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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vs 루쉰] 질서를 깨뜨리는 질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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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생각통 작성일16-02-01 12:37 조회23,807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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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를 깨뜨리는 질문이 필요하다

성승현 (감이당 대중지성 3학년)


얼마 전 남편에게서 이혼하자는 말을 듣게 됐다. 살면서 이혼을 생각해보지 않은 부부가 있을까.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생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다구? 정말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유는 시댁 문제였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내가 평생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할 게 보이고, 그걸 계속 지켜볼 자신이 없다는 거였다. 나는 나대로 결혼 이후 시댁에 적응할 수 없어 힘들었고, 남편은 남편대로 이런 상황을 힘들어했다. 어느 때는 아무 문제가 없는 듯 보이다가도, 이 문제는 어느새 삶의 가장 큰 화두가 되어 있었다. 이혼은 어쩌면 예상했던 일이었고, 때로는 일어나길 바라던 때도 있었는데, 막상 일이 닥치자 두려움이 앞섰다. 나의 의존성은 더 강렬하게 작용하기 시작했다. 혼자 사는 것, 먹고 사는 일에 대한 걱정, 타인의 곱지 않은 시선 등 단점만 생각하게 됐다. 공부를 통해 훈련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생각과 현실적 감각이 완전히 분리되는 시간을 겪어야만 했다. 

이혼도 충격적이었지만, 이 사건을 대하는 내 마음과 태도가 상상했던 것과 너무 달라 당황했다. 나는 공부를 하면서 결혼이나 가족에 대한 표상을 지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사건에 대해 통념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보면서, 현재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누구보다 가족이라는 이름에 대해 집착하고 있었으며,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깨졌을 때의 두려움을 안고 있었다. 가족 안의 구성원으로써 살아갈 때 안정감을 느끼고, 그것에 이미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져있어, 이 단단한 보호막이 깨진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결혼 후 새롭게 만난 가족들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방황을 할 때 인문학을 만났고, 생각을 교정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같은 문제로 갈등을 겪고 계속 엎어지는 건지 알아야 할 것 같았다. 만일, 이 사건을 둘러싼 문제들에 대해 탐구하지 않으면 나는 또 되풀이할 것이다. 이혼을 하지 않고 넘어가게 되더라도 똑같은 패턴으로 살게 될 것이며, 이혼을 하게 되더라도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지내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은 내가 그 누구보다 가족에 예속되어 있는 상태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말로는 가족에 대해 애착이 없는 듯 말하지만, 그것을 해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욱 강렬하게 작용하고 있었음을 말이다. 빠져나오려 하면 할수록 더욱 견고해지는 이 가족에 대한 표상, 이것과 어떻게 대면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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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질문, ‘그게 그거’인 답 
루쉰의 소설 『외침』 「단오절」에 보면 ‘그게 그거’라는 말을 즐겨 쓰는 팡쉬안춰라는 인물이 나온다. 그게 그거’라는 말은 세상을 개탄하는 심정에서 나온 경구였다. 하지만 어느새 그 말에 자신이 위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팡쉬안춰는 ‘그게 그거 설(設)’로 발전시킨다. 그것은 입장을 바꾸면 이해하지 못할 게 없다는 설이다. 예를 들어, 노인이 청년을 윽박질렀다고 치자. 분노가 치솟지만, 그 청년이 노인이 되면 아들손자에 허세를 부리는 노인이 될 것이기 때문에 피차일반이라고 정리해버리는 것이다. 다른 예도 있다. 사람들이 어떤 투쟁에 적극 나서지 않는 것은 당해보지 않아서라고 생각한다. 교원의 급료 요구를 비웃던 선량한 관리들까지 급료 지불 대회의 투사가 되었음을 비웃는 신문 기자가 있다. 이 기자에게 분노할 필요가 없다. 그 기자가 원고료를 못 받아 본 일이 없어서 그런 거지, 똑같은 일을 당하면 반드시 자신처럼 행동할 거라는 확신이 있는 것이다. 

모든 일에 통용되는 ‘그게 그거 설’이 적용되지 않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내다. 신교육을 받지 않은 아내는 아무리 입장을 바꿔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인물이다. 그래서 ‘어이’라고 부르며 ‘너와 나는 다른 사람’이라고 선을 긋는다. 그런데, 가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아내의 의견이 자신의 의견과 ‘그게 그거’일 때가 있어 부아가 치밀 때가 몇 번 있었다. 인격적으로 취급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인데, 자신의 의견과 같다니! 그럴 리가 없다는 거다. 그러던 중 다음과 같은 일이 발생한다.
 
그는 돈이 궁해 쌀을 살 돈이 없을 정도였다. 마지막 수단으로 친구에게 가서 돈을 좀 얻어보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그 친구가 돈을 꿔주지 않은 것이야말로 ‘그게 그거’라며(과거에 팡쉬안춰도 돈을 꿔주지 않고 딴청을 피운 적이 있으므로) 돈을 구할 이런 저런 방법을 제시한다. 남편이 다 거절하자, 기회를 놓칠세라 마지막에 한 마디 남긴다.

“명절 쇠고 초여드레가 되면 우리…… 복권이나 한 장 사는 게 어때요.”
“쓸데없는 소리! 못 배운 티를 내기는…….”
(루쉰, 『외침』 「단오절」, 그린비, 171쪽)

팡쉬안춰는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는 돈을 빌리러 간 친구에게 떠밀려 나오다가 식품 가게 앞에서 ‘당첨 몇 만 원’이라는 광고를 보고 마음이 혹했으나, 돈이 없어 지나쳤던 일을 떠올린다. 이 장면은 차원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아내와 자신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팡쉬안춰라는 지식인은, 세상을 ‘그게 그거 설’로 설명하며 쿨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입장을 바꿔 그 상황을 정당화하는 것 뿐이지, 실제로 그 욕망들에서 벗어난 건 아니었다. 입밖으로 꺼내 말하지 않고, 마치 세상의 부조리를 이해한 것처럼 사는 것으로 자신의 지식을 사용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던 팡쉬안춰는 가장 긴박한 상황(당장 쌀을 살 돈, 아이들 교육비 낼 돈이 없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그게 그거’를 읊어댈 뿐었이다. 국가에서 자신의 월급을 주지 않는데, 아이들 학교에서 교육비를 요구하다니 가당치 않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팡쉬안춰가 신문화운동의 주역인 후스의 시집 『상시집』을 읽는 것으로 끝이 난다. 가장 급진적인 책을 읽고 있지만, 현실을 돌파하지 못하고 안주하는 그의 모습은 인생을 가장 무력하게 살고 있는 지식인의 초상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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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은 앞서 말했던 나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서였다. 처음에는 팡쉬안춰도 세상을 개탄하는 심정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그게 그거’라는 말을 내뱉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어느새 상황을 합리화하는 쪽으로 쓰이게 되었고, 무기가 되었다. 자신을 이 상태로 머물게 하는, 현 상태에 복종하는 신체로 만드는 무기 말이다. 결국 그는 세상을 개탄하지 않는 사람들, 세상에 순응하며 산다고 비난하며 선을 그었던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된다. 가족주의를 벗어난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면서, 안으로는 가족주의를 지키려고 안간힘 썼던 나처럼 말이다. 

잘못된 답, ‘더 나은’ 가족주의
나는 내가 가족에 대한 환상이라곤 없는 줄 알았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의 신경전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가족이란 게 그렇게 행복하지도 완전하지도 않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결혼에 대해 아무 기대도 없는 것처럼 말해왔고, 결혼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 ‘현실은 달라’라고 말해왔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난 후에 나는 돌변했다. 결혼이라는 장에 들어서는 순간, 이상적인 가족을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 꿈틀댔다. 마치 그 욕망을 억누르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다. 내가 어릴 때 체험했던 불행한 가정과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가족을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내 입장에서) 남편의 술이 늘 문제였다. 술이 모든 일을 망가뜨린다고 생각했다. 일도 공부도 일상도……. 그런데, 그 뒤에는 술 권하는 시댁이 있었다. 이 가정만은 제대로 만들겠다는 욕망이 술 때문에 엉망이 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리자, 술에 집착하는 시댁을 적으로 규정하게 됐다. 그래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고, 서서히 무력감에 빠졌던 것 같다. 다시, 결혼은 다 ‘그게 그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틀을 벗어날 용기도 없었다. 내심으로는 술과 시댁 문제만 해결되면 이상적인 가정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헛된 희망에 빠져있었던 것 같다. 결국 ‘더 나은’ 가족을 만들 수는 없을까 고민했을 뿐이지 그것으로부터 어떻게 탈주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가족주의에 대한 나의 생각은 단순했다. 가족이 구성되는 순간 모두 똑같은 길(이를 테면 청혼, 결혼, 육아, 노후 등)을 걷게 되는데, 그것이 가족주의가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그 행로를 벗어나는 것이 내가 가족주의에서 비켜서는 방법이 될 거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이번 일을 겪으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다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 행로에서 비껴서는 것이 가족주의를 벗어나는 방법이라면, 이혼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무엇이 이토록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걸까. 내가 결혼을 하고 가장 놀라웠던 것은 ‘언제 결혼을 했었나?’ 싶을 정도로 결혼한 여자의 권리와 의무를 자세하게 알고 있다는 거였다. 며느리 혹은 아내의 마음가짐과 역할이 눈앞에 선했다. 나는 살면서 이미 학습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 암묵적으로 합의된 것들을 지키지 않으면 가족은 흔들리게 된다고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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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갯소리로 결혼이란 자유를 잃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개인의 삶을 억압하는 데도 불구하고 결혼을 선택한다는 것은, 가족이 주는 안정감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가족에게서 안정감을 얻으려면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가족으로부터 벗어나면 불안정하지만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무의식적으로 가족 안에서 자유와 안정성은 공존할 수 없다고 결론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분법적인 사고인 것은 틀림없고, 무엇보다 상당히 무기력한 태도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현재 굳어진 질서를 그대로 수용하겠다는 것, 혹은 어떤 것도 변화시키지 않고 받아들이겠다는 수동성이다. 나는 이런 가족주의에 기대 노예가 되어 살았던 것과 다름 없다. 억압을 힘겨워하지만, 또 그것 없이는 불안해하는 이상한 신체로 말이다. 

광인의 질문, 예상치 못한 질서의 발견
지금 이 시대는 가족주의를 부추긴다. 그리고, 가족주의는 자의든 타의든 나에게 새겨졌다. 이 만들어진 욕망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해도 그 손바닥 안에서 뛰어다니고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푸코의 이론을 빌려오면, “같은 시대적 에피스테메(특정한 시대를 지배하는 인식의 무의식적 체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어떤 문제를 극복하려고 시도하지만, 알고 있는 지식이라곤 시대적으로 통용되는 지식이 거의 전부다. 그래서 통념에 부딪쳐서 괴로울 때도, 통념으로 대응하게 되는 것이다. 이건 그 문제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더 나은’ 방법이 없는가 찾는 것일 뿐이다. 푸코는 이 지점에서 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보다는 이런 시대적 에피스테메 안에서 살고 있는 자신을 보라고 말하고 있다. 통념을 벗어날 수 있다기 보다는, 통념들과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시대를 넘나들 수 없다. 해서 이 시대적 에피스테메와 결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시대적 에피스테메를 인식한다면, 그것에 대해서 질문할 수 있게 된다. 가족주의가 새겨놓은 질서가 나를 사로잡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고 하자. 내가 이런 역사 속에 놓여 있음을 인식한다면, 이 질서가 왜 내 삶에 당위가 되었는지 질문할 수 있게 된다. 

앞의 팡쉬안춰도 질문은 있었다. 노인의 권위적 모습, 투쟁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입장을 바꾸면 분노할 것도 없고, 혁명을 시도해야 할 이유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게 그거’로써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고 안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루쉰의 다른 소설 「광인일기」의 주인공, 광인의 질문은 달랐다. 그의 질문은 언뜻 분란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질문은 질서를 깨뜨리는 물음이었다. 모두가 미쳤다고 손가락질하는 광인, 그는 ‘사람들이 왜 나를 잡아먹으려고 하지?’라는 어처구니 없어보이는 질문을 한다. 식인의 역사가 당연한 세계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져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시대착오처럼 보이는 이 질문을 통해 광인은 세상을 직시하게 된다. 

광인은 어느 날 세계를 낯설게 느낀다. 그런데 그 즈음부터 자신이 잡아먹힐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리게 된다. 자오씨네 개로부터, 그 다음엔 자오씨 노인과 마을 사람들에게서 식인의 냄새를 느끼게 된다. 사람들이 자신을 잡아먹기 위해 광인 취급한다고 느끼자, 그는 이 현상에 대해 따져 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자신이 구주 아저씨의 낡은 출납 장부를 집어던진 것 때문에 그런가 싶었다. 그런데, 자오씨 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까지 이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건가 의문이 생긴다. 엄마, 아빠가 가르쳐줬을 거라 짐작은 되지만, 만사는 모름지기 따져봐야 할 것 같아, 역사책을 뒤진다. 역사책에서는 ‘인의(仁義)’니 ‘도덕(道德)’이니 하는 글자들이 비뚤비뚤 적혀 있었는데, 그 글자들 틈새로 빼곡이 적혀 있는 ‘식인’이라는 글자를 발견하게 된다. 사천 년간 역사책을 통해 사람들은 인의와 도덕을 말하면서 동시에 식인을 말했구나! 역사책에서 말하는 전통이나 관습과 같은 것들이 곧 식인의 역사였다는 깨달음은 광인에게 놀라움이었다. 이런 역사 속에 있으니 사람들이 식인종이 된 게 이상하지 않다. 게다가 믿었던 형조차 식인이었다는 대발견을 하게 되고, 그와 함께 수십 년을 뒤섞여 살았으니 자신도 그 식인의 역사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까지 직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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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서 광인이 어느 날 낯설게 느낀 세계에 대해 공감했다. 광인은 인의나 도덕에 대해 들어왔고, 그것이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다고도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믿었던 앎들이 어느 순간 자신을 살리는 앎이 아니라 죽이는 데 쓰였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면, 인의나 도덕이 나쁜 것인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인의나 도덕을 더욱 실천적으로 알려주려던 그 설명들이 오히려 본래의 뜻을 잃게 만들었다는 의미이다. 본래의 뜻을 잃어버린 ‘앎’은 사람을 아니, 사람의 본성을 잡아먹을 수 있다는 의미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족주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나는 가족에 얽혀있는 수많은 가치들, 즉 사랑, 효, 우애, 책임감, 존중 등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였고, 그 가운데서 희로애락을 겪었다.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문이 든다. 어떻게 그 단어들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채 무의식적으로 답습하기만 했는지, 행복한 가정에 전제되는 단어들을 의심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만 했는지 말이다. 이런 태도가 광인일기에서 말하는 식인의 태도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더 비극적인 것은, 나 역시 식인이 되어 이러한 태도를 강요하고 종용했을 거라는 것. 이렇게 식인의 역사는 반복되어 왔을 것이다. 

질서가 깨질 때 비로소 찾아오는 자유
광인도 어느 날 이 세계를 낯설게 느끼기 전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자연스럽게 느꼈다. 아무 의심 없이 세계의 질서에 편입하여 살고 있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인 것이다. 루쉰의 책 『외침』 「두발 이야기」에 나오는 선배 N은 좀 더 구체적으로 이 질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실천적 모습을 보여준다. 

N은 쌍십절(신해혁명) 이후 좋은 것은 머리카락 상태와 상관 없이 거리를 다녀도 조롱을 당하거나 욕을 안 먹어도 된다는 거라 말한다. 머리털은 중국인의 보배이자 원수인데, 그 동안 이것 때문에 많은 중국인들이 의미 없는 고통을 맛봐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변발은 혁명의 상태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다. 당시 중국인들은 온 머리통이 머리털이면 관병에게 살해되고, 변발을 하고 있으면 장발적에게 살해되는 등 하찮은 머리털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고초를 겪고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먼 옛날 조상들은 머리털을 이런 방식으로 사유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건 머리니까 참수가 최고의 형이었고 그 다음이 궁형, 유폐였다. 머리털을 자르는 곤 정도는 형벌 축에도 끼지 못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머리털이 생사여탈권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여자들에게 ‘신여성은 곧 단발머리’라는 관념을 심고 있다고 비판한다. 단발머리로 개혁을 종용한다는 것이 과거의 변발 사태와 뭐가 다르냐고 묻는 것이다. 여기서 N은 하나를 더 묻고 있다. 그런데, 그 머리털이 혁명이나 개혁과 정말 관계가 있기는 한 거냐고 말이다.

“아, 조물주의 채찍이 중국의 등짝을 후려치지 않는 한, 중국은 영원히 이 모양 이 꼴일 거야. 스스로 머리털 한 올도 바꾸려 하지 않을테니 말야!” (루쉰, 『외침』 「두발 이야기」, 그린비, 74쪽) 


하지만 머리털은 어느새 혁명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머리털의 상태에 따라 울고 웃는다. 또 공포에 떨거나 안도한다. 단순히 신체의 일부였던 머리카락이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면서 권력이 된 것이다. 가족주의도 마찬가지다. 가족이란 것이 없어지면 큰일이 날 것처럼 두려워했던 것은, 가족이라는 것이 머리카락처럼 기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험한 세상 혼자 사는 게 가능할까, 젊어서는 모르겠지만 늙어서 혼자 있으면 외롭지 않을까, 절대 변하지 않는 내 편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등등. 이런 사고를 거쳐 가족주의가 나에게 당위로 작용하게 되면, 그 세계를 낯설게 느끼지 못하고 기존의 체제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선배 N은 유학을 가서 변발을 잘라 버린다. 대단한 각오를 가지고 행동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후 그는 민머리로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어야 했다. 그래서 가짜 변발도 사서 써 보고, 지팡이를 들고 휘둘러 난감한 상황을 불식시키기도 해봤다. N은 변발을 자른 이후, 온종일 얼음 창고 속에 앉았거나 형장 부근에 서 있는 것처럼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는 이런 고달픔에 엄청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고작 변발이 달랑거리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시대적 에피스테메에 갇힌 ‘변발’이라는 현실을 본 것이다. 하여 그는 변발 여부로 갖게 될 희망을 차단했다. 변발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가 아니라, 변발을 떠나서 사는 삶에 대해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이로써 N은 변발로 구성되는 질서를 깨뜨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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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놓인 상황에서 질서를 깨뜨린다는 것은 무엇일까? 가족과 함께 산다는 것에는 ‘불화없이 평온하게 사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남들과 다른 가족에 대한 새로운 시도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소소한 갈등에 대해서는 참는 것, 이해하는 것이 미덕이라 여기며 지냈다. 하지만, 이것은 불화를 없애기 위해 가족이라는 체제에 순응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차라리 가족 안에서 전사가 되어 갈등을 만들고, 고민을 생성하고, 전제를 깰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질서를 깨뜨리는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N 역시 힘들다고 해서, 회의를 느꼈다고 해서, 변발이 없다고 해서 그 공간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얼음 창고 속에 있는 것처럼 싸늘한 추위와 고통을 느끼면서도, 그 공간을 떠나지 않고 전사가 되어 살아갔다. 이로써 변발이 판치는 세상에서, 변발로부터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가족주의라는 체제 안에서 수많은 갈등을 겪게 될 것이다. 하지만, 가족이란 장(場) 위에서 가족주의로부터 자유를 얻어야지, 두려움 때문에 가족에 편입하거나, 이와 반대로 도망치는 방식으로는 절대 자유를 말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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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님의 댓글

애독자 작성일

맞아요. 문제는 변발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변발을 떠난 삶을 생각할 수 있느냐, 변발을 구성하는 제도와 도덕 규범을 떠나 능동적 윤리의 주체로 살 수 있느냐이겠지요. “내가 결혼을 하고 가장 놀라웠던 것은 ‘언제 결혼을 했었나?’ 싶을 정도로 결혼한 여자의 권리와 의무를 자세하게 알고 있다는 거였다. 며느리 혹은 아내의 마음가짐과 역할이 눈앞에 선했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하고 있는 도덕 규범, 불화 없이 평온한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가족주의의 환상-이것이 결과적으로 나의 삶을 이혼 위기로 몰고 갔습니다. 사회적 표상에 나를 맞추는 수동적 삶의 한계가 온 거죠. 이 위기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이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이혼을 떠난 삶을 생각할 수 있느냐. 제도와 규범에 길들여진 수동적인 신체를 어떻게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능동적인 신체로 바꿀 것이냐. 이 변화의 동력이 바로 공부겠지요. 건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