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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vs 연암] 필연성으로 타자를 다시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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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혜안 작성일15-06-22 09:28 조회29,366회 댓글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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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성으로 타자를 다시 만나다
- 엄마 다시 보기 -


안혜숙(감이당 대중지성 3학년)


지난 달 이사를 했다. 이사한 곳은 엄마가 사시는 곳에서 걸어서 오 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이다. 5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혼자 사신다. 올해 여든 세 살이시다. 처음엔 혼자 계셔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시지만 일주일에 서너 번 교회를 나가시고 새벽기도까지 매일 나가셨다. 나머지 시간을 거의 대부분 혼자 보내시는 게 걱정이 되었다. 자주 기억이 깜박거리시더니 결국 치매기를 보이기 시작했다. 엄마 가까이 살면서 좀 더 자주 들여다보리라 작정했다. 그런데 막상 곁으로 가니 단순히 자주 들여다보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엄마를 대하는 감정은 아주 복합적이었다. 때론 안쓰럽고, 안타깝고, 때론 밉기도 하고, 경멸감까지 들고, 좋아 보이실 땐 안도했다가 아닐 땐 절망감이 들기도 했다. 거기에 앞날에 대한 두려움까지 겹칠 때는 이런 식으로 오래 사셔서 뭐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 때도 있었다. 애증의 감정이 뒤섞여 있는 나, 가능한 엄마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내 욕망이 보였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번 학기에 배운 『에티카』에서 내가 엄마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의 대부분이 공포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치매’라는 이미지가 떠올리는 내 신체의 자동반응, 보다 정직하게는 가족인 내가 감당해야할 몫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을. 스피노자는“공포 없는 희망은 없으며, 희망 없는 공포도 없다”(『에티카』, B.스피노자 지음, 황태연 옮김, 비홍출판사, 220쪽)고 했다. 그럼 나의 희망은 무엇인가. 엄마가 다시 멀쩡했던 과거로 돌아가 달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돌아가시기 전까지 이 상태로만이라도 유지해줬으면 하는 것이다. 이 희망이 부질없다는 걸 알지만 부정할 순 없다. 그러면 그것이 다인가? 언급한대로 엄마에 대한 내 감정은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이다. 엄마의 존재와 삶을 긍정하지 못함, 그로인한 죄책감 같은 불편한 감정, 벗어나고 싶은 책임감, 앞날에 대한 두려움까지. 그래서 혼란스럽다. 나는 이 감정들을 대면하고 싶었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연의 법칙, 필연성 속에서, 그리고 연암의 사유를 더듬어 엄마에 대한 나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다른 신체 받아들이기 

엄마는 욕심이 많으시다. 많아도 정말 많다. 옷과 물건들뿐만 아니라 음식까지. 일단 양적으로 무조건 많아야 한다. 음식을 하는 것도 남아서 버릴지언정 적게는 못하신다. 먹는 것도 너무 좋아하시다 보니 결국은 50대 초반에 당뇨병이 왔고. 이어서 고혈압, 그리고 피 속의 기름기가 쌓여 심장혈관을 막아 심혈관수술까지 하셨다. 치매증상은 주로 평소에 그 사람의 삶의 패턴이나 습관이 나타난다고 한다. 엄마는 지금도 먹을거리를 끊임없이 사고 또 사서 쟁여놓는다. 먹을 만큼만 산 적도 없다. 더 많이 사놓아야 직성이 풀린다. 결국 썩어서 버린다. 물건도 조그만 비닐봉지하나 버리질 못하시니 물건들로 꽉꽉 쟁여져 쌓여 있다. 언젠가 더 이상 들어갈 데 없는 냉장고를 비워내며 그 많은 음식물이 상해 쓰레기로 버려질 때는 무섭기까지 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쉬어지며 ‘어휴, 이 업을 다 어찌 하실꼬’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난 이런 엄마를 안타까움인지 비난인지 경멸인지 모를 뒤섞인 감정으로 바라본다. 

스피노자는 감정은 ‘정신의 수동이며 어떤 혼란된 관념’(『에티카』, 230쪽)이라고 말한다. 그 감정이 혼란한 상태로 있는 한 나는 그 감정에 휘둘리고 속박된다. 솔직히 엄마를 보면 기쁘기보다는 슬프고 힘이 빠진다. 슬픔은 “인간이 보다 큰 완전성에서 보다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에티카』, 217쪽) 지극히 수동적인 감정이다. 삶의 능동이 아닌 예속으로 작동하고 있는 이 감정. 그렇다면 이런 나의 감정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연암은 <능양시집서菱洋詩集序>에서 이렇게 말한다.   
   
본 것이 적은 자는 해오라기를 기준으로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기준으로 학을 위태롭다고 여기니, 그 사물 자체는 본디 괴이할 것이 없는데 자기 혼자 화를 내고, 한 가지 일이라도 자기 생각과 같지 않으면 만물을 모조리 모함 하려 든다.
   
 (『연암집』 하권, 박지원 지음, 신호열·김명호 옮김, 돌베개, 61-62쪽)  
치매-1.jpg

연암은 내게 엄마 자체는 괴이할 것이 없는데 저 혼자 화를 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왜 나의 기준을 엄마에게 적용하여 모함하려 하느냐고 하는 것 같다. 여기서 ‘본 것이 적은 자’는 스피노자가 말하는 낮은 수준의 인식, 의견이나 표상 같은 제1종의 인식에 머물러있는 자일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허위[오류]의 유일한 원인"(『에티카』 2부, 정리41, 141쪽)이다.

정리16.계2: 우리가 외부의 물체에 대해 가지는 관념은 외부 물체의 본성보다도 우리 신체의 상태를 보다 많이 나타낸다.
(『에티카』 2부, 121쪽)

스피노자에 따르면 내가 가지고 있는 엄마에 대한 감정은 엄마의 본성보다도 내 신체의 상태를 보다 많이 나타낸다. 엄마의 본성을 정확히 드러낸 것이 아니라 내 신체(정신)가 내 식대로 해석한 관념이란 소리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엄마와의 관계에서 오랫동안 상호작용하며 몸에 새겨진 내 신체(정신)의 반응패턴이라 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지금 내가 엄마에게 가지고 있는 안타까움이나 비난, 경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새삼스러울 게 없다. 살아오는 동안 내가 평소에 엄마에게 가지고 있었던 감정의 결이었다는 걸 알았다. 여기에 ‘치매’라는 이미지가 주는 부정적인 감정이 덧씌워져 오롯이 더욱 강도 높게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나의 감정이 과연 엄마에 대한 타당한 관념인가.  

정리3. 수동적인 감정은 우리가 그것에 대하여 뚜렷하고 명확한 관념을 형성하자마자 수동적이기를 멈춘다.
(『에티카』 5부, 308쪽) 

스피노자는 말한다. “어떠한 신체적 변용이든지 그것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뚜렷하고 명확한 개념을 형성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에티카』 5부, 정리4, 309쪽)고. 내가 엄마를 대하는 묵은 감정과 치매가 덧씌워 놓은 부정적인 감정이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그것에 대해 뚜렷하고 명확한 개념을 형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곧 타당한 관념을 말한다. 

내가 지금 슬픔이라는 수동적인 감정으로 대하고 있는 엄마의 특성은 사실 엄마가 엄마이게 한 기본적인 욕망, 살려고 하는 본능, 즉 스피노자가 말하는 ‘코나투스(conatus)’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선도 악도 없다. 그 욕망의 힘으로, 그 신체로 세상과 대면하며 엄마는 여기까지 살아올 수 있었다. 일제시대에 태어나 해방과 전쟁, 가난했던 시절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힘든 시기를 살아온 동력이기도 했다. 군인으로 밖으로 돌 수밖에 없었던 남편대신 엄마표현대로 지지리 고생하며 시댁식구들과 자식 셋을 먹이고 키우며 억척스레 살아온 힘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삶의 추동력으로 작동했던 그 욕망의 힘이 엄마의 몸과 삶을 해치는 반동의 힘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먹고 살만한 지점, 안정된 시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몸에 병으로 나타났다. 삶에서도 고통이 왔다. 그 중 큰 아들을 일찌감치 앞세우신 것은, 이십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내게 왜 이런 일이? 하며 되뇌이시고 있다. 그럼, 이런 엄마를 이성으로서 타당하게 인식한다는 건 무엇인가. 

아, 저 까마귀를 보라. 그 깃털보다 더 검은 것이 없건만, 홀연 유금乳金 빛이 번지기도 하고 다시 석록石綠 빛을 반짝이기도 하며, 해가 비추면 자줏빛이 튀어 올라 눈이 어른거리다가 비췻빛으로 바뀐다. 그렇다면 내가 그 새를 ‘푸른 까마귀’라 불러도 될 것이고, ‘붉은 까마귀’라 불러도 될 것이다. 그 새에게는 본래 일정한 빛깔이 없거늘, 내가 눈으로써 먼저 그 빛깔을 정한 것이다. 어찌 단지 눈으로만 정했으리오. 보지 않고서 먼저 그 마음으로 정한 것이다.
(『연암집』 하권, 능양시집서, 6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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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새에게는 본래 일정한 빛깔이 없거늘, 내가 눈으로써 먼저 그 빛깔을 정한 것이다.

시시때때로 바뀌는 다양한 빛에 따라 까마귀의 빛깔이 달라진다. 까마귀를 검은색으로 고정하지 말라고 연암은 말한다. 까마귀는 매순간 달라지는 빛에 따라, 내가 보는 시각에 따라 푸르게도 붉게도 또 무수한 빛깔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엄마와 나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정해놓은 빛깔로, 단지 보이는 눈만으로, 아니 보지도 않고 마음으로 미리 엄마를 고정해놓지 말라는 소리이다. 엄마의 신체는 나와 다르다. 엄마는 세상을 나와 다르게 감각하고 인식하며 자신의 방식대로 세상을 해석하고 살아간다. 엄마는 엄마 나름의 고유한 삶의 인과관계 속에 놓여있다. 과연 내가 엄마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나는 다만 내게 보여 지는 걸 볼 수 있을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고정된 시선을 벗어나려 노력하는 것일 뿐이다. 

엄마를 타당하게 인식한다는 건,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시선, 나의 관점을 떠나 엄마를 바라보는 것, 엄마는 나와 다른 신체임을 받아들이는 것. 동시에 엄마도 나도 끊임없는 변화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연이 쉼 없이 변하고 있듯 엄마도 나도 매순간 달라지는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필연성으로 인식하기

신문을 훑어보다가 눈에 띄는 기사가 있었다. “내가 나를 잊어도… 나는 나야”가 기사 제목이다. <스틸 앨리스>라는 영화를 소개한 내용이었다. 잘 나가던 대학 교수였던 50살의 앨리스가 유전성 알츠하이머병(치매)에 걸려 머릿속 기억이 사라지기 시작하며 겪는 고통과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그렸다고 소개돼 있었다. 보통 치매당사자는 고통이 있거나 답답해하지 않는 거로 알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그것이 백 프로 맞는 말일까. 엄마의 경우를 봐도 처음엔 자신에 대해 몹시 불안해 하셨다. “얘, 내가 이상하냐?” “내가 치매 걸린 거 같니?” “사람들이 날 멍청이로 보는가 봐” 하시면서 급속히 위축되셨다. 어느 날 ‘내가 하나 둘 기억을 잃어간다면’하고 생각해보니 자신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어떠할지 그 고통을 상상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앞으로 어떤 경로를 밟아 가실지 일반적인 정보를 통해 예측할 수 있을 뿐 정작 구체적인 건 모른다. 각자의 몸은 다 다르기 때문이다. 

주위에서 이런 이야기를 너무 많이 보고 들으면서도 막상 자신에게 닥치면 내게 왜 이런 일이? 한다. 특히 ‘불행한’(하다고 생각되는) 일은 나만은 예외이길 바란다. 그럴 수 있으리라 착각한다.

정리16. 신의 본성의 필연성에서 무한히 많은 것이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즉, 무한한 지성의 영역에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이) 생겨나지 않으면 안된다.
(『에티카』 1부, 73쪽)

자연 안에서는 무한히 많은 일들이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쉬지 않고 일어나고 사라진다. 병이든 사건이든, 무슨 일이든,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 그게 자연의 법칙이다. 이런 상황을 필연성으로 인식한다는 건, 자연 안에 ‘나는 아니다’라는 건 없다는 걸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것은 내가 죄를 지어서 어떤 초월적인 힘에 의해 벌 받은 게 아니라, 자연의 무수한 인과관계 속에서, 내재적 원인으로 필연적으로 일어난다는 걸 이해하는 일이다. 나도 엄마도 자연이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으로서 엄마는 자신의 필연성 속에서 자연의 법칙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생성하고 소멸하는 과정을 밟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참 충격적인 스피노자의 말을 만났다. 

정리39. 주석: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에 대해 운동과 정지의 다른 비율을 갖게 되었을 때 나는 신체를 죽은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혈액순환과, 신체를 살아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다른 것들이 유지되고 있을지라도, 인간의 신체가 그것의 본성과 아주 다른 본성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감히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티카』 4부, 268-269쪽)

엄연히 살아있는 신체를 죽은 것으로 이해한다니... 스피노자는 신체 부분들 상호간의 신호체계가 망가지는 걸 얘기한다. 어느 부분이 지나치게 발달하면 다른 부분을 소외시킨다. 한쪽의 신호가 다른 쪽에 전달이 안 된다는 소리다. 서로가 교류할 수 없게 된다. 스피노자는 소통이 안 되면 사람이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신체의 다른 부분과, 외부와 소통이 되지 않을 때 우리의 몸과 삶 역시 균형을 잃고 무너진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신의 본성 또는 본질을 일정하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표현한다.”(『에티카』 1부, 정리36 증명, 92쪽)  원래 타고난 본성에서 아주 다른 본성으로 변화하는 치매는 이의 극단적인 경우가 아닐까. 우리는 모두 치우친 기운을 가지고 태어난다. 과하고 덜하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치우친 자신의 기운대로 살다가 병을 만나고 번뇌를 겪는다. 그래서 다시 균형을 잡으려 노력하며 살아간다. 스피노자의 말에 따르면 엄마의 치우친 기운에 따른 생활방식이, 혹은 타고난 어떤 소인이 신체 서로간의 소통, 외부와의 소통을 차단했다는 말이 되겠다. 치매의 특징이 소통불능이고 보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자연 안에서는 자연의 결함 탓으로 여길 수 있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에티카』 3부. 159쪽) 자연 안엔 결함을 가진 어떤 것도 없다. 치매조차도 그 자체의 내재적 질서 속에서 완벽하다는 소리다. 다만 그것이 신체 상호간의 교류체계를 유지 못함으로써 엄마의 신체를 파괴하도록 작동하기 때문에 엄마 자신에게 악(惡)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에 대해 운동과 정지의 다른 비율을 갖게 되었을 때 죽은 신체로’ 간주한다는 말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치매처럼 소위 일반적인 소통의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대로 죽은 인간인가. “각각의 사물은, 자신의 능력이 미치는 한,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고 노력한다.”(『에티카』 3부, 정리6. 168쪽) 자연안의 모든 것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려한다. 이것이 존재의 코나투스다. 그리고 그들은 제 각각 다른 방식으로 외부와 소통한다. 자폐아가 다른 감각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듯이. 엄마의 치매도 내게는 엄마의 코나투스가 자신의 존재를, 생명을 지속하려는 노력, 그 선택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엄마 역시 그렇게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내게는 낯선 엄마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교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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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까마귀를 검은색으로 고정 짓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거늘, 또다시 까마귀로써 천하의 모든 색을 고정 지으려 하는구나. 까마귀가 과연 검기는 하지만, 누가 다시 이른바 푸른빛과 붉은빛이 그 검은 빛깔(色) 안에 들어있는 빛(光)인 줄 알겠는가. 검은 것을 일러 ‘어둡다’하는 것은 비단 까마귀만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검은 빛깔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물은 검기 때문에 능히 비출 수 있고, 옻칠은 검기 때문에 능히 거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빛깔이 있는 것치고 빛이 있지 않은 것이 없고, 형체(形)가 있는 것치고 맵시(態)가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연암집』 하권, 능양시집서, 62쪽)

연암이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세상이 말하는 치매, 그 하나의 빛깔로 엄마의 치매를 보지 말라고. 드러나지 않은 그 안의 빛을 보라고. 나는 아직 그 안에 얼마나 다채로운 빛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치매라는 거울이 비춰주는 것이 무엇인지도 미처 깨닫지 못한다. 다만 지금 내게 분명한 것은 치매도 빛깔과 형체가 있는 자연의 일부이고, 그만의 고유한 빛과 맵시가 있으며, 그것을 보고 만나려는 시도가 필연성으로 엄마를 인식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매일 새롭게 만나기

내 휴대폰엔 엄마동네 교회목사님, 동네 옷가게 아주머니, 옆집 부동산 아줌마, 행운열쇠 아저씨 등의 전화번호가 들어있다. 엄마가 기억을 못하시거나 이상한 소리나 행동을 하시면 염려되어 내게 전화하신다. 최근에도 목사님은 엄마가 집에서 쓰는 쇠절구통을 아래 빵집 아저씨가 훔쳐가서 경찰서에 신고하신다고 했다면서 전화하셨다. 물론 엄마의 망상이 빚어낸 얘기이다. 옷가게 아주머니는 옷값을 받았는데 또 돈을 가져오셨다면서 전화하셨다. 물론 처음이 아니다. 열쇠가게 아저씨가 불려오고 가신 건 부지기수다. 처음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 창피하기도 했다. 혼자계시면 안될 것 같아 동생과 의논했다. 순발력 있는 동생은 당장 여기저기 요양원을 알아보았다. 대부분 시설 좋고 서비스 좋은 곳이었다. 엄마는 당연히 펄쩍 뛰셨다. 거부반응이 심했다. 나 역시 꼭 그래야하나 싶고 마음이 불편했다. 엄마에게 유익하고 행복한 것은 어디에 기준을 두어야 하는가. 그리고 나에게 유익한 선(善)은. 내 불편한 마음의 정체는 자식으로서 도리를 못하는 것 같은 죄책감에 가까운 감정과 그럼에도 전적으로 엄마에게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수 없다는 계산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난 그동안, 이미 엄마와 만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언젠가부터 엄마는 내 시간과 노력을 제공해야하는 대상이 돼버렸다는 것을. 엄마라는 존재를 긍정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는 만남이 무슨 만남이란 말인가. 그런 마음이 나를, 그리고 엄마를 소외시켜왔다는 걸 알았다. 그것은 엄마가 요양원에 가느냐 집에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디에 있건 어떤 마음으로 엄마를 대하느냐의 문제였다. 그것은 내가 대상을 어떻게 보고 관계를 맺느냐의 문제이기도 했다.

흐르는 강물-1.jpg
어떠한 사물이든 머물러 있는 것이 없이 모두가 도도하게 흘러간다.

연암은 관재기(觀齋記)에서 준(俊)대사의 말을 빌어 내게 이렇게 얘기한다. “너는 공순히 받아서 고이 보내라. 내가 60년 동안 세상을 보았는데 어떠한 사물이든 머물러 있는 것이 없이 모두가 도도하게 흘러간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그 바퀴를 멈추지 않으니, 내일의 해는 오늘의 해가 아니다. 그러므로 ‘미리 헤아린다’(迎)는 것은 ‘거스르는’(逆) 것이요. ‘붙잡는다’(挽)는 것은 ‘억지로 애쓰는’(勉) 것이요, ‘돌려보낸다’(遣)는 것은 ‘순응하는’(順) 것이다. 너는 마음속에 머물러 두지 말고 기운이 막힘이 없도록 하라.”(『연암집』 하권, 96-97쪽) 나는 어제의 감정, 과거의 신체로 현재의 엄마를 만나왔다. 오지도 않은 미래의 두려움을 미리 당겨서 엄마를 바라보았다. 도도한 생명의 흐름,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고 있었다. 현재의 엄마와 소통하지 못하고 있었다. 엄마는 매일 달라진 신체로 세상과 새롭게 만나고 있다. 엄마만의 방식으로. 나도 지금, 어제보다 한결 가볍고 담담해진 마음으로 엄마를 바라본다. 보다 명료해진 눈으로 나날이 작아지는 엄마의 몸과 새롭게 만난다. 필연성 속에서 엄마를, 타자를, 세상을 만난다는 건, 이렇듯 시시각각 고정된 마음과 눈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리라. ‘마음속에 머물러 두지 않기’ 위해. 이 글도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댓글목록

모모님의 댓글

모모 작성일

늘 평온해보이셔서 혜숙샘의 마음속에 그런 번뇌가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점점 버거워지는 부모님과의 관계...저도 많이 느낍니다.

이병선님의 댓글

이병선 작성일

좋은 글 감사합니다~~~

라일락님의 댓글

라일락 작성일

좋은글 감사합니다. 엄마를 보내드리기 전에 엄마를 진정으로 만났으면 이 서러움이 덜 했을까요?  정말 먹고 살만하니 엄마몸이 아프기시작했고 돌아가시기 몇해전부터는 많이 힘들어 하셨는데 그때부터는 엄마가 너무 버거웠어요 참 외면만 하려했던 시간이었네요 요즘 삶과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혜진님의 댓글

혜진 작성일

저도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미카님의 댓글

미카 작성일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