운 머 리. 이들이 만나는 곳에 ‘구세주’라는 광풍이 일어난다.                                                                     - 같은 책, 제2부 ‘사제들에 대하여’ p.153

 

   삶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는 어린 양들을 구원의 세계로 이끌고 가는 선한 목자인 기독교 사제. 이러한 ‘사목권력’은 근대 이후 국가통치술의 핵심적인 특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국가의 구성원인 시민을 길러내는 학교 교육에도 기독교의 연민을 바탕으로 한 사목권력이 교육철학, 제도로 작동하고 있다. 학교에서 학생을 잘 이끌고자 하는 ‘좋은 교사’와 기독교 사제의 모습은 겹치는 부분이 많다.

   나의 연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차라투스트라가 비판하는 기독교의 연민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 서양 사회와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기본 전제인 기독교는 근대 이후 우리 사회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에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중심적인 가치이기도 하다. 그 연민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며 이것이 학교에서는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보자.

   우선 기독교 교리는 신 앞에서 인간의 나약함을 철저하게 증명하도록 하는 가르침이다. 종교개혁을 이룬 루터는 인간의 죄와 사악성을 진실하게 인정할 것을 주장했고,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은 인간의 선한 행위가 아닌 오직 신을 향한 ‘믿음’이라고 보았다. 신을 향한 개인의 내면적 지향이라는 것이 서구 유럽에서 하나의 지배적인 세계관을 만드는 순간이다. 이제 사제는 교황청에 소속된 자들만을 의미하지 않게 되었다. 성서를 읽을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 사제가 될 수 있는 ‘만인사제주의’가 등장했다. 구세력에 '항의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기독교 개혁세력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는 칼뱅의 종교개혁을 거치며 행위가 아닌 믿음, 성서지상주의, 금욕적 생활태도로 사상과 윤리가 더욱 공고해진다. 금욕과 성실로 무장한 이들이 재산을 축적하고 부를 형성하며 세계의 중심적인 기득권 세력이 되었다.

   유일신 앞에서 자신의 죄와 나약함을 고백하고 끊임없이 증명하며, 신에 대한 믿음으로 그의 초월적인 창조능력을 경배하는 것. 이것을 통해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 기독교의 원리이며, 이때의 구원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현세, 그리고 영적으로 영원히 풍요로운 내세의 약속이다. 이 믿음이 개인의 내면적 지향과 맞물리면서 자신의 구원을 향해 달려가다 생겨나는 타인에 대한 폭력과 착취에 대해 점차 감각이 무뎌진다. 그러면서 타인을 구원받지 못한 ‘양 떼’로 포착하여 자기의 세계관, 종교관과 동일한 존재로 이끌어가려 한다. 이 역사에서 인간은 신 앞에서 연민 받는 존재이며, 아직 신을 모르는 자들을 연민하는 존재이다.

   기독교 내부 원리의 핵심은 인간 스스로의 ‘행위’를 부정하고, 영혼, 내면, 정신이 존재를 독점한다는 것이다. 신과 가까워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순수한 내면의 믿음 뿐이다. 신체의 행위는 인간 스스로 조절하거나 가치를 평가할 수 없다. 오직 신만이 심판할 수 있을 뿐이다. 삶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느끼는 신체의 감각은 무시되고, 고통의 원인이 ‘죄’로 떠오른다. 원죄를 타고난 인간은 신의 연민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사제를 통해 신에게 용서를 구하고 그와 가까워질 수 있는 길을 찾는다.

   나는 이 지점이 내가 내면화한 학교 교육의 연민과 맞닿아 있다고 본다. 학생들은 자기 삶을 만드는 ‘행위’를 스스로 이해하지 못한 채 온갖 사고를 치는 존재이다. 교사들은 사건의 원인으로 학생들이 겪은 감정적인 상처, 정신 질환을 찾아낸다. 이것으로 인해 죄를 짓게 되었으므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할 수 없다. 원인을 교정하고, 순화하는 상담, 써클 대화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은 순수한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학생들은 자신의 행위가 자기 자신과 관계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프로그램 절차를 밟으며 ‘용서’를 받는다. 사제와도 같은 교사 앞에서 자신을 잘 고백할수록 깊은 의존관계가 맺어지며 훈훈한 용서가 이뤄진다. 이 같은 성공경험이 많을수록 교사는 스스로가 선하고 좋은 자로서 학생을 잘 이끌었다는 자부심을 얻게 된다. 순화된 학생을 대학이나 취업을 원하는 자로 만드는 것까지가 좋은 교사가 해야 할 의무이기도 하다.

   이 과정이 아무리 성공적으로 이뤄진다 해도, 학생은 여전히 ‘나약한 자’로 증명될 뿐이다. 어떤 힘과 충동이 행위를 지배하는지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가 분석할 용기, 실제로 자신을 조절할 수 있는 지혜를 연마하는 기회는 없는 것이다. 이 안에서는 누구도 자기 삶의 새로움을 창조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한 채로 서로를 연민하게만 된다.

3. 연민을 파괴하는 철학적 무기

1) 삶은 힘들의 투쟁이다

   이제 연민이 사람을 나약한 존재로 끌어내리는 무거운 중력임을 알았다. 그렇다면 이것에 맞서 어떤 철학적 무기로 삶을 창조해 나갈 것인가? 나는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에 주목하고자 한다. 하나의 힘과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는 세계를 보는 관점 자체를 전복시킬 필요도 있다. ‘힘’이라는 개념은 니체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인데, 이를 통해 우리 삶을 볼 때 ‘연민’의 작동이 효력을 잃게 된다.   

     영원히 불완전한, 영원한 모순의 모사, 그것도 불완전한 모사인 이 세계. 그것을 창조한 불완전한 창조자에게 있어서의 도취적 즐거움. 세계는 한때 그렇게 생각되었다. 배후세계를 신봉하는 자들 모 두가 그리하듯이 나 또한 이렇듯 인간 저편에 대한 망상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 같은 책, 제1부 ‘배후세계를 신봉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p.47

 

   삶을 불완전한 고통으로만 보는 자들은 이 세계를 초월하는 ‘배후세계’를 꾸며내어 이를 신봉한다. 내세를 꿈꾸는 기독교, 초월적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서구 전통 형이상학의 세계관이 이렇다. 니체의 ‘힘’ 개념은 세계를 생성과 소멸의 흐름 자체로만 보는 것으로, 이 관점에서는 천상이나 내세가 존재하지 않으며 그에게 삶은 오직 현실에서 이 힘들이 투쟁하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힘의 특성은 첫째, 항상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작동하는 복수의 것이라는 점. 둘째, ‘표현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셋째, 정지되어 있는 양이 아닌 ‘변화’ 자체라는 점이다. 세 가지 모두 삶의 현실을 보게 하지만, 그 중에서도 두 번째 특성이 우리 자신의 행위를 있는 그대로 보는 데 도움을 준다. 차라투스트라 역시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은 의욕할 수 없다(p.196)"고 말하며 우리가 욕망대로 행위하고 있음을 말했다.

   그에게 있어 세계, 또는 삶은 고정된 선악의 기준대로 작동하는 게 아니라 모든 것에 있는 이 힘들이 끊임없이 자기를 극복하며 투쟁하는 장이다. 심지어 선악이라는 가치조차도 하나의 힘으로서 자기의 지배의지를 끊임없이 행사하고 있다. 힘으로 세계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의 삶도 욕망도 사회의 지배적 가치와 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특정 가치, 물질, 신 등에게 연민을 받으며 사는 삶은 지배적인 힘에 종속되는 나약한 삶일 뿐이다. 자기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기쁨은 이러한 자신에 대한 ‘연민’을 버리고, 스스로에게 명령의 힘 의지를 발휘할 때 누릴 수 있다.

 

2) 신체, 자기구제의 길을 여는 개념

   힘 의지를 어떻게 발휘할 수 있을까? 그 구체적인 실천을 생각할 수 있는 개념이 바로 ‘신체’이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신체는 기독교적, 형이상학적 전통인 이분법적인 존재 개념을 전복시키는 것이다.

 

     신체는 커다란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고, 전쟁이자 평화, 가축의 무리이자 목적 이다. 형제여, 네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너의 작은 이성 또한 너의 신체의 도구, 너의 커다란 이성 의 작은 도구이자 놀잇감일 뿐이다.

- 같은 책, 제1부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 p.47

 

   ‘신체’는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여 육체만을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다. 힘에의 의지가 발현되는 실제 감각과 정신을 포괄하는 ‘행위’로서의 개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를 자아와 구분하여 ‘자기(das Selbst)’라는 개념으로 말하기도 한다. 우리가 어떤 덕을, 가치를 실천하는 것은 행위로 하는 것이며, 이 안에 온갖 사회적 가치와 지배적인 욕망, 내 생리적, 감정적 습관이 모두 작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신체를 ‘다양성’이라고 표현했다. 세계가 그렇듯이 내 행위 역시 모든 힘들이 투쟁을 벌이고 있는 장이다. 따라서 자기 삶의 가치를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행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다. 일단 보아야 어느 방향으로 명령을 내릴지 판단할 수 있다.

 

지난날을 구제하고 일체의 “그랬었다”를 “나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로 전환하는 것, 내게는 비로 소 그것이 구제다!

- 같은 책, 제2부 ‘구제에 대하여’ p.236

 

   그리고 이 분석을 통해서 더 이상 ‘자기 자신’이라는 주체에 대한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모든 힘들과 함께 자기가 그 행위를 원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이 사람에게는 더 이상 자신을 용서할 구세주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가치, 어떤 힘과 함께 행위를 했는지 작동 원리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나는 1년간 장자스쿨에서 공부를 하며 행위를 만드는 내 생리적 회로를 알게 되었다. 특히 주역을 외우면서 근육량이 현저히 부족하고, 심호흡도 짧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16괘를 한 번에 외우는 게 아직도 잘 안 된다. 그리고 사람들과 세미나를 하면서 잘 안 풀릴 때, 스트레스를 받으면 위가 굉장히 아프다는 걸 알았다. 정리하자면, 몸 자체가 피로와 스트레스에 굉장히 약하다. 그래서 어떤 일이든 끝까지 완수하는 게 힘들고, 관계에서도 갈등을 겪는 게 너무 힘들다. 끝까지 부딪치기 보다는 좋게 넘어가려는 습관이 사람을 연민하는 태도도 만들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점을 변화시키기 위해 현재 하는 실천이 일단 위장을 보호하는 것이다. 평소 밥을 잘 챙겨먹지 않았는데, 요즘은 지리산 실상사에서 온 쌀 선물로 삼시세끼를 무조건 ‘밥’으로 먹고 있다. 조금씩 자주 먹으며 공부도 틈틈이 조금씩 매일 하는 습관을 들였다. 공부 역시 불규칙한 식습관처럼 안하다가 왕창 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책을 소화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주역도, 글쓰기도 아직 잘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전보다 조금 더 많은 양을 소화하게 되었을 때 삶을 살아가는 능력이 조금 더 증대된 것 같아 무척 기쁘다.

 

4. 새로운 신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삶

   좋은 삶은 누군가의 연민으로 용서 받으며 내 나약함을 존중받는 것으로는 절대 이뤄지지 않는다. 경험해봤다면 알겠지만, 그런 연민은 순간의 고통을 피할 수 있을 뿐이다. 순간이 지나고 나면 자기에 대한 불만족, 자기를 연민한 자에 대한 불쾌감이 남는다.

   그렇다면 좋은 삶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감각과 정신을 포괄하는 ‘신체’의 창조능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기에게 명령하는 힘에의 의지가 매일 차이를 생성할 때 즐겁고 긍정적인 삶이 만들어진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식을 새롭게 하는 가치의 창조와 일상의 습관을 변화시키는 것은 분리되지 않으며 이것이 이뤄질 때 새로운 삶을 창조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학교 교육에서도 학생들이 연민 받는 존재가 아닌, 스스로 창조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자신의 행위를 새로운 시선으로 볼 수 있는 교육의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행위를 지배하는 시대적 가치를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드는 새로운 ‘인식’과의 만남이다. 곧, 세계의 지혜를 담은 ‘고전’과의 만남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너무 어려운 책을 읽히는 건 학생들에 대한 폭력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시선은 아직도 ‘고통’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갖지 못한 나약한 자의 말일 뿐이다.

 

     창조. 그것은 고뇌로부터의 위대한 구제이며 삶을 가볍게 해주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창조하는 자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고뇌가 있어야 하며 많은 변신이 있어야 한다. (…) 창조하는 자 자신이 다 시 태어날 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산모가 될 각오를 해야 하며 해산의 고통을 각오해야 한다.

- 같은 책, 제2부 ‘행복이 넘치는 섬들에서’ p.142

 

   최근에 생각이 바뀌면서,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읽을 책을 수능 국어영역 비문학 지문으로 나올법한 다양한 분야의 고전과 연구 서적으로 구입했다. 평소에 접하지 못했던 책에 대해 학생들은 호기심을 보였고, 나는 무조건 자기에게 좋은 문장을 찾아 필사하고 생각을 쓰라고 했다. 학생들이 쓴 지혜의 문장들은 다른 반 친구에게 무작위로 선물되어 계속해서 새로운 생각들이 댓글로 달릴 것이다. 처음엔 지루해하던 학생들도 가장 좋은 것을 선물하는 놀이라고 하자 재밌게 참여하고 있다. 내년엔 이 작업을 확장하여 1년 수행평가로 할 것이다. 한 권의 고전을 정해 1년 내내 조금씩 읽으며 질문을 만들고 글을 쓰는 것을 국어과목 읽기와 쓰기 영역 수행평가로 할 예정이다.

   이 실천을 통해 내가 원하는 것은 올해 1년간 내가 겪은 창조의 기쁨을 함께 누리는 벗이 되는 것이다. 학원과 문제집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공부를 하며 삶을 보는 눈을 키우고, 자신의 습관을 다스리는 능력을 키워 공부나 삶을 점점 재밌게 느꼈으면 좋겠다. 나 역시 매일 다시 태어나는 아이가 되기 위해 읽고 쓰는 연습을 계속 해나갈 것이다. 현재로서는 학생과 동료와 함께하는 이 연습을 멈추고 싶지 않다.

 

 

 

Ⅳ. 차라투스트라의 즐거운 복음, 철학하라!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면서도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1883~1885)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의 첫 장에 쓰인 이 책의 부제이다. 이 책을 리라이팅하는 1년의 공부과정을 마친 지금, 나는 차라투스트라를 소개하는 이 말에 무척 공감한다. 이 책은 모든 사람에게 “철학하라!”는 즐거운 복음을 전하는 철학책이기 때문이다. 내가 1년간 차라투스트라에게 배운 것이 있다면, 철학하며 살아가는 삶은 그 자체로 즐겁다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모든 가치를 전도하는 위대한 철학을 노래하는 사람이다. 그 노래를 듣고 있다 보면, 나 역시 그의 철학 행위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이 책을 제 5의 복음서라고 하는 이유는, 니체 스스로 차라투스트라가 인류의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삶의 선물”을 주러 왔다고 말하며, 이 선물이 바로 “철학하라!”는 생성의 명령이다. 철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이기에 니체는 이것이 스스로의 ‘구원’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보았을까? 또한 이 행위가 어떤 것이기에 모든 사람을 위하면서 동시에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라고 말했을까?

   나는 1년간 대중지성 프로그램 안에서 ‘연민’이라는 문제의식을 잡고, 차라투스트라와 나의 사유를 연결하는 글을 써 왔다. 이 공부 과정을 시작할 때만 해도 차라투스트라에 ‘대해서’, 그리고 내 연민의 문제에 ‘대해서’ 보다 많이 알게 되기만을 바랐다. 철학책을 읽으면 삶에 대한 새로운 지혜가 생길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는 정도였다. 철학이라는 자체가 삶을 스스로 바꿔가는 ‘행위’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글을 쓰고 발표를 하고, 고미숙 선생님과 학인들에게 많은 질문과 지적을 받으면서 알게 된 점이 있다. 무언가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마음은 그것을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겉에서 구경하는 행위에 그친다는 것이다. 아무리 철학책을 열심히 읽는다 해도 나는 책과 삶을 구경하는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내 문제의식인 ‘연민’에 대해서 왜 구체적으로 쓰지 않느냐는 지적을 받고는 내가 나 자신조차도 구경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꽤 많이 놀랐다. 내 문제의식을 구체적으로 쓰려면 과거의 기억을 자세히 되짚어야 하고, 그 안에 담긴 상처와 내 인식의 어리석은 오류들을 정확히 보아야 한다. 그걸 보기 싫어하는 나 자신을 인식하면서 나는 나의 ‘상처와 어리석음’을 스스로 연민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 때 차라투스트라는 나에게 말했다.

 

     용기는 더없이 뛰어난 살해자다. 그것은 연민의 정까지도 죽여 없애준다. 연민의 정이야말로 더 없이 깊은 심연이 아닌가. - 같은 책, 제3부 ‘곡두와 수수께끼에 대하여’ p.260

 

   차라투스트라는 삶에 필요한 힘으로 용기와 지혜 두 가지를 말한다. 나는 이 구절을 읽고 용기가 연민을 극복하고 나의 지혜를 만날 수 있는 공격적인 힘이 된다는 걸 알았다. 말 그대로 용기를 내어, 나의 연민 안으로 들어가 기억을 더듬으며 오류를 다듬고 글을 썼다. 그 과정에서 감정이 과하게 느껴져 운 적도 있다. 그래도 내가 잡은 문제의식을 한 번 해결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끝까지 작업을 마쳤다.

   이처럼 차라투스트라와 학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나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열어가는 과정. 이 행위를 하는 시간 자체가 철학을 하는 삶이었다. 철학을 공부한다는 건 어려운 개념과 철학사를 모두 꿰면서 고통스럽게 새로운 인식을 창조해내는 거라고 믿었던 뿌리 깊은 편견이 날아가면서 드디어 공부를 하는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또한 철학책은 어렵기 때문에 내 힘으로 읽어낼 수 없다는 편견도 사라졌다. 차라투스트라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 그 대화를 내 삶에 좋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 나는 어렵다고만 느꼈던 지식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가장 재미있었던 건 나 혼자만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연민’이라는 가치를 기독교 논리 안에서 발견하면서 인류의 문제로 확장해서 볼 수 있었던 점이다. 서양을 이해하는 데 있어 기본 전제가 되면서 근대 통치술과도 밀접한 기독교의 교리, 권력의 작동방식을 공부하는 게 나 자신의 문제를 이해하는 것과 직결된다는 것이 정말 재미있었다. 그러면서 과연 이 세상에 나와 관련 없는 ‘앎’이라는 게 있을지 궁금해졌다. 앞으로 천천히 하나씩 내가 직접 공부하며 나와 세상에 대해 알아 가리라는 비전도 생겼다.

   극복하기 어렵다고만 느꼈던 내 삶의 문제를, 이해하기 어렵다고만 생각했던 세상의 ‘앎’들과 연결하여 스스로 탐구하는 길. 이것이 바로 철학하는 행위이다. 삶을 부정하지도, 저 너머의 초월적 세계로 도피하지도 않으면서 자기 힘으로 스스로의 삶을 긍정하게 만드는 ‘자기 구원’의 길. 차라투스트라는 모든 사람이 이 길을 긍정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가 길을 안내해줄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 길은 스스로 내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생성 의지와 동일한 나의 생성 의지를 가지고 내 삶의 철학을 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모든 사람을 위한 책이지만, 동시에 그 어느 누구도 위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만의 새로운 가치를 생성하는 의지에 동참할 친구를 원하는 책.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이 내게는 참으로 벅차오르는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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