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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vs노자] 어느 엄마노릇 하는 여자의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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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흰나비 작성일16-07-17 03:05 조회19,460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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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엄마노릇 하는 여자의 회상
   - ‘-되기사용법
 
  김희진(감이당 대중지성 3학년)
 
 
요즘 나는 지아빠를 꼭 빼닮아서 과격하기만 하고 해야 할 일은 하나도 스스로 못 챙기는 큰 아들을 아주 미워하며 지내고 있다. 봄에는 상을 줘야지 벌을 주면 안 된다고 했는데, 나는 봄에 더욱 자주 혼내고 매를 든다. 무엇보다 마음 깊은 곳에 못마땅함과 미움이 자리 잡고 있어 악담 섞인 잔소리를 퍼부으니 엄마로서 자격이 없는 것 같다. 종아리 맞을까봐 집에 못 들어오고 밖을 서성인 적도 있을 지경이니, 계속 이러다가는 요즘 뉴스에 심심찮게 나오는 학대 부모가 되겠구나 싶어서 주변에 조언을 구했다. 하지만, 엄마가 잘 받아줘야 한다는 말, 믿어주고 기다려주고 이해해줘야 한다는 등의 말들뿐이었다. 애는 혼자 잘 크는데 괜한 걱정한다, 자식은 남이니 그냥 내버려 두라는 말까지... 너무 뻔한 말들이어서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다. 남 얘기라 쉽게 하는 것 같았다. 신학기마다 성격이 예민한 아이가 저지르는 일들과 나의 과민반응 때문에 더 심해지는 악순환 속에서 답답하기 그지없을 때, 노자의 도덕경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또 다시 맥이 빠졌다. 여기서도 들으나 안 들으나 똑같은 뻔하디 뻔한 말들. 뭐 하나 귀에 와서 콕 박히는 것 없이 이쪽 귀로 들어왔다가 저쪽 귀로 바람처럼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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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는 도를 여인에 비유한다. 생산하고 길러내면서도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어머니 같은 도를 현덕(玄德)이라고 한다. 여성적인 부드러움에 어머니의 관용과 희생을 더해서 도()를 표현한 것이다. 어머니라는 말이 갖고 있는 엄청난 힘, 어머니 신화는 몇 천 년 전부터 이런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이미지를 부여받았기 때문인가? 현실의 그렇지 못한 엄마들, 나를 비롯해 아이를 학대하고 죽여서 뉴스에까지 나는 그런 잔혹한 어머니들은 그럼 무엇인가? 생산과 양육에 부여된 포용적인 이미지는 현실과 괴리가 너무 커서 나 같은 사람은 더욱 도에 다다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런데 나만 노자의 말을 못 알아 듣는 건 아닌 것 같다. 노자는 내 말은 알기도 그지없이 쉽고 실행하기도 그지없이 쉬운데 세상 사람들 도무지 알지도 못하고, 실행하지도 못”(도덕경, 현암사, 오강남 풀이, p.322)한다며 나처럼 못 알아듣는 세상 사람들을 보며 답답해한다.
 
도대체 엄마노릇 하는 것도, 도를 깨닫는 것도 이렇게 쉽다는데 왜 나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가? 그 이유는 믿음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나도 다 해봤다. 유아기 때에는 사랑으로 잘 보듬고 싶었고, 칭찬과 격려도 했고, 상관 않고 내버려두기도 하는 등 노력해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더 배신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말들을 다 소용없는 것으로 여겨, 이제는 비틀어진 우리 모자 관계에 꼭 맞는 다른 처방을 찾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와 의 어머니
5학년인 아들은 손톱을 물어뜯고, 여자아이들과 말싸움을 일삼고, 밀리면 주먹질도 하고, 공부 못하는 애들을 혐오하며, 거짓말을 자꾸 한다. 불평불만과 말대꾸는 기본이다. 슬프다. 왠지 나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아들은 곧 사춘기를 겪을 것이고 그건 내가 저런 상태로 아이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이 얼마 없다. 그 짧은 시간동안 서로 미워하면서 엄청난 에너지를 낭비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제는 절실하게 귀를 기울여 진리의 샘에서 뭔가 건져 올려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낳고 기르십시오. 낳았으되 가지려 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 이루나 거기 기대려 하지 마십시오. 지도자가 되어도 지배하려 하지 마십시오. 이를 일컬어 그윽한 덕(玄德)이라 합니다.(도덕경, p.61)
 
노자가 표현하는 어머니의 덕은 신묘하기 이를 데 없다. 낳고 키우면서도 완전히 자기를 비워야 한다. 노자의 어머니는 자연이다. 땅은 만물을 생성하고 키워낸다. 도법자연(道法自然), 도는 자연을 본받는 것이라 했으니, 인간세상의 어머니도 이러해야 하는 것이다. 역자인 오강남 선생님은 이 10장의 소제목을 순수한 자기희생이라고 붙였다. 그렇다면 나에게 필요한 것은 희생인가? 곧바로 지금도 많은 것들을 해주고 있는데, 더 희생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희생이라는 단어에는 왠지 억울함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그토록 희생적이셨던 부모님들도 늙으시면 내가 너를 어떻게...’의 레파토리를 읊기 때문이다. 역자도 그것을 의식했는지 댓가 없이 순수할 것을 전제한다. 분명 쉽다고 했는데, 말을 덧댈수록 불가능하게만 느껴진다. 자연이 만물을 이뤄내는 것을 인간적 관점의 희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색하다.
 
글을 쓰면서 깨달았다. 이건 안 맞아도 한참 안 맞는 대응이다. 도를 일컬어 여인’, ‘어머니라고 이름 붙였다고 해서 내가 여성이므로 그 여인이고, 엄마이므로 그 어머니인가? 노자가 말하는 도의 여인은 만물의 근원이며 곤()괘이며 물이다. 만물은 음양의 조화에서 나왔고, 이 관계에서 음()적인 물은 아래로 흐르는 성질을 지녔다. 이것은 우주를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하는 존재론이다. 세상의 반인 여자와는 동음이의어다. 사람은 우주의 흐름의 일부이지만 어떤 현상물로서 찰나에 불과한 삶을 산다. ‘생리학적으로 여자의 몸으로 태어났으니 내가 그 여인으로서의 도를 본받아야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나의 욕망은 노자가 말하는 무위의 도가 아니라 근대의 가족 삼각형,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꽁꽁 갇혀 아들과 엄마의 1:1 역할에 매몰되어 있다. 함이 없는 함(無爲)을 말하는 노자에게 우리 아들 어떻게 해요? 난 어쩌면 좋아요?’라는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우문이며, 그렇게는 도덕경의 문을 열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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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와
여성-되기
들뢰즈·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에는 이렇게 생물학적으로 여자의 신체를 지니고,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려는 주체적 여성을 일컫는 용어가 있다. 바로 그램분자적(=몰적) 여성이다. 그램분자적 여성이란 남성이라는 성에 대비되는 이항대립적인 성격의 여성이다. 한마디로 그냥 여자다.형태에 의해 한정되고, 기관과 기능을 갖추고 있고, 주체로 규정된 여성이다.”(『천개의 고원, 들뢰즈가타리, 새물결, p.522) 참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내 할 일을 잘 해보겠다고 하는데도 노자에게도 들뢰즈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신체다. 이것이 여성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모든 고정된 성은 그램분자적이다. 태어나는 순간,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남자아이는 파란색, 여자아이는 분홍색으로 규정된다. 그리고 지속적인 학습을 통해 성적정체성이 고정된다.
 
그렇다면 들뢰즈·가타리가 실천적 방향으로 제시하는 여성-되기의 여성은 어떤가? ‘여성에 앞서 되기를 보자. ‘동물-되기’, ‘아이-되기등의 언표를 마주했을 때, 몸의 형태와 질료가 다른 것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관념적으로 상상하기 시작한다. 아이처럼 해맑기? 동물처럼 본능에 충실하기? ‘분자-되기에 이르면 상상조차 불가하다. 하지만 되기는 흉내내기나 상상이 아니며 실재적인 것이라고 한다! 실재(實在)란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 아닌가. 그 불가능함에 대해 궁금함을 가질 겨를도 없이 흡혈귀, 벌레-되기, 전염병의 바이러스 등등 매력적이지도 않고 난해한 예시들은 나로 하여금 되기에서 한 발짝 더 물러나게 했다. 하지만 지금 도덕경의 여인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밝혀진 한 여자가 여성-되기의 여성이 너무 궁금하다. 많은 사람들이 변신을 꿈꾸듯이 나도 단 한 번도 되어 본 적이 없는 존재가 되고 싶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말로 나의 존재를 바꾸는 실재적 ‘-되기일 것이다.
 
들뢰즈가타리는 되기에 있어서 여성-되기를 모든 되기의 출발점이자 열쇠라고 했다. 그리고 남성뿐만이 아니라 여성도 여성-되기를 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되기는 실제로 형태가 바뀌거나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대한 의식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여성-되기는 여성에 대해 표상하는 것이 아니다. 치마를 입거나 가녀린 몸짓을 흉내내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이 지점에서 저자들은 스피노자에게서 운동과 정지의 개념을 빌려와 힌트를 준다. 운동에는 좀 더 빠르고 좀 더 느린 두 가지 형태가 있다. 모든 양태는 각각의 속도를 유지하는데, 속도가 달라지면 이전의 존재는 사라지고 다른 양태가 된다. 다른 속도를 구성할 때마다 그 존재는 다른 변용태로 드러난다. 이 변용태들의 연결을 누군가의 고유한 운동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되기는 어떤 존재가 자신의 고유의 운동성을 벗어나 다른 운동성을 갖는 것이다. 그럼 여성-되기는 여성의 운동성을 갖는다는 말이 되는데, 대체 어떤 것이 여성의 속도이자 운동성일까? 들뢰즈가타리는 소녀를 이야기한다. "소녀들은 특정한 연령, , 질서, 권역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질서들, 행위들, 연령들, 성들 사이에서 미끄러지는 것이다." (천개의 고원, p.526) 소녀(여성)란 모든 규정된 것, 고정된 것들 사이를 흐르는 운동이다.
 
 
“(여성-되기는) 여성의 모습을 모방하거나 띠는 것이 아니라 운동과 정지의 관계로 또는 미시-여성성의 근방역으로 들어가는 입자들을 방출하는 것, 말하자면 우리 자신 안에서 분자적인 여성을 생산하고 분자적인 여성을 창조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천개의 고원, p.523)
 
 
들뢰즈가타리는 소녀와 아이가 생성 자체라고 한다. 그래서 여성-되기는 어떤 여성성을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성, 동일성을 해체하는 생성이다. 모든 되기는 되기의 대상이 되는 짝에 감응하여 그 운동과 정지의 속도를 맞추어나간다. 이 때, 그 짝이 되는 존재로 변환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갖고 있던 그램분자적 운동, 의식, 신체 모두를 해체하여 완전히 다른 영역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고정된 것에서 탈주하는 흐름. 이것이 분자적인 여성이다. 이 생성자체가 들뢰즈가 말하는 여성성이기 때문에 모든 되기는 여성-되기를 통해서 시작하며 여성-되기를 지나간다(p.526)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여성-되기의 여성이 여자를 말함이 아님을, 생성이 여자의 출산과 육아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에 나는 놀랐다. 그리고 그 놀라움과 함께 일견 가벼워짐을 느꼈다. 나는 도대체 어머니나 여성스러움에 대해 얼마나 견고한 표상을 갖고 있었던 걸까?
 
 
고정된 변용태, 동일한 관계
노자와 들뢰즈의 여성성은 공통적으로 생성하는 흐름()이다. 중앙, , 권력을 생성하는 것은 ‘-되기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을 무너뜨리고, 주변으로 벗어나는 생성이라는 점에서 도는 물과 여인에 비유되고 되기는 동물과 여성의 이름을 빌렸다. 영토에서 탈주한 분자적 흐름이니 아무것도 없음의 형상이요, 무어라 이름붙일 수 없는 무엇이다.
이자 생성인 여성성은 어떤 몰적 존재로 상정되지 않은 여성성이기 때문에 흉내낼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다. 상상할 수 있다면 그것은 여성성에 인간이 끊임없이 부여한 이미지일 뿐이다. 그래서  라고 할 수 있는 는 영원한 가 아니고 이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닌 것이다. (『도덕경,p.19) 
아이를 통해 무언가를 이루려는 끊임없는 욕망, 오이디푸스 삼각형은 이미 내게 고착된 운동성이다. 그럼 이제 아이와의 관계 속에 고정된 나의 운동성을 점검하고 해체해야만 한다. 노자는 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쌓아 가는 것,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 가는 것(『도덕경,p.222)이라고 한다. 들뢰즈의 여성이 탈주의 흐름인 것과 마찬가지로 노자도 하루하루 없애 가는 것을 도라고 했다. 여인으로서의 도는 이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들뢰즈의 여성성과 통한다. 나를 해체하는 수련, 나의 여성-되기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아들과의 관계에서 오가는 공기의 흐름을 떠올려 본다. 감각이 예민해진다. 뒤통수에서 안테나가 솟는 것 같다. 감시와 훈육의 언어들이 흐른다. 고개를 숙이지만 분노와 억울함의 감정도 흘러나온다. 감시자와 처벌받는 자. 우리의 운동은 간수와 죄수의 관계로 작동하고 있었다. 몇 개의 변용태들이 돌아가는 방식은 이미 단단히 감옥의 배치에 고정되어 있다. 아침식탁의 부산거림 - 종이 땡땡치는 학교 숙제 - 학원의 동선에서 언제나 행해지는 행동 감찰, 밀고자, 그리고 징벌... 싸움이 일어났다! 호루라기를 불면서 달려가는 교도관. 변명은 필요 없어. 거짓말쟁이! 입을 다물어! 경멸의 눈빛.
 
들뢰즈는 경주마와 짐말의 차이는 짐말과 소의 차이보다 크다(p.487)고 했다. 옆집과 우리 집의 차이는 우리 집과 감옥의 차이보다 크다. 학교도 감시와 처벌의 변용태들로 규칙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아이는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내고 있다.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나를 만난 사람들이 내가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을 보면 깜짝 놀란다. 전혀 다른 톤의 목소리가 나온다. 눈빛, 표정, 목소리 등 나의 몸 전체를 구성하는 운동의 빠름과 느림은 가족 안에서는 독특한 변용태를 가진다. 내가 엄마 노릇을 잘 해보고자 혼내지 않고, 소리 지르지 않고, 칭찬과 격려도 마구 해봤지만,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번번이 실패한 이유는 나의 두려움이 간수의 그것이기 때문이었다. 간수가 사라진 감옥은 어떨까? 소요사태이다.(외출했다 돌아오면 확인할 수 있다) 아니면 버르장머리 없어진 죄수. 또는 자신이 죄수임을 잊은 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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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자기에게 가하는 폭력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나는 이 글을 쓰며 나의 괴물같은 모습을 보았다. ‘나도 한번 부드러운 엄마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 너는 그래도 끝까지 죄수야. 잊지마. 너는 죄수야...’ 내가 아들에게 갖고 있던 욕망은 아들이 잘 자라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절대 권력을 행사하며 쾌감을 얻는 것이었던가. 여기서 죄책감과 아이에 대한 연민이 발동한다. 그만! 다시 오이디푸스 회로로 회귀할 순 없다. 눈물로 시야를 흐리지 말 것.
 
운동성은 관계의 속도다. 다른 신체가 된다는 것은 다른 관계맺음을 생성한다는 것이며, 동일한 배치물들(학원, 학교, 숙제) 속에서도 다른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 여태까지 종종 포용적인 엄마 흉내를 내면서도 불안하게 요동치는 심장과 마음의 속도는 그대로였다. 좋은 엄마라는 표상은 그램분자적인 내 신체를 털끝만큼도 바꾸지 못한다. 표상은 실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불안한 감시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 한 여전히 간수의 변용태이며, 감옥의 관계맺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떠남의 생성
아이가 처음 거짓말을 했을 때, 나는 얼른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 선생님이나 다른 어른들에게 말대거리를 해서 혼나고 돌아온 아이를 가정교육이 엉망이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두려워서 다시 심하게 혼을 냈다. 이러한 책임감은 내가 아이의 창조자라도 된 듯한 어머니 신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는 여성의 몸을 빌어 새 생명을 생성한다. 그것은 내 몸을 지나가는 되기의 흐름이다. 내가 한 일이 아니다. 함이 없는 함(無爲)이었다. 그 경험은 축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라는 말에 덧씌워진 환상은 그 생성의 흐름을 탐욕스럽게 붙잡게 한다. 노자는 억지로 일을 꾸미면 세상을 다스릴 수 없고,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면 되지 않는 일이 없다고 했다. 좋은 엄마가 되겠다는 욕심은 권력, 관리, 통제의 배치를 만들어내고, 아이를 가 어떻게 하겠다는 만용에 이르른 것이다. 이 관계를 해체할 수 있을까? 그것은 좋은 엄마노릇을 포기하는 것이다. 엄마라는 이름에 따라다니는 책임감과 권력의 포기이다.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실재적인 운동성, 신체를 바꾸는 일이니 불식(不息)의 노력이 필요하다. 호흡, 불안한 곁눈질, 아이의 행동에 대한 즉각적 반응들... 모두 수련의 대상이다. 이 모든 것에 앞서 권력과 힘을 지향하는 내 신체에서 미끄러져 나와야 한다. 미끄러지기, , 얼마나 가볍고 발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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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엄마들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며 쓰나미급 번뇌가 곧 닥칠 거라고 한다. 벌써 코 밑에 검숭검숭한 것이 생기기 시작한 아이는 매일매일 내 눈앞에서 사건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글쓰기도 일종의 되기라고 한 것처럼, 이미 1(6.022x10²³개의 분자)의 나에게서 하나의 분자가 떨어져 나갔는지도 모른다. 미래를 걱정하거나 새로운 어떤 배치를 상상하는 것은 위험하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사건들 속에서 매일 새롭게 아이를 만날 것이다. 고함과 등짝 스매싱이 여전히 난무하고 감당하기 힘든 일들에 눈물 흘릴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언제나 새로운 분노, 새로운 좌절이어야 한다. 간수의 안테나를 접는 순간 아이에게 씌웠던 죄수의 굴레도 벗겨진다. 거꾸로 아이의 과거 행동들을 누적시킨 죄수의 낙인을 지워내자 나의 안테나가 사라진다. 이것은 동시적인 일이다. 한 번도 되어보지 못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일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새로운 관계가 생성되며 나의 여성-되기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나는 아들이 크면 떠나보내야 하니 내 품에 있는 동안 잘 키워야 한다고만 생각 했을까? 왜 내가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은 못했을까? ‘여성-되기는 그 자체로 떠남이 아니던가. 영토를 떠나고, 지금의 나를 떠남이 생성이다. 내가 언제까지나 가족이라는 둥지로, 고정된 엄마로 존재한다면 자식은 영원히 떠날 수 없다.
 
진리의 샘에는 좋은 엄마 되기 같은 쓸모 있는 것은 없었다. 육아의 조언들 중에 학부모가 되지 말고 부모가 되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해야겠다. 부모가 되지 말고, 분자적 여성이 되라고. 쓸모없는 것이 자유를 준다고. _()
댓글목록

세경님의 댓글

세경 작성일

희진샘 잘 지내시죠~ 지나가다 봤는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3층에서 아드님을 같이 봤던 기억도 나고. 무위와 여성되기 저도 읽어보고 싶어요

단지님의 댓글

단지 작성일

지성과 미모를 모두 겸비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