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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온라인 감이당 대중지성] 자전거를 탈 때까지_박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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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2-05-02 18:07 조회6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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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탈 때까지
박동순(감이당)

자전거를 타기 위해 고생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페달 밟기에 신경 쓰다보면, 중심이 안 맞고, 핸들에 집중하면 페달질이 어긋나고… 고것 참,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 없다. 그렇게 아슬아슬, 휘청휘청, 넘어지고, 자빠지고, 울화통이 몇 번을 터져도 안 되던 것이,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 단박에 ‘툭~’하고 트인다. 그리고, 용하게도 한 번 트이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익히는’ 대부분이 그렇다. 수영도, 스케이트도, 줄넘기의 쌩쌩이도, 현악기의 비브라토도…

이번 라성의 부제에 써있던 ‘지성’과 ‘영성’. 이 둘의 경계가 나에겐 모호했다. 지성은 ‘안다’와 영성은 ‘깨닫다’ 정도로 치환할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서도, 그 차이가 쉽게 가늠이 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이유는 분명타. 살면서 ‘깨달아’ 본 적이 그닥 없어서 그럴 게다. ‘깨닫다’라는 건 전에 없던 ‘새로운 나’를 만나는 것이라는 얘기를 이곳저곳에서 귀동냥했고 공감했다. 하지만 그 또한 지금이 아닌 마음을 다잡고 수행에 전념할 ‘언젠가의 나’에 대한 이야기라 치부했다. 아들 대학 보내고, 노후 준비 끝내고, 더 이상 야근 걱정 없는 일상에서, 수도승처럼 자연을 벗삼아… 나는 늘 길 위에 있으면서도, 길은 따로 있다 생각하고 살았다. 아니,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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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새삼, ‘깨닫다’라는 단어가 낯설어 보인다. 어쩌면, 내가 가늠하는 ‘깨닫다’라는 건 ‘깨어, 닫다’가 아닐까 싶다. ‘깨’어나 지금까지의 나라는 문을 ‘닫아’ 버리는 상태. 결코,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통과 후’의 상태. 끝까지 가보면, ‘윤회’를 벗어난 ‘해탈’의 상태. 오호라, 이 정도면 ‘지성’과 ‘영성’의 경계라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보니, 지성에는 ‘유효기간’이 존재한다. 아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까먹을 수 있으니까. 그렇기에 ‘안다’에는 ‘모른다’라는 상대어가 존재한다. 하지만 ‘깨닫다’는 유일해 보인다. 마땅한 상대어가 없다. ‘깨닫지 못하다’ 정도이다. 깨닫는다는 건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경지라면, 나에게 그런 ‘깨달음’ 비스무리한 순간이라도 있기는 했던가? 그냥 감으로 치부하고 넘기기는 싫었다. ‘경금’에 ‘속물’이어서인지, 뭐라도 꺼내봐야 그게 적절한지 적절하지 않은지 견줄 수라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고민고민 끝에 생각해 낸 것이 ‘자전거 연습’ 따위의 ‘익히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이런 ‘영성’을 익히는 데 필요한 건 무얼까. ‘익히는’ 과정을 ‘공부’라고 한다면 ‘영성’을 위한 공부는 ‘더하는’ 공부가 아닌, 철저히 ‘덜어내는’ 공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자전거를 익힐 때도 마찬가지. 의욕적으로다가 악다구니를 쓰다간 넘어지기 십상이다. 그렇기에, 탈 줄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힘주어(?) 말한다. ‘힘 빼~’, ‘힘을 빼라고~!’ 경직된 몸이 풀리고, 긴장된 마음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깨달음’의 순간은 오리라. ‘덜어내는 공부’를 위해 중요한 것은 ‘머리’가 아닌 ‘마음’과 ‘몸’. 그들의 ‘연결’이다. ‘시뮬레이션’이 아닌 ‘실천’이 동반되는 훈련을 통해야 필요한 능력만 남고, 각인이 되는 법일 게다. 몸에 새긴 ‘앎’, 그것이 곧 ‘깨달음’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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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앎은 행위의 시작이고, 행위는 앎의 완성이다. 성인의 학문은 오직 하나의 공부가 있을 뿐이니, 앎과 행위는 둘로 나눌 수 없다.’ – 낭송 전습록. 문성한 풀어 읽음. P194

마지막으로, 자전거가 트이는 때가 각자 다르듯, ‘영성’이 트이는 데에 필요한 시간 또한 각자 다를 것이다. 누군가에겐 짧은 시간에 올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겐 일생을 다해도 오지 않을 수 있다. 그렇기에, ‘윤회’라는 장치는 오히려 희망처럼 다가온다. 유효기간을 과감히 없애버린 것이니. 생각해 보면, ‘기다림’ 없는 ‘만남’이 존재할 수 없듯, ‘윤회’ 없는 ‘해탈’ 또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니 까짓거, 내일이든, 다음 달이든, 다음 해이든, 다음 생이든, 그래도 안 되면, 그 다음 생이든… 될 때까지 해보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러니 더이상, 조급해하지 말자. 조급해하며 ‘지금’을 낭비하지 말자. 중요한 건, 얼마나 노력했느냐, 얼마나 재능이 있느냐 따위가 아닐지도 모른다. 끈을 놓지 않겠다는 마음. 그거 하나면 충분할지도.

시간은 결코 돌지 않는다. (지금 나에겐 ‘윤회’마저 직선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차이’ 없는 ‘반복’은 세상에 없다. 그러니 해보는 수밖에. 가보는 수밖에. 먼저 깨달은 누군가들의 지혜를 핸들 삼아, 지금 이 순간순간을 페달 삼아, 아슬아슬, 휘청휘청, 넘어지고, 자빠져도, ‘담담히’ 그리고 ‘기꺼이’ 가자. ‘영성’이라는’자전거 타기’가 어느 순간 ‘툭~’하고 트일 때까지…

혹독한 고행의 끝, 보리수 나무 아래에 앉은 고타마의 머릿속은 생각보다 심플했을지 모른다.  ‘다음엔… 뭐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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