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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vs 노자] 생성의 소수파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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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이트 작성일16-07-11 19:56 조회20,447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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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성의 소수파 되기


김지숙(감이당 대중지성 3학년)



한 사회에서 임의의 두 사람이 꼭 한명의 공통된 친구를 갖고 있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의 친구인 한 사람이 존재한다.(들뢰즈가타리, 천개의 고원, 김재인 역, 2003, 새물결 출판사, 38)


두 사람의 친구이자 다른 모든 사람들의 친구, 그 공통의 친구인 그는 누구일까. 로장스틸프티토가 물었듯이 선생일까, 고해 신부일까, 의사일까, 철학자일까.’(같은 책, 39쪽 재인용

들뢰즈가타리는 그 공통된 친구를 권력이라고 말하고 로장스틸프티토는 이 유명한 우정의 정리를 아예 독재의 정리라고 단언한다. 권력을 쥔 자가 독재의 길로 빠지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테니 그렇게 말하는 것이 결코 과장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도 당신들 말만 들으라는 부모님을 독재자라고 원망했던 적이 있고 지금은 내 아이들로부터 똑같은 소리를 듣고 있다. 이런 것을 비추어볼 때 들뢰즈가타리의 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온갖 고집을 다부리며 자기 맘대로 하는 직장 상사를 떠올릴 때는 더욱 그렇다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자식의 의견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부모들도 상당수이며 부하 직원의 의견을 경청하고 받아주는 상사들도 의외로 꽤 많다. 그렇다면 권력이 꼭 모든 사람의 친구라고 단정지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물론, 일상에서 보여 지는 몇 가지 모습만으로 저들의 주장을 완벽하게 반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친 언설이라는 생각을 떨쳐내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도대체 무슨 근거로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도발적인 얘기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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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명령어의 전달이다


예전에 지인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집에 놀러 온 적이 있었다. 아이가 말끝마다 반말에다, 어른들한테도 누구야~”라고 부르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것은 아이들이 편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그래서 그들이 최대한 존중받을 수 있도록 한다는 어린이집의 취지에서 나온 것이라 했다듣고 보니 공감이 되기도 했다특히, 아이가 수영을 하고 싶지 않다며 불만불평을 늘어놓는데도 그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아이 엄마를 볼 때는 더욱 그랬다. 아이의 말을 다 듣고 난 후,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와 자상한 눈빛으로 이런 저런 얘기를 들려주면서 이제까지 잘 해 왔으니 조금만 참고 이 고비를 넘어보자고 했다그렇게 한참의 대화가 오고 가더니, 마침내 아이는 환한 얼굴로 수영을 계속 하겠다고 했다어떤가. 이 정도면 아이는 충분히 존중 받았고 모자간의 의사소통도 잘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들뢰즈가타리는 이와는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아이가 반말을 하든 말든, 아이 엄마가 아이의 말을 끝까지 듣든 말든, 그것은 의사소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이다. , 언어는 명령어의 전달이고, 정보는 명령이 지시로서 송신되고 전송되고 준수되기 위해 필요한 최소일 뿐(같은 책,149)이라는 것이 들뢰즈가타리의 주장이다요컨대, 아이 엄마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자상한 눈빛, 차분하고 친절한 설명은 수영을 계속 해라!”라는 명령어 전달을 위한 장식에 불과하며 그녀의 말에는 어떤 정보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언어는 정보전달과 의사소통과 관련이 있으리라(같은 책, 147)는 언어학의 전제를 전적으로 뒤집는 것이다.


슈펭글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말의 근본 형식은 판단의 언표나 느낌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명령, 복종의 표시, 단언, 질문, 긍정과 부정이며 준비 됐나?” “-” “-합시다처럼 삶에 명령을 내리고 기업이나 대규모 노동과 분리될 수 없는 짧은 문장들이다.(같은 책,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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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일상 속 대화에서 정보가 그리 많지 않음을 실감하게 된다. 언젠가 한번 직장 후배로부터 항의를 받은 적이 있다. 자기한테 가르쳐 주는 것 없이 명령만 내린다고.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업무를 익히는 데 필요한 정보를 후배에게 충분히 전달했고 그것도 나름 친절하게 설명했다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들뢰즈가타리의 주장대로라면 내가 후배에게 한 말은 정보가 아니라 업무를 수행하라’, 또는 가르쳐 준 대로 해라라는 명령이었으니 후배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렇게 따지면 직장이야말로 명령어의 각축장이 아닐까.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동료가v동료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고 알려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보가 아니라 ”, “-합시다등의 명령과 지시가 전부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신학기가 되면 학원가에서는 가장 핫한 최신 입시 정보를 알려준다는 설명회가 줄을 잇는다. 연사가 나와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며 한참을 떠들지만 설명회 내내 아이에게 무엇을 시키라는 명령어만이 넘친다. 그러다 우리 학원에 보내라는 명령어가 나오고 나서야 설명회가 비로소 끝나는데 이것이 가장 핫한 정보라면 정보다.^^ 병원에서 환자와 의사의 대화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병에 대한 정보를 의사로부터 얻을 거라는 기대는 진료가 시작되는 순간 산산이 부서진다. 귀를 쫑긋 세워 의사의 말에 집중해보지만 검사해라, 주사 맞아라, 처방한 약 먹어라.”등등의 명령어만이 귀에 와 닿는다.


이처럼 말의 형식은 느낌의 표현이나 판단의 언표가 아니라 무언가를 수행하고 이행하라는 명령어로 이루어진 짧은 문장이다. 말하자면 언어는 믿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거나 복종시키기 위해 있다.’(같은 책, 148) 결국, 언어를 사용하는 한, 우리는 명령과 복종이라는 권력의 구조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말을 함과 동시에 권력 속으로 들어가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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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내려진 사형선고

그런데 아이 엄마와 아이의 대화에서 수영을 계속 하겠다는 결론은 좀 의외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이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취지에서 보자면 말이다. 다시 말해, ‘수영을 하지 말라가 아닌 수영을 계속하라는 명령어가 나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지 궁금해진다

들뢰즈가타리는 이것을 배치로 설명한다. 명령어는 배치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 즉 어떤 배치냐에 따라 명령어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명령어는 명령뿐만 아니라 행위들과 관련된다. “사회적 의무를 통해 언표와 연관되어 있는 모든 행위들과.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이 연관 관계를 나타내지 않는 언표란 존재하지 않는다. 질문, 약속은 명령이다. 언어는 특정한 순간에 한 랑그 속에서 통용되고 있는 명령어들, 암묵적 전제나 발화 행위 같은 명령어들의 집합으로 정의 될 수밖에 없다. (같은 책, 154)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명령어들의 집합인 언어에는 암묵적 전제들이 내포되어 행동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암묵적 전제들을 우리는 보통 배치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수영을 계속하라는 명령어에는 어떤 전제들이 담겨있을까. 그것들은 아마도 수영을 하면 건강에 좋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하는 습관을 기르는 게 좋다’, ‘운동은 꾸준히 해야 한다등등의 전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전제들은 다시 말해, 이런 배치에서는 수영을 하지 말라가 아닌 수영을 계속 해라는 명령어가 작동하는 것이다. 요컨대, 배치는 명령어를 작동시키며 명령어에 힘을 실어준다.


헌데, 이런 전제들은 아이 엄마의 개인적 생각에서 나온 것일까. 그렇지 않다. 언어는 특정한 순간에 통용되는 명령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명령어는 지금 현재 사회에서 통하는 상식 또는 통념이다. 그러므로 명령어는 개인적 욕망이나 욕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사회적 의무와 관련되어 있다. , 명령어에 담겨 있는 암묵적 전제들은 사회적 욕망이며 명령어는 이것을 전달하고 있다한마디로 아이 엄마가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적 언표행위란 없으며 사회적 언표행위만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사회가 개인의 삶을 언어를 통해 조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 우리의 삶을 사회가 통제하고 있다고 말이다그렇다. 언어는 삶에 명령을 내린다. 삶은 말하지 않는다. 삶은 듣고 기다린다.’(같은 책, 149) 배치에 의해 삶이 규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삶을 쫓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목적으로서의 삶만이 존재할 할 뿐이고 삶을 틀에 가두며 고착시켜 버린다. 이것을 들뢰즈가타리는 삶에 내려진 사형선고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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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계적 구조의 우위를 인정하면 결국 나무 형태의 구조가 특권을 갖게 된다.(‧‧‧‧‧‧)나무 형태는 위상학적 설명을 허용한다. (‧‧‧‧‧‧) (같은 책, 38)


배치는 삶에 대한 표준 모델을 제시하고 그것에 대한 환상을 갖게 한다. 그래서 좀 더 우위에 있는 삶, 더 나은 삶이라는 표상과 이미지를 만들고 그 결과 이런 삶을 살라는 명령어를 작동시킨다예를 들면 병이 없는 것이 건강한 상태라는 배치는 병이 없는 것을 더 좋은 삶, 더 나은 삶이라는 전제가 이미 내포되어 있다. 해서, 정기적인 건강검진을 받으라든지 아프면 병원에 가라고 하면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이것은 세상의 예정된 질서이면서 세상을 초월적으로 지배하는 원리(천개의 고원, 역자 서문 재인용, )인 나무 체계 속으로 편입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배치는 위계를 설정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낳은 삶을 따르고 복종하라는 권력의 시스템을 작동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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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거리가 되어야 ‘도’

보통 사는 게 다 똑같다고 말한다. 이것은 누구나 똑같은 삶을 경험한다고 믿는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병원에서 태어나고, 학교에 가고, 대학을 나와 직장에 들어가고, 결혼해서 아이 낳고, 집을 마련하고, 은퇴하고, 병원에서 죽는 것을 한 사람의 일생이라고 말해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이미 삶의 사본은 주어져 있고 그것대로 살아야한다는 당위가 설정되어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삶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할 수 있는 는 영원한 가 아닙니다. 이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닙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그 무엇이 하늘과 땅의 시원,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온갖 것의 어머니. 그러므로 언제나 욕심이 없으면 그 신비함을 볼 수 있고, 언제나 욕심이 있으면 그 나타남을 볼 수 있습니다. 둘 다 근원은 같은 것, 이름이 다를 뿐 둘 다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신비중의 신비요, 모든 신비의 문입니다. (노자, 도덕경1, 오강남 풀이, 현암사, 1996)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것과 말해지는 것만을 참된 실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도는 이러한 인간의 편협함을 완전히 깨버린다. 무슨 말인고 하면, 도는 보이는 유의 세계는 물론이거니와 보이지 않는 무의 세계를 다 포괄한다. 그래서 언어로도 다 담을 수도 없고 함부로 규정할 수도 없다. 그저 전체를 보면서 대대관계만을 따질 뿐이다. 앞서가는 것이 있는가 하면 뒤따르는 것도 있고, 숨을 천천히 쉬는 것이 있는가 하면 빨리 쉬는 것도 있고, 강한 것이 있는가 하면 약한 것도 있고, 꺾이는 것이 있는가 하면 떨어지는 것도 있다(도덕경, 29)고 말이다그 어떤 것도 딱 잘라 구분하지 않는 것이 도다. 삶을 볼 때 죽음을, 높음을 볼 때 낮음을, 부귀를 볼 때 빈천을, 밖을 볼 때 안을, 앞을 볼 때 뒤를, 기쁨을 볼 때 슬픔을, 희망을 볼 때 절망을 본다. 물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도는 상대적 관계만을 따질 뿐, 위계를 두지 않으니 차별도 없다.


그렇다면 삶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삶이 있으면 저런 삶이 있는 것이고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우열을 매기는 것은 불가능다고. 그러니 표준 모델로서의 삶, 보편적 삶이라는 것도 없다고 말이다, 병원에 가서 아기를 낳는가 하면 병원이 아닌 곳에서 아기를 낳고, 안정된 직장이 있는가 하면 일용직이 있고, 대졸이 있는가 하면 고졸이 있고, 결혼을 하는가 하면 독신의 삶이 있고, 자기 소유의 집이 있는가 하면 셋방살이가 있는 것 등등 이것들 모두가 삶이라고.

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삶, 또는 누구나 경험하리라고 생각했던 삶이 아닌 다른 삶에 대해 얘기하면 사람들은 토끼눈을 하고 쳐다보거나 심지어 비웃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전혀 상상도 못한, 게다가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삶이기 때문이다.


뛰어난 사람은 도에 대해 들으면 힘써 행하려 하고, 어중간한 사람은 도에 대해 들으면 이런가 저런가 망설이고, 못난 사람은 도에 대해 들으면 크게 웃습니다.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도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도덕경,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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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웃음거리가 된다는 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보편이나 상식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도는 보편적 삶뿐만 아니라 보잘 것 없고 우습다고 여겨지는 삶 모두를 포괄한다. 따라서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도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배치가 무엇인지 따지고 그것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보편이라는 말에 가려 배치를 보지 못하니 다른 삶은 눈에 들어오지 않기에.


대학원을 마칠 때만해도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기정사실이었던 선배가 있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선배는 본인이 좋아하는 수학을 소수의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비정규직의 삶을 선택하더니 지금껏 그렇게 살고 있다. 요즘은 요가와 한의학 공부에 흠뻑 빠져 있다. 대학원까지 나와 기껏 이런 일을 한다고 사람들은 수군대고 비웃는다 이것은 안정된 직장이 있어야 쓸모 있다는 배치일 때라야 통하는 얘기다. 그런데 만약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사는 것이 쓸모 있다다고 배치를 바꾼다면 선배의 삶은 무척 자연스러우며 뭔가 부족하다기 보단 오히려 충만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그렇다. 배치를 바꿀 때라야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드러나게 되고 삶에 대한 표상과 편견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모든 생성은 중간에 있다

이렇듯 배치를 바꾼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삶의 주름들을 펼쳐내는 역량이다. 그런데 바뀐 배치가 다시 삶을 틀에 가둬버린다면 즉, ‘절대 병원에서 아이를 낳지 않고, 절대 결혼을 안 하고, 절대 직장을 구하지 않는 것등등 절대를 고집하면서 다른 삶을 배제한다면 그것은 배치를 바꾸나마나한 것이 아닐까게다가 삶의 양극단에서 옳고 그름, 좋고 싫음, 선과 악,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이분법적인 대립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 도대체 배치를 바꾸라는 것인가, 말라는 것인가.


이원론을 빠져나가는 유일한 방법은 사이에-존재하기, 사이를 지나가기, 간주곡이기이다.(같은 책, 525쪽)


배치를 바꾼다는 것은 모델을 제시하며 이것만을 요구하는 권력 상태 또는 지배 상태를 전제로(같은 책, 203) 하는 다수파에서 빠져나와 모델로부터 일탈하는(같은 책,204) 소수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바뀐 배치를 정답이라고 하면서 또 다시 모델을 제시하고 그래서 언제나 동일한 삶만을 요구한다면 이것은 소수파 되기가 아니라 다수파로 회귀한 것이다. 그렇다면 소수파 되기란 어떤 것일까.


소수파 되기는 다수파의 문턱을 쉼 없이 넘나들며 사이에- 존재하기다. 사이, 즉 중간은 규정할 수도 없고 어떻게 될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한 지대이다. 하지만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창조와 생성의 영역이다그렇다.생성은 언제나 중간에 있다.(같은 책, 555) 중간은 생성의 씨앗을 품고 있는 지대, 다시 말해 생성을 잠재하고 있으므로 모든 것 되기가 가능한 열린 지대이다. 그래서 소수파는 다수파가 될 수 있지만 다수파는 소수파가 될 수 없다. 다수파는 결코 생성이 아니다. 생성에는 오직 소수파 되기만이 있다.(같은 책 204) 결국, 삶에 내려진 사형선고를 살아가라는 명령으로 응답하며 고착된 삶에 변주를 일으키는 것, 그것이 소수파 되기이며 간주곡이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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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주곡은 독주 중간에 등장하는 반복적인 후렴구인데 그것이 나올 때마다 연속적 변주가 있다 보니 약간씩 다르다. , 차이나는 반복이 간주곡이다. 따라서 간주곡이기란 획일적이고 틀에 박힌 삶을 변주시키며 다종다양의 다채로운 삶을 생성한다이를테면, 표준 모델의 ‘4인 가족하면 부부와 그들의 두 자녀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간주곡이기라면 그 구성원에 연속적 변주가 일어날 수 있다. , 조부모와 손자가 사는 경우, 이혼한 엄마 혹은 아빠와 사는 경우, 사별로 부부 중 어느 한 사람이 없는 경우, 아이 없이 부부만 사는 경우, 입양한 아이와 사는 부부 등등 수많은 가족의 유형이 나올 수 있다. 목적이 아닌 그리고 배치에 상관없이 삶의 과정 속에 나타난 결과다. 억지라든지 인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간주곡이기는 자연의 모습과도 참 닮아 있다.


계곡의 신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비의 여인. 여인의 문은 하늘과 땅의 근원. 끊길 듯하면서도 이어지고, 써도 써도 다할 줄을 모릅니다. (도덕경6)


자연은 순환하면서 반복되지만 매번 다르다.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스스로 그러함이라는 자연의 속성, 이것이 차이를 낳아서 생긴 일이다. 꼭 그래야 한다는 당위가 있으면 차이가 생길 수가 없다. 한마디로 자연에는 모델이나 목적이 없다그래서 사계절이 매년 오지만 한 번도 같은 적이 없고 낮과 밤이 매일 반복되는 데도 항상 다르다. 끊어질 듯 하다가도 이어지고, 써도 써도 다할 줄을 모르는 것은 스스로 그러함이 차이를 낳고 그것이 생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산다는 것도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목적이나 당위가 없는 스스로 그러함. 그렇다. 삶에는 표상도 모델도 이미지도 사본도 없다. 그저 살아갈 뿐! 그래서 삶은 멈추지 않고 계속될 수 있다따라서 배치를 바꾼다는 것도 이전의 배치와는 정반대의 배치에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배치를 보고 그 둘 사이에서 배치를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다. 그 결과 절대 이것, 절대 저것이라는 이원론에서 빠져나올 수 있고, 동시에 위계적 구조가 무너지면서 일상에서 알게 모르게 작동했던 권력도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제대로 된 배치의 전환이자 소수파 되기이며 죽음의  삶이 아닌 생성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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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목화님의 댓글

목화 작성일

특히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라는 대목은 스스로를 믿고 지지하도록 용기를 내게 해 주는 부분이었습니다.

목화님의 댓글

목화 작성일

모두 한 길로 가려고 아둥바둥 애쓰는 우리나라의 문화를 깨기위해서는 정말 모두가 자각해야 할 점이 아닌가 합니다.~ 시원한 글, 깨치는 글 감사히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