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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vs 장자] 탈주, 욕망을 재배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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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곰사랑 작성일15-10-20 01:33 조회8,1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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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주, 욕망을 재배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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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미(감이당대중지성 3학년)


 작년에 장자를 처음 만났다. 길샘은 첫 수업에서 ‘장자는 가난하게 살았다’고 말씀하시며 수업을 마치셨다. 장자를 읽으며 그가 펼쳐내는 사상들 곤이 붕이되는 심연, 포정의 결을 읽는 능력, 추남 애태타의 안명安命등을 만나 가슴이 뜨거워지며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장자는 가난하게 살았다’는 저 말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사상을 내면화 하면 나는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나는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은데. 끊임없이 ‘돈’이라는 가치와 싸움을 했다. 내가 왜 그렇게 돈에 집착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자본주의는 우리의 욕망 안에서 작동한다. 탈코드화, 탈영토화하는 욕망을 자기의 극한으로 만든다. 자본주의는 계속해서 벗어나는 얘들을 잡아오라고 하는 게 아니라 저 벗어나는 얘들의 욕망이 어디 있는지를 보고 그것을 상품화한다. 욕망의 흐름에 들어가서 그 흐름의 방향을 바꾸고 그 흐름에 화폐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게 자본주의다. ”


채운샘 2015. 7. 4 안티 오이디푸스 강의 중   

 

 삼 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백수가 되었다. 공동체에서 일 년 정도 생활을 했고 올해부터는 직업을 바꾸어 시간제 보육교사로 일하고 있다. 보육교사로의 전환은 쉽지 않았다. 끊임없이 세상이 정해놓은 가치와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왜 지금 가진 전문직을 그만두고 급여와 처우도 나쁜 보육교사를 하려고 하느냐’는 물음에 답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해보고 싶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내가 정말 무엇을 원하며 그 일로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시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접속한 곳도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이곳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곳이기에 형태는 달랐지만. 예전 회사와 똑같은 패턴의 관계와 질서 그리고 규율들이 존재했다. 조금씩 일에서 흥미를 잃어가며 실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빈틈을 타고 이런 생각이 올라왔다.


 ‘어차피 이곳이나 저곳이나 모두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면 그냥 예전으로 돌아가 일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그러면 돈이라도 많이 벌 수 있을 텐데.’ 지금의 수입은 생활비를 빼고 나면 넉넉하지 않다. 절약하며 생활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필요한 것들이 생겨났다. 조금씩 생활에서 불편한 것들이 생겨나며 돈이 주는 자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어쩔 수 없이 돈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생명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하고, 모든 것들이 돈과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사회체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모든 탈영토화는 그 이면에 재 영토화를 가지고 있다. 기입되지 않은 탈주, 어딘가에 또다시 영토를 구성하지 않는 탈주는 없다1." 아무리 내가 돈의 가치를 부정하고 새로운 가치를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자본이라는 가치에 의해 재 영토화 될 수밖에 없다. 그럼 이것은 운명 같은 것이지 않을까. 이 조건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어떻게 살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나는 왜 들뢰즈과타리가 던진 ‘자본주의는 너의 탈주를 관리하고 있어, 너는 곳 재 영토화 될 거야’라는 말이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일까.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재 영토화 그리고 탈주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들뢰즈과타리가 던진 재 영토화에 대한 질문을 들고 난세의 혼돈 속에서 자신을 지키며 인간의 자유를 사유한 장자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지키며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기술을 배워보자.

 

접속, 코드를 부여받다

 


장자가 조릉이라는 밤나무 밭 울타리 안을 거닐다가 문득 남쪽에서 한 마리의 이상한 까치가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날개의 넓이가 일곱 자, 눈의 직경이 한 치나 되었다. 장자의 이마에 닿았다가 밤나무 숲에 가서 멎었다. 장자는 ‘저건 대체 무슨 새일까? 날개는 큰데 높이 날지 못하고 눈은 크나 보지 못하다니!’ 하고 말한 뒤 아랫도리를 걷어 올리고 재빨리 다가가 활을 쥐고 그 새를 쏘려 했다. 그러다 문득 보니, 매미 한 마리가 시원한 나무 그늘에 멎어 제 몸을 잊은 듯 울고 있다. 그리고 바로 곁에는 사마귀 한 마리가 나뭇잎 그늘에 숨어서 이 매미를 잡으려고 정신이 팔려 스스로의 몸을 잊고 있다. 이상한 까치는 이 기회에 사마귀를 노리면서 거기에 정신이 팔려 제 몸을 잊고 있다. 장자는 이꼴을 보고 깜짝 놀라서 ‘아, 모든 사물이란 본래 서로 해를 끼치고 이와 해는 서로를 불러들이고 있는 거구나!’ 하고 말한 뒤 활을 내버리고 도망쳐 나왔다. 밤나무 밭지기가 쫓아와 장자가 밤을 훔친 줄로 알고 그를 꾸짖었다. 장자는 집에 돌아온 뒤 석 달 동안 불쾌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제자인 인저가 따라와 물었다. “선생님께선 요즘 어째서 아주 언짢으십니까?” 장자는 대답했다. “나는 외물에 사로잡혀 내 몸을 잊고 있었다. 즉 흙탕물을 보느라고 맑은 못을 잊듯이 외물에 사로잡혀 자연의 대도를 놓치고 있었다. 또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속세에 들어가면 그 속세를 따르라.”는 말을 들었는데도 이번에 나는 조릉을 거닐며 내 몸을 잊었고 이상한 까치는 내 이마에 닿았다가 밤나무 숲에서 노닐며 그 몸을 잊었고 나는 밤나무 밭지기로부터 꾸지람을 듣고 모욕을 당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불쾌한 것이다.


장자, 현암사, 안동림 역주, 산목山木, 505쪽   

 

 장자가 조릉이라는 밤나무밭을 거닐다가 한 마리의 새와 마주쳤다. 장자는 새와 접속하는 순간 욕심이 발동했다. 이 욕망이 발동하는 순간 그는 아랫도리를 걷어 올리고 손에 활을 쥐고 까치에게 다가간다. 까치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팔린 그는 자신의 몸을 잊어버렸다. 즉 아무런 사심 없이 거닐고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린 채 까치를 잡을 욕심에 빠지게 된 것이다. 자신을 잃어버리고 외물에 미혹된 것은 장자만이 아니다. 조릉숲에 있는 모든 만물이 그러했다. 이상한 까치는 사마귀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팔려 몸을 잊고 자신이 불러들인 위험을 간과했고, 사마귀 또한 매미를 잡겠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자신에게 다가올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장자는 이익에 눈이 멀어 사냥터 지기에게 모욕을 당하리라는 것을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눈을 부라리며 서로를 지켜보고 있는 꼴을 보게 되었다. 이것은 무엇인가?


 들뢰즈과타리는 ‘사회체에 접속하는 순간 그 사회의 코드를 부여받는다’고 말한다. 장자 역시 임금님의 사냥터인 조릉이라는 사회체에 접속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이와 해라는 코드를 부여받았다. 즉, 까치를 잡겠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사물들은 서로 연루되어 있고, 이익을 쫓는 순간 그 이익과 함께 손해도 같이 따라온다는 자명한 자연의 법칙을 잊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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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들은 서로 연루되어 있고, 이익을 쫓는 순간 그 이익과 함께 손해도 같이 따라온다


 이해란 무엇인가? 이익과 손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타인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 의도하든 하지 않던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면 그것과 함께 인연들이 딸려온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타자들에게 손해를 입히는 경우도 있다. 또 장자에서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인 장자 「지락」 편에는   왕이 아름다운 새를 잡아와서 그 새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풍악을 울리고 음식을 대접하니 아름다운 새는 몇 일 동안 밥을 먹지 않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왕은 자신의 좋음으로 타인을 보양하려 했다. 자신의 사랑을 받고 상대도 기뻐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렇게 기쁨을 추구하는 마음, 이것도 이익일 수 있다. 이익을 바라는 마음이 어긋나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것은 이익을 바라다 의도하지 않게 손해를 끼친 상황에 해당한다. 물론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사냥터가 가진 특성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죽여서 자신의 배를 채우고 새끼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장자는 그것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 생명을 유지할 만큼의 욕심만 부리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잊어버리고 욕심에 눈이 머는 순간 흙탕물을 보느라고 맑은 못을 잊어버리고 자연의 대도를 놓치는 꼴이 된다. 즉 외물에 미혹되어 자신의 몸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장자는 ‘세속에 들어가면 그 속세를 따르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잊어버리고 외물에 빠져 제 몸을 잊었다. ‘세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모든 만물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많은 사물과 다양한 관계를 형성하며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 즉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서로의 이해관계에 의해 얽혀 있다. 이것은 사회체를 구성하고 사는 동안은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지 않을까. 장자는 이러한 삶의 조건을 인정하고 들어간다.

 

 그럼 ‘속세를 따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몸이라는 형체를 가진 사물이 불러오는 인연, 즉 까치라는 형체가 장자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발생했다. 까치의 욕심과 그의 신체성이 함께 작용해 인연을 불러들였다. 최초의 시발점인 매미는 어떠한가. 매미는 억울할 수 있다. 까치와 사마귀, 장자는 자신들의 이익, 즉 욕심을 위해 악연을 불러드렸지만 자신은 단지 그냥 울었을 뿐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매미에게 물어보자. 너는 거기서 왜 울고 있었는가. 매미가 우는 것은 짝을 찾는 행위이다. 울음소리로 암컷을 불러들여 자신의 생명을 지속시키려 한 것이다. 찬찬히 원인을 따지고 들어가 보니 매미 또한 사심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의 생명을 지속시키려는 본성이 아무런 이유 없이 우발적 마주침에 의해서 사건들을 만들어 냈다. 이렇게 몸이라는 신체 성이 불러들이는 인연의 장을 우리는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석 달 동안 불쾌한 모양을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악연을 불러들이는 장을 피해 홀로 살 것인가? 아니면 세속에 법칙을 받아들이고 그곳에 안주하면서 살 것인가. 도대체 나는 어떻게 살아야 나를 잃지 않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살 수 있는 것일까? 장자는 홀로 칩거하는 삶이 아니라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선택했다.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속세에서 욕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떤 회로에 갇히게 되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보면서 말이다. 보는 순간 욕망은 재배치되며 탈주할 수 있다. 즉 욕망의 배치를 바꿀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장자는 이해관계를 불러들인 욕심, 그리고 타인을 해치고자 했던 활을 내버리고 조릉숲을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욕망을 관하라 


 

 들뢰즈과타리가 말하는 영토화라는 것은 무엇일까. 삼 년 전 회사를 그만둘 때의 나를 떠올려 보았다. 직장인으로 일하며 쌓아 놓았던 지위, 명예, 연봉 그리고 남들이 어떻다고 보는 나라는 것을 버릴 수 없어서 힘들었다. 그것을 내려놓기가 죽는 것만큼 힘들었다. 이 욕심들이 나를 옭아매어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영토화란 내가 가진 것을 움켜쥐고 놓지 못하는 것이었다. 내 안에 나를 가두는 것.


 그럼 탈주는 무엇인가. 탈주가 무엇인지 대답하기 전에 나를 공포에 빠트렸던 재영토라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물어야 했다. 재 영토화 된다는 것은 예전에 삶의 패턴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진짜 두려운 것은 “자신이 하지 않은 선택을” 하며, “모든 출구는 막혀버2리는 상황에 놓여서 오도 가도 못하고 괴로워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이 나를 이다지도 강력하게 억압하는 것일까.


 내 안에서 찾지 못한 답을 찾기 위해 다시 장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조릉숲에서 탈주한 그를 「인간세」편의 공자와 안회의 문답 속에서 다시 만났다. 안회는 스승에게 위나라로 여행을 떠나겠다고 청한다. 무엇 때문에 그곳에 가려냐는 물음에, 위나라의 군주가 제멋대로 국권을 남용하여 함부로 백성들을 사지로 몰아넣어 주검이 넘쳐난다고 하니 위나라에 가서 병폐를 고치겠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스승은 너는 그 나라에 가봤자 처벌을 받는 일이 고작일 뿐이라며 만류한다. 덕은 명예심 때문에 녹아 없어지고, 지식은 경쟁심에서 생긴다. 명예란 서로 헐뜯는 것이고, 지식은 다투기 위한 도구로서 명예와 지식 이 두 가지가 인간을 불행으로 몰아넣는 흉기라고 일러준다. 명예와 지식 그리고 재물은 인간을 영토화시키는 도구이다. 경쟁심은 누군가를 이기고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서로를 헐뜯게 하는 명예심도 그것을 차지하여 다른 이들에게 좋은 대우를 받으며 안락한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누군가 이 욕망을 추동하게 된다면 아직 도를 갖추지 못한 제자가 자신을 지키지 못할까 봐 스승은 걱정한 것이다. 스승이 제자에 대해서 염려하는 것은 장자가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염려한 것이 아닐까. 그럼 장자는 어떻게 재 영토화 시키는 힘에 대항하여 자신을 지킨 것일까.


“날개가 있어서 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날개 없이 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우리는 이같이 쉽다 어렵다, 있다 없다 하는 상대적인 세계에 살고 있지만 저 텅 빈 것을 보라.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에 눈부신 햇빛이 비쳐 저렿게 환히 밝지 않느냐. 이처럼 상대적인 것에 얽매이지 말고 마음을 공허하게 하면, 모든 사물의 진상이 환하게 뚜렷해진다. 행복도 이 호젓하고 텅 빈 곳에 머무는 것이다. 그런데도 머물러야 할 곳에 머물지 않으면 이를 좌치라고 한다.”


인간세, 116쪽   

 

 

 장자가 말하는 키워드는 ‘심재’이다. 상대적인 것에 얽매이지 말고 마음을 공허하게 하라. 마음을 공허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공허라는 글자는 빌공空자에 빌허虛자가 합쳐져서 만들어졌다. 두 글자 모두 비어있다. 헛되다, 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빌 공자의 뜻 중에 공간, 공중이라는 뜻도 함께 포함돼 있다. 장자가 공허를 설명하며 텅 빈 방으로 설명한 것이 우연은 아닌 듯하다. 장자는 마음을 공간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공허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비어 있는 마음의 상태다.


 나는 매일 출근하면서 하늘을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같은 하늘이지만 ‘공허’라는 것을 생각하며 매일 새롭게 펼쳐지는 하늘을 보니 놀랍고 신기하기만 했다. 하늘은 어떻게 그렇게 매일 새로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일까. 하늘이 매번 새로울 수 있는 것은 장자의 말처럼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만들어 내고 또 어떤 때는 구름과 햇살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다양한 형태로 하늘을 수놓기도 하며 새로움을 만들어 낸다. 물론 매일 아름답고 평화롭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 또한 머물지 않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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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매번 새로울 수 있는 것은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에 ‘심재’를 끌어와 적용해 보자. 마음의 공간을 텅 비운다. 우선 마음이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지부터 살펴봐야 할 것이다. 무엇인가 얻고자 하는 것이 있을 때의 마음은 무엇으로 가득 차 있을까. 정규직으로 일할 때의 마음을 한번 살펴보자. 그때는 일에 대한 욕심으로 마음이 한 가득이었다. 그 욕심 뒤에는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대접받고자 하는 명예심, 나는 이 정도 사람이라는 오만함과 우쭐함이 함께 들어 있었다. 그러니 나와 생각이 다르고 고분고분하지 않은 사람을 만나면 타인의 다름을 살펴보고 받아들일 마음의 공간이 없었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한번 마음이 틀어지면 단점을 찾느라 마음은 늘 바빴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불평 거리를 찾느라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하늘이 텅 비어 매번 새로움을 만들어 내듯이 꽉 찬 마음을 어떻게 비우고 새로움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장자의 조언은 “쉽다 어렵다, 있다 없다는 상대적인 세계에 얽매이지 말고, 마음을 공허하게 하면 사물의 진상이 환하고 뚜렷”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자신의 본성이 있다. 일을 잘하지만 참신한 아이디어가 없는 사람, 일은 잘 못 하지만 성실한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장자는 타자들의 본성을 볼 수 있는 눈, 즉 타자들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는 힘을 기르라고 조언한다.  어떻게 하면 타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잠시 들뢰즈과타리의 ‘욕망하는 기계’의 개념을 빌려와 보고자 한다. 채운선생님은 욕망하는 기계를 허虛라는 글자로 표현하셨다.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상태. 자신의 욕망에 따라서 주체를 생산해 낼 수 있는 것.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잘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러니 타인들과 관계를 맺을 때도 내가 이해할 수 없으면 상대방과 잘 지낼 수가 없다. 그러니 관계가 힘들어지고 마음고생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에 안티오이디푸스를 읽고 욕망하는 기계의 개념을 생각하다가 실생활에 적용해 보기로 했다. 나를 해체하여 새로운 나를 만드는 것.


 마침 이해할 수 없는 상사의 행동에 마음이 불편해져서 그를 보는 것이 힘든 상태였다. 하늘이 공부하라고 준 기회를 맞이하여 출퇴근길에 나에게 주문처럼 몸을 해체할 것을 명령했다. 명령은 정신과 신체에 함께 주어졌다. 매일 아침 힘차게 걸으며 팔을 흔들며 중얼거렸다. 무쇠 팔 무쇠 다리를 가지고 새로운 내가 되자. 이렇게 주문을 외우고 나를 달래다 보니 정말 신기하게 마음이 변했다. 진짜 팔이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 들면서 그동안 나를 불편함으로 꽉 채우고 있던 마음이 비워졌다. 비워진 마음으로 상대를 다르게 대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났다. 물론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일하는 곳에서 1년은 버티어야 한다는 욕망이 나를 추동했다. 그것과 함께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는 생각을 내려놓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을 하며 내가 하지 않는 것으로 인해서 받는 불편함이나 손해를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이렇게 마음이 바뀌니 내가 그에게 아부하기 위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을 보고 웃으며 인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것이 진정한 마음을 텅 비게 하여 새로움을 만들어낸 것이지 않을까. 감정의 찌꺼기를 흘려버리고 매일 새로운 감정으로 타자를 대할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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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쇠 팔 무쇠 다리를 가지고 새로운 내가 되자 ㅋㅋ (가볍고 경쾌하게~)


 재 영토화를 두려워했던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 보자. 장자와 들뢰즈를 가지고 글을 쓰다가 보니 나를 공포에 떨게 하고 두렵게 만들었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디에도 나를 옭아매는 존재는 없다. 나를 억압하며 구속했던 것은 내 안에 똬리 틀고 있던 ‘사회화된 나’였다. 어디에도 나를 억압하는 것은 없었으며 나를 억압하는 내가 있었을 뿐이었다. 자본주의의 레일 위에 올라가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부여잡은 것은 욕심이었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레일 위에서 스스로 내려오지 못하게 될까 봐 그것이 두려운 것이었다. 이번 에세이를 쓰면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를 억압하는 것은 사회질서를 내면화한 ‘나’라는 것, 그리고 이익을 추구하는 순간 그것과 함께 인연과 손해가 함께 따라온다는 것을 배웠으며 그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관계의 장에서도 많은 자유를 얻게 되었다.

 

 지금 삶이 힘겹다면 자신의 욕망을 살펴보고 그것이 어떻게 작용을 하고 있으며 어떤 회로에 갇히는지, 또 그것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 보는 순간 욕망은 재배치 될 수 있다. 장자가 조롱숲을 도망쳐 나온 것 처럼. 욕심을 손에서 놓는 순간 다른 인연이 찾아올 것이다. 그 인연으로 삶을 새롭게 구성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뱁새가 깊은 숲 속에 둥지를 짓는다 해도 불과 나뭇가지 하나면 족하고, 두더지가 강물을 마신다 해도 그 작은 배를 채우는데 불과”3하다. 즉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 그리고 얼마나 필요한지를 명확하게 보게 된다면 돈을 추구하든, 명예를 추구하든 놓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욕망을 통찰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면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쓸모 있음에 맞추기 위해서 몸을 해치지 않고, 자신에게 쓸모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사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는 순간 사회체가 부여하는 코드가 아닌 나에게 적합한 코드로 접속할 수 있다. 자신의 본성을 해치지 않고 몸을 희생하지 않을 만큼만 욕망하는 것. 이렇게 욕망을 재배치한다면 자본주의의 경찰인 화폐의 그물망에 포획되지 않고 나를 잃지 않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장자에게서 내가 배운 삶의 테크네, 즉 삶의 기술이다.

  1. 채운샘 2015.7.5일 안티 오이디푸스 강의 중
  2. 『안티 오이디푸스』, 민음사, 들뢰즈․가타리, 김재인 옮김, 147쪽
  3. 「소요유」,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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