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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vs 연암] 들끓는 감정에서 필연적 인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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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이트 작성일15-07-19 15:30 조회6,0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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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끓는 감정에서 필연적 인식으로

 

김지숙(감이당 대중지성 3학년) 


일상에서 감정으로부터 자유롭기란 참 어렵다. 아니 일상을 채우는 것은 사람의 감정이 전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감정과 늘 붙어 다닌다. 어제는 화려하게 핀 벚꽃을 보고 환하게 웃더니 오늘은 비가 온 후 떨어진 벚꽃을 보고 갑자기 우울해진다. 평소 자는 아들의 모습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는데 당장 내일 시험을 앞두고 퍼져 자는 모습에서는 미운마음이 앞선다. 화장실 갈 때 마음과 올 때 마음이 다르다는 말은 이랬다저랬다 하는 나의 감정에도 딱 맞아 떨어진다. 헌데 문제는 소소한 감정이 별것 아닌 일을 심각하게 만들 때이다.


최근 나에게도 그런 일이 생겼다. 직장맘으로서 서로의 고충을 이해하는 관계였던 동료가 함께 처리해야 하는 일에서 슬쩍 슬쩍 게으름을 피우는 모습이 자꾸 내 눈에 잡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모른 척하다가 나중에는 몇 번 지적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대로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보기도 싫어지더니 말도 거의 하지 않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사람들은 이정도 가지고 무슨 고민이냐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몇 년 전, 나의 잔소리와 지적을 못 견디고 그만둔 직원이 있었다. 사실, 나로 인해 그만두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좀 화가 났다. 그녀가 잘못해서 나간거지, 나한테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왜 내가 그렇게 예민하게 굴었는지, 좀 더 이성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는지 후회와 자책감이 밀려들었다. 그래서 화를 다스리는 방법’, ‘처세술등에 관한 책을 읽어보기도 하고, 나중에는 인간관계에 회의가 들어 상담도 받아보았다. 상당한 시간을 우울하게 보냈다. 그러니 지금 심각할 수밖에. 혹시 저번처럼 그녀 역시 그만두게 된다면 이건 내 문제라는 생각에 빠져 허우적댈 것만 같아 두렵기 때문이다. 문제는 뻔히 그럴 걸 알면서도 직장에 들어서기만 하면 여실히 드러나는 감정을 도무지 숨길 수가 없다. 하지만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이란 외부의 원인들에 의하여 여러 가지 형식으로 휘둘리며, 맞바람에 요동치는 바다의 파도(에티카, 스피노자 지음, 황태연 옮김, 비홍출판사, 2014, 215)와 같다는데 어쩌란 말인가. 여전히 감정 하나를 다스리지 못해 지금도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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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보여준 길을 따라가며 감정이란 무엇이고 어떤 원리에 의해 감정이 느껴지는 것인지, 또한 감정을 조절하려는 시도는 왜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궁금한 것은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지에 대해 탐색하고 그녀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삶에서 감정으로 부딪히는 관계에 대한 해법을 찾고 싶다.


감정, 자연스러운 신체 반응


그녀와의 관계가 나빠지자 나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다짐했다. “미워하지 말자오늘은 내가 먼저 상냥하게 말을 건네자하지만 직장에 들어서기만 하면 그 말은 허공에 흩어지고 만다불쑥 불쑥 올라오는 그녀에 대한 감정을 나는 정말 주체할 수 없다도대체 감정이 뭐 길래 나의 굳건한 다짐을 이렇게 산산조각 내는 것일까.


스피노자는 말한다정신과 신체는 하나로 결합되어 있으며 정신은 신체가 느끼는 것을 인식할 뿐이라고. 태양이 우리로부터 지구직경의 600배 떨어져 있다고 알더라도 매번 태양을 볼 때는 200피트 정도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시신경이 감각하는 것을 정신이 인식하는 것이다. 즉 신체가 받은 인상을 정신이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외부 사물에 대해서 신체가 느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정신안의 다른 정신-스피노자는 이것을 그냥 정신이라고 불렀다-이고 이것은 오류투성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정신은 지각하거나 인식하는 것이지, 우리의 기대처럼 신체를 지배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체의 우월성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 어떤 것도 우위에 있지 않은 상태란 결국 정신과 신체는 하나라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이름 하여 심신평행론’. , 신체의 활동 능력이 클수록 정신의 사유 능력도 커지게 되고, 신체 활동 능력이 떨어지면 사유능력도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몸의 컨디션이 좋으면 책도 잘 읽히고 이해가 잘 되지만, 몸이 피곤하면 책도 잘 안 읽히면서 무슨 말인지 도통 들어오지 않는 것은 내 몸이 곧 내 정신이기 때문이다.


감정이란 신체의 활동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며, 촉진하거나 억제하는 신체의 변용인 동시에 그러한 변용의 관념이다. (에티카3, 정의 3)


감정도 마찬가지다. 인용문에서 보듯, 감정은 신체와 긴밀하게 움직인다. 이성이라는 정신의 영역이 신체 우위에 있지 않다면, 이성 역시 감정을 좌우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이성이 나서서 슬픔과기쁨을 통제하거나 조절할 수 없다. ‘슬프지 말아야지.’해서 슬프지 않고 기쁘지 말아야지.’해서 기쁘지 않을 수 없다. 정신은 신체가 느낀 감정을 인식할 뿐이다. 그러므로 얼굴표정에서도, 목소리 톤에서도, 몸짓에서도 감정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 말은 내가 몸을 가지고 있는 한 감정으로부터 떠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내가 그녀를 미워하지 말아야지.’하고 아무리 결심해도 안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내 신체가 받은 그녀의 인상을 내 정신이 인식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숨길 수 있겠는가.


그런데 어떤 대상에 대해 감정이 지속되지 못하고 왜 휙휙 바뀌는 것일까. 나 역시 그녀가 한없이 밉다가도 좀 누그러지기도 하면서 괜찮아질 때가 가끔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렇지 않아도 올라오는 감정을 주체하기도 어려운데 그마저 이랬다저랬다 하니 혼란스러울 뿐이다. 이런 현상도 신체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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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신체는 어떤 때는 이런 방식으로, 어떤 때에는 다른 방식으로 자극받아 변화 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동일한 대상으로부터 서로 다른 때에 상이한 방식으로 자극받아 변화 될 수 있다. (에티카, 3, 정리 51)


아하! ‘감정이 죽 끓듯 한다.’는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어제 본 벚꽃과 오늘 본 벚꽃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도, 사랑스럽던 아들이 밉게 보이는 것도, 밖에서 만나는 직장 동료와 일터에서 만나는 직장 동료에 대한 감정이 변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왜 일관성이 없느냐고 나를 탓하지 말자. 계속 변화하는 신체가 있는 한 어찌할 도리가 없다. 신체와 신체의 마주침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정신의 활동을 어떻게 막겠는가. 그러니 감정이 시도 때도 없이 올라오고 쉽게 변하는 것은 너무나 정상적이므로 자책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감정을 이렇게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감정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평생 감정과 부대끼면서 함께 살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필연적 인식을 통해 감정 들여다보기

앞서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쉽게 변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이리저리 변화무쌍한 감정도 문제지만 계속해서 하나의 감정에 머무른다면 어떨까. 분노를 느낀다고 계속 분노하고, 밉다고 계속 증오하고, 자기에게 기쁨을 준다고 거기에 빠져있다면 정말 끔찍할 것 같다. 게다가 주지하듯 감정은 조절하거나 통제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감정에서 영영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일까.


어떤 수동 또는 감정의 힘은 인간의 기타의 작용이나 능력을 능가할 수 있으므로, 그러한 감정은 인간에게 끈질기게 달라붙는다. (에티카4, 정리 6)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감정은 인간에게 끈질기게 달라붙어 거기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슬픔이나 기쁨이라는 감정 자체보다도 감정의 수동과 능동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능동의 감정일 때라야 감정에 예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도 그녀를 한번 미워하기 시작하더니 아무리 해도 미움의 감정은 잘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번에는 그녀가 나를 미워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를 슬슬 피하면서 말하는 횟수도 줄고, 대하는 눈빛도 예전과 달랐으며, 말투도 친절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를 증오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신체 반응이었다. 미움이 증오를 불러온 것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그럴수록 나는 더욱 감정의 회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후회와 자책, 비난밖에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을 몇 년 전의 경험을 통해 어렴풋이 알고 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앞서 보았듯이 감정은 신체 변용으로 오류투성이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도 오류일 수 있다는 것, 즉 타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녀를 왜 미워하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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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돌아가 내가 그녀에게 화가 났던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이유는 간단하다그녀가 나보다 일을 적게 한다는 거였다그래서 그녀를 게으르다고 책망했다.하지만 생각해 보라! 사람들이 어떻게 나와 같을 수가 있겠는가. 각자의 속도와 리듬이 있고 이것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의 양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그런데 일의 양이라는 것은 직장에서 정해준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정해준 것도 아니다. 오로지 나의 기준으로 내가 판단한 것이다각자는 본성적으로 자기의 의향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기를 바란다.”(『에티카,189)는 것을 나는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그래서 선이라는 것도 악이라는 것도 내 감정에 따라 결정했다선이기 때문에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욕구하는 것, 나에게 좋은 것과 기쁨을 주는 것, 내 기준에 맞는 것만을 선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그녀에게 요구했다. 그렇다면 나한테 좋지 않다고, 그리고 내가 불편하다고 그녀를 옭아매고 있는 것은 나의 편견이자 오만이다.


하여 인간의 본성은 이러하며 판단은 불안정하다는 것, 인간은 오직 감정에 의해서만 사물을 판단한다는 것, 기쁨 또는 슬픔을 가져오는 것으로 믿음에 따라 실현하거나 배제하려고 노력하는 사물이 종종 상상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에티카, 205쪽)을 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정신의 능동은 오직 타당한 관념에서만 발생하며, 정신의 수동은 타당하지 못한 관념에만 의존한다. (에티카3, 정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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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내가 그녀를 미워했던 감정이 오류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원인을 다시 파악하는 것은 타당한 관념을 획득하는 출발이었다. 이것이 스피노자가 말한 정신의 능동이자 필연적 인식이다. 그것을 통해 나의 미움의 감정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더 이상 그녀를 미워할 이유가 없어졌다. 이렇듯 우리를 한시도 떠나지 않으면서 숨기지도, 억제하지도 못할 것 같던 감정도 필연적 인식을 통해 벗어날 수 있다.

 

공통 개념, 그것은 관계의 힘

내가 필연적 인식을 통해 미움이라는 감정에서 벗어났다고 그녀와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영문도 모른 채 나에게서 미움을 받는다고 생각한 그녀도 어느 순간부터 나를 미워했다. 하지만 그녀가 거기에 계속 머무르게 되면 증오라는 감정, 즉 슬픔에 예속되고 만다. 내가 그녀를 미워했던 이유를 알아야만 그녀도 나에 대한 미움의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일을 하는 것, 그것이 당신에게는 선이고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그녀에게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느냐는 각자 다를 수 있으며 이에 대해 어떤 것이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서로 공감할 때 비로소 우리는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또한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본성을 인정하고 차이를 이해함으로서 서로를 배려하고 도움을 주는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능동적 기쁨이 아닐까.


이처럼 관계를 회복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필연적 인식을 통해 무엇보다도 서로가 인정할 수 있는 타당한 관념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옳다고 인정되는 것으로, 이것을 스피노자는 공통개념이라고 말한다. 공통개념은 선악, 좋음과 나쁨이 누구에게나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다시 말해,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창출된다. 그래서 이것을 관계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까지 살펴보았지만 자신의 오류를 인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스피노자는 이것을 신체 변용이라는 감정을 통해 설명했다면 연암은 자기한테 들리는 것만 믿을 때 얼마나 치명적 오류를 범할 수 있는지에 대해 얘기한다. 정말 재미있으면서도 설득력이 있는 연암의 글을 따라가 보자.


한 아이가 뜰에 놀다가 제 귀가 갑자기 울리자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기뻐하며, 가만히 이웃집 아이더러 말하기를, “너 이 소리 좀 들어봐라. 내 귀에서 앵앵 하며 피리 불고 생황 부는 소리가 나는데 별같이 동글동글하다!”하였다. 이웃집 아이가 귀를 기울여 맞대어 보았으나 끝내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자, 안타깝게 소리치며 남이 몰라주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일찍이 어떤 촌사람과 동숙한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의 코고는 소리가 우람하여 마치 토하는 것도 같고, 휘파람 부는 것도 같고, 한탄하는 것도 같고, 숨을 크게 내쉬는 것도 같고, 솥의 물이 끓는 것도 같고, 빈 수레가 덜커덩거리며 구르는 것도 같았으며, 들이쉴 땐 톱질하는 소리가 나고, 내뿜을 때는 돼지처럼 씩씩대었다. 그러다가 남이 일깨워 주자 발끈 성을 내며 난 그런 일이 없소하였다.(연암집중권, 공작관 문고,<자서>, 돌베게 출판사. 2012,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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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울리는 것은 병이어서 자기만 들을 수 있는데도 남이 몰라준다고 섭섭해 하고 있다. 코고는 소리는 정작 본인만 듣지 못해 남이 깨우쳐주는데도 수긍하지 않고 있다. 전자는 자기만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고, 후자는 자기만 모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상황. 자기만 알고 있는 것이 틀릴 수도 있는 데 그것을 주장하고, 자기만 모른다고 남이 일깨워주는데도 그것을 무시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아 소통이 되지 않으니 제대로 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그래서 연암은 말한다. 남의 귀 울리는 소리는 들으려 말고 나의 코고는 소리를 들으라고. 살면서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면 필연적 인식에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 나의 경우를 보라. 내가 품고 있는 미움이라는 감정이 오류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 감정의 원인결과를 따질 수 있었고, 그 감정에서 떠날 수 있었다. 따라서 나의 귀 울림소리는 나한테만 들린다는 것, 나의 코고는 소리를 나만 듣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 서로에게 타당한 관념을 형성할 수 있는 출발이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스피노자가 말한 공통개념을 도출하면서 관계는 새롭게 정립 될 수 있다.


고귀한 것은 어렵고 드물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힘들어질 때마다 감정적인 내 자신이 싫었다. 그럴 때마다 상대를 탓하기도 했지만 보통은 나의 이성을 질타하면서 관계를 회피했다. 그래서 참된 지식이나 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귀가 번쩍했다. 이것을 머릿속에 집어넣기만 하면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체 변용인 감정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고 이성이 감정을 조절하거나 억제할 수도 없다는것을, 오직 우리는 감정에 따라 행동하고 판단하며 선도 악도 감정에 따른 관념일 뿐이라는 것을 에티카를 통해 알게 되었다. 따라서 나의 생각은 부끄럽지만 그저 무지에서 나왔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흔들리는 감정 속에서 필연적 인식을 할 때 감정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관계의 힘인 공통 개념을 산출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고귀하다고 그러나 어려울 뿐 아니라 드물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시시각각 끈덕지게 달라붙는 감정을 이성도 어찌할 도리가 없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더 많다고 스피노자는 내게 일러 준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거나 슬퍼하지 말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인간만큼 유익한 것이 없다. 말하건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서는()하나의 정신과 하나의 신체를 구성하고,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가능한 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며, 모든 사람이 다함께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이익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어떠한 것도 바랄 수 없다.”(에티카, 250)는 스피노자의 말은 내게 여전히 인간에 대한 무한한 긍정을 보여준다. 그러니 어찌 들끓는 감정이 무서워 관계를 끊겠는가. 관계 속으로 풍덩 빠져 인간의 유익함을 만끽하는 행운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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