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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일요대중지성] 네트워크적 존재, 연결된 삶을 산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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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2-07-23 19:05 조회6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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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적 존재, 연결된 삶을 산다는 의미

이 형 은(감이당)

베르그손은 서문에서 물질의 실재성과 정신의 실재성을 기억이라는 예증 위에서 증명하기 위해 『물질과 기억』을 썼다고 했다. 그리고는 총 4장 중 1장의 대부분을 지각을 설명하는데 바친다. 그에게는 지각이 뇌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외부 대상에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입증해 내는 것이 왜 그렇게도 중요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지각은 바깥에

1장을 간단히 요약해 보자. 우리는 움직이는 신체를 가지고 있으며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인다. 신체에는 유입신경과 유출신경이 있어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고 이를 전달하여 운동으로 내보낸다. 뇌는 이러한 신경계의 하나이지만 특별한 점은 유입신경을 통해 받아들인 진동은 일단 다 뇌로 전달된다는 점이다. 중앙전화국처럼 기능하기에, 뇌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운동기제의 옵션을 다 펼쳐 보여주게 되고, 이러한 속성 때문에 뇌는 지각을 만들어 내는 장소처럼 보인다. 그러나 뇌에서는 없던 것이 덧붙여지지 않으며, 뇌는 단지 감지한 자극을 전달하는 전도체의 역할만 한다.  

수많은 이미지들 중 우리는 쓸모 있는 것만을 지각하는 경향이 있다. 배고프면 사과는 보여도 사과나무 가지는 눈에 안 보이는 이러한 분별이 의식적 지각의 바탕이 된다. 욕구에 의해 현존하는 것으로부터 불필요한 것은 제외시키고 필요한 것만 받아들이는 것, 이 때문에 표상은 현존으로부터의 감소이고 지각은 항상 실재적 대상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 지각이 대상의 전체를 인식하든 부분만을 인식하든, 중요한 점은 지각은 외부 대상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우리 뇌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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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니까 연장일 수밖에

외부 대상이 전달되어 들어오는 것을 ‘연장’이라 하고, 감관을 통해 들어온 기호들이 재구성되는 것을 ‘비연장’이라고 한다. 베르그손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지각의 연장성이다. 지각이 비연장이 아니라 연장인 이유는 어찌 보면 간단하다. 지각하는 나는 지각의 대상과 “하나의 네트워크” 안에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베선생님은 “신경계는 그것에 영양을 공급하는 유기체 없이, 유기체는 그것이 호흡하는 환경이 없이, 이 환경은 그것이 젖어있는 지구 없이, 지구는 그것이 주위를 선회하는 태양 없이, 살아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더 일반적으로 하나의 고립된 물질적 대상이란 허구는 일종의 부조리를 내포하는 것이 아닌가?(앙리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아카넷, 2019, 49쪽)”라고 하셨다. 이를 나의 언어로 풀어보면 이렇다. 모든 이미지들이 네트워크 안에서 작용과 반작용을 하고, 이 작용과 반작용은 어떤 의지(또는 신神)의 개입도 없이 자연의 법칙에 따라 “무사심하게” 이루어진다. 오히려 반대로 의도 없는 작용과 반작용이 지속되기에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물리법칙에는 예외가 없으므로 필연성이 발생하고 어떤 존재든 네트워크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거꾸로 네트워크가 없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모든 이미지들을 비연장적인 방법을 통해 만들어내야 한다.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이 방법에 따르면 맹점이 생긴다. 부분을 통해 전체를 설명해야 하므로 설명하기 힘든 영역이 발생하며, 부분의 합은 전체가 아니므로 다 합쳐놨다고 생각해도 빠지는 부분이 생긴다. 서양철학을 잘 모르지만, 이렇게 설명되지 못한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이데아도 등장하고 신의 영역이 생겨났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신이 아니라도 필연성을 거스르고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내는 존재들이 있다. 바로 인간과 유사한 신체를 가진 생명체들이다. 논의의 편리함을 위해 인간으로 그 대상을 좁히면, 인간의 신체는 특권적 위치를 가진다. 이 특권은 행동의 중심이기에 생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신체 속에 기억과 정념이라는 작용과 반작용의 필연성을 거스르는 요소들이 있기에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camilo-jimenez-0yLmwcXLwLw-unsplash이 특권은 행동의 중심이기에 생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신체 속에 기억과 정념이라는 작용과 반작용의 필연성을 거스르는 요소들이 있기에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정신의 단초인 정념과 그 증거인 기억

나는 이미지의 총체인 우주의 일부이고, 주변의 이미지들을 필요에 따라 지각하거나 지각하지 않을 수 있으므로 내 신체도 지각의 대상에 포함된다. 나는 나의 욕구와 필요에 의해 신체를 움직여야 하므로 내가 나를 지각해야 하는 때는 꽤 많을 것이다. 내 위장의 신경세포는 전체에 복무하는 부분으로서 내 배를 채워달라는 신호를 충실히 전달했음에도 응당한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이 미해결 욕구를 고통이라는 운동으로 표현한다. 배고픔에 “고통스럽던” 내가 사과를 보게 되었을 때, 나의 지각은 “배가 고파 고통스럽다는 정념”과 혼합되어 사과를 낚아채는 실제적 행동이 된다. 정념은 이처럼 나의 신체 안에서 출현하고 외부 대상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므로 지각과는 본성부터 다르며, 신체 안에서 느껴지기 때문에 감각적일 수밖에 없다. 즉, 정념은 물질성으로부터 한 발짝 벗어난 것이다.

정념의 역할이 가능적 행동을 실제적 행동으로 변환시켜주는 것이라면, 기억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배고픈 내가 사과를 지각했을 때, 나는 푸르둥둥하고 작은 사과를 일일이 따고 맛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 나는 마치 슈퍼컴퓨터와도 같은 정확성으로 순식간에 열려있는 사과 중 1) 제일 빨갛고, 2) 탐스러우며, 3) 내가 딸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는 사과로 손을 뻗게 되는데 이는 과거에 내가 했던 여러 시행착오들을 기억하여 학습한 결과이다. 

사과에 대한 응축된 과거 기억을 불러내어 나의 현재로 끌고 들어간 이 순간, 물질적인 요소가 단 하나라도 있었는가? 이 기억은 내가 사과를 인지한 것으로 호출되었지만, 빨갛고 크며 내 손에 잡히는 사과를 따는 것이 유리했었다는 기억은 엄연히 현재에는 없는, 과거의 사과를 표상한 결과이다. 현재에 없는 것, 현재 내 앞에 보인 물질적 대상에 기반하지 않은 것을 떠올렸으니 100% 정신적인 작용이다. 분별로 시작하여 정념을 거치고 기억에 이르자 우리는 확실히 정신이 우리 안에 작동한다는 것을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보자.

사과를 손에 쥔 나는 매우 의기양양하다. 그런데 이럴 어쩔…말라 비틀어지다 못해 영양실조로 배까지 뽈록 튀어나온 자그마한 아이가 내 눈에 띄어버린 것이다! 나는 물론…갈등하나 이내 그 사과를 아이에게 양보하기로 한다. 왜? 나의 아이돌 맹자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어린아이가 우물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면 누구나 그 아이를 구하려 달려가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나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배고픈 아이나 우물에 빠질 것 같은 아이를 돕는 것은 무사심한 작용과 반작용의 필연성을 벗어난 것이다. 이미 나에게는 사심이 가득하지 않은가? 배고픈 아이를 도와주려는 사심, 위험에 처한 아이를 구해주려는 사심. 

priscilla-du-preez-CoqJGsFVJtM-unsplash사과에 대한 응축된 과거 기억을 불러내어 나의 현재로 끌고 들어간 이 순간, 물질적인 요소가 단 하나라도 있었는가?

극단적으로, 이런 나를 사과나무 옆 돌멩이에 비교해 보자. 돌멩이는 정념에 휩싸여 사과를 딸 일도 없겠지만, 위험에 처한 다른 돌멩이를 구해주지도 않는다. 그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작용과 반작용을 지속할 뿐. 감히 돌멩이의 세계를 안다고 자신하지는 않겠다. 그들의 내부에서 정념이 발생할 수도, 기억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베선생님의 말씀처럼, 그들의 기억은 다소 반복적이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만일 물질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물질이 과거를 끊임없이 반복하기 때문이며, [또한] 필연성에 종속되어 각각이 선행하는 것과 등가적이고, 그것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일련의 순간들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물질의 과거는 진실로 그것의 현재 속에 주어진다. 그러나 다소간 자유롭게 전개되는 존재는 매순간 새로운 어떤 것을 창조한다.(같은 책, 371쪽)” 

필연성을 따르는 돌멩이와 필연성을 거부한 나, 그 차이는 분별, 정념, 기억으로 이어지는 정신의 실재성에 있다 할 것이다. 그런데, 정신이 있다 치고, 필연성을 거슬렀다 치고, 이게 매일 매일의 살아내는 내 삶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베르그손은 윤리와 도덕에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나에게 『물질과 기억』은 어떤 다른 텍스트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었다. 나의 자유의지와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원리적으로 이해시켜주었기 때문이다. 베르그손을 알기 전 나는 과거를 하나의 단면으로만 기억한다. 남편이 문제다, 아이들이 뜻대로 안 된다는 것은 실제로 내게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과거에 안 일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이 과거가 끊임없이 현재를 통해 어떤 모습으로 재탄생하는지는 오로지 내가 결정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억의 작동 기제 자체가 원리적으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기억이란 과거를 냉동시킨 것이 아니다. 기억은 현재를 통해 소환되어 현재와 섞이면서 새로운 현재를 만들어가는 지속의 과정이고 이 과정은 계속된다. 고로 내 과거는 무수히 다른 방식으로 변용될 수 있고, 어떤 변용을 선택하는가는 오롯이 나의 몫이다. 이것은 가련한 정신승리의 몸부림이 아닌 사실적 원리이다.  

지각이 현존으로부터의 감소라는 베르그손의 천재적 입증은 또 어떠한가? 내가 아무리 하나의 대상을 파고 파고 또 파더라도, 나는 그 대상의 전부를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내가 옳다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게다가 내가 네트워크 안의 존재라면, 내가 맺고 있는 수많은 관계들은 여러 타자들을 포함한 것이다. 작게는 두 명, 많게는 수십 명까지 포진된 각각의 관계에서 항상 옳다는 정답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 네트워크는 살아 움직이기에 수시로 그 배치가 바뀌며, 배치가 바뀌면 양상도 달라진다. 이런 유동적 관계 속 정답은 오로지 하나, 서로 맞춰가며 살아가는 지혜를 발휘하는 것이고, 이를 부처님은 중도中道로, 주역에서는 중中으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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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나는 지난 7년간 매일 아침 따라 하면서도 수긍할 수 없었던 수행문의 한 구절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화나고, 짜증나고, 미워하고, 원망하는 이 모든 것은 밖으로 살피면 상대가 잘못해서 생긴 괴로움인 것 같지만, 안으로 살피면 ‘내가 옳다’는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일어난 것이므로 ‘내가 옳다’는 한 생각을 내려놓을 때 모든 괴로움은 사라지고 온갖 업장은 녹아나는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구성하면 내가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을 길이 없다. 그러나 나를 우주적 네트워크에 단번에 위치시키면, 나와 남의 경계가 애매해지면서 나라고 할 것이 없게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주 전체가 내 것이 되기도 한다. 이 좋은 것을 놔두고 왜 나를 붙들고 있었는지! 베르그손 덕분에 나는 과거를 능동적으로 변주하며, 온 우주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무한히 자유롭고도 무한한 잠재력을 소유한 능력자가 되었다. 

하여, 이 문장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 베르그손은 양명과 더불어 나의 마음 속 신전 1등석에 나란히 앉게 되었음을 밝힌다. 물론 특등석에는 부처님이 앉아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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