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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vs 장자] 질문하는 글쓰기로 타협하는 신체를 벗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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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땐구 작성일15-10-20 13:10 조회7,5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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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는 글쓰기로 타협하는 신체를 벗어나다



 
 이성남 (감이당 대중지성 3학년)
 

질문하며 세상의 통념을 깼던 철학자, 장자가 있다. 사마천은 그를 이렇게 논평했다. ‘그의 말은 거센 물결처럼 거침이 없으므로 왕공이나 대인들에게 등용되지 못하였다.’(사마천,『사기열전 1』, 김원중역, 민음사, 84쪽) 한 마디로 그는 권위에 복종하기를 거부했다. 왕의 말이 곧 법이었던 세상에 그는 어떻게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을까? 가난하게 살지언정 그에게 자유와 생명은 무엇보다 소중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통용되는 가치체계에 맞짱을 뜨고자 하는 질문을 던졌기 때문에 자기를 긍정하는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 소수자가 유독 많다. 그들의 공통점은 당당하고 결핍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나는 글을 쓰며 늘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권위자와 전문가들의 해석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글 잘 쓴다는 학인들의 의견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했다. 나는 토론에서도 상대가 약간만 언성을 높이며 강하게 주장하면 내 의견을 너무도 쉽게 철회한다. 내 의견을 피력하기에 자신감이 너무 없다. 망신당할까봐 두려운 마음이 앞서 서둘러 타협하자는 쪽으로 기운다. 세상에 대한 나의 질문도 비슷한 양상을 띠는 것 같다. 내가 현재 당면한 질문을 당당하게 대면을 못한다. 질문을 따라 나의 욕망을 들여다보는 일은 성가시고 초라해 보여서다. 장자가 질문을 하며 가치를 전복하는 언어를 사용했다면 나는 권위에 복종하는 언어를 써왔다.  
 

글은 자기가 던지는 세상에 대한 질문만큼 쓸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질문이 곧 그 사람의 사유의 폭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질문이 없는 나로서는 글을 쓸 때마다 괴로웠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다 나의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 편하고 게으른 방식의 타협하는 글쓰기로 마무리 지었다. ‘나’는 왜 이런 패턴을 반복하는 것일까? 그래서 그런 언어 안에 갇혀 사유를 하고 있는 나의 몸을 검토해 보는 일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신체와 언어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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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은 지루한 글쓰기만 생산한다
  결핍은 지루한 글쓰기만 생산한다
이번 학기 배운 들뢰즈 ․ 과타리의 이론은 무척 흥미로웠다. 욕망의 본질을 좀 더 깊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들의 저서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욕망은 한 번도 결핍을 느껴 본 적이 없었고 욕망은 항상 혁명적이었다는 사실이 가장 놀라웠다.
 

“욕망은 아무것도 결핍하고 있지 않다. 욕망은 자신의 대상을 결핍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욕망에 결핍되어 있는 것은 바로 주체이다. 또는 고정된 주체를 결핍하고 있는 것이 욕망이다. 탄압을 통해서만 고정된 주체가 생기는 법이니 말이다.”
들뢰즈.가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김재인역, 민음사 61쪽   
 
 
글을 잘 쓰고 싶어 하는 ‘나’와 글이라는 도구를 통해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글을 잘 쓴다는 전제가 있고 나는 열심히 수련을 해서 욕망에 도달하는 것이 욕망에 충실하게 사는 것인 줄 알았다. 이제껏 욕망의 본질을 착각하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욕망의 본질은 잘 쓰려는 욕망에 따른 접속만 있을 뿐이지 고정된 ‘나’ 따위는 없다는 얘기다. 글을 잘 쓰는 ‘나’도 글을 잘 못 쓰는 ‘나’도 사실은 규정지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글발은 타고나야 하고 글을 생산하는 저자는 따로 있다고 규정지어 왔다. 나는 글을 못 쓴다는 전제가 늘 나를 따라다니니, 글 좀 쓴다 하면 괜히 기가 죽었다. 그래서 그들에 비해 나는 부족하다는 수동적인 포지션을 취해왔다. 이러한 소극적인 태도가 내 스타일을 결정짓고 있었다. ‘글을 못 쓰는 나’라고 탄압한 사람은 바로 나였던 것이다.
 

“결핍은 사회적 생산 속에서 설비되고 조직된다.”
안티 오이디푸스』,  63쪽   
 
들뢰즈 ․ 과타리의 저서『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이 시대가 욕망 결핍을 끊임없이 소비하도록 부추기고 있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욕망은 절대 자신을 속이지 않는데, 우리는 욕망이 결여된 것처럼 느낀다고 한다. 이제야 알겠다. 고전을 많이 읽었음에도 나는 늘 에세이를 쓸 때면 갖가지 핑계를 댔다. 솔직한 질문을 던지며 내가 해결하고 싶은 문제에 봉착해 텍스트를 면밀히 분석하려 하기보다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이해하려면 멀었다고 지식 결핍을 한탄한다. 결핍은 결핍을 양산한다. 그래서 나는 매번 지식인들의 해석에 의존하거나 전문가들의 말에 기대려 한다. 내 안의 질문은 거세되고 해답만 찾아다니는 수동적 글쓰기에 무진장 에너지를 쏟고 살아온 것이다.
 
글을 쓸 때면 나는 늘 괴로웠다. 결핍은 슬픔의 감정을 낳게 한다. 스피노자는 슬픔의 감정은 우리의 역량을 떨어뜨리고 수동적 신체 상태로 이행하게 한다고 했다. 노예의 방식으로 권위에 복종하고 완전성을 갈망하며 그들의 언어를 무한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노예 되기를 욕망하는 아이러니가 연출된다. 내 언어로 말하기보다 전문가의 말을 빌려와 말해야 폼이 나고 신뢰감이 든다고 생각한 나의 욕망 결핍이 원인이다.
 
그런데 결핍이 왜 지루한 글쓰기를 반복하게 하는 걸까? 질문을 통해 내 문제를 해결하지 않아서이다. 절실한 나의 질문이 없는데 글이 어떻게 생동감을 가질 수가 있겠는가? 지루하고 파동이 일어나지 않는 글만 쓰게 될 뿐이다. 현장을 적극적으로 포착하면 얻어지는 그 상황의 고유성은 늘 휘발되고 만다. 왜일까? 전문가나 지식인들의 말을 동일시하는 언어는 나의 경험이 녹아든 언어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결과는 내 글에 다양성이 사라지고 동일성만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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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글을 잘 쓴다’는 전제를 ‘질문을 잘 한다’로 바꿔 생각하면 어떨까? 하여 나는 왜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지지 않고 통념을 따르기만 하고 있는지, 자기를 부정하며 이런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 나의 신체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질문하지 않고 타협하는 나약한 신체


“욕망과 그 대상은 일체이며 기계로서의 기계이다”

안티 오이디푸스』,  민음사, 들뢰즈.가타리, 김재인 옮김, 147쪽   
 
욕망은 흐르면서 접속하고 끊임없이 생산하는 기계의 속성을 지녔다. 그리하여 ‘욕망은 내 것’이 아니다. 누구의 것도 아니다. 들뢰즈 ․ 과타리의 이론에 따르면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라는 차원에서 인간의 욕망을 발견했지만, 언어로 질서화해 다시 욕망을 가족 안에 가두는 오류를 범했다고 한다. 욕망의 사유화. 즉 끊임없이 흘러 다니며 접속하는 ‘욕망 자체를 주체의 소유로 만들었고 그 주체화가 시작되는 지점, 그게 가족’(채운샘 강의록)이라는 이야기다. 다시 말하자면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을 한 ‘오이디푸스의 상징구조’란 가족 안에서 내가 아버지의 말을 내면화하면서 가장의 규율에 복종하는 신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말을 내면화한다는 것은 곧 사회적 질서를 내면화하는 출발점이다. 이 사회구조의 언어질서를 내면화한 결과로 나는 저자, 혹은 지식인의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는 언어 습관을 지니게 된 것이다. 글쓰기 욕망을 능동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역량을  스스로 포기한 셈이다. 글쓰기가 신체변화를 일으키고 존재 변화의 좋은 도구가 된다는 사실에 매혹돼서 글쓰기를 시작했지만, 나는 저자와 독자라는 이분법의 장벽에 나를 가두고 억압했다.
 
그런데 나도 몇 번의 밴드 글쓰기를 통해 능동적 글쓰기 경험을 해보았다. 내 글과 다른 사람의 글이 섞이는 체험은 어떤 결합보다 강력했다. 내가 뚫지 못하는 사유를 더 하라고 채근하며 사지(死地)로 몰아넣는 괴로움은 결핍에서 오는 괴로움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글이 막힐 때마다 밴드 도반이 던져주는 질문은 이제껏 내가 가져보지 못한 질문이었다. 낯선 질문을 들고 캄캄한 길을 더듬어 가는 과정은 힘들었다. 하지만 질문의 답을 스스로 찾아가는 기쁨이 있었다. 도반에게서 출발한 질문이지만 내 질문이 생기자, 해답을 찾고자 계속 생각을 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내 질문이었기 때문에 해답은 내가 능동적으로 찾는 수밖에 없었다. 질문을 던지며 좌충우돌 글쓰기를 하려고 시도한 점을 칭찬받았고 우리 밴드는 장원을 했다. 질문을 가지면 글쓰기가 즐거울 수도 있다는 경험을 했다.
  
또 이런 밴드글쓰기 경험도 있다. 질문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밴드 구성원들끼리 의견이 갈렸다. 강하게 주장을 밀어붙이는 질문이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내 질문을 설득시키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냥 묻어가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적극적인 사람들의 의견을 꺾고 눈총 받으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책임지기 싫다는 생각 반, 곰댄스(학술세미나대회)에 출품할 질문으로 아껴두자는 생각 반. 현명한 선택을 한듯했다.
 
그런데 막상 글이 진행되니 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질문으로 글쓰기를 해야 하는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글쓰기에 집중하기보다 감정소모에 에너지를 더 많이 소진했다. 끝까지 맞짱을 떠야하는 현장에서 상대의 의견을 너무 쉽게 따른 나를 이후 떠올릴 때마다 후회가 들었다. 더군다나 이번 에세이에서는 분명한 질문도 있지 않았었나? 에세이 후유증으로 며칠 몸살을 앓았다. 복종에 대한 거부반응으로 병이 난 듯했다. 나는 왜 쉽게 복종했을까? 타협하면 쉽다. 수동적으로 따르기만 하면 되니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의견을 낸 도반은 나보다 글을 더 잘 쓰는 사람이라고 여겨서 내가 저자의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듯이 동일한 마음으로 그 도반에게 쉽게 복종한 것 같았다. 복종에 익숙한 신체는 습관을 따른다. 나보다 글을 더 잘 쓰는 사람이라고 규정해 놓고 자기를 부정하는 신체는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질 줄 모른다. 질문할 기회가 와도 복종할 명령을 선택한다. 타협이 가장 쉬운 방식 같지만 결국 원한 감정만 생긴다. 원한 감정은 고통의 원인을 외부로부터 찾고,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발생한다. 자기의 역량으로부터 발생하는 게 아니라 내가 못한다는 것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원한 감정은 수동적 감정이다. ‘나는 왜 이럴까’라는 자기 부정은 자기 경멸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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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가 소개하는 인물들은 질문이 많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우주의 주인공들로 생각했다. 하여 수많은 장애인과 소수자들은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욕망에 충실한 질문을 던져서 현장에서 내가 잘 살 수 있는 길을 고민했다. 능동적으로 자기 질문을 들고 해답을 찾아가는 길은 소외나 결핍이 있을 수 없다. 고로 자기가 자기의 욕망을 능동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역량이란 질문의 크기에 비례한다.
 
그럼 타협하는 나약한 신체에서 나를 혁명하는 힘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현장에서 가지는 질문과 그 질문을 정직하게 해결하려고 대면하는 것 말고 없는 것 같다. 결혼하고 시집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과정을 떠올려오면 쉽게 이해가 된다. 외부에서 규정해 놓은 며느리라는 표상에 갇히지 않으려고 내가 했던 일은 수많은 질문이었다. 노예 같은 며느리를 원하고 그 의무가 당연한 가치체계인 듯이 요구하는 시집권력에 저항한 힘은 수없이 많은 질문을 던져서 얻은 결과다. 글도 마찬가지다. 질문하지 않고 글을 쓰는 순간 노예처럼 타협해 버리고 마는 나의 신체를 바꾸려면 내 질문을 갖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글을 못 쓴다’는 전제를 버리고, ‘질문을 어떻게 할까?’ 부터 실천해야하지 않을까?


“자신이 맞서 싸우는 대상이 역겹더라도, 투사가 되기 위해서는 슬퍼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혁명적 힘을 지니고 있는 건 욕망과 현실의 연결이다. (욕망이 재현의 형식들로 퇴각하는 것이 아니라)”
안티 오이디푸스』,  9쪽   
 


질문하는 신도가, 권위에 저항하다


 
『장자』에 형벌로 발이 잘린 신도가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정자산이라는 재상과 함께 같은 문하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자산은 재상이라는 직위를 내세워 신도가에게 면박을 준다. 같은 공간에서 공부하기 싫으니 알아서 피하라고. 나라면 그 서슬에 눌려 분하지만 물러났을 텐데. 신도가는 그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반문을 한다.
 

“거울이 밝은 것은 먼지가 앉지 않아서이고, (먼지가) 앉으면 흐려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현인과 함께 있으면 잘못이 없어진다. 지금 자네가 소중히 여길 것은 선생님의 도일 텐데 아직 그런 소리를 하다니 지나친 잘못이 아니겠는가..”
장자, 『장자』,  안동림 역주, 현암사, 164쪽   
 

신도가는 재상이라는 지위에 얽매여 공부공동체에서 배운 ‘도’를 실천하지 않는 자산이 한심했다. 통념에 갇힌 도반의 행동을 어떻게 그렇게 당당하게 꾸짖을 수 있었을까? 그가 재상이라는 권위에 맞짱을 뜨며 타협하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세상 가치에 대한 질문을 끝없이 한 결과였다. 외발인 신도가를 사람들이 비웃을 때마다 자기도 울컥 화가 났다고 하는걸 보면 그도 속을 어지간히 끓이는 시간을 보냈다는 걸 알 수 있다. ‘외형의 완전함’이라는 기준에 끄달리며 그라고 왜 결핍을 느끼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외형의 완전함’이란 무엇인가를 끝까지 대면하면서 그는 자신만의 긍정의 길을 찾은 것이다.
 
한편 자산은 명령을 거부당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 속내를 드러낸다. “자네는 이미 그런 (병 신) 꼴인데도 아직 요 임금보다 훌륭해지려 하고 있군. 자네의 덕을 생각해보고 (형벌로 발까지 잘렸으면서) 스스로 반성할 수가 없겠는가?”(『장자』, 155쪽) 자산의 대답은 지극히 통념적이다. 형벌로 벌 받은 주제에 재상의 신분인 자신을 알아서 대접하지 않는 신도가가 아니꼬왔을 것이다. 공부하는 공간에서 오랜 시간 있었다고 해서 공부의 깊이가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대해 질문을 하는 만큼 자기 삶의 깊이도 깊어지는 법이다. 신도가는 진노한 자산을 향해 그의 통념을 흔들어 놓는 질문거리를 다시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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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잘못을 변명하며 발을 잘리지 않았어야 한다고 뇌까리는 자는 많아도, 그 잘못을 변명 않고 (애초) 발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고 하는 자는 적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수가 없음을 알고, 그러한 경지에 편안히 머물러 운명을 (순순히) 다르는 것은 덕이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중략) 나는 선생님과 퍽 오랫동안 사귀어 왔지만 아직 선생님은 내가 발 병 신이란 걸 모르신다. 지금 자네와 나는 정신적으로 사귀고 있을 텐데, 내게서 외형적인 것을 찾다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나.”
장자』,  155-156쪽   
 

신도가는 외형의 완전함을 추구하는 기존 가치의 장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을까? 억울한 일은 남 탓하지 운명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그러나 그는 자기변명을 하는 방식이 아니라 발이 없는 신체 변화 자체를 자기 명(命)으로 받아들였다. 나를 외부의 잣대로 규정하지 않고 ‘한번은 용이 되고 한번은 뱀이 되어, 시절인연에 따라 변할 뿐 한 가지만 고집하지 않는’(『낭송 장자』, 이희경 풀어읽음, 북드라망, 72쪽) 것. ‘있는 그대로 모두 긍정’하기에 그는 신체와 마음의 온전함의 경계를 넘었다. 이것이 신도가가 질문을 통해 얻은 온전한 신체성이다.
 
지식인, 권위자 등으로 흡수되는 동일성을 향한 나의 신체성을 극복한다는 문제는 아직도 어렵게 여겨지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글을 잘 쓴다는 전제를 바꾸니 좀 가벼워진 건 사실이다. 나로부터 출발하는 질문을 들고 무엇을 볼 것인가? 매순간 편한 방식으로 권위에 복종하며 타협하고자 하는 욕망이 올라올 때 집중하기. 나를 긍정하며 맞짱을 뜰 힘을 기르려면 수동적 신체 상태를 인지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괴로운 글쓰기에서 질문하는 글쓰기로 끝없이 모드 전환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들뢰즈도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한 ‘과정이 곧 완전함’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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