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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vs 연암] 우정, 또 다른 나와 이루는 합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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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물 작성일15-07-17 09:54 조회6,3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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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 또 다른 나와 이루는 합일


김주란(감이당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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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백아를 보다

종자기가 세상을 떠났으니, 백아가 이 석 자의 오동나무 고목을 끌어안고 장차 뉘를 향하여 타며 장차 뉘로 하여금 듣게 하겠는가? 그 형세로 말하자면 부득불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단번에 다섯 줄을 긁어 대어, 그 소리가 쟁그르르 하고 났을 걸세. 그렇게 하여 줄을 자르고 끊고 부딪고 깨고 부수고 밟아서 모조리 아궁이에 밀어 넣고 단번에 불태워 버린 연후에야 마음이 후련하였을 것이네. 그리고 제 자신과 이렇게 문답했겠지. 

 “네 속이 시원하냐?”

 “시원하고말고.”

 “울고 싶으냐?”

 “울고 싶고말고.”

그러자 울음소리가 천지에 가득하여 종이나 경쇠에서 울려 나오는 듯하며, 눈물이 솟아나 옷깃 앞에 마치 화제나 슬슬처럼 떨어졌을 것이네. 눈물을 드리운 채 눈을 들어 바라보노라면, 빈 산에는 사람 하나 없는데 물은 절로 흐르고 꽃은 절로 피어 있네. 

네가 백아를 보았느냐고 물을 테지. 암, 보았고말고!


- 박지원, 『연암집』 하 <어떤 이에게 보냄>, 돌베개, 348쪽


연암은 우정의 대가이다. 장소와 상대를 불문하고 글과 말과 술과 웃음을 나누는 것을 능력이라 하면 연암은 대단한 능력자이다. 백탑에서 노닐었던 친구들이나 열하를 다녀오며 만난 중국 선비들과의 우정은 연암의 이름과 거의 동시에 호출된다. 이뿐이랴, 저자거리에서 만나는 숱한 기인들이나 깊은 암자에 머무는 승려, 하다하다 연암협의 행랑 사람과 다리 다친 새끼 까치에 이르기까지 연암의 우정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이런 그가 백아와 종자기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지음(知音)이라는 우정의 경지를 우정의 대표 아이콘이라 할 수 있다. 이 둘의 고사(故事)를 들어 우정을 이야기하다니, 너무 뻔한 수순이어서 김이 팍 샌다. 연암도 이 점을 의식했는가, 대신 묘사가 형형하다. 백아가 칼로 오현금의 줄을 자르는 장면에서는  칼이 줄에 닿았을 때 ‘쟁그르르’ 울렸을 소리나 나무통을 ‘부딪고 깨고 부수고 밟아서 모조리 아궁이에 밀어 넣고 단번에 불 태’우는 동작 하나하나를 보고 들은 듯 적어나간다. 실감나는 이야기에 홀려 있는 와중에 연암이 느닷없이 말을 건다.


나는 문득 무안해진다. 아닌 게 아니라, 이건 다 연암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가. 하물며 백아가 자문자답 하는 장면은 고사에도 없는 연암의 창작이다. 뭐라 답할 겨를도 주지 않고 연암은 바로 말을 잇는다. 백아가 자문자답하듯, 연암도 자문자답이다. “보았느냐고? 암, 보았고말고!” 


천지가 울리도록 통곡하는 백아의 모습, 연암은 그런 백아를 보았다 한다. 백아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을 걸세, ~했겠지’ 등의 말투 또한 ‘~하였고말고’라는 강한 확언의 말투로 바뀌고 있다. 이건 무슨 의미인가. 본 거나 진 배 없다는 뜻인가?  연암은 어째서 백아의 모습을 그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렇게 글을 맺은 것일까? 연암의 평소 지론에 따르면 작자의 고심처(苦心處)를 알아보는 것이 제대로 된 읽기라 하는데, 아무래도 이 글의 고심처는 이 마지막 문장에 있지 싶다. 우정의 대가 연암은 지금 우정에 대해 어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연암은 이미 입을 닫고 먼 곳만 본다. 그러니 나는 이 질문을 스피노자와 함께 풀어 볼까 한다. 스피노자, 그가 누구인가? 공동체에서 추방되고 신의 이름으로 저주받았으면서도 신과 우정을 역설한 철학자가 아닌가. 이런 스피노자라면 분명 나와 함께 연암의 무언의 암시를 읽어줄 것이다.


추방된 자, 스피노자의 질문


스피노자와 우정에 대해 얘기나누기 전, 우리는 먼저 그가 처한 상황을 이해해볼 필요가 있다. “자유를 보장하는 국가”였던 네덜란드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스피노자. 그의 벗은 자유주의자나 공화주의자, 범신론자들이었다. 그러나 유대인 공동체는 그의 사상을 몹시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다. 자신이 속한 유태인공동체로부터 추방을 당한 것이 그의 나이 24세 무렵. 젊은 청년에게 신의 이름으로 내려진 저주는 더할 수 없으리만치 끔찍한 것이었다. 나라의 정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중앙집권적 정치를 주장하는 오렌지 공(公)에 맞서 네덜란드의 공화정을 이끌던 더빗 형제가 거리에서 살해당한 것이다. 민중의 자유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민중이 찢어 죽이는 광경이라니.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스피노자의 질문은 시작되었다. 왜 사람들은 스스로 예속되고자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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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와 추방과 살해. 스피노자가 겪은 상황이 워낙 드라마틱하긴 하나, 인간의 역사란 대개 이런 식이었다. 오죽하면 신이 직접 내렸다는 계율 중 이웃을 사랑하라는 항목이 있을까. 조용히 공부하는 애들 보고는 아무도 조용하라고 소리치지 않는다. 이런 계율은 그 자체로 서로 못잡아 먹어 난리인 현실에 대한 반증이다. 무지와 폭력으로 점철된 이 세상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대개가 분노 아니면 냉소이다. 한데 스피노자는 달랐다. 분노도 냉소도 주어진 상황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그는 반응 대신 질문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왜 이다지도 야만적인가? 왜 대중들은 자유가 몹쓸 것이라도 된다는 듯 예속되고자 하는가? 신의 이름으로 사람을 저주하고 죽이는 까닭이 뭘까? 이러한 의문은 신과 인간에 대한 탐구, 지성과 감정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현실적인 수준에서 각 개인들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 싸운다. 서로가 서로에게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하여 풍자가는 이런 인간사를 한껏 비웃고, 신학자는 저주하며, 우울증에 걸린 이들은 차라리 원시적인 삶을 동경하고 인간보다 동물을 사랑한다. 서로의 존재를 견딜 수 없어 하면서도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인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명제에는 이런 인간됨에 대한 양가감정이 공존한다.
 

스피노자는 이 지점을 다시 묻는다. 인간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한, 인간은 서로에게 장애물일 수 밖에 없는가? 이 질문에 대한 그의 결론은 아래와 같다.


인간에게는 인간만큼 유익한 것이 없다. -스피노자, 에티카 4부 정리 18 증명

 

자기 이익 추구는 모든 존재의 본성이다. 이를 부정하지 않고도 서로가 서로에게 장애물이 아닌 유익한 존재가 되는 세상이 있다. 그것이 바로 우정으로 맺어진 세상이다. 인간에 대한 한없는 긍정을 바탕으로 한 이러한 주장이 “낮에도 그에게 저주가 있을 것이고, 밤에도 그에게 저주가 있을지어다. 그가 앉아 있을 때에도 저주가 있을 것이고, 그가 일어서 있을 때에도 저주가 있을지어다. 그가 밖에 나가도…그가 안에 있어도 저주가 있을지어다.”라는 최고의 저주를 받으며 추방된 사람에게서 나왔다니!  


스피노자는 대체 어떻게 이런 과감한 결론에 도달했는가? 그가 보기에 우리의 신은 아무래도 좀 이상했다. 인간처럼 질투하고 인간처럼 분노하고 인간처럼 편애하는 신. 어떻게 신이 이럴 수 있는가? 신이라면, 전지전능한 존재라면 ‘온통 긍정’이어야 하는게 아닌가? 그는 깨달았다. 아, 인간은 신을 자기 모습에 비춰 상상해내는구나! 신은 무능할 수 없다. 그렇기에 아직 드러나지 않은 다른 것은 없다. 비존재는 무능력이니까. 따라서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 그대로가 신의 표현이다. 목적도 없다. 왜냐면 목적은 필요에 의해 생기고 필요는 부족함에서 생기는데, 부족함이 있다면 그건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인간처럼 목적을 갖는 신, 사랑과 질투의 신을 만들고 신과 공통된 지성을 발휘하는 대신 복종을 맹세해왔다. 우리는 왜 이런 오해를 해왔을까? 이 오류는 사실 인간의 타고난 조건이다. 인간은 자신의 신체를 통하지 않고는 외부를 인식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태양의 실제 크기를 계산해 낼 수 있기는 하지만 그걸 알고 난 다음에도 우리 눈에 비치는 태양은 동전만 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대체 참된 인식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신체에 갇힌 존재라는 바로 그 조건 자체가 참된 인식의 출발지점이다. 너도 나도 같은 조건하에 있다는 이 공통성. 이 공통성이 참된 인식을 담보한다.
 

모든 것에 공통적이며, 부분 속에도 전체의 속에도 똑같이 존재하는 것은 타당하게 파악될 수밖에 없다. - 스피노자, 에티카 2부 정리 38  

그렇다면 나에게도 너에게도 공통되는 인식은 참된 인식이다. 인간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공통조건과 ‘신체를 경유할 수밖에 없는 인식’의 존재라는 공통조건은 스피노자에 의해 이렇게 재발견된다! 증오와 오류의 원천에서 덕과 유능의 원천으로! 스피노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조건을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길을 발견했다. 서로를 못견뎌하면서 어쩔 수 없이 함께 사는 관계가 아닌 나의 이익이 너의 이익이 되는 관계를 원하는 자, 우정의 공동체를 건설하라, 우정 없이 혼자서는 그 누구도 참된 인식이라는 자유의 경지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보고 듣고 깨닫는 친구


이제 이러한 스피노자의 시선으로 연암의 마음을 이해해보자.


앞의 글은 절친 이덕무를 먼저 떠나보낸 박제가의 안부를 묻는 편지의 일부이다. 아내도 죽고 벼슬자리에서 물러난 데다 절친했던 벗 이덕무까지 먼저 떠나보낸 박제가가 어떻게 지내려나, 연암은 그게 걱정이다. 그는 지금 박제가의 상태를 보지 않고도 환히 볼 수 있다. 벗을 잃은 자는 살아있으되 ‘외톨이’이다. 천애고아라도 이보다 더할 것인가. 친구가 떠난 세상에 남겨진 자는 천지간에 ‘의지가지’없는 쓸쓸한 외톨이로 삶을 이어가야한다. 이토록 쓸쓸한 존재라니, 대체 친구가 무엇이건대!


앞서 본 대로 스피노자에게 친구란, 공통성을 형성하는 상대이다. ‘한 신체가 다른 신체와 공통적인 것을 많이 가질수록 정신은 많은 것을 적합하게 인식하는 데 더 유능’해지므로 친구를 만드는 능력은 지성의 강화와도 직결된다. 서로 간에 공통성이 형성될수록 우리는 자유롭고 유능해진다. 우리가 추구하는 이익과 타인이 추구하는 이익이 같을 때, 이 두 이익은 공통된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상호간에 능력이 증가되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공통성이 형성된 관계 속에서는 ‘타인과 함께 있어도 자신의 본성이 타인의 본성과 동일하게 발휘되어 서로에게 제약이 되지 않는’다. 신체와 신체가 만드는 공통성이란 어떤 것인가. 신체의 공통성은 같은 현장에서 서로 부딪히는 구체적 상호 작용-눈빛 교환, 어투와 몸짓, 습관적 표현에 익숙해지기 등을 통해 형성된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 우정이란 아주 구체적인 현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정은 맹세 따위로 가질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차라리 끊임없이 움직이는 파트너와 리듬을 맞추면서 즐기는 춤에 가깝다. “아주 구체적인 신체적 수준에서 공통 개념을 형성하려고 시도하라. 이것이 스피노자의 윤리적 제안이다.”(이수영,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오월의 봄, 3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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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연암에게 친구란 나와 더불어 보고 듣는 존재, 일상을 함께 나누는 존재이며 그리하여 함께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존재이다. “내가 다행히 눈을 지녔지만 뉘와 더불어 내 보는 것을 같이 하며, 내가 다행히 귀를 지녔지만 뉘와 더불어 내 듣는 것을 같이하며,...... 내가 다행히 마음을 지녔지만 장차 뉘와 더불어 나의 지혜와 영각을 함께한단 말인가?”(박지원, 『연암집』 하 <어떤 이에게 보냄>, 돌베개, 347쪽)그렇기에 친구는 먼 데서 구할 수가 없다. 생활을 같이 할 수 없는 다른 시공의 존재들과는 지금 나의 감각과 깨달음을 나눌 수 없다.

 

“천고의 옛사람을 벗 삼는다.〔尙友千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너무도 답답한 말이다. 천고의 옛사람은 이미 휘날리는 먼지와 싸늘한 바람으로 변해 버렸으니, 그 누가 장차 ‘제 2 의 나’가 될 것이며, 누가 나를 위해 주선인이 되겠는가 ....... 아아, 이미 서로 만나 볼 수 없는 처지라면 그래도 벗이라 이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봉규 씨의 키가 몇 자인지, 수염과 눈썹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용모도 알 수 없다면 한세상에 같이 사는 사람이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연암집 제 3권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회성원집(繪聲園集)》 발문 


이렇게 볼 때 친구를 잃는다는 것은 내가 보고 들은 것을 기쁘게 나눌 대상의 상실만이 아니다. 절친한 벗과 함께 구성했던 세계 또한 벗의 죽음과 동시에 사라지는 것이다. 과연 ‘의지할 곳 없는 외톨이’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연암은 친구를 잃은 슬픔은 아내 잃은 슬픔과 비교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아내는 새로 얻을 수 있지만 친구는 새로 얻을 수 없다는 게 그 이유다. 그런데 막상 연암 자신은 주위의 걱정 섞인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상처(喪妻)한 뒤 죽을 때까지 홀아비 신세를 고집했다. 하긴 그렇다. 함께 보고 듣고 깨닫는 존재가 벗일진대, 연암이라면 아내 또한 훌륭한 벗으로 삼지 않았겠는가.


연암, 백아가 되다


그럼 이제 맨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 연암은 백아를 보았다고 했다. 내가 아는 한에서는, 연암은 풍자를 위해서라면 모를까 자신의 슬픔을 과장하기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이런 판단을 전제한다면 우리는 질문을 조금 바꿔야 한다. 연암은 백아를 ‘어떻게’ 볼 수 있었는가.
 

지금 이덕무라는 친구를 잃은 것은 박제가 뿐이 아니다. 그의 부고를 접한 연암 또한 "나를 잃어버린 것 같구나"라며 탄식했다 한다. 그런 연암이기에 박제가의 얼굴을 보지 않고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연암이기에 백아를 보았다 한 것이다. 아니, 글을 다시 읽자면 “보았고말고”라는 말은 그 마음을 외려 억누르는 표현이다. 연암은 백아를 단지 보기만 한 게 아니다. 백아의 마음 속에 일어난 자문자답을 듣고 백아의 눈물 너머로 빈산을 보고 있는 연암. 그 문장들 안에서 연암이 백아가 되고, 백아가 연암이 되어 있다.
 

하여 이 글을 읽으면 여기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 한 사람이 떠오른다. 담헌 홍대용 말이다. 백탑 시절, 연암은 친구들과 더불어 음악을 즐겼었다. 담헌의 집에 있던 청나라 양금을 처음 보고 연주법을 궁리해낸 일이라던가, 눈 내린 겨울 밤 풍류를 아는 벗들과 즐긴 일 등에 관해 연암은 아름다운 글들을 남기고 있다. 담헌이 죽은 후로 연암은 다시 음악을 가까이 하지 않았고 몇 년 후 담헌의 집에 다녀온 날 아예 집안의 악기들을 치워버렸다 한다. 연암, 담헌, 박제가, 이덕무, 그리고 백아. 연암의 “보았고말고!”라는 단언은 이 모든 벗들이 서로 어우러지며 통하고 있는 세상을 기반으로 한 진술인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스피노자는 ‘합일’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다른 물체들이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어떤 일정한 비율로 전달할 때, 그러한 물체들이 서로 합일되어 있’(스피노자, 『에티카』, 황태연 역, 비홍 출판사, 117쪽). 그러한 모든 것들은 다 함께 하나의 개체를 형성한다. 이 합일을 통해 우리의 감각과 지성은 다른 지평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연암은 담헌과의 합일을 통해 백아와의 합일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담헌 이전의 연암이 알던 백아는 고사 속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담헌 이후의 연암에게 백아는 ‘또 다른 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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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의문이 든다. 공통성을 형성한 관계 속에서 친구는 또 다른 나이다. 그럼 내가 둘이 되는 것일까? 아니다. 친구는 나를 다른 나로 만들어 주는 존재다. 기존의 나를 고스란히 고수하면서 타자와 공통성을 형성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정은 각자의 운동을 서로 간에 함께 공통된 비율로 만들어가는 합일의 경험이다. 이 경험을 통해 우리는 친구의 흔적을 내 몸에 담게 된다. 이런 친구를 잃으면 어떻게 되는가? 연암 혹은 백아는 여기에 대해 말한다. 친구와 함께 있을 때 ‘이 석 자의 오동나무 고목’에서는 비로소 음악이 울려 퍼진다. 그러나 친구를 잃으면 거문고는 도로 고목이 되고 산은 빈 산이 된다. 지기를 잃은 자는 지기와 함께 한 그 세상을 잃는다. 이 쓸쓸함은 뼛골이 사무치는 쓸쓸함이다. 그러나, 이 쓸쓸함은 지기와 함께 세상을 이룰 수 있는 능력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다. 그런 존재라면, 누구라도 백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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