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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목요대중지성] 타인과 진심으로 연결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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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2-07-12 22:55 조회6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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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과 진심으로 연결되기

김 영 자(감이당)

나는 어째서 외로움이 공포스러울까

목성에서 같이 공부하고 있는 도반은 내 글을 읽으면 뭔가 슬픔과 외로움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달아 올라왔다. 가슴이 조금 쿵쾅거리기도 했다. 일단 가장 강하게 밀려오는 감정은 수치스럽다는 느낌이었다. 왜 수치스러웠을까. 아마 내가 슬프다는 것, 외롭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간만에 느껴본 당황스러운 감정이었다. 그리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내 생각했다. 내가 슬픈가. 그다지 슬프지는 않은 것 같은데, 내가 모르는 슬픔이 어디 있는 건가. 외로운가. 그것은 맞지. 현실적인 상황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모호한 외로움. 외로움이 올라올 때 같이 딸려오는 막연한 공포감. 이들의 실체가 뭘까.

한때 의사를 동경했다. 하얀 가운도 멋있지만, 그것보다는 ‘바쁨’이 눈에 들어왔다. 뛰어다니느라 ‘외로울’ 틈이 없겠구나 싶었다. 지금도 친정어머니는 ‘왜 그렇게 평생을 바쁘게 사느냐’고 타박이시다. 친정집에 가도 동생은 3, 4일 있지만, 나는 하루를 겨우 넘긴다. 공사가 다 망해서다. 동생은 갈 데 많고 만날 사람 많다고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나는 안다. 자신이 비어 있는 시간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그러니 함께 사는 남편과 아이들은 어떠했을까. 언젠가 딸아이가 엄마 때문에 학원을 여기저기 다녀야 했다고, 엄마는 내가 혼자 그냥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고,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런데 나는 왜 그리 빈 시간을 견디기 어려워했을까. 빈 시간에 어째서 외로움이란 감정이 툭 삐져 올라올까. 더욱이 그런 감정의 출처를 몰라 간혹 공포를 느끼기도 했던 것 같다.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을 닦아 적의가 없이 무엇이나 얻은 것으로 만족하고, 온갖 위험을 극복하여 두려움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숫타니파타』, 전재성 역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3. 무소의 뿔의 경〉, 4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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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이리 바쁠까

이 게송의 인연담은 다음과 같다. 베나레스의 왕이 밤중에 악몽에 시달려 세 번이나 놀라 경악하며 비명을 지르는 공포에 휩싸였다. 이에 주위 사제들은 대규모의 희생제를 치르라고 종용했다. 그러나 네 명의 연각불은 왕이 희생제를 지내면 공포의 모습을 더 이상 깨닫게 하는 것이 곤란해지는 것을 알았다. 이에 왕에게 네 방향을 닦으면 공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네 가지 청정한 삶을 권했다. 이 네 가지 청정한 삶이란 첫째 자애, 두 번째 연민, 세 번째 기쁨, 네 번째 평정의 삶을 말한다.

나는 ‘희생제를 치르면 왕이 더 이상 자신의 공포의 모습을 깨닫지도 못할뿐더러 공포에서 놓여나지도 못할 것’이라는 2,500여년 전의 네 명의 연각불들의 통찰이 놀라웠다. 당시 바라문 사제들이 제사를 크게 지내게 된 것은 하늘의 명령도 아니요, 신비한 초자연적 기적이 있어서도 아니요 오직 호화로운 재물과 잘 치장한 여인들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연각불들은 제사와 주문의 종교적 행위에 감추어진 위선을 본 것이리라.

그런데 이 게송의 주석에서 말한 ‘희생제’가 나에게는 ‘바쁨’으로 읽혔다. 수많은 사람들과 번제물과 거대한 제의식과 화려함의 축제 같은 이벤트. 눈과 귀와 혀등 모든 감각들의 충만함이 그 공간에 가득 채워졌을 것이고, 울부짖는 소 울음을 비롯한 갖가지 소음들로 꽉 찬 그곳 에, 어디 빈 시간과 빈 공간이 있을 것인가. 사실 왕이 공포의 모습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거대한 희생제 이벤트가 벌어지는 시간과 공간에는 왕의 악몽이 반복되는 상황을 찬찬히 들여다 볼 필요도, 그 원인을 살펴볼 시간도 없을 뿐더러, 무엇보다 악몽에서 밀려오는 공포감을 해결해야 하는, 꾸준하고 지난한 자신의 행위가 들어설 여지가 희생제에는 없다는 점이 아닐까. 제대로 보지 못하면 깨달을 수 없고, 그러면 벗어날 수 없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나 역시 실체가 잡히지 않아 두려운 외로움이나 슬픔이라는 감정을 보지 않으려 그렇게 갖가지 모양의 ‘바쁨’ 속으로 도망갔던 것은 아니었을까.

city-g7ef467d68_640그런데 이 게송의 주석에서 말한 ‘희생제’가 나에게는 ‘바쁨’으로 읽혔다.

한량없는 마음이란 무엇인가

부처님께서는 자애, 연민, 기쁨, 평정 이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을 닦으면, 적의가 없이 무엇이나 얻은 것으로 만족하고, 두려움 없이 혼자서 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타인을 차별없이 무한히 사랑하고, 타인의 성공과 행복을 기뻐하며, 고통속의 타인들에게 연민을 갖는 이와 같은 한량없는 마음을 닦으면 두려움 없이 혼자서 갈 수 있다는 말씀이다. 결국 부처님께서는 타인과 진심으로 연결하라고 말씀하신 게 아니었을까. 마치 갓난아이가 엄마와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 아래, 세상을 향해 두려움 없이 한 발짝 자신의 발걸음을 떼어놓듯, 스스로가 타인과 진심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진실로 두려움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걸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두려움 없이 혼자서 갈 수 있다면, 막연한 외로움이나 슬픔도 같이 걸어갈 수 있지 않을까.

이 게송을 반복해 읽으면서 왠지 막연한 나의 외로움과 슬픔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나의 막연한 외로움이란 감정은 내가 타인들과 진심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가 아닐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타인은 차치하고, 나 자신과의 연결조차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서가 아닐까. 즉 내가 타인과 진정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과도 진정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자기소외라고 할까. 어쩌면 막연한 나의 공허함이 나 외로움의 출처는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처님의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는’, 즉 ‘너’가 없으면 ‘나’도 없다는 말씀이 이 한량없는 마음과 연결이 되는 것 같다. ‘나’와 ‘너’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너’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곧 ‘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일단 나는 나 자신과의 연결부터 제대로 시작해야 하리라. 이것이 타인과 진정으로 연결되기 위한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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