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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vs 장자] 과정으로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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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이트 작성일15-10-14 23:25 조회26,310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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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으로서의 삶

 

감이당 대중지성 3학년 김지숙

 

메르스 여파로 한가하게 보내고 있어서 7월도 휴직하는 것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정상화되는 대로 복귀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것은 6월 말 문득 내게 도착한 한 통의 메시지이다. 메르스 광풍이 온 나라에 몰아치고 있을 때 내 직장은 그것에 완전히 직격탄을 맞았고, 나는 자진해서 6월 초 3주간의 무급 휴가를 받아 쉬고 있었다. 며칠 후 복귀를 앞두고 이런 문자를 받으니 좀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문자 한 통으로 끝내는 오너의 독선적 행태에도 화가 났지만 무엇보다 왜 내가 권고 휴직을 받아야 하는 지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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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고 있는 동안에도 빨리 돌아와서 최대한 직장의 공백을 메워주라는 동료들의 카톡에 내심 나는 직장에서 정말 필요한 존재라 생각하며 흐뭇해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한 통의 문자는 나의 무능력을 평가하는 것 같아 혼란스러웠고 괴로웠다. 하지만 함께 무급 휴가를 받고 있는 직장의 최고 에이스인 다른 동료에게도 똑같은 문자를 보냈다는 것을 알고 바로 평온을 되찾는 나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그녀와 똑같은 문자를 받은 것은 직장의 사정이 정말 어려워서이지, 내가 무능력해서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 것 같아 안심했던 것이다.

왜 이렇게 나는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일까. 그리고 나는 정말 직장에서 필요한 존재일까. 어쩌면 직장 시스템에 저항하지 않고 따랐던 것이 그렇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동료들한테 인정받는 지름길이라고 나 스스로 확신한 것은 아니었을까.

 

시스템에 순응하는 쓸모 있음의 신체성

올해로 나는 직장 생활 20년차. 그 간의 직장생활을 돌이켜 보면 항상 10분 이상 일찍 출근했으며 하던 일이 있으면 퇴근 시간을 늦춰서라도 마무리했다. 내가 먼저 알아서 일을 찾아 하려했고 남들보다 더 많은 일을 처리하려 했다. 그러다보니 어떤 날은 화장실 한 번 가지 못하고 퇴근한 적도 있었다. 30분 주어지는 점심 식사시간에도 대충 먹고 빨리 업무에 복귀했다. 오너가 원하면 그의 스케줄에 맞춰 내 스케줄을 조정하기도 했다. 매출도 적당히 올려주었고 일도 성실히 하니 나에 대한 평가는 나쁘지 않았고 칭찬도 꽤 받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직장에서 필요한 존재로서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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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직장에서 필요한 존재로서의 쓸모 있음이 단순하게 기쁜 일이기만 할 것일까. 그 이면에 직장이라는 시스템에 순응하고 그것을 기꺼이 따르고 있는 내 모습을 놓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욕망은 아무것도 결핍하고 있지 않다. 욕망은 자신의 대상을 결핍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욕망에 결핍되어 있는 것은 바로 주체이다. 또는 고정된 주체를 결핍하고 있는 것이 욕망이다. 탄압을 통해서만 고정된 주체가 생기는 법이니 말이다. (안티 오이디푸스, 들뢰즈와 가타리 저, 김재인 역, 민음사, 2015, 61)


내가 쓸모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고정된 주체로서 시스템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존재를 욕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시스템에 저항하지 않고 암묵적으로 동의하며 거기에 맞추는 신체가 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시스템을 내면화하면서 쓸모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시스템의 억압을 자청하는 것이기도 하다. 억압이란 성과에 따른 차등, 즉 상벌로서 승진이라든지 연봉의 차등이다. 이것들은 시스템의 가치와 질서를 거부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것도 모르고 나는 직장에서 쓸모 있는 존재, 그래서 필요로 하는 존재라고, 그리고 그것을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직업은 승진도 없고 급여도 5년 정도 지나면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까지도 직장에서 필요한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요는 순이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그를 황무지에 등용하고는 부디 이곳에 와서 다스려 은택을 베풀어 주시오.”라고 말했다. 순은 황무지를 다스리는 지위에 올라 나이를 먹고 눈도 귀도 멀게 되었으나 그래도 돌아가 쉬려 하지 않았다. 이것이 소위 외물에 심신을 괴롭히는 자이다. 그래서 신인은 많은 사람이 모임을 싫어하고 그들이 모여들어도 화합하지 않고 화합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이익을 얻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때문에 새삼 친하지도 않고 새삼 소원하게 굴지도 않는다. (장자, 잡편, 서무귀, 안동림 역주, 현암사, 616)


태평시대를 열었던 요순임금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지독한 일벌레였다. 나이 먹고 눈멀고 귀가 멀 정도면 돌아가 쉬는 게 순리이지만 요순은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까지도 백성들에게 은택을 베풀고 화합했던 왕으로 남았다. 장자는 외물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외물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명예나 명성 같은 것이 아닐까. 이런 것이 없고서야 어떻게 자기 몸을 지치게 하면서까지 쉬지 않고 일할 수 있겠는가. 신인처럼 명예와 명성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도 싫고, 화합도 생각하지 않으며 그래서 친하지도 않고 소원하게 굴지 않을 수 있다. 요순도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열심히 일하다보니 백성들로부터 존경과 찬사와 인정을 받았을 것이고 이것은 그들에게 훌륭한 임금이라는 사회적 코드를 부여했다. 이제 존경과 찬사, 인정은 그들의 명예가 되어 버렸고, 그것은 요순으로 하여금 더욱 열심히 일하게 만드는 동력으로 전도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처럼 은택을 베풀고 화합했던 훌륭한 임금이라는 고정된 주체는 스스로에 대한 탄압이 되고 만다. 장자가 말한 것처럼 쉬지도 못하고 스스로 심신을 괴롭히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나도 명예 때문에 열심히 일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스스로를 탄압하면서 쉬지 않고 일함으로써 능력 있고 필요한 존재라는 고정된 주체가 나의 목적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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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고사 전후기를 다 떨어지고 재수해서 그것도 후기로 겨우 대학에 들어갔던 나는 시험에 대한 트라우마가 엄청나게 심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완벽하게 해놓지 않으면 안심이 되지 않았기에 하고 또 하기를 반복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결과가 좋으니 만족했고 게다가 부모님이나 교수님의 칭찬은 더 공부에 매진하도록 추동했다. 나중에는 칭찬 받기 위해 공부했다. , 칭찬은 나의 자랑스러움이자 명예가 되었고, 이것은 어느 순간 목적으로 전도되어 버렸다. 이런 것이 살아가면서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내면화되었고 직장생활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결국, 나는 명예를 쫓으며 쓸모 있는 존재가 되기를 원했다. 그것은 제도와 시스템이 마련해준 길을 따르는 것이었고 거기에 예속된 신체가 되는 것이기도 했다. 안티 오이디푸스역자도 말하지 않던가. 오늘날 정상적인 삶은 실은 예속된 삶이다.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마련해 놓은 길을 얌전히 따른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다른 길은 없는 것처럼. 자본주의가 현대인의 삶에 파 놓은 길들,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제시된 그 길들. 이 길들이 우리 삶의 하부구조요 현실적 조건(안티 오이디푸스, 679)이라고 말이다.


권력이 되어버린 쓸모 있음

그런데 문제는 쓸모 있는 존재로서 나 스스로 시스템을 내면화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내가 자진해서 무급휴가를 보내고 있는 동안 오너는 직원들에게 의무적으로 2주간 무급휴가를 갈 것을 종용했다. 이런 지침이 내려지자 동료들은 누가 무급휴가를 갈 것인가를 놓고 나름의 계산들을 했다. 제일 일을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 무급 휴가를 가야한다는 둥의 얘기가 은밀하게 오고갔다. 나 역시 그런 의견들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맞장구쳤다.


욕망은 절대로 속는 법이 없다. 이해관계는 속거나 오인하거나 배반당할 수 있지만, 욕망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라이히는 외친다. 아니다, 대중들은 속지 않았다. 대중들은 파시즘을 원했다. (안티 오이디푸스, 433)


! 욕망은 정말 속지 않았다. 나의 욕망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나는 쓸모 있음을 무기로 사람들에게 그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즉 그것이 나에게 권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직원 중 누군가 실수했을 때 그들을 지적하는 사람들 옆에서 침묵하지 않고 동조하면서 완벽한 일처리를 주문했다. 설렁설렁 일하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가 비난할 때 나도 그들이 게으르다고,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고 거들었다. 나야말로 시스템을 요구하고 있는 파시즘의 전형이었다. 라이히의 말처럼 마치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싸우기라도 하는 양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우고 있는(안티 오이디푸스, 64) 꼴이었다.


욕망을 획득 쪽에 두자마자 욕망에 대한 하나의 관념론적 (변증법적, 허무주의적) 착상을 갖게 된다. 이 착상은 욕망을 무엇보다도 결핍, 대상의 결핍, 현실적 대상의 결핍이라고 규정한다. (안티 오이디푸스, 58)


내가 동료들에게 쓸모 있기를 요구하는 순간 그들은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는 존재, 부족하고 결핍된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런 그들을 답답해 하니 만족스러움은 드물고 못마땅함만 넘쳤다. 그럴수록 시스템을 내면화시키기 위해 나의 잔소리는 더욱 심해졌고 동시에 나 역시 쓸모 있음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생산의 풍부함 속에 결핍을 조직하기, 모든 욕망을 결핍에 대한 큰 공포 속으로 몰아넣기(안티 오이디푸스, 63) 나의 특기이자 취미가 되어버렸다. 나는 어떤 집단이 존재하는 것은 거기에서 개인의 욕망을 다양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그 안에서 모든 개인에서 동일한 권리를 부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523일자 채운 강의록)는 것과 완전히 반대의 길을 걸었다.


저 가장 올바른 길을 가는 사람은 태어난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발가락이 붙어 있어도 네 발가락이라 생각지 않고, 손가락이 더 있어도 육손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길다고 그것을 여분으로 생각지 않으며 짧다고 그것을 부족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니까 물오리는 비록 다리가 짧지만 그것을 길게 이어 주면 괴로워하고, 두루미의 다리는 길지만 그것을 짧게 잘라 주면 슬퍼한다. 때문에 본래부터 긴 것을 잘라서는 안 되며 본래부터 짧은 것을 이어 주어도 안 된다. 그러니 여기에 대해 근심하고 두려워할 까닭은 없다. (장자, 외편, 변무,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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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는 사회적 가치와 기준을 가지고 모든 것을 재단하면서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고획일화하는 현실을 비판한다. 다섯 개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정상으로 생각하면 네 발가락은 부족하고, 육 손가락은 많은 것이 되므로 그것은 비정상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장자는 묻는다. 왜 그것을 자연스럽게 보지 못하느냐고. 그러면 정상이니 비정상이니 따질 이유가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 본래부터 짧은 다리의 물오리를 부족하게 여기지 않고, 본래부터 긴 다리의 두루미도 여분으로 생각지 않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하지만 본래부터 그러하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척도에 따라 자르거나 늘린다면 그것은 폭력이 된다는 것을 까마득하게 모른다. 이것을 좀 더 확장하면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가치질서를 강요하고 요구함으로써 동일화하려는 것 역시 폭력이 될 수 있다. 나의 경우는 어떤가.

사실 잘못이나 실수를 지적하고 충고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나의 가치 기준과 직장의 시스템을 강요했기에 폭력이 되고 말았다.

 

쓸모 있음쓸모없음을 넘어

앞서 보았듯이 나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쓸모 있음에 갇혀 있었고 그것을 사람들한테 강요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쓸모 있음이 아니라면 쓸모없음을 욕망하기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장자가 산 속을 가다가 잎과 가지가 무성한 거목을 보았다. 그런데 나무꾼이 그 곁에 머문 채 나무를 베려 하지 않으므로 그 까닭을 물었더니 쓸모가 없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장자가 말했다. “이 나무는 재목감이 안 되므로 쓸모가 없으니 그 천수를 다할 수 있었던 거다.” 장자가 산을 나와 옛 친구 집에 머물렀다. 친구는 매우 반기며 심부름하는 아이에게 거위를 잡아 대접하라고 일렀다. 아이가 한 마리는 잘 우고 또 한 마리는 울지 못합니다. 어느 쪽을 잡을까요?”하고 묻자 주인은 울지 못하는 쪽을 잡아라.”고 했다. 다음날 제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어제 산 속의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그 천수를 다할 수가 있었는데, 지금 이 집 주인의 거위는 쓸모가 없어서 죽었습니다. 선생님은 대체 어느 입장에 머물겠습니까?” 장자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쓸모 있음과 없음의 중간에 머물고 싶다. 그러나 쓸모 있음과 없음의 중간이란 도와 비슷하면서도 실은 참된 도가 아니므로 화를 아주 면하지는 못한다. 만약 이런 쓸모 있음과 없음 따위를 초월한 자연의 도에 의거하여 유유히 노닌다면 그렇지 않게 된다. (장자, 외편, 산목, 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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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나무도, 계수나무도, 옻나무도 모두 쓸모가 있어 베어지지만 너무 무성하여 재목감이 되지 못하는 거목은 천수를 다할 수 있다.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 그런데 잘 울지 못하는 거위는 쓸모없는데도 결국 죽음을 면치 못한다. 쓸모없음이라고 다 소용이 있는 것도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다. 도대체 어떤 입장에 있어야 하는 것일까.

장자는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중간 즉 사이에 있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 역시 도와 비슷하나 참된 도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것을 초월하면 명예도 비난도 없고 용이 되었다가 뱀이 되듯이 때의 움직임과 함께 변화하여 한 군데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그렇다면 쓸모없음과 쓸모 있음도 삶의 과정 중에 나타나는 것일 뿐, 그 어떤 것에도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닐까.

이에 대해 들뢰즈가타리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은 욕망의 생산, 과정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거기에 얽매일 이유가 없다고.


주체 자신은 기계에 의해 점유된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에, 고정된 정체성이 없으며, 중심에서 늘 벗어나고, 자신이 경유하는 상태들로부터 귀결된다.()주체는 그 계열의 각 상태마다 태어나고, 한순간 그것을 규정하는 그다음 상태에서 항상 다시 태어나며, 자신을 태어나게 하고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이 모든 상태를 소비한다.( 안티 오이디푸스, 51)


들뢰즈․‧가타리는 '욕망은 하나의 관념이 아니라 먹고, 싸고, 짝짓기하고 연결하고, 흐름을 방출하고, 절단하는 활동이자 작동하는 기계다. 욕망은 늘 흐르고 어딘가에 갇히는 동시에 갇히지 않는 끊임없는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이다. 그래서 욕망하는 생산, 과정만이 있을 뿐이고 주체라는 것도 욕망 기계의 생산 맨 마지막 단계에서 생겨난다'고 말한다. 욕망 자체를 주체로부터 출발한다는 생각, 즉 주체가 무엇을 욕망한다는 일반적인 생각과 완전히 배치된다.


사실 주체란 관계를 통해서만 드러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주체가 선행한다고 생각한다. 들뢰즈가타리는 이것을 접속과 배치로 설명한다. 어떻게 접속하고 배치를 하느냐에 따라 주체는 매번 달라진다고 말이다. 그래서 주체는 고정되지 않으며 규정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따라서 쓸모 있는 존재라는 것도 그리고 쓸모없는 존재라는 것도 욕망의 생산 과정 중에 나타날 뿐이고 이것도 사회적 코드에 불과 한 것이므로 거기에 연연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내가 쓸모 있음이라는 주체를 욕망하는 순간 나의 접속과 배치는 배타적이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접속이나 배치를 생각지 못하고 오직 시스템을 요구하는 획일성의 전형이었다. 그렇다면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고 고민하면서 직장 생활의 다양한 배치를 만들어내야 하지 않을까. 때로는 시스템에 순응하면서, 때로는 시스템에 균열을 내면서 말이다. 이것은 결국 명예나 비난을 초월한, 즉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을 넘어선 상태를 말한다.


그렇다. 쓸모 있든지 없든지 간에 그것에 상관하지 않고 그저 길을 가면 된다. 거기에는 길이 아니면 다시 돌아오거나 아니면 다시 길을 내야 하는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과정으로서의 삶, 그것 말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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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오후님의 댓글

오후 작성일

주체가 욕망기계 작동의 맨 마지막에 드러나는 환상과 같은건가요? 배치속에서 생성되는 욕망들이 잘 흘러갈 수 있게 그 주체란 환상에 매여있지 않는 훈련을 해야하는 건가요? 그게 과정으로서의 삶인가요?

화이트님의 댓글

화이트 댓글의 댓글 작성일

주체란 욕망기계 작동의 맨 마지막에 결과로서 드러나는 것이지 환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대부분 '나는 어떤 사람이어야지'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주체가 설정될 때 환상이 개입되는 것이고 설정한 주체에 도달하지 못하면 결핍이 따라오는 것이죠. 들뢰즈 과타리는 주체란 맨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결과로서 드러나는 내 꼬라지를 보면서 '아, 이게 나구나!'라고 인정할 수 있을 때 욕망의 배치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그 결과 주체가 달라지는 것이죠. 그러므로 주체는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정으로서의 삶이지 완성으로서의 삶이 아닌게 되지요.
답변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