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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vs 노자] 장애라는 특별함에서 빠져나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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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도타기 작성일16-07-19 12:04 조회19,199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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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라는 특별함에서 빠져나오기
 
추경미(감이당 대중지성 3학년)
 
 
 
지금의 나와 다른 존재를 꿈꾸다
장애인인 내 몸은 장애가 없는 사람과 다르다. 초등학교때 나를 당황하게 한 친구들의 질문 중의 하나는 푸세식 화장실에서 오줌을 어떻게 누냐는 거였다. 나는 “니네랑 똑같이 누거든”이라고 퉁명스레 답했지만, 이말은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이고 어떤 면에서는 틀린 말이다. 화장실에서 오줌을 눈다는 사실에선 맞는 말이고, 오줌 누는 과정의 미세한 행동의 차이에선 틀린 말인 것이다. 나를 오줌도 못 누는 무능력자로 보는 것과 알수 없는 차이에 대하여 나를 친구들과는 다른 존재로 대하는 것에 대해 화가 났었다. 그러나 나의 시각은 그 아이와 달랐을까?
 
오래전 일 때문에 간 학교의 대형 거울 앞에서 당황한 적이 있었다. 거울 속의 내가 너무 기우뚱거리며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몸은 내 몸에 맞게 걷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머릿속에는 내가 보는 사람들, 비장애인의 걸음걸이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비장애인의 리듬에 맞춰 걷지 않는 내가 나자신에게는 낯설었던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른 잣대를 머릿속에 가지고 사는 일은 귀찮고 한심한 일이다. 자신의 모습이 계속 걸리적거린다는 점에서 귀찮고, 불필요하고 때론 불가능한 다른 자기를 지속적으로 꿈꾼다는 점에서 한심하다.
 
나는 한때 남자되기, 비장애인되기를 꿈꾸었다. 중학생때 교복치마를 입어야 한다는 두려움에 맞딱뜨렸을 때 나는 내가 남자이기를 바랬다. 장애로 불편한 많은 상황들 앞에서 내가 장애가 아니라면 하는 생각을 수시로 하게 된다. 그러나 내가 꿈꾼 것은 지금의 나와 다른 존재였을 것이다. 나의 상상력의 한계 안에서 그것은 남자거나 비장애인이었을 뿐이다. 지금 내가 경험하는 한계를 넘어서고 싶은데, 내가 아는 한에서 그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설수 있다면 나는 무엇이 될수 있는 것일까? 이번 학기 스승이었던 들뢰즈·가타리와 노자로부터 답을 구해보고자 한다.
다른존재(무당벌레).jpg

소수자-되기
들뢰즈·가타리는 『천개의 고원』 10장에서 다른 -되기에 대해 말한다. -되기는 ‘욕망이나 의지를 바꾸는 것인 동시에 그와 결부하여 힘과 속도를 바꾸고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되기는 모방이 아니라 생성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는 남성이 될수 있을 것인가?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남성-되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되기는 생성이고 들뢰즈·가타리는 ‘생성들은 소수적이며, 모든 생성은 소수자-되기’(『천개의고원』p.550)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수나 소수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들뢰즈·가타리는 다수와 소수를 양이나 상태로 설명하지 않는다. 다수성이란 ‘지배 상태를 전제하는 것으로 남성-어른-백인-인간 등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소수성이란 비지배 상태를 전제하는 것으로 여성-아이-흑인-동물 등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생성이 소수적이며, 모든 생성은 소수자-되기라는 것은 지배적인 것 다수적인 것으로 되는 것은 생성(-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점에서 남성(어른, 백인, 인간)-되기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되기는 소수자-되기이며, 소수자-되기란 여성(아이, 흑인, 동물)-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남성들만 여성-되기를 해야 하는 걸까? 여성은 여성-되기를 할수 없는 걸까?  가령 유대인, 집시 등은 특정한 조건에서는 소수자를 형성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소수자를 생성하게 하기에 충분치 않다. 상태로서의 소수성 위에서 우리는 재영토화되거나 재영토화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성 속에서는 탈영토화된다. 블랙 팬더 활동가들이 말했듯이, 흑인들조차 흑인이 되어야 한다. 여성들조차 여성이 되어야 한다. 유대인들조차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상태로는 충분치 않다는 건 틀림없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유대인-되기는 필연적으로 유대인뿐만 아니라 비유대인들도 변용시킨다.
(『천개의고원』, 들뢰즈·가타리,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3, 5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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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도 소수자-되기를 해야 한다. 그러나 소수자라는 상태로는 소수자-되기에 충분치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이라는 소수성 위에서 우리는 충분히 재영토화 될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장애인이라는 소수적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소수성 위에서 재영토화 되어 나자신의 신체를 낯설게 보는 비장애인의 다수성에 지배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인인 나 자신도 장애인-되기를 해야 한다. 장애인-되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장애인은 분명 소수자지만 소수자라는 상태만으로는 장애인-되기에 충분치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필요한 것인가?
 
여성은 여성-되기를 해야만 한다. 하지만 전 남성의 여성-되기 속에서 그래야 한다. 유대인은 유대인이 되지만, 비유대인의 유대인-되기 속에서 그래야 한다. 소수자 되기는 자신의 요소들인 탈영토화된 매체와 주체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생성의 주체는 다수성의 탈영토화된 변수로서만 존재하며, 생성의 매체는 소수성의 탈영토화하는 변수로서만 존재한다.
(『천개의고원』, 들뢰즈·가타리,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3, 552쪽)
 
장애인이지만 비장애인의 척도를 내면화한 나는 내안의 전 비장애인의 장애인-되기 속에서 장애인-되기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비장애인의 척도를 내면화한 나라는 주체는 다수성(비장애인)에서 탈영토화되어 비장애인의 표준 척도를 버리는 변수로서 존재하고, 장애인의 몸을 가진 나라는 매체는 소수성(장애인)에서 탈영토화하는, 다시말해 비장애인과 대립되는 관계로서의 장애인 집합의 일원으로서 체험하는 내몸을 버리는 변수로서 존재할 때 장애인-되기는 존재하는 것이라는 말로 이해된다. 다수성의 탈영토화 즉 비장애인의 표준 척도를 버린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쉽다. 그러나 다음 항인 소수성의 탈영토화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비장애인과 대립되는 장애인이라는 체험으로서만 몸을 경험하게 된다면 소수적 상태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 상태에 머무르는 한 분노와 자기연민에 빠지는 일은 늘 시간문제일 뿐이다. 소수적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을 다르게 체험할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수성의 척도를 벗어나는 탈영토화와 더불어 또다른 운동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물론 소수성의 탈영토화는 다수성의 탈영토화와 분리 불가능하며 비대칭적인 생성의 블록 속에 존재할 것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이 이중운동의 블록속에서 ‘하나의 운동을 통해 하나의 항(주체)이 다수성에서 벗어나며, 다른 운동을 통해 하나의 항(매체 또는 인자)이 소수성에서 빠져나온다고 말한다. 또한 ‘유대인이자 비유대인인 두 명의 “클라인 씨”가 유대인-되기에 들어가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그렇다면 장애인-되기란 장애인이자 비장애인인 두 명의 내가 장애인-되기로 들어가는 것일 것이다. 소수성의 탈영토화는 좀더 살펴볼 숙제이다. 또다른 스승에게 소수성(장애인)의 탈영토화에 대한 조언을 들어보자.
 
성인의 마음두기
성인의 마음을 깨우쳐 장애에 대해 사유해 본다는 것은 얼마나 막막하고 막연한가? 그렇지만 도전해 볼만한 일이다. 장애라는 감옥에 갇혀 살지 않을수 있다면 말이다. 운전이라는 기술지로서의 무위에 대한 발제를 발표했을 때 곰샘은 기술지는 이렇게 열심히 연마하면서 사람과 장애에 대해서는, 마음에 대해서는 기본기도 연습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 발제문을 쓰면서 사람사이에 있을 때의 나와 운전할 때의 나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고 잠깐 멈칫하긴 했었다. 하지만 시간도 부족하고 장애인자전거에 마음이 가 있는 상태여서 그 차이에 대해 천착해볼 여유가 없었다. 마음에 대해 기본기를 익힌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안정된 상태에 있을 때 유지하기가 쉽고, 아직 기미가 나타나기 전에 도모하기가 쉽고, 취약할 때 부서뜨리기가 쉽고, 미세할 때 흩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아직 일이 생기기 전에 처리하고, 혼란해지기 전에 다스려야 합니다. 억지로 하는 자 실패하게 마련이고, 집착하는 자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성인는 하지 않음으로 실패하는 일이 없고, 집착하지 않음으로 잃는 일이 없습니다. 사람이 일을 하면 언제나 거의 성공할 즈음에 실패하고 맙니다. 시작할 때처럼 마지막에도 신중했으면 실패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노자,『도덕경』, 64장, 오강남 풀이, 현암사, 2015, 292~293쪽)
 
마음을 두고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리라. 기미가 나타나기 전에 도모하는 것. 아직 일이 생기기 전에 처리하는 것. 아직 일이 생기기 전에 기미를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온마음을 그것에 두어야 할 것이다. 온마음을 둔다는 것을 떠올리면 임신했을 때가 떠오른다. 길에서 임신부만 골라 눈에 들어오는 신기를 경험한 것이다. 거리에 임신부가 그렇게 많이 있는지 그 전에는 몰랐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아이들만 골라 눈에 들어왔다. 모든 신경이 거기에 가 있었고 불안하고 예민했다. 노력의 결과는 아니지만 그때 온마음이 그리로 가 있었던 것이다. 마음을 둔다는 것은 그런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마음두기는 늘 불안과 예민을 동반했다. 『도덕경』15장에도 성인의 모습을 형용할 때 ‘겨울에 강을 건너듯 머뭇거리고라는 표현이 나온다. 겨울에 언 강을 건널 때는 두꺼운 얼음인지 살얼음인지 잘 살피며 건너야 할 것이다. 불안하고 예민한 마음으로 말이다. 그러나 온마음을 두면서도 억지로 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무위의 위를 하라고 한다.
 
온마음을 두면서 자연스럽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에세이 주간을 떠올려보면 그 기간에는 에세이에 온 마음을 둔다. 다른 일들은 뒤로 미룬다. 직장에서도 집안에서도 최소한의 일만 하고 모든 일을 다음주로 미룬다. 그러나 자연스럽지도 않고 상시적으로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성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신중함을 유지해서 실패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수 있는 것일까? 일상의 기술지처럼 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밥을 먹듯이 운전을 하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고 능숙하지 않다면 말이다.
 
밥먹기2.jpg

그렇게 일을 이루어 나가는 사람에게 장애는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마음을 두어야 하는 여러 일들 중 하나일 뿐일 것이다. 특별한 무엇일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큰일도 작은일도 아니다. 장애를 넘어선다는 것은 그것에 특별한 마음을 두어 장애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마음을 두어 그것이 특별하지 않은 것으로 되게 하는 것이다. 성인의 마음두기는 하나의 태도이지 방법이 아닌 것이다. 태도는 타자를 분별하지 않고도 지니는 자신의 존재형태이지만 방법은 타자를 분별해야 선택할수 있는 기술지다. 온마음을 두는 무위의 태도 앞에서 장애는 더 이상 특별한 무엇일수 없다.
 
장애라는 특별함에서 빠져나와
그동안 에세이에서 장애에 대한 이야기를 쓸 때 마다 어려움들을 감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었다. 그래서 한동안 장애라는 단어를 아예 쓰지 않기로 했다. 그 단어를 쓰지 않으면서 내가 좀더 가벼워지는 걸 느꼈었다. 그러나 나의 몸과 감정을 지배하는 많은 부분이 장애와 연결되어 있다. 그것에 대해 입을 다물어서 그렇지 입을 열면 나는 언제나 똑같은 감정을 쏟아낸다. 이번 에세이를 쓰면서 장애라는 주제를 다루는 방법을 조금 배웠다. 텍스트에 집중하면서 나의 문제를 분석해 보는 것. 그러나 아직은 분석력이 약해 시원스런 결론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밥을 먹듯 마음두기의 기술을 연마해야 장애라는 특별함에서 빠져나올수 있으며 그럴수 있어야 다른 무엇이 되는 블록속으로 들어갈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되기의 블록은 분리 불가능한 공존의 영역으로 의도를 허락하지 않는 우연의 영역이지만, 장애라는 집합적 소수성에서 빠져나오지 않는다면 밀려들어갈수 없는 것이다. 다음 에세이에서는 한발 더 나아가고 싶다.
 
탈출(트루먼 문으로 나가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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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소님의 댓글

파랑소 작성일

선생님. 글 후반부로 가다 놀랬어요. 장애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든 것에 마음을 두어 그 특별함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 장애 뿐만이 아니라 자기가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에 적용 될 것 같아요.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