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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vs 장자] 천천히 가며 지금 이 순간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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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단주 작성일15-10-15 16:49 조회27,58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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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천히 가며 지금 이 순간을 보라


                                                             대중지성 3학년  이한주


                         

  한 밤의 필화사건


한 밤에 집 안이 발칵 뒤집히는 필화사건이 일어났다. 나의 1학기 에세이의 내용은 ‘온전하게 이해한다는 것’이었다. 현재 고 2인 딸을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에 대한 이해가 먼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딸이 우연히 그 글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딸을 불안장애, 주의력 결핍장애를 앓고 있다고 표현한 부분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딸은 불같이 화를 내었다. 엄마가 자신을 장애인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몰랐다며......


그런 뜻이 아니었다며 해명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딸은 자신에게 장애가 있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고 했다. 나 또한,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다만 병원 검사 결과에 의거한 것이라며 말을 돌렸다. 딸은 나에게 이중인격이라며 소리쳤다. 병원 검사 결과를 무조건 믿느냐며, 장애라고 표현했으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 날 이후 딸아이와의 관계가 서먹해지며 나는 고민에 빠졌다. 무엇이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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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6년, 중학 3년 동안 왕따를 경험했던 딸은 관계성 회복을 위해 스스로 노력하고 있는 듯 보인다. 고등학생이 된 이후,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하여 신경정신과의 심리치료를 원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심리학 서적도 읽고 학교에서 운영하는 심리프로그램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모두 본인이 스스로 찾아다니며 방법을 찾고 있다. 그 덕분인지 절친도 몇 명 생기고 성격도 많이 밝아졌다. 딸은 나름 자기보존의 노력을 열심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아이를 나는 왜 장애라고 규정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나는 왜 딸의 변화한 모습은 보지 않고 과거에 했던 병원 검사 결과에 아직도 의존하고 있었을까? 결국 나의 해명은 딸에 대한 무관심을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이는 변하고 있는데 나는 고착화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딸과의 갈등을 화두로 놓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나를 포함한 가족 모두를 문제적 인간이라고 규정한다. 사람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선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그 사람 전체로 규정하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평소에 자기 비하와 자조적인 언어 사용이 잦다. 평소의 습관이 이러하다면 나는 자기부정의 감정 매커니즘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고착화된 부정적 세계관, 여기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 가는 과정, 나에게 꼭 필요한 탐구가 될 듯하다.



규정한다는 것


딸을 장애로 규정하다니, 어떻게 이렇게 쉽게 규정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주로 장애에 대하여 말할 때 외형, 즉, 신체에 대하여 거론한다. 장애를 사물이나 신체의 기능, 능력의 결여 상태로 보는 것이다. 「장자」에는 이러한 장애를 가진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인기지리무신이 위나라 영공에게 의견을 말했더니, 영공는 기뻐했다. 그런 뒤로 그는 온전한 사람을 보면 그 목이 오히려 가냘프게 보였다. 옹앙대영이 제나라 환공에게 의견을 말했더니, 환공은 기뻐했다. 그런 뒤로 그 온전한 사람을 보면 그 목이 오히려 야위고 가냘프게 보였다. 그러므로 내면의 덕이 뛰어나면 외형 따위는 잊게 되고 만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잊어야 할 외형은 잊지 않고, 잊어서는 안 될 내면의 덕에 대한 것은 잊고 있다. 이런 일을 참으로 잊고 있음이라고 한다.-「장자」<덕충부>, 안동림 역주, 현암사, 166쪽

덕충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주로 형벌로 발이 잘린 사람들이다. 그런데 윗글의 인기지리무신이라는 절름발이에 꼽추에 언청이인 사람, 옹앙대영이라는 커다란 혹이 달린 사람은 선천적인 장애인들이다. 이들을 만난 영공과 환공은 내면의 덕이 뛰어나면 외형 따위는 잊게 된다고 한다. 내면의 덕을 가지게 되면 온전한 외형이 가진 사람이 오히려 더 나약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장자의 말을 거꾸로 해석해보면 우리는 외형을 보는 듯하나 내면을 보고 있는 것이다. 내면은 외형으로 구체화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내면의 덕을 보기 힘든 것은 외형과 내면을 분별하고 내면을 잊으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장자는 말한다. 우리가 ‘참으로 잊고’ 있지만 않는다면 외형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외형은 그 사람의 일부이며 ‘참으로 잊는’다는 것은 일부를 제외한 다른 부분을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외형만으로 대상을 보려고 하는 태도는 이미 내면을 보려는 시선이 결핍되어 있다. 대상에 대한 결핍과 부정성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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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딸의 심리 상태를 장애라고 규정하는 나의 태도는 어떻게 해석이 되어야 할까? 앞에서 장자가 밝혔듯이 사람은 외형으로 내면이 드러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내면은 신체의 운동성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거에 내가 딸의 심리상태에서 문제점을 발견하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논리가 바탕에 있었을 것이다. 나는 양육의 과정에서 딸의 외형적 운동성과 관계성이 다른 아이들과 미세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을 것이다. 다양성이 주는 차이일 수도 있는데 굳이 애를 써서 딸이 장애라는 병원 소견을 받았다. 그건 편견에 의한 소견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의심은 없었다. 아마도 병원의 소견은 믿을 수 있다는 잠재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후 줄곧 본인의 노력에 의해 딸은 변하고 있었는데도 편견에 사로잡힌 나는 과정을 보는 시선을 ‘참으로 잊’어 버렸다. 딸을 바라보는 시선에 이미 결핍과 부정성의 전제가 있었다. 그러니 변화하는 과정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심리상태가 장애라고 규정하는 것, 완전한 심리상태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이 아닌가? 완전한 심리 상태, 이 얼마나 불합리한 언어의 규정성인가?


규정한다는 것, 결국 나에게 있어 이것은 완전함에 대한 환상이 만들어 놓은 결핍과 부정성의 언어일 뿐이었다.



  완전성이라는 환상


결핍과 부정성이 완전성이라는 환상이 만든 것이라면 이것은 또 어떤 식으로 가족 내부로 들어오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하여 들뢰즈와 과타리는「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이렇게 말한다.


욕망기계들과 기관 없는 몸 사이에는 명백한 충돌이 일어난다. 기계들의 연결, 기계의 생산, 기계의 소음은 그 각각이 기관 없는 몸에게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기관들 아래에서 이 몸은 역겨운 애벌레들과 기생충을 느끼며, 자신을 조직함으로써 자신을 헤집거나 목 조르는 신의 작용을 느낀다. -「안티 오이디푸스」질 들뢰즈·펠릭스 과타리, 민음사, 9쪽

들뢰즈와 과타리의 이론에 따르자면 우리는 모두 욕망 기계들이다. 욕망 기계들은 기관 없는 몸과 묶이고 연결되고 절단되며 그 표면 위에 흘러 다닌다. 기관 없는 몸은 끌어당김과 밀쳐내는 힘의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 기관 없는 몸은 일종의 에너지의 장, 기의 역동적인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기계들은 연결되고, 생산하고, 소음을 일으키는 존재들이다. 그러니 기관 없는 몸과 욕망 기계들은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 표면은 미끄러운 성질을 지니고 있으므로 기계인 우리는 기우뚱 기우뚱 하기도 하고, 삐거덕거리기도 하며 고장 난 상태를 삶의 현장에서 경험한다. 따라서 우리가 완전한 상태를 경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사회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회 기계는 고장 나기 마련이나 그것이 사회기계의 죽음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오히려 고장이 초래하는 위기가 사회를 더 활기차게 움직이게 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고장 난 사회기계가 낳는 불안과 갈등은 개인으로 환원된다. 개인은 욕망적 생산성에 따라 끊임없이 분열되고 욕망기계들 또한 ‘끊임없이 자신을 고장 내면서 고장 난 채 로 작동한다.’(위의 책, 32쪽) 앞에서 밝혔듯이 우리의 삶이 혼란스러운 것은 당연하고, 이것이 개인과 사회의 순환 작동의 한 방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고장 난 채로 분열화 되는 인간의 무의식을 프로이트는 정신 분석의 이름으로 병으로 규정했다.


19세기 정신의학이 수용소에서 조직하고자 했던 것-<가족이라는 강제적 허구>, 아버지 -이성과 미성년자-광인, 어린 시절에 의해서만 병든 부모-이 모든 것은 수용소 밖에서, 정신분석과 분석가의 진찰실에서 완성된다. 프로이트는 정신의학의 루터요 애덤 스미스이다. 그는 신화, 비극, 꿈 등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욕망을 이번엔 내면에서 다시 얽어맨다. -「안티 오이디푸스」질 들뢰즈·펠릭스 과타리, 민음사, 455쪽



프로이트는 분열증화 되는 욕망 기계들을 가족이라는 삼각형의 내부로 밀어 넣었다. 오이디푸스의 신화를 이용하여 마구 흘러 다니는 무의식의 욕망들을 정신분석이라는 이름으로 가족 안에 가둔 것이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것을 수용소에서 조직하고자 했던 것, 즉, 오이디푸스의 덫이라고 말한다. 개인의 욕망을 구조화시키는 덫이다. ‘차라리 분열증화의 길을 선택했더라면 우리는 치료에서 치유되었을 텐데......’(위의 책,127쪽)라며 들뢰즈와 과타리는  개인적인 정신분석 치료는 치료가 아니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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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불구하고 사실 나는 얼마 전까지도 딸의 불통의 관계성이 늘 우리 가족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딸이 관계 속에서 힘들어하는 것은 가족 삼각형 내부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규정했다. 그래서 반드시 답을 가족 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후 나를 포함한 가족들의 문제점만 보려고 노력했다. 자기 부정의 시선이 작동하는 순간들이 이어졌다. 딸을 문제적 인간으로 규정하고 오이디푸스 삼각형 안으로 끌어들여 가족 모두를 부정적 시각으로 보는 함몰의 시간들이었다. 부정적 언어들이 오고가고 갈등이 순환되는 가족 내부, 그 속에서 나는 나약할 때로 나약해졌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가족 전체를 병원으로 끌어 들이는 방법을 고민했다. 딸을 ‘가족 콤플렉스로 감쌈으로써, 그 다음엔 이 가족 콤플렉스 자체를 전이 또는 환자- 의사의 관계로 감쌈으로써, 가족을 어떤 점에서’(위의 책, 177쪽) 자본주의가 사용하는 상황으로 몰고 갔다. 인간의 수동성의 극대화를 이용한 자본주의의 장, 수동적 주체가 병원 권력에게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이는 고통을 양산하는 자기 부정의 힘이 다른 권력에 예속되는 전형적인 예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기 부정은 더 큰 힘에 의해 억압받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욕망적 생산성을 멈추는 행위라고도 할 수 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오이디푸스 삼각형은 없다. 오이디푸스는 열린 사회장 안에서 늘 열려 있다. 오이디푸스는 사방으로, 사회장의 네 구석으로 열려 있다.’(위의 책, 175쪽)라고 한다. 그들에 의하면 “오이디푸스 그 따위는 몰라”라고 말하며 떠날 수 있는 자가 혁명적인 자이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의 덫에서 벗어난다 할지라도 궁극적인 자기부정에서 벗어나려면 욕망이 다른 힘에 의해 포획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욕망을 내면에서 얽어맨 자는 다른 권력의 아래로 끊임없이 미끄러져 들어가려고 한다. 나 자신이 바로 그런 자였다. 다행히도 나는 미끄러져 들어가는 행위를 멈추었다. 그리고 정작 나에게 필요한 것은 완전성에 대한 환상을 깨트리고 기관 없는 몸의 무질서한 힘의 흐름 속으로 뛰어 들어 갈 수 있는 용기, 욕망의 자기 생산의 힘임을 알게 되었다. 어차피 모두가 고장 난 신체를 지니고 있다면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있겠는가?  일단 온 몸으로 뛰어 들어가 보는 거지 뭐~ 


그런데 이지점에서 한 가지 꼭 짚고 가야하는 사실! 무질서한 힘의 흐름을 타고 떠난다는 것, 그것은 묘하게도 나의 일상, 그 자리로 떠나는 제자리 여행이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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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질서한 힘들의 장 속으로


오이디푸스의 덫에 걸려 자기 부정의 감정에 중독된 엄마, 들뢰즈와 과타리를 만나기 전부터 나는 이러한 스스로의 문제를 일상 속에서 언제부터인가 감지하고 있었다. 무지에서 벗어나 좀 더 능동적인 삶을 살고 싶었다. 3년 전부터 공부를 시작했고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들뢰즈와 과타리가 말했듯이 변화는 그렇게 쉽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알아간다는 것, 보이는 듯, 보이는 듯하지만 실천이 힘든 앎은 어쩌면 신기루가 아닐까? 하는 혼란이 찾아왔다. 그런데 이렇게 혼란했던 이유가 있었다. 알고 보니 앎이란 질서화된 무의식의 순환 구도가 무너지고 무질서의 혼란이 찾아오는 과정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앎에 의하여 깨어나는 시간과 일상이 변화하는 시간은 비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이분법의 사유체계가 더 빨리 작동하였기 때문이었다.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무질서의 혼란을 빨리 벗어나고자 시비로 상황을 분별하고자 하는 마음이 앞섰다. 나는 내 안의 자기부정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그 대척점에 있는 자기긍정이라는 답을 찾았다. 물론 자기긍정의 방법이 꼭 필요하긴 하다. 하지만 삶은 그러한 대척점만을 오간다고 해결 되는 것이 아니었다.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면 반드시 삷이 있다. <된다>가 있으면 <안된다>가 있고, <안된다>가 있으면 <된다>가 있다. 이처럼 세상일은 상대적이므로 그래서 성인은 그런 방법에 의하지 않고 그것을 절대적인 자연의 조명에 비추어본다. 그리고 커다란 긍정의 세계에 의존한다. 거기서는 이것이 저것이고 저것 또한 이것이다. 또 저것도 하나의 시비이고 이것도 하나의 시비이다. 과연 저것과 이것이 있단 말인가. 과연 저것과 이것이 없다는 말인가. 저것과 이것이 그 대립을 없애 버린 경지, 이를 도추라고 한다. -장자」<제물론>, 안동림 역주, 현암사, 59쪽



장자는 제물론에서 혜시의 방생의 설을 근거로 시비의 문제를 논하고 있다. 방생설이란 세상의 모든 것은 나란히 생긴다는 것이다. 세상을 대립의 세계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장자는 시비는 하나라고 보았다. 그러면서 그가 설명한 것이 도(道)의 지도리, 도추이다. 도는 지도리이기 때문에 원의 중심에 있고 이 속에서 세계는 변화한다고 보았다. 도는 변화의 중심에 있지만 변하지 않는다. 참 어려운 말이다. 자기부정의 감정이 자기긍정으로 쉽게 나아가지 않는 이유를 우리는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앎과 삶의 일치가 어려운 이유와 같다. 나는 무지에서 깨어나기 위해 ‘도추의 변전’의 운동 속으로 나를 던져 넣었다. 그러니 당연히 무질서의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들뢰즈와 과타리가 말한 기관 없는 충만한 몸의 역동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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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질서한 힘들의 역동성 속에서 시비를 분별하는 태도로는 변화의 흐름을 타기 어렵다.  ‘모든 것은 동시에 행해진다.’(앙띠 오이디푸스, 627쪽)  그러므로  시비의 분별은 또 다른 고착화를 낳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19년이라는 과정으로서의 시간성


「장자」의 <양생주>에 포정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이 사람은 백정이다. 문혜군을 위하여 소를 잡는 그의 모습은 마치 은나라와 탕왕과 요임금 때의 명곡들과 조화를 이루었다. 문혜군이 그 기술의 경지에 대하여 묻자 포정은 19년의 시간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그가 가진 칼은 그와 함께 19년 시간을 같이 한다. 19년 동안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방금 숫돌에 간 칼과 같다고 포정은 설명한다. 문혜군은 포정의 말을 듣고서 양생의 도를 터득했다고 한다.


19년이라는 시간성,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삶을 과정으로 해석하라는 의미이다. 19년이라는 상징적인 시간성 속에서 줄곧 하나의 칼과 함께 했었기에 포정은 칼과 사물의 본질을 넘어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우리의 앎과 삶의 일치도 이와 같은 과정으로서의 시간성이 필요하다. 들뢰즈와 과타리도 「안띠 오이디푸스」에서 과정의 중요성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새로운 대지는 과정을 멈추거나 과정에 목표들을 정해 주는 신경증적 내지 변태적 재영토화들 속에 있지 않으니까. 새로운 대지는 이제 더 이상 뒤에 있지도 앞에 있지도 않다. 그것은 욕망적 생산의 과정과 일치한다. 이 과정은 진행하고 있는 한, 그리고 진행하는 만큼 언제나 이미 완성되어 있다.-「안티 오이디푸스」질 들뢰즈·펠릭스 과타리, 민음사,628쪽


들뢰즈와 과타리는 우리의 욕망이 분열화의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생산된다고 한다. 욕망적 생산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물질적으로 존재한다. 가족 삼각형과 자기 부정은 자신의 상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들은 알려준다. 그래서 갇히지 말 것을, 멈추지 말 것을, 너의 욕망이 무엇인지, 현재 일상의 그 자리에서 욕망이 생산하는 과정에 집중할 것을 강조한다. 희한하게도 그들은 과정이 완성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하루를 완성하고 또 다음 과정으로 나아가고 있다. 매일 죽고 또 살아나는 과정, 그러고 보면 과정은 곧, 완성이 맞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순간을 보며 천천히 가려고 한다. 이렇게 가다보면 가끔씩 자기 긍정의 힘으로 나를 만나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매순간 만족하는 나를 만날 수도 있다. 아니면 못 만날 수도 있다. 느끼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앞으로 만나고 못 만나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이 참 좋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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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화 사건 이후로 딸은 계속 토라져 있다. 그 아이에게 이번 에세이로 내 마음을 보여주기로 했다. 이 에세이를 읽고 그 아이가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지만 아직 이해
하지 못해도 실망하지 않겠다. 이것도 19년이라는 과정 속의 한 순간임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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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도영님의 댓글

도영 작성일

샘 글 잘읽었어요^^ 이 에세이로 한주샘의 마음이  꼬옥 따님에게 전해지기를요. 그 마음이 풀어지기를 저도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