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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목성] 명상, 그래도 계속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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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희자 작성일21-12-29 21:17 조회1,0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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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그래도 계속하기

 

진희수 (목요 대중지성)

 

 

  담마코리아에 다녀온 이후 매일 아침, 저녁으로 명상을 하고 있다. 두 달이 지난 지금쯤이면 익숙하게 매일 거뜬히 해 냈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시간은 확보했으나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생각이 원숭이 마음처럼 이리저리 날뛴다. 알아차리고 호흡으로 돌아오기를 잠깐, 다시 생각에 끌려 다닌다. 명상을 마치며 하는 자애명상에서 나의 공덕을 함께 나누기를이라고 말하기 민망할 지경이다. 그래서 이번 에세이를 통해 명상의 시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살펴서 지금 흐트러지는 상황을 이해해 보고 싶다. 베르그손이 정신과 신체의 관계에 대해 설명한 내용을 바탕으로 명상의 경험을 풀어보려 한다.

 

 

명상의 벽을 넘다

 

  명상을 위해 왕복시간을 포함 12일의 시간을 내는 게 쉽지 않았지만 가고 싶었다. 3학기 세미나 시간에 읽었던 고엔카의 위빳사나 명상과 로버트 라이트의 불교는 왜 진실인가가 결정적이었다. 명상을 통해 고정된 실체는 없다는 걸 경험한다는 것도 좋았고, 마음이 고요해지면 내 안에 켜켜이 쌓여있는 부정적 감정들이 올라와서 그걸 볼 수 있다는 것도 끌렸다. 내게 명상은 20분 이상 지속하기 어려운,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다닌 학교에서는 명상이 하루 일과의 주요한 부분이었고, 부모들도 함께 공부하고 명상을 했는데 내겐 그 시간이 늘 어려웠다. 명상을 위해 앉아있는 것을 포함하여 이후에 소감을 나누는 과정에서 뭐라 말할지 모르겠고, 나만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힘들었다.

 

  그런데 10일간 모든 자극이 차단된 상태에서 오로지 명상만을 한다는 것이 궁금했다. 그리고 다녀온 선생님들의 얘기를 들으니 나도 어쩌면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까다롭게 느껴지는 입소 절차와 코스의 진행 방식은 정교하게 잘 설계된 프로그램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3일간 코 밑과 윗입술의 삼각형에 집중하는 아나빠나(들숨날숨)를 하면서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걸 느꼈고, 이후 감각을 관찰하는 위빳사나를 시작했다. 명상을 길게 하니 다리가 너무 아파 조금씩 움직이기도 했지만 때론 아딧타나(강한 결심, 움직이지 않고 1시간 명상하기)에 성공하기도 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에 그 날의 법문을 들으면 내가 과정을 잘 따라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기계적인 반복의 시간

 

  집에 돌아오자 가족들은 내게 다른 사람 같다고 했다. 일단 열흘간의 침묵으로 목소리가 쉽게 높아지질 않았고, 주변의 자극에도 쉽사리 동요되지 않았다. 그 상태는 일주일 정도 이어진 것 같다. 명상을 꾸준히 하기에 내심 내가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기대를 했는데 특정 상황에 화를 내거나 흥분하는 것은 그리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계속 명상을 하면서 호흡하고, 손바닥 발바닥에서 진동을 느끼고, 머리에서 발끝으로 훑어 내려오면서 순서대로 감각을 관찰하는 기계적인 행동이 반복되었다. 진행 도중에 다른 생각이 들어 순서를 놓치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그러니 끝나고 나면 찜찜한 느낌이었다. 담마코리아에서 배운 대로 하고 있는데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걸까?

 

  가장 큰 차이는 외부로부터의 자극이다. 이미 일상으로 돌아온 이상 매일 만나는 사람들과 사건들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는 없다. 집에서 직장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들은 나의 정신을 마구 헝클어 놓는다. “나의 현재는 나의 관심을 야기하는 것이  고, 나를 위해 살고 있는 것이며, 말하자면 나의 행동을 촉발하는 것” (앙리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아카넷, 236) 이므로 명상 중에 다른 생각들이 들어오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음식을 포함하여 외부 자극이 극도로 차단된 담마코리아와는 상황이 다르다. 나는 다른 생각에 끌려 다닌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곤 무언가 만족스럽지 않은 마음이 들며 마무리를 한다.

 

 

반복의 분해와 재구성


  베르그손은 물질과 기억에서 물질이란 이미지들의 총체이며 그 가운데 우리 신체는 특별한 이미지라고 말한다. 이는 물질을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진 무엇으로 보는 게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계속 변해가는 것으로 본다는 의미이다. 집은 누군가 사용하지 않으면 망가진다든지 가만히 두었던 사과가 썩어가는 걸 보면 그 말이 이해가 된다. 나 또한 10년 전의 나와 같지 않다. 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순간적으로 잘라낸 단면을 이미지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물질들로 구성된 세계란 이 이미지들이 겹쳐져 이루는 흐름이다. 이런 세계 속에서 개체의 형태를 지닌 동식물 등의 생명체를 포함하여 우리 인간도 이미지이고, 각자의 신체를 중심으로 다른 이미지들과 상호작용을 한다는 의미에서 신체는 특별한 이미지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무언가와 접해서 알아차리는 지각은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내가 나와 분리된 대상을 인식하는 게 아니다. 지각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운동하는 나의 신체와 운동하는 대상들이 겹쳐져서 만들어지며, 따라서 나의 신체는 모든 것을 지각하는 게 아니라 나와 상호 영향관계에 있는 것을 지각한다.

그런데 지각을 통해 무언가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이미지들 외에 더 필요로 하는 게 있는데 그것이 기억이다. 지각에 기억이 개입되면서 재인식하는 과정을 식별이라고 한다. 내가 바라보는 저것을 고양이라고 부를 때, 이미 보는 행위와 고양이라고 불렀던 과거가 같이 작동을 한다. 그 자동적인 식별의 과정은 생명체로 하여금 적응을 가능케 하고, 거기에는 습관 기억이 관여한다. 습관 기억은 암송할 때처럼 동일한 노력의 반복에 의해 만들어지며 신체에 새겨진다.

 

 

사람들이 습관은 노력의 반복에 의해서 획득된다고 말한 것은 옳았다. 그러나 반복된 노력이 언제나 같은 것을 재생산 한다면, 그것은 무엇에 소용이 되겠는가? 반복은 진실로 우선 분해하고, 그 다음에는 재구성하고, 이렇게 해서 신체의 지성에게 말을 건네는 효과를 갖는다. 반복은 매번의 새로운 시도마다 감추어진 운동을 발전시킨다. 반복은 지각되지 않고 지나쳤던 새로운 세부사항에 관해 매번 신체의 주의를 요청한다. (같은 책, 193)

 

 

  내가 기계적인 반복이라고 느꼈던 방석위에서의 관찰은 자세히 생각해 보면 늘 똑같지는 않았다. 그 날의 나의 상태, 방안의 공기, 감각들의 다양함 등을 생각해 보면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기계적이라고 느낀 것은 그 미세한 차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세한 차이는 어떻게 인지할 수 있을까? 베르그손은 분해하라고 말한다. 대상과 멀리 떨어져 대충의 윤곽만을 보는 게 아니라 아주 가까이 다가가 순간을 넓게 펼치는 것이다. 그런 매번의 시도가 감추어진 운동을 보게 하고, 이 반복의 과정을 통해 본질적인 것이 드러난다. 이렇게 분할하고 분류하여 재구성하는 일련의 과정을 신체의 지성에게 말을 건넨다고 표현하는 것 같다. 반복 없이 어쩌다 하는 명상으로 이 미세한 차이들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주의적 식별

 

 주의적 식별 역시 운동들에 의해서 시작한다그러나 자동적 식별에서 운동들이 지각을 연장하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유용한 결과들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이며따라서 그것은 우리를 지각된 대상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데 반해주의적 식별에서는 반대로 대상의 윤곽을 강조하기 위해 운동들이 우리를 대상 앞으로 데려간다. (같은 책, 172)

 

  반복을 분해하기 위해서 내게 필요한 것은 주의이다. 내가 명상을 기계적으로 반복한다고 느낀 것은 대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두루뭉술하게 공통점만을 지각하는 자동식별의 과정으로 볼 때였다. , ‘이렇게 다른 생각을 하면서 명상을 하면 무슨 소용이 있지?’ 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했던 것 같다. 명상을 자동식별의 과정으로 보니, 유용성을 따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명상이 유용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담마에서 명상이 끝나고 평온했던 이유는 유용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무언가 집중해서 관찰하는 그 시간이 좋았다.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생존하기 위해 즉각 반응을 하며 살아가는 존재에게 유용성과 무관하게 앉아서 자신의 감각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하루 두 번의 반복은 그 자체로 의식에 영향을 줄 것이다. 몸의 구조와 마음의 구조가 접해서 생기는 감각은 유쾌하든 불쾌하든 어느 정도 지속했다 사라진다. 이를 통해 내 몸이라고 불릴 만한 고정된 무엇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매일 경험한다면, 일상에서 를 고집하고픈 순간에도 조금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다만 주의를 놓칠 경우에는 늘 동일한 라는 패턴을 반복할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분석하는 지성은 세상을 실용적 관점에서 구분해 주지만 불행히도 세계를 있는 그대로, 그 자체로 보게 하지는 못한다. “우리의 오성은 창조하거나 구성하는 기능이 아니라, 분리하고 구분하고 논리적으로 대립시키는 특정한 기능(302)”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사실이라고 부르는 것 달리 말하면 지성의 판단은 그 순간에 직접적 직관에 나타나는 대로의 실재가 아니라, 실천적 관심들과 사회적 삶의 요구들에 실재를 적응시킨(305)”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직접적 직관이라고 베르그손이 표현한 것은 시간이 개입된 흐름으로서의 세상, 나눌 수 없는 불가분적 연속성에 대한 직관(305)”이다. 우리는 신체를 가지고 있기에 자기의 경험 속에서 세계를 분절하면서 살아가지만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통째로의 흐름이다. 이를 지속이라고 한다. 이 때의 지속은 시간이 계속 흐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통째로의 흐름이란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의 연속 속에 있다는 것이다. 흐름 속에 있는 나 역시 다른 모든 것과의 연결 속에 있다.

 

 

계속 읽고 계속 생각하고 계속 명상하기

 

  베르그손은 이런 지속을 파악하는 것이 직관이며 이를 위해서는 철학이 필요하다고 한다. 나는 이걸 명상의 과정에 적용해 보고 싶다. 처음에 아나빠나로 호흡에 집중하여 통찰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통찰 과정에서 주의 깊은 분석을 통해 감각의 미세한 차이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다시 집중의 힘으로 그 지성을 넘어 라고 부를만한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나의 한 순간은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있음을 직관으로 깨닫는 과정이라고 말이다. 힘겹게 여기까지 와서 보니 나의 고민은 명상 1단계에서 벌어지는 지극히 일반적인 일이었다. “두서없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생각을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집중을 함으로써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목격하게” (달라이 라마, 우리가 명상할 때 꼭 알아야할 것들, 불광출판사, 126) 된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명상은 계속 되고 있었다.

 

  베르그손의 지속개념으로 보면 라는 것 역시 신체를 갖는 하나의 흐름이면서 전체의 흐름 속에 존재한다. 나의 한 순간에 만물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당연히 라고 부르는 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를 깊은 명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지속은 직관을 가능하게 한다.

 

  달라이라마는 올해 여든 일곱 번째 생일에 비폭력과 자비를 실천하며 살겠다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실천을 권했다. 그 선물을 받은 나는 오늘이 쉰네번째 생일이다^^ 동영상을 보며 나도 생일을 맞아 친구들에게 난 앞으로 이렇게 살겠고 이게 나의 선물이다라고 얘기하고 싶다.

 

  지난 감이당의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이 곳에서의 질문들과 활동들 덕에 나의 정신적 영역은 크게 확장되었다.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실재하는 게 아니며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배웠다. 법화, 즉 이름 지어진 것들을 어떻게 실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지를 중론으로 배웠고, 비트겐슈타인을 통해 이해한다는 것은 연관들을 보는 것임을 알았다. , 유식에서 식()이란 나라는 인식주체가 대상이라는 객체를 만나는 게 아니라 그 관계성이라고 배웠다. ‘라고 굳건하게 믿었던 것들이 흔들리고 있고, 달리 생각되고 있다.

 

  막상 결심을 얘기하려니 부끄럽기도 하지만 생각만 하는 것보다 말로 표현하면 그걸 지키기 위해 애쓸 것이고 게다가 에세이로 표현한 그 결심은 함부로 무시할 수 없을 테니 말하기로 한다. 올 해 나의 선물은 주의 깊은 태도로 정신적 삶을 고양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다음의 문장을 매일 읽고, 생각하고 명상할 것이다.

 

지각이 그리거나 번역한다고 간주하는 것은 우리 신경계의 상태들이다. 그러나 신경계는 그것에 영양을 공급하는 유기체 없이, 유기체는 그것이 호흡하는 환경이 없이, 이 환경은 그것이 젖어있는 지구 없이, 지구는 그것이 주위를 선회하는 태양 없이, 살아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더 일반적으로 하나의 고립된 물질적 대상이란 허구는 일종의 부조리를 내포하는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이 대상은 자신의 물리적 속성들을 자신이 다른 모든 대상들과 유지하는 관계들에 빚지고 있으며, 자신의 규정들 각각을, 따라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자신이 우주 전체 속에서 점하는 위치에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책,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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