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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목성] 분별을 거두고 지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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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희자 작성일21-05-01 19:02 조회1,4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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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을 거두고 지켜보기

 

 

 

진희수(목요대중지성)

 

 

  나는 자신의 의견을 마치 모두의 의견인 것처럼 말하거나 누군가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단정 짓는 말에 대해 반감이 심하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안에서 싸늘한 반응이 올라온다. 그리고 그 반응이 여과 없이 상대에게 전달되면 조금씩은 다르지만 대체로 관계가 불편해진다. 그러면 나는 그 불편함을 못 견디고 상대의 눈치를 보며 그걸 풀기위해 전전긍긍한다. 이런 과정들이 내게는 못마땅하다. 비슷한 방식으로 마음 끓이는 횟수가 점차 줄어드는 추세이기는 해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누군가 나와 다른 의견을 말할 수 있고, 그 의견이 과하다 싶으면 나는 불편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그럼 상대도 당연히 나에게 불쾌한 감정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런데 상대가 보이는 반응에 그럴 수도 있지가 아니라 얼른 풀기위해 온 신경을 쏟는 이유는 뭘까? 기존의 관계가 틀어지는 것에 대한 불안함이 이유인 것 같다. 불안함 아래에 나는 좋은 사람, 경우에 바른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싶은 마음과 구설에 오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상대의 차가운 반응은 나에게 알람 신호를 켜는 것이다. 관계가 틀어질 수 있으니 경계하라는.

 

  그럼 다시 그 상황이 오면 그 말을 안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해 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 말은 여전히 필요하고 해야 할 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보면 필요한 말은 하면서도 좋은 사람이란 평가를 받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내게 좋은 사람이란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부드럽게 말하는 사람이다.

 

 

내가 생각한 좋은 사람은 존재할 수 있을까

 

  중론의 관법품(觀法品)을 풀어쓴 글에서 정화스님은 법이란 보고 듣고 맛보고 생각하는 모든 대상”(용수 지음정화 풀어씀, 중론, 법공양, 398)라고 말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책상위에 놓인 노트북,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내가하는 생각, 그리고 생각하는 도 포함한 모든 것이다. 법이라 불리는 이러한 인식대상들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인식되지 않는 특징이 있다. ‘인간이라는 조건, 특히 이런 몸과 마음과 신경회로를 가진 라는 조건에 따라 인식한다. “그렇게 인식할 수밖에 없도록 조건 지워진 것”(399)의한 인식이다 즉, 객관적인 외부가 아닌 내가 만든 대상에 대한 인식이라는 거다. 그리고 인식된 대상은 다른 것들과의 차이를 통해 무엇이라고 이름 붙여진다. 이후 이름에 맞추어 보고 듣고 생각하게 되므로 같은 것을 보고 듣는다고 느낀다. ()현재의 앎을 대물림하고 있는 기억된 정보”(400)라고 하는 이유이다.

 

  내가 생각한 좋은 사람은 어느 인연 조건에서 처음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좋은 사람이라 이름 붙여지고 기억되었는데 내게는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부드럽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법을 인식할 때, 나의 조건으로 대상을 인식하는 것처럼 상대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내가 부드럽게 말을 한다고 해도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결정은 상대의 조건이 더 크게 작용할 것이다. 그렇게 보면 내가 생각했던 좋은 사람이란 것이 언제나 존재하기란 어렵다.

 

 

좋은 사람이라는 이름의 양면성

 

 

이와 같은 정보는 생명활동을 하는 데에 대단히 중요한 요소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된 정보의 법을 어떤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필요 없이 바로 그렇게 생각되도록 조건 지어놓은 생존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생각된 습관들의 총상인 정보가 인식의 경향성이란 뜻에서 업이라고 부르는 이유이지요. 이와 같은 인식 결과만 놓고 본다면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으나 그 과정에서 좋고 나쁨, 옳고 그름 등의 분별이 더해지고, 이웃들과 비교가 이루어지면서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불만족을 낳는 모태가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입니다. (같은 책, 400)

 

  관계의 알람이라고 여겨진 그 불안함은 생명활동을 하는데 유용한 생존의 경험이었을 것이다. 특정 상황에서 바로 그렇게 생각되도록 조건 지워진 습관은 불안함을 통해 내 행동을 돌아보고 수정하여 함께 사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회복되게 한다. 게다가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은 대체로 환영받으니 세상을 살아가는 든든한 빽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그 결과만 놓고 본다면 그리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대상에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아진다. 다른 것과 구별해야 하고, 나쁜 사람이 전제 되어있다. 판단이 들어가기 시작하며, 현실의 나는 이름이 된 좋은 사람과 비교된다. 이름은 변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하기에 현실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며 그 괴리로 불만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름은 생명활동을 편리하게 유지하는데 매우 유리한 요소다. 함께 살아가는데 매번 새로 이름을 짓는다면 얼마나 피곤할 것인가. 또한 이름을 통해 무언가 고정된 실재가 있다는 착각을 일으킨다는 데에서는 불리한 요소다. 그 이미지에 붙잡혀 괴로움이 생기고 있으니 말이다.

 

 

고정된 좋은 사람에서 벗어나기

 

법을 관찰한다는 것은 우선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사건들을 그 자체로 보는 것입니다. 좋은 것도 없고 싫은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지켜보고 또 지켜볼 뿐입니다. 그러다보면 현상 그것에 대해서 바라거나 바라지 않는 마음이 사라지면서, 지금까지의 가치매김과 다른 삶을 보기 시작합니다.(같은 책, 400)

 

 

 내가 생각했던 좋은 사람이란 것이 특정 인연에서 만들어진 이름이었고, 그것은 생존에 필요했으며 동시에 나를 그 말에 가두어 괴롭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니 틀어진 관계를 풀기위해 내가 행했던 일련의 과정들을 달리 볼 수도 있겠다.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나의 행위는 무언가 달라진 현실을 반영하려고 애쓴 것으로 말이다. 어떻게 말하면 상대가 좀 더 받아들이기 쉬웠을까? 나는 어떤 마음으로 상대에게 그 말을 한 걸까? 등으로 나를 돌아보는 것은 그 때의 상황에 맞는 좋은 사람을 새롭게 이름 짓기 위한 노력이 아니었을까. 상대의 평판에 달려있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 계속 변하는 관계가 드러나는 좋은 사람으로 말이다.

 

  며칠 전 직장에서 비슷한 상황이 또 생겼다. 입바른 나의 지적에 상대는 투덜거리며 냉랭한 태도를 보였다. 그래도 조바심 내지 않으며 조금은 무심히 지켜보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자연스레 말을 걸자 그도 기다렸다는 듯 선뜻 대답을 했다. 관계를 회복하려고 온 신경을 썼던 경험과 비교하면 결말은 좀 싱거웠다. 그런데 그 시간이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한 번 이런 경험을 하고나니 조금 욕심이 난다. 동의하기 어려운 상대의 의견에 발끈하는 것에 대해서도 분별을 멈추고 지켜보고 싶어졌다. 바로 판단하는 대신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보면서 말이다. 왜냐하면 그 판단에는 또 다른 고정된 혹은 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 인식이 객관적인 게 아니라 내가 만든 것이라면 조금 숨을 고르고 반응해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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