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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목성]관찰하고 가다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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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석영 작성일21-12-29 22:59 조회1,074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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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하고 가다듬기

 

김석영(목요 대중지성)

 

공부가 뭐길래

공부 공동체에서 공부를 시작한 지 올해로 5년째, 나는 재작년부터 많이 아팠다. 내가 하다 병이 난 그 공부가 입시공부도 고시공부도 아닌 인문학 공부라는 데에서 할 얘기가 좀 생긴다. 주변 사람들은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하면 그렇게 아프냐고 물었다. 친구들은 말라가는 나를 보며 대체 네가 하는 공부가 뭐냐고 물어왔다. 민망했다. 여기서나 입을 떼 보자면, 내가 하는 공부는 늘 잘 살기 위한공부였다. 주로 삶의 전제를 발견하는 철학책, 몸과 자연을 탐구하는 책을 읽었다. 내가 하는 공부는 그렇게 세상의 이치를 살피고, 기존의 삶의 방식을 조금이라도 그 이치에 맞게 변화시키고자 하는 거, ... 라고 설명하고 싶었으나 버벅거리며 눈알만 굴릴 뿐. 내가 생각해도 그런 공부를 열심히해서 몸이 아팠다는 게 영 앞뒤가 안 맞는 듯 했다.

 

비결정성의 지대, ‘생각의 공간

나의 병은 화병이었다. 분노와 억울함이 쌓여 있고 바깥과 순환, 소통이 안 되는 상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친구와의 싸움? 선생님께 혼난 일? 이별?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은 됐으나 이렇게도 저렇게도 전부 설명은 안 됐다. 시시각각 A가 잘못했냐, B가 나빴냐, 내가 잘못했냐 하는 판단만 달라질 뿐이었다. 어떤 서사든 남들도 나도 납득 가능한 것으로 하나 잡아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임의적이고 일부는 이라는 것을, 그런 서사화가 오히려 분명히 바꾸어야 할 무언가를 반복하도록 내 눈을 가리리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공부라는 것 자체를 잘못 상정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공부가 무엇인지 여러 번 스스로 정의를 내려보고 싶었으나 잘 되지 않았다. 그러다 베르그손이 물질과 기억에서 사용한 비결정성의 지대라는 용어를 들었을 때, 이것으로 내가 생각하는 공부를 말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베르그손은 물질과 기억에서 인간의 의식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를 탐구한다. 그는 우리의 의식이 물질들 간의 결합, 혹은 개체 간 작용-반작용을 주고받는 운동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의 의식은 아메바가 주변의 자극(작용)에 의해 몸을 움직이는(반작용) 활동이 복잡해지며 자극과 반응 사이에 틈이 생긴 것일 뿐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미물들과 인간을 구분하는 (예컨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메바는 외부로부터 어떤 자극을 받으면 즉각적으로, 거의 결정되어있는 어떤 움직임을 보인다. 한데 고등생물로 갈수록 외부에서 받는 자극과 그 자극을 되돌려보내는 행위 사이의 결정성이 줄어든다. 예컨대 인간은 어떤 자극을 받고 행위를 하기 전에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게 정말 유리할까?’하는 고민을 할 수 있다. 이처럼 작용과 반작용 사이의 틈에 의식이 자리한다. ‘비결정성의 지대.

그래,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는 것.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도 문제들을 신중히 살피고 내 선택대로 살기 위해서가 아닐가? 돌아보면 그렇다. 공부는 내게 세상의 요구, 혹은 자본의 부름에 즉각 반응하지 않을 수 있는 틈이었다. 공부를 시작할 때도 나는 백수였는데, ‘얼른 취직을 해야 해!’하는 요구에 즉각 반응하지 않을 수 있었다. ‘2-30대 여성은 이런 모습이어야 해!’하는 요구에서도 살짝 떨어져 있었다. 그러는 대신 어디로 가야 하지? 무얼 추구해야 하지?’를 나름대로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렇게 다른 삶을 실험해볼 수 있는 공간이 내겐 공부였다.

 

행복을 위한 길 찾기

인간의 인식 체계가 동물의 작용-반작용 체계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는 베르그손의 주장은 이전까지의 관점과 비교해보면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너무나도 평등하게 바라보는 시각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말 이후로, 사람들은 인식 능력이 개개인의 주체들에게 신성하게 부여된 능력이라 믿어왔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베르그손이 인간을 동물과 같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인간의 광대한 비결정성의 지대를 인간만의 고유한 정신적 삶의 가능성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인식체계가 아주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고도로 복잡화되어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개체 자신을 뛰어넘는 사유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이 중요하다. 그는 개체성을 뛰어넘는것을 정신적 삶이라고 말했다. 이는 그냥 생각을 많이 하는 것, 판단을 날카롭게 하는 것과는 다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부분이 내가 공부를 하면서 놓친 부분, 어쩌면 완전히 잘못 생각한 부분이었다. 많이 알고 많이 생각하면, 옳고 그른 것을 확실히 가를 줄 알면 최선인 줄 알았던 나는 베르그손 식으로 말하면 정신적 삶의 언저리에도 가보지 못했다.

나는 개체성을 단단히 붙잡고, 나와 외부를 더 세세히 분석하고 파악하려고 했다. 나에 대해 깊이 관찰하고 살피면 나를 알 수 있을 것 같았고 외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 저 사람, 이 공간, 저 책, 이러저러한 사건들을 골똘히 생각하면 잘 알 수 있고 나와 맞는 것과 맞지 않는 것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옳고 그름을 열심히 갈랐다. 내가 책을 보는 것은 세상에 대한 많은 데이터를 쌓는 일이었다. 세상을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다. 어떤 틀이 더 맞을까? 좋은 것, 그리고 내게 맞는 것을 많이 알아야 했다. 그래야 더더욱 그에 부합하며 살고, 더더욱 행복해질 테니까. 오답은 잘 걸러내야 했다. 좋은 것만 선택하며 살기에도 바쁜데 틀린 것, 혹은 애매한 것으로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됐다. 하지만 완벽한 무언가를 찾는 게 쉬울 리 없다. ‘완벽은 아닌 주변에 대한 불만족과 분노는 점점 커져갔다. 골똘히 생각한 결과인 만큼 그 판단과 감정에 대한 내 확신은 어마어마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은 이런 지점에 이르렀다. 그냥 맛있는 거 먹고 유튜브 보는 게, ‘내가그게 더 좋다면, 이런 것들과 공부의 차이가 뭐가 있을까? 나는 내게 좋은 것을 어디에서든 찾을 수 있었고, 한순간에 내가 왜 공부를 했었는지를 잊어버렸다. 공부를 하며 경험한 말로 설명되지 않는 많은 순간들이 있었겠지만 지금 내 언어의 한계, 의식의 한계는 이 정도였다. 여기서 뭔가 바꾸지 않고 계속 노력한다면 같은 벽을 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신체와 우주적 기억

베르그손의 뒤집힌 원뿔 도식은 내가 무얼 놓치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며, 인간의 정신을 활용하는 완전히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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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손의 뒤집힌 원뿔도식

 

그는 생명체의 의식 체계를 뒤집힌 원뿔 모양의 도식으로 나타냈다. 이 도식은 물질의 평면 P에 맞닿아 있는 꼭지점 S, 밑바닥 AB를 갖는 원뿔이 거꾸로 연결된 모양을 하고 있다. 여기서 S는 우리의 신체이고 원뿔 ASB는 우리 기억의 총체이다.

기억의 원뿔이 우리의 신체 S에 연결되어 있는 것은 우리 신체가 물질 차원에서 진동하는 방식, 즉 행위하는 방식과 기억이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우리가 외부세계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 때, 우리는 기억의 원뿔에서 특정한 층위의 기억을 현재로 가져와 재생한다. 그리고 그 작동의 기억은 또다시 원뿔에 새겨진다. 우리가 의지적으로 어떤 기억을 끄집어오는 일은 드물기 때문에 사실 기억의 특정한 층위가 재생된 결과로 우리의 반응이 나온다고 말하는 것이 더 맞다. 다른 층위의 기억을 가져오면 우리는 외부에 다르게 반응할 것이며, 우리가 습관과 다른 반응을 하는 것은 습관과는 다른 층위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 기억의 원뿔은 어디서 온 것인가? 우리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으면 된다. 우리 각각의 개체들은 각자 신체를 가지기에 서로 떨어져 어떤 접점도 없는 존재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태어난 것은 우주 전체와 분리된 무언가, 우주에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가 어디선가 뿅! 하고 생겨난 것이 아니다. 40억 년 전 우주에 생명체가 생겨난 시점부터 무수한 생명들이 생겨나고 죽었다. 다르게 말하면 우주의 물질들이 다양하게 이합집산하며 무언가를 조형했다가 해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도 우주의 물질들이 특정한 방법으로 결합하여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결합방식, 즉 작용과 반작용의 방식들은 물질에 기억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 합이 원뿔이다. 여기에는 아메바의 기억, 이구아나의 기억, 늑대의 기억, 원숭이의 기억뿐만 아니라 흙의 기억, 별의 기억, 바람의 기억도 모두 있다. 우리는 한때 돌이기도, 버섯이기도, 물이기도, 다른 누군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릴 적 피아노를 치거나 학교에 가기 싫었던 개인적인 기억뿐 아니라 종적이고 우주적인 모든 기억들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에겐 를 뛰어넘는 기억들이 있다는 것, 세계와 외따로 분리된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나를 지키는 자동적 식별

우리는 주로 생존본능에 입각하여 즉각적이고 충동적으로 움직인다. 우리에게 기본적으로 장착된 기제가 그렇다. 나의 생존에 필요한 먹거리, 잘 곳, 그것을 보장해주는 것들에 끌리며 그 외의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동물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기제를 베르그손은 자동적 식별이라고 했다. 신체 S와 아주 가까이에 있는 영역만을 사용하는 식별. 이러한 즉각적인 기제가 있기에 우리는 오늘도 현실에 적응하며 자동적으로 생을 유지한다. 어두운 밤 수상한 사람을 보고 촉각이 곤두서는 것도, 추운 날씨에 땀구멍이 줄어드는 것도 이런 작동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을 보고 싫은 감정이 올라옴과 동시에 그를 나쁜 사람이라 칭하는 것도, 어떤 물건을 보고 소유욕이 일어나며 저걸 가져야 한다!’라고 느껴버리는 것도 모두 이 자동적 식별의 작용이다. 우리는 그렇게 종종 저 사람을 징벌하거나, 저 물건을 가지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거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리고 거기에 목숨이라도 달린 것처럼 열을 올린다. 그게 곧 옮음이라 느껴지기 때문이다.

행위가 즉각적이지 않다고 해서 S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신중함은 S 가까이에서 다만 생각을 오래, 치밀하게 하는 것일 확률이 높다. 이미 올라온 식별을 고집한 채 거기에서 어떻게 행동할까를 고민하는 것 말이다. 이는 오히려 넓은 평면으로 넓혀갈 수 없도록 수많은 논리로 자그마한 원뿔을 딴딴하게 굳히는 일인지도 모른다.

 

깊은 인식과 새롭게 구성되는 나

신중함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대체 어떻게 다른 방식의 사유가 가능할까? 기억의 어떤 층위를 작동시키는 것은 우리의 신체의 움직임 없이 따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니까 우리는 행위를 바꾸어야 한다. 이 행위라는 건 공을 던진다같은 동작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외부로부터 받은 작용에 반응을 되돌려주는 것 전부를 말한다. 예컨대 어떤 진동을 내뿜느냐. 즉 어떤 감정을 품느냐, 어떤 몸 상태를 갖느냐를 말한다.

우선 습관적 기제를 멈춰야 한다. 베르그손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하나의 사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직접적 직관에 나타나는 대로의 실재가 아니라, 실천적 관심들과 사회적 삶의 요구들에 실재를 적응시킨 것’(앙리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아카넷, 2019, p.305) 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세계를 바라볼 때, 역시 일종의 기억인 자신의 관심과 요구들에 기반하여 사실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우주의 물질들이 특정 형태로 결합하여 각각의 개체를 이루고 있고, 이 개체는 자신이 호흡하는 환경에, 그 환경은 지구 전체에, 지구는 자신이 주위를 선회하는 태양에 빚을 지면서만 살아간다는 점에서 우주는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여기에서 실제 일어나는 일들은 갈마듬, 작용-반작용, 진동들뿐이다. 한데 우리는 우리 모두를 각기 떨어뜨려 생각하며 이 물질적 사건에 나와 너, 이 사람과 저 사람의 의도 등을 덧붙여 스토리를 만든다. 그리고 그 스토리 자체가 어떤 감정을 내포한다. 이런 우리의 세계 해석을 모두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심지어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이런 해석은 반드시 필요하며 아주 유용할 때가 많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원뿔의 어떤 층위가 작동하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같은 사건을 봐도 주목하는 부분이 다 다르고, 다르게 해석한다는 점이다. 절대적 사실도 절대적 사실 아님도 없다. 우리는 모두가 다르게 세계를 보고 있다.

이 점을 알 때 깊은 식별이 가능하다. 올라오는 나의 감정, 나의 판단이 이 세상에 있는 절대적 사실을 알려주는 지표가 아니라 단지 내 기억의 원뿔의 어떤 층위를 기반할 때만 사실이라는 것을 알 때. 심지어 옆 사람과 내가 거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조차 이것은 실재가 아니라 우리의 관심과 삶의 요구가 덧붙여진 이야기임을 알 때. 그럴 때 우리는 호흡을 통해 몸과 마음을 가다듬기도 하고, 상황을 다르게 보려 하기도 한다. 혹은 다른 것에 집중하며 문제를 그냥 털어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할 때 감정과 몸 상태가 바뀌는데 그때가 바로 우리가 행위를 바꿔내는, 즉 기억의 다른 층위를 작동시킨 순간이다. 생존이 달린 듯 느껴지는 문제를 다른 맥락으로 바라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몸 상태를 바꾸지 않고 하는 모든 생각은 같은 기억을 소환할 뿐이다. 몸을 바꾸는 것, 우리가 그것을 해낼 때 기억의 다른 층위가 작동하고, 그 즉시 그 문제는 사소한 것이 되기도 한다. 내가 반드시 바깥으로 되돌려 보내야 했던 반응이 흐려진다. 의외의 에너지가 내게 들어온다. 내가 사건 안에서 자리한 위치, 나의 주변도 새롭게 읽힌다. ‘와 세계가 달라지는 것이다.

 

다음 실험

어떻게 살아야 하지? 어디에 힘을 주며?’ 하는 고민을 하는 것은 삶에 실험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고민을 하면서 특정한 몸의 상태가 고착되어 병이 된다면 사유의 방향성을 의심해봐야 한다. 우리는 어떤 새로운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어떤 새로운 기억 층위도 더듬지 않으면서 치밀하게 S 가까이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전히 전에 내가 알던 의 이익만을 최고로 치면서, 내 모든 욕심을 그대로 가져가면서 어떤 다른 삶이 가능할까? 이렇게는 진짜 실험에는 한 발도 들어가지 못 한다. 정신적 삶의 실험, 곧 다른 사유의 실험은 나라는 것을 새롭게 구성하면서만 가능하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필요와 욕망도 바뀔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실험으로 들어가려는 실험은 제대로 했다. 멋지게 실패다. 공동체 생활을 마무리하는 날, 짐을 정리하며 집과 공동체 공간 사이를 몇 번이고 오갔다. 올라갈 때, 내려갈 때, 다시 올라가고 다시 내려갈 때, 그때그때 다른 기분에 사로잡혔다. 동네 곳곳에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다양하게 구성되는 를 소환하는 기억들이 쌓여 있다. 병이 있는 곳에 약이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오래 버텼다. 생각에 빠져 병이 났었는데 신체를 바꾸기 위해 이 공간을 떠나는 것도 하나의 좋은 선택이겠단 생각이 이제는 든다. S의 변용력의 수준을 미처 몰랐던 나는 이곳에서 너무 많은 것을 너무 빨리 얻으려고 했다. 몸으로 채 겪지 않고, 행하지 않고 좋은 것만 찾으면 단번에 어딘가에 도달할 수 있다 믿었다. 그러나 빠르건 느리건, 모든 건 몸으로 해야 했다. 지금 밟아야 할 스텝은 질문을 품으면서도 질문하는 나에 빠져버리지 않는 신체 훈련 하나를 하는 것이다. 한 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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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쥬쥬님의 댓글

시크릿쥬쥬 작성일

석영샘의 몸으로 행하는 공부를 응원합니다~ 석영샘! 새로운 장에서 새로운 시도 많이 하시길  그리고 행복하시길 마음 속 깊이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