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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금성] 존재의 GPS,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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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희씨 작성일20-01-24 23:42 조회2,7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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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텍스트 / 『주역』 리-라이팅


존재의 GPS,『주역


                          오창희(금요 감이당대중지성)


Ⅰ. 周易, 내가 찾던 ‘매직아이’
Ⅱ. 공자님은 왜, 주역에 그 많은 날개를 달았을까
  1. 세 분 성인의 마음
  2. ‘그 마음’이 통하다
  3. 주역은 날개를 달고
Ⅲ. 삶,비전,GPS 
  1. 내 삶에 ‘비전’을 세우다
  2. 점을 치는 마음, 살리는 마음
  3. 하늘과 땅, 가장 오래된 GPS
  4. 팔괘, 주역의 해석 기반
  5. 64괘 384효에서 삶의 윤리를
Ⅳ. 인간이 없다면




Ⅰ. 周易, 내가 찾던 ‘매직아이’ 
 
내겐 스물한 살부터 지금까지 40여 년 류머티즘을 앓으면서 품게 된 몇 가지 질문이 있다. 백약이 무효이던 투병 초기, ‘언젠가 걸을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하는 걸까, 오지도 않을 날을 기다리며 헛고생만 하는 건 아닐까, 다른 치료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이러고 시간만 보내는 건 아닌가?’,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알’ 수 없던 그때, 그 끝도 없고 답도 없는 의문에 명쾌히 답할 수 있는 눈, ‘무엇이 내 병에 좋은지 꿰뚫어볼 수 있는 눈을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을까’를 간절한 마음으로 묻고 또 물었다.  
  20년 만에 독립도 하고 돈도 벌며 생활인으로 제법 안정을 누리던 무렵, 차츰 이게 다는 아닌 것 같다는 공허함이 파고들었고, 경미한 교통사고 후유증이 1년간의 치료로 이어지면서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때 어떤 책에서, “한가로운 삶에는 반드시 기반이 있어야 하며, 그 기반이란 인간적 성숙이다”라는 글귀를 보는 순간, 아, 내게 이런 기반이 없어서 흔들리는 거였구나, 인간적으로 성숙하면, 돈이 없어도 건강하지 않아도 편안할 수 있구나 싶어서 크게 안도했다. 그 후 ‘인간적 성숙이란 어떤 상태며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하는 게 새 화두가 됐다.
  10년간의 명약 순례를 끝내고, 인공관절 교체로 방향을 바꾼 직후, 다시 관절을 차례로 바꿔야 하나 싶어 암담하던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꼭 나아야 돼? 이대로 살면 안 돼?’하는 물음은, ‘환자’에서 ‘생활인’으로 내 일상을 180도 바꿔놓았다. 2007년, 목욕탕에서 미끄러져 대퇴부 골절로 2년간 휠체어를 타면서 다시 미래가 불안했던 때 갑자기 올라온, ‘왜 바보같이 30년 동안이나 내 몸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지?’하는 자각은 감이당과 접속케 했고, 몸과 삶을 탐구하는 ‘학인’으로 나를 또 한 번 바꿔놓았다. 이 두 번의 전환으로 공부가 생활의 중심이 되면서 나으려 애쓸 때보다 오히려 몸이 더 편안해졌고, 생각이 변해야 삶이 바뀌고 병도 달라진다는 걸 깨달았다. 그 뒤 ‘겪을 대로 겪고 막다른 지점까지 몰려서야 일어났던 생각의 전환, 존재의 변이를 지성의 힘으로 이루어낼 수는 없을까’ 하는 새로운 질문을 하게 됐다.
  이런 질문들을 품은 채, 감이당에 왔고, ‘글쓰기로 수련하기’라는 모토 아래 인류 지성사에 빛나는 고전들을 만났다. 그 중, 『주역』의 입문과정은 특별했다. 본경 64괘 384효를 몽땅 외워 쓰기. 생소한 한자는 차치하고, 그렇게 연결이 안 되는 문장(괘사·효사)들이 하나의 의미 단락(괘)을 이루고, 앞뒤를 어떤 연결사로 이어야 할지 난감한 문장들이 수두룩한 텍스트는 처음이었다. 논리와 이해로는 접근불가. 무조건 외웠다. 간신히 몇 괘 외웠다 싶으면 괘사가 넘나들고 효사가 뒤섞이는 건 기본. 4괘->30괘->64괘로 갈수록 뒤죽박죽. 핸드폰에 녹음하고, 쪽지에 적어서 어딜 가나 들고 다녔고, 눈 뜨면서 잠들기까지 자투리 시간엔 주역을 외웠다. 그러기를 1년. 드디어 64괘를 모조리 외웠다. 그 통쾌함과 뿌듯함이란! 몸으로 찐하게 만나선지 더 공부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점서(占書)로 지성을 연마할 수 있을까 하는 약간의 찜찜함이 남아있었다.
  그 무렵, 「계사전」을 만났다. 공자님은 주역이, 인생사 힘든 문제를 두고 점괘를 뽑아 길흉 판단이나 하는 단순한 점서가 아니라 하셨다. 점서가 아니라면? 도올 선생과 남회근 선생도 ‘계사전’ 강의에서 주역이 동양철학의 최고봉이며, 주역에는 우주와 생명, 자연의 물리법칙, 통치원리, 삶의 이치들이 망라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배우고 이해하면 마음이 편안해져 고통이나 번뇌가 없어지고, 점을 치지 않아도 인생사 모든 걸 훤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아, 주역의 이치를 깨달아 체득하면 내가 바라던 인간적 성숙을 이룰 수 있고, 고도의 지성도 연마할 수 있겠구나. 무엇보다 모든 이치를 꿰뚫어볼 수 있는 눈, 매직아이를 『주역』을 통해 얻을 수 있다니! 
  그간 품어온 질문들이 쫘르륵 꿰어지면서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 이제 흔쾌히 공자님의 가르침 따라 가벼운 마음으로 384효를 가지고 놀아볼 생각이다.


Ⅱ. 공자님은 왜, 주역에 그 많은 ‘날개’를 달았을까

『주역』을 공부하면서 가장 뜻밖이었던 것은 공자님이 점서인 주역을 공부하셨고, 거기다가 열 편의 해설까지 붙이셨다는 사실이다. 이름하여 십익(十翼). 그 중 하나인 「계사전」을 읽으면서 또 한 번 놀랐다. 『논어』의 공자님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본 때문이다. 『논어』의 공자님이 솔직하고 친근하며 제자들과 시시콜콜한 인간사에 대해 토론하기를 즐겨하는 분이라면, 「계사전」의 공자님은 도가들이 말했을 법한 음양을 이야기하고 자연의 이치와 우주의 탄생을 이야기하는 너무도 스케일이 큰 분이셨다. 그러면서 궁금증이 생겼다. 『주역』은 도대체 어떤 책이며, 공자님은 여기에 왜 이렇게 많은 날개를 달아놓으셨을까. 그리고 점서인 『주역』이 어떻게 그 긴 세월을 살아남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까지 날아왔을까 등등. 

1. 세 분 성인의 마음

주나라 역(易)인 『주역(周易)』은 크게 몸체인 역경(易經)과 이를 해설한 역전(易傳)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경의 저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공통으로 언급되는 분은 셋이다. 전설 속의 인물인 복희씨, 후에 문왕으로 추존된 서백 창(西伯 昌)과 그의 아들 주공 단이다. 복희씨가 8괘를, 문왕이 64괘와 괘사를, 주공이 효사를 썼다고 전해진다. 역전은 공자나 공자의 사상을 배제하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는 뜻에서 그 저자가 공자라는 게 통설이다. 
  복희씨는 중국 고대 전설상의 임금인 삼황(三皇) 중 한 사람이며 중국 최초의 황제라고 전해진다. 복희씨가 황제로 있을 때 어떻게 하면 천하를 올바르게 다스릴 수 있을까를 고민했고 그러던 어느 날, 황하에서 머리는 용의 모습을 하고 몸은 말의 모습을 한 신비로운 용마가 나왔다. 그 등에는 쉰다섯 개의 점이 무늬를 이루고 있었는데 복희씨가 그 무늬를 바탕으로 천지가 창조되고 만물이 생성된 원리와 이치를 탐구하였고, 그것을 여덟 종류의 간단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부호로 나타낸 것이 팔괘다. 이것이 주역의 시작이다. 복희씨는 용마에게서 얻은 자연지(自然智)를 바탕으로 문명을 일구기 시작했다. 
  창(昌)은 은나라 말기인 기원전 12세기-11세기 사람이다. 은나라는 고대사회가 흔히 그렇듯이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사회로, 제의[禮]가 통치의 중심이었다. 하늘의 신인 제(帝), 자연신, 조상신을 함께 섬겼고 그들에게 모든 문제를 물어서 결정했다. 이런 물음과 응답 그리고 그것의 해석을 갑골문으로 기록하여 통치의 중요한 자료로 사용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제와 자연신보다는 살았을 때 자신들을 위해 일한 조상신을 섬기는 걸 더 중요하게 여겼고, 조상들이 자신들에게 유익한 행위를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의는 점차 더 촘촘하게 조직되었고 호화로워졌다. 왕이나 제후가 죽으면 보석이나 물건들을 아낌없이 묻었고 적게는 수십에서 수백 명을 함께 묻는 풍습이 있었다. 당시 백성들은 인간이 아니라, 오로지 지배층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제공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조상신의 보호를 받는 대상에 백성은 없었다. 
  그런 시대에 창은 은나라의 서쪽 변방을 지키는 우두머리로 임명되었다. 그 이름 앞에 서백(西伯)이 붙는 이유다. 창은 선조들의 선업을 본받아 노인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어진 자를 우대하며, 밥 먹을 겨를도 없이 백성들을 돌보았다. 그 소문을 듣고 은나라의 폭군 주(紂)를 피해 창에게 귀의한 제후가 40에 달했다고 한다. 이를 경계한 주가 창을 유리옥에 가두고, 창이 소문처럼 성인이 맞는지 시험하겠다며 그의 아들을 삶아 그 국을 먹게 했다. 아들을 삶은 국을 앞에 두고, 창은 자신이 죽으면 천하의 도가 끊어질 것을 우려하였고, 결국 아들의 살점을 먹으면서도, 폭군을 물리치고 천하를 다시 안정시킬 방도를 고민했다. 그 간절한 마음으로 7년간의 감옥 생활을 견뎠으며, 그 안에서 복희 팔괘를 중첩시켜 64괘를 그려 인생사 모든 국면을 담았다. 그리고 각 괘마다 ‘사(辭)’를 달아, 처음 복희씨가 팔괘에 담았던 천지자연의 지혜를 준칙으로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을 안내하고자 했다. 옥에서 풀려난 뒤 그를 따르는 제후들이 그에게 ‘천명을 받은 인군[受命之君]’이라 칭송하며 주를 칠 것을 종용했으나, 그는 아직 천명이 자신에게 내리지 않았다며 끝까지 신하의 예를 지킴으로써 스스로도 그 길을 따랐다.
  주공 단은 문왕의 둘째 아들이자, 무왕의 동생이다. 무왕이 은나라를 치고 주나라를 세운 뒤, 즉위 2년 만에 죽고 어린 조카가 왕위에 올랐다. 그가 성왕이다. 세상 사람 모두 주공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서경』에 실린 연설문-동쪽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면서 했던-에서 주공은 '은왕조 말년에 더욱 비참해진 백성들은 괴로워하며 하늘에 호소했고, 하늘은 온 땅의 백성을 보고 몹시 슬퍼서 은나라의 통치자에게서 천명을 빼앗아 더 자격을 갖춘 주 왕조에게 주었다. 왕은 백성이 길을 잃고 그른 일을 하더라도 가혹한 엄벌로 다스리지 말아야 한다. 왕이 자신의 덕을 겸손하게 돌본다면 백성들은 왕을 본받을 것이며, 이로써 왕은 많은 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성왕이 잊지 말 것을 당부한다. 주공은 그런 마음으로 주 왕실을 중심으로 각 제후국들이 각자의 위치와 힘에 맞는 역할들을 할 수 있도록 꼼꼼하게 규칙을 만들었고, 이에 따라 천하가 다스려질 수 있도록 했다. 심지어는 전쟁조차도 이러한 예(禮)에 따라 수행되었다. 그 뒤 조카인 성왕이 성인이 되자 섭정에서 물러나 봉토인 노나라로 돌아감으로써 스스로 천명을 받드는 모범이 된다. 주공은 이런 사심 없는 마음, 예(禮)가 바로 서서 천하가 태평하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아버지 문왕이 만든 64괘에 각각 효사를 달았다. 이렇게 하여 인간사 중대한 갈림길에서 ‘역’에 그 나아갈 바를 묻는 사람들이 우주자연의 이치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점서인 「역경」이 완성되었다. 

2. ‘그 마음’이 통하다

공자는 주공의 시대로부터 오백여 년 뒤인 기원전 551년,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주 왕실이 그 권위를 거의 잃고 중국 천하가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기 시작한 춘추시대 말기였다. 그나마 명목상으로 유지해 오던 주 왕실마저 힘을 잃고 새로운 질서는 나타나지 않아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주나라 예의 전통이 강한 노나라에서 태어난 공자는 어려서부터 문왕과 주공을 흠모하였으며 배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갈수록 천하는 혼란스러워졌고, 버림받은 백성들은 더욱 살기가 힘들었으며,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는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80이 넘은 노인들조차 추위와 굶주림에 죽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에게 예의를 되살려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공자가 그 전범으로 찾은 것이 주공 시절의 주나라였다. 문왕과 주공의 마음으로 천하를 다스린다면 거기에는 각각의 역할이 있을 뿐 위계나 지배나 예속이 없는, 백성들이 편안한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으리라 믿었다. 
  공자는 오십이 넘어서 자신이 꿈꾸는 예를 펼칠 수 있는 나라를 찾아다녔다. 제자들과 함께 광(匡)땅을 지나던 공자는, 양호(한때 노나라를 주무르던 강패 정치인)로 오인 받아 닷새를 민병대에 포위된 채 죽기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사색이 된 제자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묻자 공자는, “문왕께서 이미 돌아가셨으나 그 문(文)이 여기 있지 않은가? 하늘이 없애려 하셨다면 그것이 어찌 지금처럼 이렇게 남아 있겠는가? 하늘이 원치 않거늘 광 사람들이 나를 어찌하겠는가!”하고 확신에 차서 외쳤다. 그 문은 주례(周禮)에 있었으며, 예란 하늘과 땅을 관찰하고 거기서 인간이 가야 할 길을 찾은 것이다. 그것은 변화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 것이며, 그 원리를 가르치는 것이 바로 역(易)이었다.  
  오백 년을 이어서 공자께 세 분 성현의 ‘그 마음’이 통했다. 공자는 죽간의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주역을 읽었으며, 모든 사람이 주역의 가르침대로 천지자연을 본받아 삶의 윤리를 삼고, 그것을 온전히 실천함으로써 모두가 군자가 되는 세상을 꿈꾸면서 열 개의 날개를 달았다. 그 중 하나인 「계사전」은 역경을 점서에서 철학서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역경에 담겨 있는 우주의 탄생과 만물의 생성 원리를 밝히고, 동시에 역경의 효 하나하나를 분석하면서 아주 구체적인 일상의 국면에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할지를 이야기함으로써 인간의 윤리를 우주 자연의 이치에서 도출하고 있다. 
  이 이치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공자가 오십에 깨달았다는 천명이며, 문왕이 유리옥에서 아들의 고깃국을 먹으면서 64괘와 괘사에 담아내던 천명이었고, 주공이 조카를 도와 주나라를 정립하며 효사에 담아낸 천명이었다. 이렇게 성인들의 '그 마음'이 서로 통하여 『주역』이 탄생했다. 

3. 주역은 날개를 달고

그로부터『주역』은 모든 지식인들의 필수 텍스트가 되었고, 『주역』을 해석하면서 자신들의 사상들을 정립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주역은 중국의 전통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천문, 지리, 악률, 병법, 운학(韻學), 의학, 산술, 연단술 등. 이렇듯 역학이 중국 문화의 베이스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주역이 상, 수, 의리라는 서로 다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과 그 전제가 자연의 이치와 인간 삶의 이치가 같다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시대를 거쳐 20세기까지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성리학도 주역을 바탕으로 한 학문이다. 송대에 들어와 위진남북조와 당나라를 거치며 불교와 도교의 위세에 눌려 있던 유학자들이 유교를 부활시키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이 과정에서 유불도 삼교를 유교 중심으로 통합한 신유교 철학이 성립되었다. 그때 핵심 텍스트가 주역이었다. 북송 시대, 주돈이를 중심으로 주역의 상(象)을 중시하는 학파와 소강절을 중심으로 수(數)를 중시하는 학파, 그리고 호원과 정이를 중심으로 의리(義理)를 중시하는 학파가 서로 경쟁하였다. 남송의 주희는 이런 흐름 위에서 정이의 의리역학을 골간으로 삼되 상수학을 비롯한 여러 역학가들의 관점을 흡수하면서 유학을 형이상학의 절정에 올려놓았다. 주희는 이때 주역이 본래 “복서의 책”임을 환기시키면서, 우주론에서부터 인간사 윤리적인 측면까지를 포괄하는 주역 본래의 모습을 설명하고자 노력했다. 
  문제는 성리학이 조선에 들어와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 20세기 내내 우리는 우주론이 사라진 유학을 배웠다는 것이다. 공자와 주역이 이렇게 깊은 관계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공자님이 말씀하시는 그 윤리는 곧 우주자연의 원리와 이치에서 본받은 것이기에 우주론이 없는 윤리는 반쪽짜리 윤리에 불과하다. 뿌리가 없는 메마른 윤리를 경직되게 받아들임으로써 급기야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이제 다시, 중국 사상의 절정이며 원천인 『주역』이 날개를 달고 많은 사람들에게 날아가길 바라며, 모든 사람이 자연의 이치에 따라 자기 삶을 완성하여 군자가 되는 길을 밝혀주려 했던 공자의 ‘그 마음’으로 돌아가자. 


Ⅲ. 삶,비전,GPS

1. 내 삶에 ‘비전’을 세우다

내 삶에서 ‘비전’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환갑이 막 지난 2018년 겨울이었다. 그 이전에도 이 말을 무수히 들었고 내 입으로 말하기도 했지만 그건 모두 맥락상 그 말이 필요해서 한 것일 뿐, 내 삶 안에는 이 단어가 없었다. 그때까지 내 삶을 이끌어 온 것은 류머티즘이었다. 스물한 살 발병 시점으로부터 30년이 흐른 뒤에야 내 몸을 관리할 방법을 찾다가 감이당에 왔다. 『동의보감』을 시작으로 동서양의 고전들을 읽고 글을 쓰면서, 세상의 이치와 인간의 생리를 아는 게 치료보다 더 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경험하면서 죽을 때까지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인생 최대의 미션은 류머티즘을 잘 관리하는 것, 그로 인해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공부를 어떻게 해 나가야 할까를 고민하던 중 갑자기 어머니가 편찮으셨고 그때 처음으로 어렴풋하게나마 ‘비전’이라는 걸 생각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수십 년 병수발을 하시는 동안,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신 적도, 한탄이나 조바심을 내신 적도, 일상이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신 적도 없을 만큼 굳건하신 분이셨다. 어머니 덕분에 나 역시 독립도 하고 밥벌이도 하면서 살 수 있었다. 그러던 어머니가 95세 되던 2013년 여름, 허리 통증으로 갑자기 자리에 누우시더니 두 달 간 일어나지 못하셨다. 무더위에 체력이 소진되면서, 급기야는 “마음이 자꾸 어디로 갈라칸다” 하시면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찾기도 하고 나와 둘이 사는 걸 무척 불안해하시기도 했다.
  어머니가 불안에 흔들리는 모습은 내게 전혀 다른 질문을 안겨 주었다. ‘죽는 순간까지 평정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질문을 시작으로 ‘병을 다스린다는 것은 살면서 맞닥뜨리는 무수한 상황들, 죽음을 포함한 모든 인생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대할 것인가의 문제 중 하나에 불과한 게 아닌가. 그렇다면 류머티즘을 다스리는 단순하고 협소한 의미를 넘어서는 어떤 길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때서야 비로소 40년간 류머티즘에 묶여 있던 나의 시선이 그 너머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비로소 ‘비전’이라는 개념이 내 삶에 들어왔다. 
  그 즈음 우연히 『주역』을 만나 무작정 외우고 쓰기를 반복하면서 나도 모르게 정이 들었고, 그 뒤 공자님이 쓰신 주역 해설서인 「계사전」을 만났다. 거기서 인간이란 천지 사이에서 하늘을 보고 땅을 살피면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존재임을 알았다. “한 번은 음이 되고 한 번은 양이 되는 끊임없는 변화를 도(道)라 하고 이 이치를 삶에서 구현해 가는 것을 선(善)이라 한다”는 구절은 평소 멀게만 생각되던 ‘도’나 ‘선’을 가까이 느끼게 했고, “괘사와 효사는 사람이 가야 할 곳을 알려준다”는 구절을 읽고는『주역』을 내 삶의 길잡이로 삼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생애 처음으로 비전이라는 걸 세웠다. ‘『주역』을 GPS 삼아 남은 생애는 천지자연의 이치를 탐구하고 그 이치에 따라 살겠다’는. 그러자 갑자기 내 시선이 저 먼 곳을 향하게 되고 하체에는 힘이 들어가고 상체가 펴지면서, 눈도 가슴도 마음도 툭 트이면서 앞이 시원하고 넓어지는 것 같았다. 비로소 내가 어디를 향해 나아갈 것인지 그 방향이 설정되었고 그 후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제는 쉼 없이 이 길을 가는 거다.  

2. 점을 치는 마음, 살리는 마음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우리는 무언가 이루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점을 친다. 그 대상은 주로 결혼이나 취직, 승진, 진학, 질병 치료, 사업 등으로 사적인 욕망과 관련되는 것들이다. 그래서 점집을 공공연하게 찾기보다는, 스리슬쩍 다녀오거나 점 자체를 부끄러운 일로 치부한다. 그런데 어째서 점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공자님께서 『주역』에 10편의 해설서를 쓰시고, 이 시대의 석학이라는 도올 선생님은 『주역』을 동양사상의 베이스이자 정점이라 칭송하는 건가. 거기에는 20세기 근대교육을 받은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히스토리가 있다.  
  고대 사회에서는 전쟁을 하거나 사냥을 할 때 점을 쳤다. 언제 전쟁을 해야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는지, 언제 어디로 사냥을 가야 공동체 구성원이 먹을 음식을 마련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당시 개인의 생존은 공동체의 생존과 운명을 같이 했고, 천지자연의 변화와 직결되어 있었다. 자연스레 나를 살리는 길이 곧 너를 살리는 길이자 공동체와 천지만물을 함께 살리는 길이었다. 그러니 주역을 점치는 책이라고 할 때 그 점의 기본 원리는 무언가를 생하는 것, 즉 낳고 살리는 것이고 이와 관련되는 인간사를 물을 때 점을 쳤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공자님이 쓰신 계사전에도 기록되어 있다. “낳고 낳는 것을 일러 역이라 하고[生生之謂易]”,(계사 상전 제5장) “하늘과 땅의 큰 덕은 생하는 것이다[天地之大德曰生]”라고.(계사 하전 제1장) 
  이러한 히스토리를 가진 점이 시나브로 지극히 사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것은 서양과학이 절대적인 것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그때부터 우리의 삶은 천지자연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상태로 표류하기 시작했다. 현대과학은 자연을 물질로 보지 않는 모든 담론을 미신으로 치부한다. 이러한 과학이 자본주의와 만나자 부를 증진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 덕분에 인간의 부는 놀랄 만큼 증진되었고, 육체노동에서 해방되었지만, 세상은 이전보다 훨씬 복잡해졌고 첨단 과학기술이 만들어내는 온갖 기기들은 생각지 못한 사건사고를 발생시키며 우리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자 과학지상주의, 물질지상주의에 제동이 걸렸고, 다시 천지자연과의 연결고리를 이으려는 시도들이 일어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첨단 과학인 양자역학이 그 선두에 있다. 천지자연과 인간이 별개가 아니며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밝혀내고 있는 중이다. 양자물리학에서는 물질을 이루는 최소 단위인 전자가 그 ‘무엇’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했다. “물리학자들은 이 ‘무엇’을 전자장(電磁場)”이라 부르고, “전자는 실체가 아니라 전자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라 본다. 즉 “전자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자장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형상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면 “우리가 보는 물질은 그 자체로 실체가 아니라 그 뒤에 숨어있는 장의 일부분, 형상의 결과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김상욱,『떨림과 울림』, 동아시아, 65-66) 요컨대 모든 사물이 입자의 모습을 띠기 이전에는 파동으로 존재하다가 그것이 뭉쳐져 형상을 이루면 입자가 된다. 따라서 사물은 모두 입자이며 동시에 파동이라는 것이다. 세상 만물이 ‘기’의 이합집산이라는 주역의 원리와 다르지 않다. 물리학자가 “양자역학이 발견한 것은 어찌 보면 동양의 오래된 지혜였다.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개념이 혼재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의 본질이라는 거다”라는 말로 이를 뒷받침해 준다.(앞의 책, 129)  
  양자역학에 따르면 미시세계에서 완벽한 정지 상태는 불가능하다. 정지하고 있는 물체는 단진동 운동을 하고 있다. 이러한 단진동의 모임이 파동이다. 미시세계와 거시세계가 우리의 감각적 범위에서는 큰 차이가 있겠지만 그 근본에서는 다르지 않다. 질량이 있는 모든 물체 주변에는 중력장이 펼쳐진다. 미시세계에서 모든 존재는 떨고 있고 이러한 떨림이 중력장을 흔들면 중력파가 발생한다. 결국 우주만물은 이 파동으로 인해 서로 연결된다. 이런 원리에 의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마음도 우주와 파동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리고 뇌과학에 의하면 뇌가 인체 부위 중 가장 에너지를 많이 소비한다. 그만큼 마음의 힘이 세다는 말이다. 만약 산만하게 흩어지는 마음을 모은다면 그 힘은 더 막강할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는 시공간적인 경계가 없다. 그러니 간절한 마음으로 점을 친다면 천지가 응답한다는 게 미신이 아니다. 간절한 마음이 일으키는 파동과 천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기’의 파동이 공명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잠깐 점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자. 점이 무엇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면 간절하지 않을 수 없고 간절해지면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간절함이 두 번 일수는 없는 법. 그래서 주역에서는 한 가지 물음에 딱 한 번만 점을 치라고 한다. 원하는 답을 들을 때까지 유명 점집을 순례하는 우리들과는 무척이나 다르다. 또한 『서경』의 기록을 보면 “그대에게 큰 의심이 있거든, 그대의 마음으로 헤아리고, 경사들에게 헤아리게 하고, 서인들에게 헤아리게 하고, 점을 쳐서 헤아리게 한다”고 하였다.(『서경강설』,이기동 역해,성대출판부,410) 판단이나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는 왕이 먼저 생각해 보고, 그래도 판단이 안 설 때는 대신들에게 물어보고, 그래도 어려우면 백성들에게, 그래도 안 될 때 비로소 천지에 물으라고 한다. 
  점을 치는 과정도 만만하지 않다. 일단 새벽에 일어나 목욕재계로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한 다음, 산가지 50개에서 하나를 뽑아 태극을 상징하는 몫으로 놓아두고 49개를 가지고 점을 친다. 먼저 천·지를 나누고 지에서 인간의 몫으로 가지 하나를 뽑아 손가락 사이에 끼운 뒤, 다시 사계절로 나누고 윤달을 계산하는 복잡한 과정을 18회 반복해서 하나의 점괘를 뽑게 된다. 오롯한 마음으로 과정에 집중하지 않으면 금세 마음이 산만해져서 처음부터 다시 반복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따라서 점을 치는 과정은 그 자체로 수행의 과정이며, 천지와 회통하는 걸 체험하는 순간이면서, 인간이 천지 사이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낳고 살리는 존재임을 몸으로 체득하는 시간이다. 복채 얼마 들고 가서 점치는 사람의 입만 쳐다보며 그저 원하는 답을 듣기를 바라는 요즘 우리들의 점과는 차원이 다르다. 
 
3. 하늘과 땅, 가장 오래된 GPS

GPS는 인공위성을 이용한 글로벌 위치추적 시스템이다. 이 GPS의 힘을 빌리면 세계 어디서든 현재 내가 서 있는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고, 그걸 알고 나면 어디로 가야 할지를 결정할 수 있다. 『주역』 역시 현재의 내가 처한 상황과 위치를 파악함으로써 그 다음 스텝을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지를 알게 해 준다는 점에서 GPS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주역』은 어떤 법칙 위에서 어떤 시스템으로 작동되는 GPS일까. 『주역』에 의하면 우주는 기로 가득차 있으며, 기가 아직 분화되지 않은 상태가 태극이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거기서 음과 양이 생겨나는데, 양을 하늘로 음을 땅으로 나타낸다. 우주에는 이 두 기운밖에 없다. 그래서 간단하고 쉽다. 진리란 자고로 그래야 한다. 그래야 모든 사람이 따를 수 있으니까. 이 두 가지 기운의 움직임으로 일체만물이 생겨난다. 그래서 「계사전」에서도 말하고 있다. “역은 하늘과 땅으로 기준을 삼”기 때문에 “하늘과 땅의 모든 도를 꿸 수 있”으며, 천지 사이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의 이치를 보고, 땅의 이치를 굽어 살”피는 것이 타고난 운명이라고.(『김용옥 선생님의 주역 계사전 강의록』, 52쪽)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가야 하는 길이고 갈 수 있는 길이다.
  하늘[天]은 광대무변한 무형의 영역이며, 땅[地]은 구체적인 생활 현장이다. 고로 산다는 것은 두 발로 땅을 딛고 구체적인 활동을 하되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며 이상을 품는 것이다. 이상과 현실의 균형 잡기, 그것이 인간의 길이다. 이것이 무너질 때 존재는 위기에 봉착한다. 땅이라는 현장에만 매몰되면 가야 할 방향을 잃게 되고, 하늘이라는 이상에만 치우치면 현장을 잃고 떠돌게 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 이치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앞에서 천지의 큰 덕이 생생이라 했다. 생생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일상을 맑게 꾸려야 한다. 그래야 기가 청정해지고 생명을 살릴 수 있다. 먼저 거처를 청결하게 해야 한다. 쓰레기가 쌓이면 탁한 기운이 머무른다. 지나친 인테리어 역시 기의 순환을 방해한다. 그리고 아무리 사소한 물건이라도 소중히 여겨야 하고 지나친 육식이나 과식을 피해 몸의 기가 탁해지는 걸 피해야 한다. 동양의 모든 수행이 청소, 절약, 소식, 절식을 기본으로 하는 이유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삶의 기본기를 너무 하찮게 여긴다. 자기 방 하나 청소하기를 싫어하고, 끊임없이 먹고 먹어서 성인병이 없는 사람이 드물 정도다. 일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돈만 많이 번다면 무슨 일이든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나에게도 좋고 남에게도 좋은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못한다. 이뿐만 아니다.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살기는 하는데 그것이 나를 살리는 길인지 더 나아가 남도 살리는 길인지를 모르고 살아간다. 상황에 따라 이것이 옳기도 하고 저것이 옳기도 하고 이것도 괜찮고 저것도 괜찮을 때도 많은 것 같아 헷갈린다. 이럴 때 그것을 판단할 기준이 없다.  
   『주역』에서는 그런 경우,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고 한다. 하늘은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먹구름이 몰려와도 천둥 번개가 쳐도 곧 맑은 모습을 드러낸다. 구름이나 저녁노을이 아름답게 펼쳐져도 붙들지 않는다. 하늘의 이런 모습을 본받아 나의 윤리로 삼는다면 내가 선택한 그 현장이 어떤 곳이든 어떤 일을 겪든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한다. 실연을 당하든 사업에 실패를 하든, 지금 여기의 상황을 현장으로 삼고 다시 살아가는 것이다. 이 원리를 잊으면 아무리 돈을 잘 벌어도 소위 성공이라는 걸 해도 불안하다. 잘 되면 유지하지 못할까 불안하고 못 되면 영영 안 될 것 같아 불안하다. 나 역시 스무 살 시절 나의 불안이 류머티즘 때문인 줄로만 알았는데 돌아보면 그게 아니었다. 그저 낫고자 하는 열망만 있었지 삶의 방향을 잡아줄 비전이 없었기 때문에 불안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일도 하고 돈도 벌면서 일상을 혼자서 꾸려나갈 때도 수시로 뭔가가 허전했고 알 수 없는 불안이 함께 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래서 쉼 없이 나아가되, 어디로 가야 할지 그 방향을 안내해 주는 천·지라는 GPS가 필요하다.

4. 팔괘, 주역의 해석 기반

우주만물이 기의 이합집산이라고 보는 『주역』에서는 자연의 이치와 인간 삶의 이치가 다르지 않다고 본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에서 통치의 원리, 삶의 원리를 도출하는 근거다. 인간은 천지 사이에서 자신의 길을 찾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라고 했다. 여기서 천·지·인 삼재(三才)라는 개념이 나오고, 이 셋이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재료이자 변화의 동인으로 작용하는 질료가 된다. 이걸 상징하는 부호가 소성괘이며, 세 개의 막대기로 표시한다. 세 개의 막대기는 각각 음이 될 수도 양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경우의 수가 8이다. 여기서 건/태/리/진/손/감/간/곤 팔괘가 만들어진다. 이 여덟 가지 기운은 다양한 자연 현상으로 드러난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풀어보자. 태극에서 음양, 음양에서 사상, 사상에서 팔괘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우주창조의 과정이기도 하다. 빅뱅이 일어날 때 거기서 나온 원소들이 물질을 만들고 물질이 이합집산하면서 행성들이 생겨나고 지구가 탄생했다. 지구에 행성이 부딪치면서 떨어져 나간 조각이 달이 되고 지구와 달 사이에 인력이 작용하면서 균형을 이루게 되었고 하늘과 땅이 생겼다. 이 과정에서 기운들이 움직이면서 물과 불이 생겨나고, 바람과 우레가 생기자 우레가 흔들고 바람이 흩트리면서 산과 연못이 만들어졌다. 이로써 천지 변화의 기본이 되는 팔괘가 탄생한 것이다. 『주역』에서는 이러한 자연의 물리적 작용에서 삶의 윤리를 도출하여 다양한 상황들을 해석하는 기반으로 삼고 있다. 
  ‘건’은 양이 셋 모인 것이고, 그 덕성은 굳건함이다. 이걸 잘 드러내는 것이 하늘이다. 여기서 말하는 굳건함이란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 하늘의 광대무변함이 보여주는 무한한 상상력, 무엇이든 낳을 수 있는 창조력과 생명력, 그리고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해와 달의 성실함을 상징한다. ‘태’는 두 개의 양 위에 하나의 음이 자리하고 있으며 여기서 기쁨의 덕성을 도출하고 그것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게 연못이라고 보았다. 당시 사람들에게 연못은 가뭄에는 만물을 길러주는 생명수도, 연꽃이 만발한 꽃밭도, 물고기와 다양한 식물들이 서식하는 먹거리 제공처도, 즐거운 놀이터도, 가장자리에 정자를 지으면 벗들과 공부하는 기쁨을 누리는 공간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데서 기쁨이라는 덕성을 연상했을 듯하다. ‘리’는 두 양 안에 하나의 음이 들어있는 모습이다. 불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반드시 어디에 붙어서 주변을 환히 밝힌다. 이런 속성에서 걸다, 붙다, 밝히다의 의미를 담아 인간이 이루어낸 문명을 상징하기도 하고 인간이 가는 길을 밝혀주는 길잡이로 해석하기도 한다. ‘진’은 위에 있는 두 음을 하나의 양이 아래에서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하나의 양이 두 음을 뚫고 거침없이 나아가는 모습에서 우레를 연상할 수 있다. 또한 천지를 뒤흔드는 상황이 오면 미리 놀라고 두려워함으로써 늘 자기 삶을 돌아보고 조심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놀람, 두려움의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손’은 진과는 반대로 위로 두 개의 양 아래에 하나의 음이 엎드려 있다. 여기에 공손의 덕목을 담았고 그것을 잘 드러내는 것을 바람이라 보았다. 바람은 천하 곳곳에 들어가지 못할 데가 없다. 높은 곳이든 낮은 곳이든 넓은 곳이든 좁은 틈새든. 여기서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낮추고 자신에게 알맞은 자리를 찾아서 거하는 태도를 도출했다. ‘감’은 리와 반대로 두 개의 음 안에 하나의 양이 있는 모습이다. 연못의 물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어 기쁨을 상징하는 데 반해, 감은 밤길을 가다가 뜻밖에 맞닥뜨리는 물구덩이라는 의미로, 예상치 못한 고난, 험난함을 의미한다. 이런 고난에 빠졌을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을 비우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힘을 기르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감을 지혜로 해석하기도 한다. ‘간’은 두 개의 음을 양 하나가 위에서 덮고 있는 모습이다. 여기서 힘차게 나아가다가 딱 멈춘다는 의미를 읽었고, 거기서 우레처럼 움직일 때도 있어야 하지만 때로는 산처럼 멈출 줄도 알아야 한다는 윤리를 찾아냈다. ‘곤’은 음 셋으로 이루어진 형상이다. 가운데가 끊어진 모습에서 어떤 것도 다 품을 수 있는 포용력이라는 의미와 함께, 건의 생명력과 창조력을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는 실천력, 그리고 구체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현실감각을 이끌어냈다.  
  팔괘로부터 나올 수 있는 윤리는 무궁무진하다. 자연 현상에서 인간 삶의 윤리를 끌어내고 해석하는 능력이 곧 세상을 보는 안목을 결정하고, 그것은 다시 자기 삶의 폭과 깊이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내 삶의 현장과 괘를 접목하는 과정에서 괘의 의미를 끊임없이 창조하고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윤리들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5. 64괘와 384효에서 삶의 윤리를   

64괘는 팔괘가 변화무쌍하게 상호작용함으로써 만들어내는 경우의 수에서 비롯된 것이고, 384효는 각 괘가 겪게 되는 단계가 여섯이라는 데서 나온 숫자이다. 64*6=384. 여기서 우리가 이끌어낼 수 있는 윤리는 다양하다. 그 중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지침으로 삼을 만한 몇 가지를 소개한다. 
  첫째, 우리가 겪는 모든 사건은 관계와 배치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이걸 보여 주는 것이 바로 64괘와 384효라는 전체 구성이다. 이는 인간사 어떤 사건도 모두 이 64괘 384효로 수렴되며, 우리는 그 매트릭스 안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말해 준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겪는 고통과 괴로움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내가 주체가 되어 겪는 나만의 고유한 사건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주역에서는 사건이 있지 주체가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주체는 그러한 사건의 결과물로 존재할 뿐, 그 사건이 지나가면 거기서 만들어진 주체도 사라진다. 흡사 양자물리학에서 입자가 파동의 결과물로 존재할 뿐 파동의 움직임이 바뀌면 입자는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다가 또 다시 어떤 조건들이 형성되면서 하나의 사건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거기서 또 다른 주체가 탄생한고 사건이 소멸하면 거기서 탄생한 주체 또한 소멸한다.
  따라서 주역에서는 자신의 기질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그 기질을 가진 존재가 어떤 자리에 있는가, 그리고 어떤 기질(음 또는 양)을 가진, 어떤 자리(位)에 있는 누구와 코드가 맞는가(應),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자(比)는 어떤 기질을 가진 자이며 그와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이 사건 전개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지금 겪은 이 사건은 우리가 거기에 집착하지만 않으면, 관계와 배치가 달라지면서 또 다른 사건으로 전환된다. 이런 이치를 알게 된다면, 내가 했다고 잘난 척하거나 누구 때문이라고 원망하며 사건을 흘려보내지 못하고 상처로 부둥켜안고 원망과 자책으로 생명에너지를 소모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둘째,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점이다. 64괘의 순서가 이를 잘 보여준다. 중천건, 중지곤으로 시작한 64괘는 수화기제, 화수미제로 끝이 난다. 여기서 기제(旣濟), 즉 물을 건너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미제(未濟)로 끝이 났으니, 다시 다리를 걷어 올리고 물을 건너야 한다. 이게 자연의 이치이자 인생사 이치다. 모든 게 변하는 상황에서 처음 계획한 그대로 완성되는 일이 있을까도 의문이지만, 혹 이루어졌다 해도 그 다음에는 또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그렇다면 무엇을 완성이라 할 수 있는가. 같은 주제로 강의를 해도 청중에 따라 장소에 따라 날씨에 따라 또 나의 컨디션에 따라 매번 다른 강의가 펼쳐진다. 그러니 완벽한 상태를 설정한다 그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다. 특히 자본주의는 있지도 않은 완벽한 행복과 성공이 있는 것처럼 선전하고 사람들은 그곳을 향해 달려간다. 살자고 하는 일에 죽자고 뛰어드는 꼴이다. 무언가를 애를 써서 완벽하게 만들어 놓으면 그때부터 고생 끝 행복 시작이 될 줄로 믿고 달려가지만, 이는 과정이야 어떻든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온갖 편법이 동원되고 사건 사고들이 터지면서 삶이 탁해진다. 완성되었나 싶었는데 다시 시작이다. 그러니 매사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그만큼을 하면서 무슨 일을 하든 그 과정 속에서 이런저런 즐거움을 맛보며 생기 있게 살 일이다. 
  셋째, 겸손이 최고의 미덕임을 깨우쳐 준다. 주역은 사건의 전개 과정에 따라 길/흉/회/린/무구 등의 해석 코드를 갖고 있다. 길과 흉의 중간에 후회와 반성을 의미하는 ‘회(悔)’와 후회와 반성에 인색한 ‘린(吝)’이 놓인다. 회는 길에, 린은 흉에 더 가깝다. 무구는 허물이 없다는 것. 길과 회 중간쯤에 놓인다. 64괘 모두 흉과 회, 린을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지산겸 괘만은 흉도 회도 린도 없다. 모든 효가 길하거나 길함에 가깝다. 겸손하면 모든 것이 길하다는 뜻이다. 땅 속에 산이 있는 형상을 한 겸괘는 자신에게 덕이 있으면서도 그 덕에 대한 인정과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인정욕망의 화신인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다. 이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다음 구절을 읽어 보자. “귀신은 가득찬 것을 해치고 겸손한 것에 복을 준다”(정이천 주역, 글항아리, 348) 좀 섬뜩하지 않은가. 귀신이 해치기 전에 많이 가졌다면 덜어내어 순환시키고, 부족하면 그대로 만족하며 살아야 할 것 같다. 그러면 자연 천지의 모든 것들은 정체됨 없이 순환의 리듬을 타고 흐르고 또 흐르면서 만물을 낳고 살리게 되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겸손함이야말로 『동의보감』에서 말하는 양생의 기본 원리인,‘줄이고 또 줄이라’는 것과도 통하고, 낳고 또 낳는 것을 일러 역이라 한다(생생지위역)는 역의 원리에도 딱 들어맞는 덕목이다. 이상 세 가지 만이라도 삶에 적용할 수 있다면 현대인들이 겪는 거의 모든 억압과 불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Ⅳ. 인간이 없다면  

이 글을 쓰는 데 일 년이 걸렸다. 처음 『주역』이야말로 ‘내가 찾던 매직아이’라고 생각했을 때, 『주역』의 용도는 아직 내 개인사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했다. 모든 이치를 꿰뚫어볼 수 있는 눈을 『주역』을 통해 가질 수 있겠구나 싶었을 때, 그 눈은 내게 가장 좋은 선택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눈, 지극히 개인적인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눈이었다. 그런 정도의 인식으로 2학기 『주역』의 저자와 시대배경을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정보는 넘쳐나는데 그걸 한 편의 글로 꿸 수가 없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어떻게 해야 할까. 아, 이대로 정보를 나열할 수밖에 없겠다 싶어, 분량을 한참 초과한 상태로 발표 자료를 준비했다. 발표일 아침, 답답한 심정으로 세수를 하다가 가슴에서부터 한 줄기 전율이 느껴지면서 울컥했다. 갑자기 공자님의 마음이 너무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스무 살 그 시절 병상에 누워 막막함에 시달렸던 내게 『주역』의 이치를 깨우쳐 주시려고 그 많은 날개를 달아놓은 공자님의 그 마음이! 공자님의 마음은 우주만물과 연결되어 있었고 그러기에 오늘 나에게 와 닿을 수 있었다. 그제서야 ‘공자님은 왜, 주역에 그 많은 날개를 달았을까’라는 제목으로 글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 후 『주역』을 읽으면 공자님의 마음이 느껴졌고, 「계사전」에서도 전에는 보이지 않던 구절들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그 중의 한 구절, 구비기인 도불허행(苟非其人 道不虛行). 천지의 이치대로 세상이 구성되고 그렇게 흘러간다 해도 ‘인간이 없다면’ 도가 저절로 헛바퀴 굴러가지는 않는다는 공자님 말씀. 『주역』의 관점에서 우리가 겪는 모든 사건은 관계와 배치의 산물이다. ‘나’와 ‘너’라는 주체가 사건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주체는 그러한 사건의 결과물로 존재할 뿐이라는 것.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어떤 괘의 어느 단계를 지나고 있을 것이고, 나의 생각과 행동 역시도 64괘 384효의 매트릭스 안에 있는데, 인간이 없다면 도가 저 혼자 굴러가지 않는다는 건 무슨 말씀인가. 우리가 겪는 사건은 수많은 인연조건들이 중중무진 겹쳐져서 일어나는 것인데 그것을 나와 너가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믿지 말라. 그렇다고 결정론에 빠지지도 말고. 인연조건 그 자체를 내 힘으로 바꿀 수는 없지만, 그것을 능동적으로 활용하며 살아가라는 말씀. 결국 ‘인간이 없다면’ 우주자연의 이치 또한 없으며 이것의 활용 여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말씀이리라.
  이러한 인연조건의 능동적인 활용법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주역』. 시시때때로 판단과 결정의 기로에서 갈 길 몰라 헤매는 현대인들에게 이 이상 가는 길잡이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가장 오래된, 최첨단 GPS『주역』, 이 고전을 내 존재의 GPS로 활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또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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