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 vs 연암] 글쓰기, 참된 인식으로 가는 길 > 횡단에세이

횡단에세이

홈 > 커뮤니티 > 횡단에세이

[스피노자 vs 연암] 글쓰기, 참된 인식으로 가는 길

페이지 정보

작성자 양파 작성일15-07-20 23:53 조회6,086회 댓글0건

본문

 

글쓰기, 참된 인식으로 가는 길
 
                                                                                              
  박경옥(감이당 3학년)
 

생명을 키우는 질문
 
올 가뭄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심하다. 도시에서는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니 가뭄을 실감하지 못한다. 한 발 짝 교외로 나가면 빗물을 먹고 사는 많은 잡초들이 시들시들 죽어가고 있다. 서울엔 가끔 비가 내렸지만 기상청에서 발표하는 하루 20mm의 빗물은 겨우 잎을 적실 뿐 뿌리에 스며들 수 없는 수치이다.
 
그런 가뭄 속에 주말 농장에서 5평 땅에 작물을 키우고 있다. 같은 장소에서 삼 년 동안 주말농장을 하고 있다. 농사짓기는 어릴 때는 배움이라기보다는 일상의 생활이었다. 부모님이 시키면 밭에 가서 고추 따오고, 모심기가 되면 모를 심고, 밥 먹기 위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하는 주말농사는 다시 배워야 하는 일이다. 어떤 씨앗을 뿌리고, 언제 순지르기를 할 것인지, 언제 수확하는 지 등등. 가족들 밥상에 올리기까지 모두 적절한 순서와 방법을 알아야 한다.
 
이런 일련의 농사일이 농촌에서 자랐다고 쉬운 것은 아니다. 이 과정을 서울이라는 지역에 맞게, 5평 크기의 땅에 맞게 계획을 짜야 한다. 물론 농작물에 대한 기본 지식은 필수다. 그런데 3년을 경험해보니, 미리 계획도 짜고 주변에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 겸손하게 물어야 더 수확이 좋아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5년토마토1.jpg

 
그렇다. 궁금할 때는 질문해야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떻게 하면 좋을 지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런데 에세이에선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에세이를 쓸려면 삶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질문하라고 질책을 받는데 질문이 없었다. 내 인생임에도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방치했다. 문제에 제대로 대면하지 못하고 머릿속에 빙빙 돌기만 했다. 내 글쓰기에 무엇이 문제가 있는 것일까?

“무지한 자는 외부의 원인들에 의하여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교란되어 결코 정신의 참다운 만족을 향유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마치 자신과 신과 사물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생활하고, 작용 받는 것을 멈추자마자 동시에 존재하는 것도 멈춘다. 이에 반하여 현자는 현자로서 고찰되는 한에 있어서 정신이 거의 동요 되지 않고, 자기와 신과 사물을 어떤 필연성에 의하여 의식하며, 결코 존재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언제나 정신의 참다운 만족을 향유하고 있다.(『에티카』비홍출판사, 제5부 정리 42 주석)
 
정신의 참다운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무지한 자이며, 외부에서 작용 받는 것을 멈추자마자 존재하는 것도 멈출 수 있다고 한다. 존재하는 것도 멈춘다면 생명력이 없어진다는 의미다. 살기 위해선 자신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기다. 현자에 속해 정신이 거의 동요되지 않는 단계는 나에겐 너무 높은 차원이라 꿈꿀 수는 없지만.
 
그럼, 나는 어떤 필연성을 의식하며 책을 읽고 질문했던가. 책을 읽어도 절실한 질문이 없었다. 그리고 “책 정리에 불과한 에세이다”라는 평을 듣고도 무엇이 문제인지 몰랐다. 질문이 없으니 글쓰기가 풀리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농사를 짓듯 생명력을 키우는 글은 어떻게 써야 할까? 고춧잎 하나도 시들었을 때 왜 그런지 세밀하게 관찰하고 원인을 알아야 다음에 고추나무를 잘 살릴 수 있다. 세밀하다는 것은 허술하다는 것의 반대 개념이다. 그러면 질문이 허술하면 왜 글이 안 되는가? 연암은 이렇게 충고한다.
 
글 짓는 자는 그 걱정이 항상 스스로 갈 길을 잃고 요령을 얻지 못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무릇 갈 길이 밝지 못하면 한 글자도 하필(下筆)하기가 어려워져서 항상 더디고 깔끄러움을 고민하게 되고, 요령을 얻지 못하면 두루 얽매이기를 아무리 튼튼하게 해도 오히려 허술함을 걱정하게 된다.(...) 진실로 한마디 말로 정곡을 찌르기를 눈 오는 밤에 채주에 쳐들어가듯이, 한마디 말로 핵심을 뽑아내기를 세 차례 북을 울려 관문을 빼앗듯이 할 수 있어야 하니, 글을 짓는 방도가 이 정도는 되어야 지극하다 할 것이다. -『연암집』上,,132쪽
 
글이 나아갈 방향을 짜놓지 않고 어림짐작으로 글을 쓰니 늘 허술하고 갈 길을 모르게 된 것이다. 글은 한마디 말로 정곡을 찌르고 핵심을 뽑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정곡을 찌르기 위해서는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하는데 그 중 하나가 다른 사람의 책읽기다. 그러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book.jpg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책을 읽는 것은 외부의 영양분의 섭취이다. 입으로 들어온다고 그 영양분이 내게로 다 흡수되지 않는다. 여태까지 흡수는커녕 영양분을 조각내어 입에 물고 있었다. 삼키지 못한 말은 누구도 들을 수 없다. 책읽기는 외부의 영양물질이 들어와 피와 살이 되듯 다른 이의 글을 소화시키는 과정이다. 내 신체에 새기는 작업이다. 그런데 여태까지 내가 책을 어떻게 대해 왔는지 점검해보자.
 
책을 많이 소장하는 것이 나의 20대부터의 로망이었다. 스무 살부터 집에 대한 그림이 있었다. 방의 한 면을 책으로 가득 채우고 그 속에서 책을 읽기. 세월이 지나니 그 소망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이제 방 한쪽 벽은 모두 책이다. 책이 많아 어디에 둘 지 고민이다. 책장을 보면 여러 분야의 책이 있다. 여행서, 신화, 서양철학, 동양철학까지.(감이당 3년에 어려운 책이 잔뜩 늘었다!) 수많은 책들은 아는 사람이 집을 방문하면 보여주는 전시물처럼 되었다. 책장을 본 사람이 “어머 책을 많이 읽으시나 봐요” 하면 나는 지식인이 된 것처럼 우쭐해졌다. 마치 이서구가 소완정(素玩亭)을 지어놓고 책을 마룻대에 가득하게 좌우에 쌓아 놓은 것을 연암에게 보인 것처럼 책이 많이 있는 것을 친구들에게 내심 자랑했다.
 
남에게 장식품처럼 보여주는 책은 해외패키지 여행과 별다름 없다. 패키지여행은 현지 사람들에게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에펠탑에서 사진 한 장, 로마에서 한 장처럼 방문 증거만 남기는 여행이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여행이나 책읽기로는 내 자신이 충만해지지 않는다. 단지 책 속에서 시간을 의미 없이 흘려보내게 되는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겉멋은 집안일에 집중을 못하고 대충 때우는 잘못된 습관까지 생겼다. 습관이 오래 되어 고치기 힘든 고질병처럼 되어 간다. 이런 식으로 계속 책을 읽는 것은 내 몸에 어혈을 쌓는 것과 같다. 생각이 흘러가고 새로운 질문이 나와야 하는데 꽉 막혀 있는 것이다.
 
남보다 많은 책이 있다고 자랑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액세서리나 명품가방을 자랑하는 것과 같은 허영심이 아닌가. 그런 마음으로는 책에서 아무 배움이 일어나지 않았다. 더구나 책을 통해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나의 논리를 구성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천지는 끊임없이 생명을 낳고, 해와 달이 날마다 새롭듯이, ‘책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책마다 담긴 뜻은 제각각’인데 책을 제대로 안 읽는 행동은 책에 있는 내용에 상관없이 살겠다는 거만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어떠한 것도 장식으로 치부하며 내 자신과 타인에 대한 사랑이 없어서가 아닐까. 스피노자는 말한다.
  
 
거만은 인간이 자신에 대하여 적정 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기는 것에서 생기는 기쁨이다. 이 오견(誤見)을 거만한 인간은 가능한 한 소중히 간직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에티카』(비홍, 2014) 280쪽
 

거만한 마음에 무엇이 들어갈 수 있겠는가. 게다가 잘못된 관점을 가능한 한 소중하게 간직하려고 하다니! 허영심은 정신적으로 약한 자에게 주로 온다. 그러면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은, 모든 것이 신의 본성의 필연성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각별히 명심하고, 따라서 불쾌하고 악하다고 생각되는 온갖 것과 부도덕하고, 혐오스럽고, 부정하고 비열하게 보이는 온갖 것은 자신이 사물 자체를 혼란스럽고, 단편적이고, 어지럽게 파악하는 것에서 생긴다는 것을 유념한다. 이런 이유로, 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려고 노력하며, 참된 인식에 장애가 되는 것들, 즉 미움, 분노, 질투, 비웃음, 거만 그리고 우리가 주의한 기타의 것들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에티카』, 295쪽)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은 신의 본성의 필연성을 명심하고, 달라붙는 망상들을 제거하고 참된 인식에 이르기 위해 용맹정진 한다. 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려고 노력하며 참된 인식에 장애가 되는 것을 제거하려고 한다. ‘우리의 모든 노력, 욕망은 본성의 필연성에서 나오고’ 그 욕망이 외부에 의존하면 우리는 무능력과 불완전한 인식을 가진다. 세상에 대한 질문이 없는 자들은 사물을 단편적으로 인식하고 모두 비슷하다고 치부해버린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거기다 지나치게 조급한 마음은 자기부정에 빠진다. 책을 읽었으되 그 책에 대한 내 견해 한마디 말하지 못했을 때 나를 비하한 적이 여러 번 있다.
 
복숭아 인제_1.jpg
 
자기부정은 감정의 예속이다. 연암은 이서구에게 <소완정기(素玩亭記)>를 써주면서 책을 눈으로만 보지 말고 마음으로 보고 집중해서 봐야 정기가 모이고 흩어지지 않아 깨달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박지원은' 세상에 대한 질문과 뜻을 밝히는 방법은 ‘마음을 비워야 하고 외물을 받아들이고 사심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글은 글쓴이의 혼이 들어간 것이다. 그 혼을 내 몸에 덧씌우고 남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하고 나를 포장하는 허영으로 읽었다. 그러면 신체의 반응과 정신이 어긋나게 된다.
 
“닭이 울면 일어나서 눈을 감고 꿇어앉아 이전에 외운 것을 복습하고 가만히 음미해 보라. 그 내용이 이해되지 않는 곳은 없는가, 그 뜻이 통하지 않는 곳은 없는가, 글자를 착각한 것은 없는가? 마음속으로 검증하고 몸으로 체험해 보아 스스로 터득한 것이 있으면 기뻐하여 잊지 말아야 한다.” -『연암집』하, 379쪽
 
 연암이 말하듯 글은 가만히 음미하며 내용을 이해하고 뜻을 알고 비로소 스스로 터득해야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공부란 차서를 두며 자연의 질서를 이해하는 길이다.  자연은 때로는 무자비하고, 때로는 따스하다. 공부하며 자연의 흐름에 나를 맡길 때 노력과 능력 이상을 바라지 않고 순리를 터득해 갈 수 있는 것이다.
 
'나’를 찾기
 
우리는 주변사람들이 좋아하고 가치 있다고 표상하는 행동을 많이 한다. 나에게 독서도 그 중의 하나였다. 스피노자는 단지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어떤 일을 행하거나 피하려는 노력은 야심[아부]이라고 한다. 그것이 우리 자신이나 타인에게 해로움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할 때 그렇게 부른다.(에티카,186쪽) 책을 읽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고 우주의 이치를 알고자 하는 행동이다. 그것이 아무 질문도 없고 삶에 변화가 없다면 슬픈 일이다. 연암은 ‘부서진 기와나 벽돌처럼 쓸모없는 것들에도 도를 표현할 수 있다면 어찌 버릴 수 있느냐’고 묻는다. 연암의 글을 읽으면서 그의 명성에 기대면 오히려 글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된다. 오직 한 문장 한 문장의 참모습을 잘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조급함과 허영심을 내려놓는 일이다. 책을 사놓고 돈이 아까워서 다 읽어버리겠다는 욕심, 남에게 지식인으로 보이고 싶은 욕심을 내려놓지 않으면 책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책장의 많은 책이 나를 대신 할 수 없다. 더구나 저자의 생각이 나의 생각을 대변할 수 없다. 책은 나의 생각을 키우는 좋은 밭이다. 저자는 나를 발견하는 길에서 목마를 때 목을 축여 준다. 목을 축였으면 열매를 맺기 위해 나만의 나무를 키워야 한다. 큰 나무의 그늘에 의존해서는 안 되는 작물처럼.
 
 
 
노각1.jpg


글쓰기, 생명의 욕구
 
생명의 본질은 생산이자 순환이다. 물을 빨아들여 식물이 성장하듯 인간은 근원적으로 생산하고자 한다. 내 안의 생명의 힘을 무시하고 가꾸지를 않으니 시들하고 재미없고 글이 안 써진 것이다. 예전의 어머니 세대는 몸을 움직여 생명을 키웠다. 또, 사람들과 어울리며 생명을 풍부하게 했다. 지인 중에 네이버에서 가장 자주 검색되는 영어사전을 쓴 여성이 있다. 그 사람은 “ 하루에 몇 시간씩 어머니들이 밭고랑에 김을 매듯이 매일 사전을 번역하고 있어요. 그 일이 벌써 20년이 되었어요” 라고 했다.
 
글을 쓰는 일은 엉덩이가 무겁고 체력을 버텨내야 할 수 있다.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이번에 독송 수업을 준비하면서 글 하나 하나에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다섯 번을 다시 쓰면서 어떤 정보도 나의 언어로 가공하고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지식을 나누는 일도 생명을 키우는 일의 하나가 아닐까.
 
우리는 이제 예전의 어머니 세대처럼 살지는 않는다. 이곳저곳 자주 옮겨 다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생명을 키우는 일은 가능할 것이다. 글쓰기가 그 중 하나이다. 글을 통해 또 다른 길을 만드는 것이다.
 
“도(道)란 길과 같으니, 청컨대 길을 들어 비유해 보겠다. 동서남북 각처로 가는 나그네는 반드시 먼저 목적지까지 노정이 몇 리나 되고, 필요한 양식이 얼마나 되며, 거쳐 가는 정자·나루·역참·봉후(烽堠)의 거리와 차례를 자세히 물어 눈으로 보듯 훤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 뒤에야 다리로 실지(實地)를 밟고 평소의 발걸음으로 평탄한 길을 가는 법이다. 먼저 분명히 알고 있었으므로, 바르지 못한 샛길로 달려가거나 엉뚱한 갈림길에서 방황하게 되지 않으며, 또 지름길로 가다가 가시덤불을 만날 위험이나 중도에 포기해 버릴 걱정도 없게 되는 것이다. 이는 지(知)와 행(行)이 겸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행하면 저절로 알게 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헤엄쳐서 물속의 달을 건지거나 북을 치면서 자식을 찾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연암집』중(中)<위학지방도 발문> 107쪽
 

이처럼 글쓰기의 길도 저절로 되지는 않는다. 준비를 철저히 해야 일이다. 길 위의 나그네도 길에서 물어야 한다. 다음 목적지를 잘 알고 가야 샛길로 빠지거나 방황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글쓰기는 마음 쓰기이다. 마음의 에너지가 움직이는 것이다. 몸과 마음으로 생명이 자랄 수 있도록 애쓰는 일이다. 글을 쓰는 것은 ‘ 두터운 땅이 지극히 단단하고 꽉 막혀 있지만 오래 파면 샘을 얻는 것은 꾸준한 성(誠)’(연암집上, 77쪽)인 것처럼 마음을 다하여 가는 길이다. 온 몸을 다하는 글쓰기는 가뭄 속에서도 물길을 찾아 꽃을 피우는 일이 아닐까.@
 
기룬꽃밭1.jpg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