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화요대중지성] 지금, 여기에서 ‘하는’ 유목적 사랑 > 감성에세이

감성에세이

홈 > 커뮤니티 > 감성에세이

[2022 화요대중지성] 지금, 여기에서 ‘하는’ 유목적 사랑

페이지 정보

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2-06-01 21:18 조회600회 댓글0건

본문

 

 

지금, 여기에서 ‘하는’ 유목적 사랑

이 향 원(감이당)

“어느 소수민족은 평생 결혼을 세 번 한다고 한다. 처음엔 아주 늙은 사람과, 두 번째는 자신과 엇비슷한 연배와, 그 다음엔 다시 아주 어린 사람과.”(고미숙, 『연애의 시대』, 북드라망,  18쪽)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너무 부러웠다. 결혼을 두 번은 해보았으니, 이제 세 번째는 나이 어린 남자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다가, 죽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 것이다.

나에게 이렇게 사랑은, 내가 독점적으로, 전적으로 받고 싶은 어떤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게 충족되지 않으면 거길 벗어나 다른 어디론가로 늘 떠나고 싶었다. 그러니까 내게 지금, 여기는 늘 불만족스러운 어떤 곳이었다. 그래서 다른 데로 떠나면 지금, 여기와는 달리, 자유롭고 행복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떠나서 간 곳에서도, 언제나 또 다른 불만이 가득 차게 되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는 가난한 환경을 벗어나고 싶어 서울로 대학을 왔다. 그리고 서울로 따라온 동생들을 보살피기 싫어 결혼으로 도피했다. 그 결혼생활이 불행해지자, 이혼하여 대학 후배네 집에 얹혀 살았고, 그 후배와의 생활이 힘들어지자 또, 지금의 남친에게로 갈아탔다. 그리곤 지금, 여기가 불만스러워지자 또 다른 환경을 꿈꾸게 되는 것이다. 

나는 왜 이렇게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고, 그것이 충족이 안 되면 다른 곳으로 옮겨 가는 패턴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걸까. 이런 ‘탐욕의 화신’인 나에겐 새로운 돌파구가 절실했다.

kevin-quezada-9ZXIaHwWazo-unsplash

연애 중독

전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당연히 나는 불우한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줄, 그와의 스위트 홈을 꿈꿨다. 그러나 나보다 돈도 더 많고 능력 있어 보였던 그는, 알고 보니 도박 중독인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와의 첫 성행위 후 내게서 혈흔이 나오지 않자, 그는 나의 과거 성 경험을 의심했다. 그 질문은 집요하게 계속되었고, 나는 하도 시달린 나머지 어렸을 때 당한 몇 번의 성추행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날 이후 그는 나의 몸을 존중하지 않았다. 자기가 하고 싶은 날, 내 의사도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하는 그 행위는 내 몸을 몹시 아프게 했다. 그리고 막상 내가 성행위를 원할 때는 돌아누웠다. 나는 심한 모멸감을 느꼈고, 나를 사랑해 주는 다른 남자들을 찾아다녔다. 나는 열에 들떠, 그들로부터 온전한 사랑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럴 때 내가 사는 의미를 찾은 것 같았다. 나는 끝없이 사랑을 갈구했고, 그 연애 감정에 빠져 살았다. 

욕망을 오로지 연애 감정으로 흡인해 버린 것, 근대의 성적 판타지는 이점에서도 참, 문제적이다. 무의식의 판타지에는 무수히 많은 욕망들이 흘러넘친다. 성욕은 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근대에 들면, 성욕이 모든 욕망의 중심을 차지해 버린다. 연애를 통해서만 존재를 확인하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불구자들이 된 것이다. …… 근대 이래 우리 문화의 핵심 코드는 사랑(혹은 섹스)이다. 마치 사회 전체가 무슨 열병에나 걸린 듯이 사랑을 갈구하고, 또 갈구한다. (같은 책, 156, 157쪽)

어렸을 때부터 내가 원하는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그 억울함과 결핍감을 연애로 보상받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무의식에 있는 나의 수많은 욕망들 중에서, 이렇게 오로지 그 연애를 통해서만 내 존재와 삶의 의미를 확인하려고 하는, 불구자였던 것이다.

couple-g1ebc19b76_640

새로운 형식의 사랑

이리저리 대상만 바꾸어 몇 번, 되지도 않는 연애에서 행복했느냐, 그렇지도 못했다. 그 희열은 잠시뿐이었다. 가정 안에서 정절을 지키지 못했다는 일말의 죄책감이 들었고. 그 행위가 나에 대한 진정한 배려도 아니었다는 뒤늦은 후회감이 몰려왔다. 그러니까 내가 이상한 열기에 휩싸여, 쫓아다닌 사랑, 그것은 정말 잠시 생겨났다 사라지는 물거품 같은 것이었다.

사랑은 그 자체의 진리를 사랑하는 대상에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랑에서 구할 때만 자기의 진리를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로부터 사랑하는 자에게로 돌아가야 하며, 그 자체로서 그것을 검토해야 한다. (푸코, 『성의 역사』 2권, 같은 책, 160쪽에서 재인용) 

푸코는 사랑을 그 대상에서가 아니라, 사랑 그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사랑은 자기의 진리를 드러낸다고 한다. 사랑 그 자체가 드러내는 진리는 무엇일까. 이 자연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사랑으로 인하여 탄생된다. 그러니까 그 생성, 창조하는 힘이 사랑이 드러내는 진리 아닐까. 그는 또한, 우리에게 그 창조의 힘인, 사랑을 능동적으로 탐구하며 살아가라고 한다. 그게 진정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는 거라고. 

여기에서 나는 한 번도 이 ‘하는’ 사랑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과 비교하여 늘 부족한 사랑을 받아왔다고 생각하며, 그걸 결핍으로 여겼다. 그리고 다른 곳에 내가 꿈꾸는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며,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했고, 실제로 떠났다. 어쩌다가 나는, 이렇게 내가 만나는 대상을 철저히 이용하고, 내 성공의 발판으로 삼다가, 버리고 떠나는, 이런 패턴을 반복하며 살아온 것일까. 부끄러웠다. 

jerry-zhang-OnXvKZldSJ0-unsplash그리고 다른 곳에 내가 꿈꾸는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며,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했고, 실제로 떠났다.

푸코는 다시 말한다. “우리는 욕망들을 지닌 채, 새로운 형식의 사랑, 새로운 형식의 관계, 새로운 형식의 창조를 진행해야 한다.”(같은 책, 227쪽)고. 도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그동안의 이기적인,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는 자로부터, 새로운 형식의 사랑을 ‘하는’ 자로 돌아서서, 살아갈 수 있을까. 

유목적 사랑

앞서 얘기한 그 소수민족의 결혼 방식을 다시 생각해 본다. 그 세 번째 결혼, 나이 들어서 아주 어린 사람과 산다는 것, 이것은 그 나이 어린 사람에게 노년의 지혜를 나누어주며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의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 아닐까. 젊은이와 노년의 지혜가 서로 만나 그것을 나누며 사는 것, 그런데 이건 나도 감이당에서 이미 함께 하고 있는 것 아닌가. 

감이당에 가면 젊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 이제는 나이 든 내가 어디 가서 그런 신선한, 젊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겠는가. 그들과 함께 공부하는 과정도 나에겐 새로운 형식의 사랑을 하는 시간이다. 우리는 같은 텍스트를 읽고, 토론하며 서로의 생각을 나눈다. 남친과도 새로운 방식의 관계를 모색해보려고 한다. 그와도 서로 존중하면서, 자유롭고 행복하게, 함께 공부하는 친구로 살고 싶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렇게 내가 이전에 살아온 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사랑을 이미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지금, 여기 아산에서 서울을 오가며, 내게는 새로운 형식의 사랑, 유목적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매번 글쓰기를 할 때마다 막막하다. 하지만 도반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고민하다 보면 어느새 컴퓨터 화면에 꽉 찬 글을 보게 된다. 이 경이로운 과정을 보며, 이것이 도반들과의 새로운 사랑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새로운 창조로 이어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그 새로운 형식의 사랑이 드러내는 진리, 그 창조성을 이미 맛보고 있다. 

brooke-cagle-g1Kr4Ozfoac-unsplash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