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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vs 장자] 목적 없이 사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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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생각통 작성일15-10-15 18:27 조회27,384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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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없이 사는 즐거움 

감이당 대중지성 3학년 성승현 


회사를 그만두고 작은 가게를 하나 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판매하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일을 잘 벌이지 못하는 성격에 비추어 보면, 나름 인생의 큰 사건이었다. 딱 하나의 이유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당시 두 가지의 큰 고민이 공부와 만나면서 낳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고민 중 하나는 회사라는 조직을 잘 견디지 못하는 거였다. 직장 생활을 7년 정도 했는데, 회사 생활이 힘들었다. 회사가 가진 모든 규율이 억압처럼 느껴졌다. 한때는 승진을 목표로, 어떤 때는 술 먹는 재미 혹은 또래 동료들과 어울리는 재미로 다녀도 봤지만 그야말로 한때였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내내 따라다녔다. 또 다른 고민은 결혼 후 생긴 가족에 대한 회의감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표상들은 나를 숨막히게 했다. 나 역시 가족이 가지고 있는 표상을 들이대며 갖가지 사건들에 저항해봤지만 답답함이 풀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인문학 공부를 시작하게 됐는데, 그 입구에서 만난 책이 『임꺽정』이었다. 그중에서도 갖바치란 인물에 빠졌다. 갖바치는 먹고 살만큼 일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공부하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무엇보다 갖바치가 맺는 가족 관계가 생경하게 다가왔다. 경계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관계를 맺는 것 같은데, 그 가운데서 강렬한 유대를 느낄 수 있었다. 정말, 갖바치처럼 살고 싶다고 강렬하게 원했던 것 같다. 게다가 평소 좋아하던 자전거와 인문학이 만난다고 생각하니 뭔가 그림이 그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전거와 공부가 연결되는 삶, 자전거 정비로 재생산의 길에 동참하는 것, 새로운 가족의 탄생 등등. 어쩌면 이런 환상이 주입되어야 시작할 수 있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자전거를 만지는 사람이 아니라, 자전거로 학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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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인문학 공부를 시작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 잘 살아보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공부를 통해 이상적인 삶을 만드는 데 급급했던 것은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였을까? 요즘 들어 공부를 너무 초월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는 코멘트를 듣곤 한다. 나는 늘 혁명을 꿈꾸고 그렇게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탈주라고 할 수 없었다. 현실은 보잘 것 없으니,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오직 공부에 정진해야 한다는 관념으로, 이 현실을 버티고 있었을 뿐이다. 왜 나는 공부를 초월적인 것으로 만들었을까? 공부로 탈주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장자』와 『안티 오이디푸스』를 통해 답을 구해보고자 한다. 


초월적 주체와 싸우다
푸코는 안티 오이디푸스가 세 부류의 적과 싸우고 있다고 했다. ‘정치적 금욕주의자들, 미친 투사들, 이론의 테러리스트들’이 첫 번째 적이다. 두 번째는 ‘욕망에 서툰 기술자들, 즉 정신분석가 및 모든 기호와 기호학자들’이다. 마지막은 ‘파시즘, 우리 안의 파시즘’이다. 이 세 부류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는 나와 관계 없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바꾸겠다며 어떤 이념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지, 내 욕망을 정신분석학적으로 생각해본 적도 별로 없지, 나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싶었다. 특히 파시즘은 더더욱 그랬다. 히틀러와 같이 무서운 사람, 혹은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권력을 휘둘러 자신의 욕망 안에 가두려고 하는 강한 사람들을 두고 파시스트라고 하는 거지, 나 같이 평범한 사람에게 파시즘 운운할 수 있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문제의식을 가지고 나를 들여다보자, 이 세 가지 부류의 적을 내 안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적들은 내 안에서 따로 또 같이 작용하며 내 삶을 지배하고 있다. 

첫 번째 적 - 욕망에 복무하는 공무원
열자는 호자를 스승으로 모시며 ‘도(道)’를 깨치기 위해 공부하던 사람이었다. 어느 날, 기쁜 마음으로 스승을 찾는다. 스승님의 도를 최고라 여기고 있었는데, 그 도를 넘어서는 자를 만났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스승이 불쾌해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스승인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니! 하지만, 안회가 좌망(坐忘)을 깨쳤을 때, 공자가 제자로 삼아달라고 했던 것처럼 이 시대에는 깨달음을 얻은 자에게서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오히려 기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니 이 사실을 스승인 호자도 기뻐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 장면에서 아이처럼 기뻐하는 열자의 모습이 그려지는 듯했다. 도를 구하는 자의 열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승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너에게 아직 도의 표면밖에 가르치지 못했는데, 어찌 도를 알아봤냐”는 거였다. 말인즉슨, 도를 어렴풋이 깨우쳤을텐데, 진실로 도를 알아본 것이냐 묻고 있다. 혹시 그 비슷한 것을 도라 착각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도에 대한 얄팍한 지식을 가지고 나서니, 관상만으로도 상대에게 간파당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 일침을 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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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갖바치의 삶을(그것도 일부만) 보고 그것을 흉내내려고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장사를 시작한다는 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꽤 중요한 결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갖바치를 만나고 아주 급하게 삶의 방향을 틀어버린 것이다. 아직도 갖바치의 삶을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단순하게 그의 삶을 볼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게 됐다. 하지만 그때는 마치 열자처럼 들떠 있었다. 인생의 큰 숙제를 해결한 기분이었다. 이제야 내가 원하는 삶을 찾았다고 기뻐했다. 갖바치의 삶이 내 인생의 정답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자 앞으로의 삶이 정해져 버렸다. 자전거와 인문학이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에 어긋난 삶은 잘못된 거라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됐다. 

안티 오이디푸스가 싸우는 첫 번째 적은 정치적 금욕주의자들, 미친 투사들, 이론의 테러리스트들이다. 운동권을 쉽게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분명 세상을 바꾼다며 혁명을 꿈꿨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새 자신들이 신봉하는 이데올로기나 이념에 복무하는 공무원으로, 당원들로 살아가게 된다. 나중에는 그 이념을 지키는데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일상에서 작은 혁명을 꿈궜다. 그렇게 시작한 자전거 인문학 프로젝트는 어느새 내가 도달해야만 하는 목적이 되어버렸고, 나는 그 프로젝트를 실현하기 위한 직원처럼 되어버렸다. 전도되어 버린 것이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욕망을 사유하지 않은 데 있다. 인간의 다양하게 날뛰는 욕망을 사유하지 않은 채로 모든 것을 혁명의 이념적인 순수성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자전거 인문학을 실현하기 위해 주변의 크고 작은 희생은 필연적이고, 그런 희생을 통해 실현이 되기만 한다면 이 혁명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욕망을, 거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감정들을 이렇게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치부해도 되는 것일까? 
  
두 번째 적 - 욕망이 빠진 혁명 
나는 내가 욕망이 많은 사람이라고 늘 생각해왔다. 늘 목표가 확실했고, 공부에 대한 열정도 충만했다. 이런 나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들과 쉽게 타협하지도 않았다. 이런 게 욕망에 충실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안티 오이디푸스에 의하면, 나는 과정을 겪지 않는 사람이었다. 과정을 겪지 않는다는 것은, 욕망의 출렁임을 차단하는 구조 속에 놓여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떤 사건이 닥쳐도 이미 정해진 결론(목적)에 맞게 해석해버리기 때문에 새로운 욕망이 내 인생에 출현할 수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나는 자전거 인문학을 지향하며 오랜 시간 일하고 공부했다. 일과 공부에 경계가 없었으면 했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일하는 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부딪침을 적극 겪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나는 처음부터 공부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 없는 사람으로 선을 그었다. 관계가 시작되기도 전에 의견이 맞지 않거나 갈등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한다. 그러니 그 고정된 선에는 사람이 서 있을 수 없었다. 수년 째 ‘일 따로, 공부 따로’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행동하고선, 일과 공부는 연결될 수 없다고, 손님과는 서비스를 주고받는 것 이외의 관계로 발전할 수 없는 거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나의 이런 행동은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잘 겪어내지 못한다. 이것은 결혼 이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나는 결혼을 하고나서 비로소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와 만난 기분이었다. 결혼 전 ‘딸’로 존재할 때는 가족이라는 이념에 갇히지 않았다. 떠날 일이 생기면 떠날 수 있었고, 가족으로써 가져야 할 표상이랄 게 별로 없었다. 그런데, 내가 점하는 위치가 바뀌자 나는 그 안으로 흡수되어야 했고, 그 안에 포획되지 않으려 발버둥치면 칠수록 죄인이 되는 기분을 맛봐야 했다. 그때부터 생각했던 것 같다. 부부가 아닌 새로운 모습의 가족 공동체는 불가능한 것인가! 하지만, 이번 공부를 하면서 나의 이런 생각은 무척 폭력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사람들과의 부딪침에서 생기는 감정들과 싸우는 게 힘들었다. 식구들이 무엇을 강요하면 ‘No'를 하지 못했다. 가족 관계에서 강요되는 사랑, 포용, 희생 등의 단어들이 나를 억압했지만 그것에 직접적으로 대항할 정신도, 힘도 없었다. 갈등이 생기는 게 무서웠다. 감정이 일어나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나는, 가족 내에서 생기는 문제들은 일단 덮어두곤 했다. 그리고 접속할 기회를 최대한 차단하곤 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머릿속으로 내가 꿈꾸는 새로운 가족 공동체를 그리는 것이다. 새로운 가족의 탄생이 내 억압된 상황을 해소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들뢰즈 과타리가 싸우고 있는 두 번째 적은 욕망에 서툰 기술자들이다. 정신분석가 및 모든 기호와 기호학자를 말한다. 인간에게 생기는 욕망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들은 다양한 감정들을 가족 삼각형에 가두고, 하나의 원인으로 그 감정들을 설명하는 자들이다. 나는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감당하지 못할 감정들과 만나지 않으려 했고, 피해만 다녔다. 그리고 저 앞에 이상적인 기호를 상정해놓고 그것을 향해 도망치듯 달려갔던 것이다. 그 목표 안에 나의 모든 욕망이 빨려 들어갔던 것 같다. 그리고 도달해야 할 어떤 것이 생기자, 내 안에서 파시즘적 징후들이 속속 발현되기 시작했다. 

세 번째 적 - 동일화의 욕망 
새로운 가족 공동체란 것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내게 주어진 새로운 화두였다. 여기서 가족은 혈연 관계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자전거와 공부로 엮어지는 새로운 관계가 탄생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 더 나아가 그런 관계에 대한 갈증의 표현이었다. 처음에는 비슷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마음이 그 상태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거였다. 동네 자전거포로 시작했는데, 참 가난했다. 가건물에 월 십만 원의 세, 겨울이 되면 온몸에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어도 이를 딱딱 부딪치고 있어야 했다. 열악했지만 즐거웠다. 자전거 생활을 인문학적으로 사유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모든 것에 한계가 보이는 것 같았다. 공부도 사유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이에 비해, 사업 규모를 키우는 것은 (비교적) 손쉬운 일이었다. 약간의 자본을 마련해서 사업 규모를 키웠다. 규모가 커진 만큼 감당해야 할 것은 늘어났고, 욕심도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 상업적으로 간다고 생각하면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블로그에 책이나 여행에 대한 글을 올리면서 일반 장사꾼과는 다르다는 것을 어필하려고 했다. 또 남편이 돈 버는 데 혈안이 되어 있으면 ‘우리의 목적은 돈을 버는 데 있지 않아. 돈에 휘둘리는 너의 욕망을 어떻게 좀 해 봐’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남편에게도 나의 목적에 동참해 달라고, 같은 꿈을 꿔 달라고 종용했다. 언뜻 보기에는 순수한 멘트처럼 보이지만, 실은 남편이 나의 욕망과 같았으면 하는 파시즘적 욕망이 꿈틀댔던 것이다. ‘순수해 보이는 꿈이 파시즘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착각이다. 세계를 나의 의식 속에 가두려고 하는 것, 그것도 파시즘(채운 강의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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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해보면 나는 공부든, 일상이든 관계없이 지금 현실을 부정하고, 이상적인 뭔가가 있다고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논리라면, 나의 현실은 늘 결핍되어 있는 상태, 미완의 상태가 된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주체다. 흔히 ‘나’라는 주체가 있고, 그 주체가 욕망을 생산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주체적으로 판단해서 어떤 것은 욕망하고, 어떤 것은 욕망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주체를 상정하면 ‘욕망하는 생산’은 성립되지 않는다. 주체는 욕망의 잔여로써 말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렇다. 즉 욕망은 아무것도 결핍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욕망에 결핍되어 있는 것이 주체다. 주체라는 것이 없어야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 욕망이라는 말이다. ‘욕망의 주된 임무는 생산하는 일이다. 생산물은 생산하기에서 채취되고, 생산하기에서 생산물로 가는 중에 뭔가가 이탈하며, 이것이 유목하고 방랑하는 주체에게 여분을 준다.’(『안티 오이디푸스』, 61쪽)는 말은 고정된 것 없이 절단 · 채취되고, 고장나고, 방황하는 것이 바로 욕망이라는 말과 같다. 반면 고정된 주체는 탄압에 의해서만 생긴다. 내가 남편에게 요구하는 것, 즉 우리가 정한 이상을 향해 돌진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공부하는 자전거쟁이’라는 고정된 주체를 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상대는 원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아무리 좋은 단어를 갖다 붙여도 이것은 상대에게 탄압이 될 수밖에 없다. 


목적을 버려라! 
열자는 도(道)로써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도(道)를 위한 도를 구하던 열자는 너무 성급했고 미숙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현혹되어 참된 도를 구하는 데 장애를 겪었다. 이런 열자에게 호자는 허심(虛心)에 대해 말한다. 호자가 말하는 허심은 무조건 마음을 비우라는 상투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욕망도 갖지 말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도인처럼 살라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욕망과 매번 어떻게 만날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호자는 열자가 데리고 온 무당을 통해 열자에게 깨우침을 준다. 사람의 상을 통해 운명을 보는 무당은 호자를 만나 혼란에 빠진다. 어떤 때는 생기가 막힌 대지의 무늬가 보이고, 어떤 때는 생기가 피어오르는 천지의 모습이 보인다. 결정적으로 호자가 ‘나를 텅 비우고 상대에게 따르기만’ 했더니, 무당은 줄행랑을 친다. 인간은 자연이다. 자연은 늘 변한다. 고정된 상으로 사람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무당은 고정된 상으로 사람의 운명을 말해 유명세를 얻었다. 호자는 무당에게 사람의 도(道), 운명의 도(道)는 그렇게 정의할 수 있는 게 아님을 말해준 것이다. 

이에 열자는 자신의 상태를 깨닫는다. 도달해야 할 숭고한 도(道)가 있다고 믿었던 열자는 스승의 가르침마저 자신의 관념론 안에 집어넣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도(道)에 대한 표상이 도를 향해 가는 길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그리고 외물에 끄달리고 분별하는 어쩔 수 없는 자신을 알기에 집으로 돌아가 소박하게 도(道)를 실천하기로 마음 먹는다. 외부의 사건이나 사고에 도를 흩트리지 않고, 사람과 동물을 분별하지 않으면서 사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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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것에서 도를 찾던 열자와는 달리 현실에서 도(道)를 구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포정이다. 그는 호자의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으나 이미 그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었다. 포정은 소의 살을 가르면서 도(道)를 구하는 자이다. 포정이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은 일이 있었는데, 문혜군은 뛰어난 솜씨에 놀라 기술의 비법을 물었다. 포정은 자신이 소를 잘 잡는 것은 기술이 아니며, 도(道)에 따라 행할 뿐이라고 답한다. 처음 소를 잡을 때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소뿐이었으나 3년이 지나자 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다. 포정은 열자와 달리, 자신이 매일 접하고 있는 소를 통해 도(道)를 구한다. 소는 그의 생계를 위해 도살되는 대상이 아니다. ‘소’라는 똑같은 표상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본성을 가진 소를 만나는 것이다. 

“요즘 저는 정신으로 소를 대하고 있고 눈으로 보지는 않습죠. 눈의 작용이 멎으니 정신의 자연스런 작용만 남습니다. 천리를 따라 커다란 틈새와 빈 곳에 칼을 놀리고 움직여 소 몸이 생긴 그대로를 따라갑니다. 그 기술의 미묘함은 아직 한 번도 살이나 뼈를 다친 일이 없습니다.” (안동림, 『장자』, 현암사, 94쪽)

포정이 소의 도(道)를 알아보지 못하고 살을 갈랐다면 살과 뼈가 다쳤을 것이다. 그에게 도는 지금 내가 매일 만나는 소를 제대로 아는 것, 그래서 매번 만나는 소가 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를 거(鐻)를 만드는 목수, 재경의 이야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재경은 나무를 깎아 거(鐻)를 만들었는데, 그것을 본 사람들은 놀라면서 솜씨가 귀신 같다고 했다. 노나라 임금이 비술을 묻자 재경이 답한다. 

“신이 거를 만들려 할 때는 감히 심기(心氣)를 소모시키지 않고 반드시 재계하여 마음을 깨끗이 합니다. 사흘을 재계하면 상을 받거나 벼슬을 얻는다는 따위 생각을 품지 않게 되고, 닷새를 재계하면 세상의 비난이나 칭찬, 잘하고 못함 따위 생각을 갖지 않게 되며, 이래를 재계하면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내가 사지와 육체를 지녔다는 것조차 잊고 맙니다. 이때가 되면 이미 조정의 권세는 마음에 없고 그 기술에 전념하여 밖에서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란 모두 없어지고 맙니다. 그런 뒤에야 산의 숲으로 들어가 나무 본래의 자연스런 성질이나 모습이 이를 데 없이 좋은 것을 찾아봅니다.” (안동림 ,『장자』, 현암사, 478쪽)

이런 과정을 거치면 나무의 자연스런 본성과 재경의 본성이 하나가 된 거(鐻)를 만들 수 있게 된다. 재경이 심기를 소모시키지 않고 재계하여 가장 먼저 없앤 것이 상이나 벼슬 따위에 대한 욕심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귀신 같은 솜씨로 거를 만드는 장인으로 불리게 됐다. 이때 비로소 거를 만드는 재경으로써 ‘주체’가 부여되는 것이다. 목적이나 주체를 설정하지 않고 빈 채로, 계산하지 않고 만날 수 있을 때 비로소 주체는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이지,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만들 수 있는 것이 주체가 아니다. 그러니 목적을 두고 주체를 만들어, 그 주체 안에서 옴싹달싹하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가. 반면 욕망과 날것으로 만나 매번 새롭게 생산되는 나를 기대하는 것, 목적 없이 산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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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노님의 댓글

마에노 작성일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도 그대로 수행해 볼 수 있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