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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수성] 향유고래에게 말을 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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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윤계사 작성일21-07-07 18:34 조회1,65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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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유고래에게 말을 걸고 있다.

                                       - 모비딕을 읽고 -

  

이서윤(수요 대중지성)

 

 모비딕1.JPG

 

안전한 선택

길을 잃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없으면 난 어지간해서는 움직이지 않는다. 관계를 맺을 때도 가치관이 상충하지 않는 안전한 타인이라는 믿음이 생기지 않으면 선뜻 다가서질 못한다. 그런데 이슈메일은 이런 안정이라는 권태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이유로 변화무쌍한 바다를 향해 떠난다. 내 눈에는 무모해 보이는 그의 선택이 과연 어느 지점에 가닿는지, 그 경험이 그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안전한 것만을 고집하는 내 견고한 틀은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인지 이슈메일을 통해 되짚어 보고도 싶었다.

 

이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바다를 알기만 하면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언젠가는 바다에 대해 나와 비슷한 감정을 품게 될 것이다.허먼 멜빌, 모비딕, 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2011, 전자책 19.

좋아. 그럼 세계를 보는 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혼곶을 돌아서 세계를 더 보고 싶나? ? 지금 자네가 서 있는 곳에서는 세계를 볼 수 없나?”(같은책 169)

 

펠레그 선장은 피쿼드호의 선원이 되려고 찾아온 이슈메일에게 굳이 포경선을 타고 먼 바다로 나가야만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냐고 신랄하게 묻는다. 순간 당황했지만 어떻게든 피쿼드호의 선원이 되고 싶었던 이슈메일은 고래잡이에 대한 자신의 열정과 세상을 보고 싶은 갈망에 대해 열심히 어필했다. 숨쉬기가 버거울 만큼 육지 생활이 답답했던 이슈메일은 살기 위해 바다로 나가야겠다는 절박함 외에 분명한 비전이 있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적어도 출발 시점엔 그렇게 보였다. 펠레그 선장이 에둘러 지적했던 것처럼, 이슈메일은 현실도피를 목적으로 포경선을 타보기로 한 것이라 짐작했고, 거대한 고래에 대한 막연한 동경만 조금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이슈메일이 비범하게 느껴졌던 이유는바다를 알기만 하면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언젠가는 바다에 대해 나와 비슷한 감정을 게 될(같은책 19)이라며,바다가 가진 역동성이 나를 자유롭게 할 거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실망을 기다리며

초등학교 때부터 난 어른들의 얘기를 잘 이해하는 아이였고 주로 칭찬을 받으면서 자랐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단지 또래들보다 생일이 빨라서 그랬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키워보니 애가 애답지 않으면 도리어 밉상이던데 그 시절 어른들은 먹고사는 것이 바빠서였는지, 자신들을 귀찮게 하지 않고 혼자 알아서 잘하는 애들을 편애했다. 어린 맘에 또래보다 잘한다는 칭찬이 기뻐서 난 자꾸만 어른들 기색을 살폈다.

  피아노 학원에 보내달라고 졸라서 신나게 배우러 다니다가 체르니 30 과정에서 어려워지면 피아노에 빠지니 공부를 안 하게 된다는 핑계를 대고 그만뒀다. 예상대로 엄마는 기특하다며 칭찬했다. 피아노에 흥미를 잃은 것이 아니었는데도 뭐든 늘 잘하는 애라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 봐, 그래서 엄마가 실망할까 봐 그렇게 했다. 그런데 사실, 고비를 넘어서는 나의 근기 없음을 은폐하려고 적당한 이유를 찾아 합리화한 것일지도 모른다. 지난 일들은 대부분 잊고 사는데 유난히 선명한 기억이 남은 걸 보면, 뭔가 찜찜한 가식이 있었던 게 분명하고 매사 이런 식이었다. 차라리 어른들이 내 앙큼한 가식을 눈치채고 엄청나게 실망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은밀히 품고 살았던 기억이 난다. 이젠 어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어린 시절과 비슷한 패턴을 반복하고 있는 걸 보면, 쓴소리에 계속 귀를 닫고 산 것이라고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

 

벽 앞에서 쓴소리가 들려왔다.

안전한 선택만을 한다는 건, 말하자면 평가가 좋을 것 같은 선택만 한다는 뜻이다. 모험을 꺼리는 건, 예상할 수 없는 변수에 세련되게 대응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안 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이 견고한 고집이 올해 감이당에서 글쓰기를 배우며 조금씩 깨지고 있다고 느낀다.

 

오늘날에도 참고래라면 서슴지 않고 덤벼들 만한 지성과 용기를 가진 고래잡이들 중에는, 솜씨가 미숙하거나 능력이 없거나 겁이 많아서 향유고래와 싸우기를 꺼리는 자들이 있다. (...)보트 뱃머리에서 그 고래와 맞서본 자만이 가장 실감 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허먼 멜빌, 모비딕, 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2011, 전자책 152.

 

모비딕에게 패한 자들의 공포는 온갖 터무니 없는 소문을 만들어냈고 증폭된 공포심은 고래잡이들의 용기를 앗아갔다. 그래서 결국 향유고래 사냥 자체를 꺼리게 만들고 그저 전해지는 모비딕의 전설을 따뜻하고 안전한 곳에서 듣는 것으로 만족하게 했다.

  소문만 무성하던 감이당 글쓰기를 실제 맞닥뜨리니 솜씨가 미숙하고 능력이 없는(같은책152)참고래잡이가 된 기분이다. 감이당에서 하는 수련으로서의 글쓰기는 완전한 변화를 의미한다. 일기를 통해 일상을 스케치하는 글쓰기에서 약간의 변주를 하는 것만으로는 공부도 수련도 되지 않는다. 의역학을 본격적으로 배워보고 싶어서 시작한 공부인데 생각보다 비중이 큰 글쓰기 필수과정이 있어서 솔직히 좀 당황했다. 미리 알았다면 잘할 자신이 없으니 이래저래 망설이다 결국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그 고래와 맞서본 자만이 가장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같은책 152)다는 말만 믿고, 난 향유고래 같은 난공불락의 글쓰기를 상대로 고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신기한 건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쓴소리가 당황스러우면서도 내 안의 에로스를 자극한다고 느낀다. 확실하고 안전한 틀 안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불편하고도 신선한 동기부여다. 그리고 낯설고 불편해도 우선 부딪쳐보자는 마음이 드는 걸 보면 경직된 태도도 뭔가 좀 달라지고 있는 것 같다. 어설픈 고군분투의 현장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지 않으면 난 결코 내 한계를 넘지 못할 것이고, 늘 그랬던 것처럼 적당한 명분을 찾아 핑계를 대고 유유히 사라질 것이다. 더는 그렇게 안 살기로 했다.

 

너의 정체를 보여다오.

항해가 끝나고 나니, 이슈메일이 가닿은 어떤 지점이나 경지가 아닌 그의 태도에 눈길이 갔다. 그가 불확실한 바다가 내포한 위험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던 건, 내 안에 있는 미지의 힘을 발견하게 하고, 그 힘은 생을 추동하는 에로스가 된다는 걸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변수가 공부가 될 거라는 열린 마음으로 내 전부를 건 진솔한 태도였기에, 자연도 그 뜻에 감응하여 이슈메일을 살게 한 것이라 여겨졌다. 야만인 퀴퀘그가 가진 생명을 살리는 본성만큼, 문명인인 그가 터득해가는 성찰의 힘도 중요하다는 메시지로 읽었다. 본성은 바다에 수장된다 해도 훼손되지 않겠지만 로고스는 문명 속에서 계속 살아 움직여야 한다.

  의도하지 않았던 수련으로서의 글쓰기와 마주하며 이슈메일의 선택과 항해의 결과가 남긴 의미를 어렴풋이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슈메일이 삶의 열정과 지혜를 미지의 바다에서 얻는다면, 나에게 그 예측 불가능한 현장은 거대한 향유고래로 느껴지는 글쓰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고백하자면 남들보다 잘하고 싶다는 욕심보다 제대로 하고 싶다는 바람이 더 간절하다. 공부를 시작한 후에도 원대한 비전이 운명처럼 나에게 손 내밀어 주길 넋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상태로 정작 목적지는 설정하지 않은 채 수단의 장단만 분석하고 궁구하고 있었다는 자각을 하고 있다. 한계를 절감하고 감이당 글쓰기의 혹독한 전설에 대해 소문만 키우는 존재로 남을지도 모르지만, 알 수 없는 이 세계를 붙들고 씨름하면서, 시간도 허기도 잊는 내 상태를 지금은 흥미롭게 관찰하며 길을 모색하고 있다.

  수성 2학기 수업 마지막 날, 글쓰기는 결단코 당신을 끊임없이 애태울 거라는 예언을 들었다. 그 좌절의 순간마다 도망가지 않으려면 좀 더 구체적이고 예리한 질문을 찾을 필요가 있다는 조언도 있었다. 그렇게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함께 공부하면서 비범한 현장을 만들고 서로에게 고무되는 순간을 경험했다. 항해를 떠나기에 앞서 이슈메일이 찬양하던 그 바다는, 감히 이곳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몇 달 동안, 만날 때마다 온통 고래잡이 얘기만 했더니 친구가 나무로 향유고래를 깎아준다고 했다. 불과 얼마 전에 투박하고 거친 감나무 토막을 본 것 같은데, 어느새 고래 형태를 갖추어 가고 있다. 옆에 앉아서 나무가 변해가는 모습을 구경하며 내내 글쓰기를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꼴을 만들어가는 경이로운 과정 이전에, 친구는 나무토막이 무엇을 향해 갈 것인지 먼저 좌표 설정을 하고 칼을 들었다. 간과했던 엄연한 이 사실을 앞에 두고 가만가만 향유고래에게 말을 걸고 있다. 친밀한 벗이 되고 싶어 너에게 가고 있으니, 너무 애태우지 말고 부디 너의 정체를 보여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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