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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목성] 업 들여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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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산진 작성일21-05-01 18:55 조회1,5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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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 들여다보기

 

 

 

최희진(목요대중지성)

 

 

왜 그렇게 생각했지?


  작년에 감이당에서 두 명의 학인과 함께 청소년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었다. 몇 달이 지나자, 한 명이 자기 길을 찾아가겠다고 팀에서 나갔다. 이러다 프로그램을 시작도 못해보고 끝나는 건가 싶었다. 마음이 급해졌고, 준비되지 않은 프로그램들을 막 짜나갔다. 그러자 남은 한 명의 동료와 부딪치기 시작했다. 일이 잘 진행되지 않는 상황에서 동료와 갈등까지 하게 되자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밀려왔다. 이걸 계속 진행해야 하나 여기서 그만두어야 하나, 준비 과정도 이렇게 힘든데 프로그램을 시작하면 얼마나 더 많은 사건사고가 있을까, 그러면 감당하기 어렵지 않을까, 차라리 시작하기 전에 그만두는 게 낫겠다, 라고 생각했다. 얼마 못가 우리는 프로그램을 흐지부지 접었다.

 

  뭔가를 하다가 힘이 들면 그만둘 수도 있고, 때로는 그만두는 게 계속하는 것보다 낫기도 할 것이다. 힘이 든다는 건 그 자체로 상황을 돌아보고 자신을 점검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메시지이기도 할 테니까. 이 사건에서 내가 보려고 하는 지점은 힘들어서 그만둔 행동이 아니라 그 행동을 하기 직전에 습관처럼 일어난 생각이다. 바로 비관적인 전망이다. 과거에도 숱하게 뭘 하다가 힘들어서 그만두기 직전이면 꼭 거쳐 가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중론을 읽다보니 내 생각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왜 비관적 전망은 거듭해서 돌아올까, 과거는 어째서 완전히 흘러가버리지 않고 결정적인 알맹이(?)를 남기고 갈까, 궁금해졌다.

 

 

인식의 한계, ()


  목성 1학기에 정화스님의 중론을 읽었다. 새롭고 어려웠다. 하지만 중론에 따르면, 책을 읽을 때 활동하는 건 책에 대한 감각 지각과 책에 대한 습관적인 인식 내용”(378)이다. ‘습관적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대로 과거의 습관적인 인식 내용들은 일회만 나타나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대물림되며 이어진다. 이것이 의(). 새로운 책을 읽을 때든 낯선 사람을 볼 때든 이 인식틀은 자기가 인식하는 것의 바운더리를 결정한다. 이변이 없는 한, 인식은 의()의 한계 내에서만 이루어진다. 인식틀이 활동한다는 건 과거에 몸과 마음에 축적된 모든 경험 내용들”(93)이 현재화된다는 걸 의미한다.

 

  인식틀인 의()가 과거의 경험 정보의 총체라고 할 때, 과거란 어느 시점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걸까? 정화스님에 따르면, 그것은 의 과거, 부모님의 과거, 그 부모님의 부모님과거에서 우주의 역사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개인과 사회가 함께 만들어낸다. 유전자와 신경 세포, 환경과 학습의 결과이기 때문에 이미 형성된 인식의 패턴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업이란 활동과 그 활동이 남기는 힘을 말합니다. 실상은 활동이 있고 남는 여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남는 힘들의 모임인 업이 현재의 관계를 자신에 맞게 재구성하기 때문에, 여력이 활동이 되고, 그 활동이 다시 여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들의 활동의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업의 개념이 현재의 활동보다는 과거의 습관적인 인식들이 상속된 의()의 활동[]과 그것이 표현된 몸과 입의 작용이라고 하는 데에 더 큰 뜻이 있습니다. (용수 지음, 정화 풀어씀,중론, 법공양, 378)

 

 

 

 

  과거의 경험 내용들이 축적된 의()의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습관적인 인식, 그리고 그것이 표현된 말과 행동이 업()이다. 업은 활동과 그 활동이 남기는 힘까지를 포함한다. 활동이 남기는 힘은 현재를 업이 다시 활동할 수 있게 한정짓는 역할을 한다. 여력이 다시 과거의 습관으로 이루어진 활동을 불러오고, 그 활동이 다시 의()가 활동할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한다. ()와 업의 끝없는 순환이다. 따라서 자기 생각과 말과 행동에 대해서 ?’ 라고 묻지 않는 이상, 이 제한된 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가 어떤 것을 알게 하는 인식틀로 기능하면서 동시에 그것 외에 다른 것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한계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정된 인식틀로 자신의 세계 즉, ‘’, ‘나의 것을 구성하기 때문에 다른 해석틀과 마주칠 때는 불편함을 느낀다. ‘저 사람은 왜 저래? 일이 왜 뜻대로 안 돼? 세상이 왜 이래?’ 라고 분노한다. 그런 불편함이 일어나는 지점이 자기 인식틀의 한계다.

 

 

생각의 활동, ()


  내 경우, 상황이 힘들어지고 다른 사람과 부딪칠 때 인식틀은 이렇게 작동했다. ‘지금도 이렇게 힘든데 앞으로는 더 힘들 거야. 절대로 감당하지 못할 거야. 빨리 그만두는 게 나아.’ 이러한 인식은 세 단계로 나누어진다. 지금의 상황이 앞으로 더 나빠질 거라고 단정하는 단계. 그리 되면 버티지 못할 거라고 단정하는 단계. 당장 그만둘 결심을 하는 단계. 하지만 상황이 앞으로 더 나빠질지, 좋아질지, 고만고만할지, 나빴다가 좋았다가를 반복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또 힘들어도 배우는 게 많을지 모르고, 일이 잘 풀려도 아쉬움이 남을지 모르고, 해봐야 뭐라고 말할 수 있는 거지, 생각만으로 앞일을 예상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거 없이 생각하고 그 생각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데 익숙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근거 없는 생각에 습관적으로 매여 살 수 있을까. 습관적인 생각의 활동이 업”(381)이기 때문이다. 업은 미세하다. 미세해서 매여 있는 줄도 모를 정도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작은 것이라고 하니 금방 바꿀 수 있을 것도 같다. 하지만 그 생각들은 습관적으로 자아를 세우면서 욕심내고 분노하도록 길들여진 활동”(387)이다. 자기중심성, 욕심, 분노, 그리고 그것에 스스로 매여 있음을 모르는 어리석음까지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강력하다.

 

 

  처음에 청소년 프로그램을 만들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왔을 때, 나는 기대에 부풀었다. 이런저런 걱정이 들긴 했지만 잘 해낸다면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고, 공부로 경제 활동도 할 수 있고, 방향성 없이 하던 공부에 비전도 생길 수 있고, 모든 게 한 번에 해결될 수 있는 도약대처럼 보였다. 그런데 상황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고, 동료들도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니 힘들고 화가 났다. 그럴 때 익숙한 비관적 전망으로 끌려갈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면 어땠을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능력을 인정받고, 경제 활동을 하고, 미래가 보장되는 거였는지,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이다. 그런 욕망을 채울 거라면 감이당이 아니라 다른 데가 훨씬 더 적합하다는 건 금방 나오는 답이었다. 내 욕망 따로, 공부 따로 하다 보니 공부에 방향성도 안 생기고 힘도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내가 넘어진 지점을 잘 들여다보니 거기에 중요한 것들이 많이 묻혀 있었다. 습관적인 생각은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덮어버리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습관적인 생각에 매여 있음을 보고, 그것을 이어나가지 않는 힘을 기르는 것이 업을 반복하지 않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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