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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기 vs 아함경] 진짜와 가짜의 분별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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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필벽성옥 작성일16-12-31 15:28 조회3,2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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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와 가짜의 분별을 넘어서



                                        박 성 옥 (감이당 대중지성 3학년) 

믿을 수 없는 눈과 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두 달 넘게 전국이 떠들썩하다. 이 사건의 기저에 흐르는 감정은  우리가 속았다는 데서 오는 분노다. 법질서와 정치시스템이 환하게 갖춰져 있다고 믿었던 대명천지에 어쩌다 이렇게 전 국민이 감쪽같이 속을 수 있었을까.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려는 시비다툼이 온 나라를 휩싸고 있다. 하지만 시시각각 폭로되는 언론보도를 봐도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판단하기 힘들다. 국회청문회에서 모른다, 아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되풀이를 듣고 있노라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욕망의 난맥상을 낱낱이 규명하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뼈저리게 실감하는 중이다. 

박근혜 속임수.jpg

 서유기에서 내가 주목한 것도 이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속임수인가.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내 귀로 단단히 들어도 속임수를 피해가지 못한다. 왜? 무엇에 속는단 말인가? 삼장법사 일행은 14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십만 팔천 리 길을 가면서 각양각색의 고난을 겪는다. 그들이 겪는 역경은 대부분 요괴에게 속는 얘기로 시작된다. 일례로 제3권에 나오는 삼장법사가 황포요괴에게 납치되는 사건을 살펴보기로 하자. 

 삼장법사가 잡혀간 황포요괴의 굴에는 아리따운 공주가 있었다. 그녀는 13년 전에 황포요괴에게 잡혀 와서 요괴의 부인으로 살고 있었다. 공주는 삼장법사를 몰래 풀어주면서 자신의 아버지인 보상국 왕에게 편지를 전해달라고 한다. 국왕은 편지를 받아 보고 공주가 황포요괴에게 잡혀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국왕은 요괴에게서 공주를 구출할 수 있을까? 

 사건은 이제부터다. 공주가 몰래 편지를 전달했다는 것을 눈치 챈 황포요괴는 당당하게 국왕을 찾아가서 자신이 셋째 사위라고 밝힌다. “여러 벼슬아치들은 그가 준수하게 생긴 걸 보고 요괴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그들은 모두 식견이 좁은 범속한 인간들이었는지라, 오히려 그를 좋은 사람으로 생각했어요.” (오승은, 『서유기』, 서울대학교 서유기 번역연구회 옮김, 솔 출판사, 2012년, 3권 283쪽)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출중한 외모에 속는다. 심지어 국왕은 요괴사위를 ‘세상을 구할 재목’으로까지 여긴다. 딸이 분명히 요괴라고 알려주었는데도 자신이 직접 본 장면을 더 믿는다. 이렇게 멋진 청년이 사위였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실상을 가리는 것이다. 우리의 눈은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이 욕망하는 대로 본다. 

 요괴는 한 술 더 뜬다. 13년 전 어떤 호랑이가 여자를 등에 태우고 달아나는 걸 보고 자신이 그 여자를 구출해서 살고 있었다고 이야기를 지어낸다. 그 여자가 공주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고 능청을 떨면서. 삼장법사가 공주를 태우고 달아난 그 호랑이 요괴이며 지금 국왕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 말한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디테일이 딱딱 들어맞는 스토리텔링의 귀재다. 진짜와 가짜가 전도되는 순간 국왕은 완벽하게 속아 넘어간다. 딸의 편지는 까마득하게 잊고, 자기 귀로 들은 이야기를 더 믿는다. 사위를 대접하는 성대한 잔치가 벌어지고 사람들은 앞 다투어 소문을 퍼트린다. “당나라 승려는 요괴다.~~”(3권 289쪽) 요괴는 삽시간에 여론조작에 성공한다. 삼장법사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목숨이 위태로워졌다. 그야말로 눈과 귀로 인해 벌어지는 총체적 난관이다. 

  황포요괴의 사례는 우리가 세상을 본다는 게 얼마나 속임수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듣는 것에도 속는다. 하물며 몇 다리 거쳐 전해들은 말이라면 오죽하랴. 왜 이런 사단이 나는 걸까? 유독 요괴의 변신술이 뛰어나고 말재간이 특출나서가 아니다. 나를 속이려드는 외부 때문에 속는다고 말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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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장법사, 번번이 속다
 
  진짜와 가짜를 분별하지 못하고 요괴에게 속아 넘어가는 대표주자는 단연 삼장법사다. 삼장법사는 어릴 때 불교에 귀의해서 40세가 넘도록 원양을 보존해 온 순수의 결정체다. 어질고 선한 데다 학식도 뛰어나다. 서유기 일행 중 유일한 인간이기도 하다. 제자들은 인간 축에도 끼지 못하는 축생이다. 그런 손오공 눈에는 요괴로 보이는데 삼장법사 눈에는 인간으로 보인다. 손오공이 요괴를 때려잡으면 삼장법사는 왜 멀쩡한 사람을 죽이느냐고 야단을 친다. 그로 인해 삼장법사와 손오공은 끊임없이 투닥거린다.

 손오공은 신체적 능력이 남다르다. 천상의 복숭아를 훔쳐 먹고 태상노군의 선단과 옥황상제의 술도 훔쳐 먹은 몸이다. 그는 이글이글 불타는 금빛 눈동자를 가졌다. 팔괘로에서 49일간 불로 단련된 눈이다. 척 보면 한 눈에 요괴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 있다. 그런 손오공이 아무리 요괴라고 말해도 삼장법사는 믿지 않는다. 그의 눈에는 그저 예쁜 여인으로 보일 뿐이다. 그는 자신의 눈으로 보고 인식한 것을 더 확신한다. 

 손오공은 답답한 나머지 이죽거린다. “사부님께서 저놈이 예쁘게 생긴 것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신 게로군요. 저 요괴와 부부가 되게 해드리겠어요. 뭣 하러 굳이 고생고생해가며 불경을 구하러 갑니까?”(3권, 205쪽) 손오공은 삼장법사의 마음이 흔들려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 못한다고 생각한다. 성질 급한 손오공은 요괴의 머리를 때려죽이고, 삼장법사는 손오공을 더 이상 제자로 삼지 않겠다며 내쫒는다. 손오공은 울면서 떠난다. “사부님은 현명한 이와 어리석은 이를 알아볼 줄 모른다.”고 원망하면서.(3권 232쪽)

  삼장법사가 유독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게 아니다. 비록 세상물정 모르고 순진하지만 당대에 가장 뛰어난 현명한 스님이다. 여색과 부귀영화의 유혹에 한 치도 흔들리지 않는 올곧은 사람이다. 학식과 덕망이 높은데도 보고 듣고 판단하는 능력이 이렇게 허술하다. 삼장법사는 범속한 사람이라 요괴라는 걸 알아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진짜 가짜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원초적 한계인가? 

 인간의 분별력을 좌우하는 것은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이다. 우리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말하는 감각활동을 통해 세상과 마주하고 대상을 지각한다. 자신의 감각과 지각으로 상(相)을 만들고 판단한다. 우리의 눈과 귀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감지하지 않는다. 그 이면에 자신의 욕망이 깃든다. 대상은 끝없이 변하는 데 그것을 변하지 않는 상으로 실체화하고 내가 만든 상의 총합이 나라는 아상을 만든다. 아상을 고집하면 할수록 집착이 커진다. 그것이 번뇌다.  대상에 대한 분별도 자신이 만든 상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속는다는 것은 자신이 만든 상에 속는다는 말과 같다. 그러니 나를 속이려드는 외부 탓을 할 수 없다. 내가 확실하다고 믿고 있는 가치관과 통념이 나를 속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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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괴들이 삼장법사를 공략하는 포인트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요괴들은 주로 늙은 노인이나 어린아이, 가녀린 여인으로 변신해서 나타난다. 약하고 불쌍한 중생의 표상이다. 그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면 삼장법사는 백발백중 요괴의 마수에 걸려든다. 요괴들이 삼장법사를 속이려드는 포인트는 자비심이다. 선한 마음을 자극하여 미혹시킨다. 삼장법사는 약자를 보호하고 구해주려는 자비심 때문에 얄궂게도 고초를 겪게 된다. 삼장법사에게도 자비를 베푸는 것이 좋은 거라는 상이 있다. 때론 선하고 좋은 가치도 편견이 된다. 어떤 상은 옳고 어떤 상은 나쁘다고 절대시할 수가 없다. 절대적 기준을 상정하면 그것 자체가 속임수가 된다. 최순실 게이트를 초래한 당사자가 한사코 자신은 순수한 마음이었다고 강변하는 이유를 알겠다. 18년 동안 1원도 사익을 취하지 않았다고 믿는 자신에게 철저히 속고 있음을 본인만 모를 뿐이다. 약자와 강자, 선과 악, 옳고 그름을 가르는 기준은 맥락과 정황에 따라 달라진다. 절대적 기준이 없다. 이를 불교에서는 연기(緣起)라고 말하고 있다. 조건이 달라지면 실체가 달라진다. 모든 것은 공(空)하다는 말이다. 진실과 거짓, 진짜와 가짜의 경계는 외부가 아니라 내 자신에게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요괴와 보살은 마음 한 끗 차이 

  진짜와 가짜가 충돌하는 사건은 서유기에서 무수히 일어난다. 요괴가 사람 시체의 머리를 보여주면서 삼장법사를 먹어 치웠다고 거짓말을 하자 천하의 손오공도 속아서 대성통곡을 한다. (9권) 요괴가 가짜 관음보살로 변해서 저팔계를 속이지 않나 (5권) 가짜 소뇌음사를 세워서 함정을 파기도 한다. (7권) 부처님도 천축국도 가짜가 판친다. 세상 믿을 게 하나 없다. 

 관음보살이 만들어낸 설정 샷은 정말 난감하다. 삼장법사 일행이 힘겹게 요괴와 싸우고 나면 “관음보살이 그들을 이곳으로 보내 요괴가 되게 하여 너희 스승과 제자가 진심으로 서쪽으로 갈 생각이 있는지를 시험한 것이다.”(4권 146쪽)라고 밝힌다. 오 마이 갓!  진짜 요괴의 농단도 아니고, 관음보살이 의도적으로 꾸며낸 가짜 요괴라니.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따로 없다. 언제 어디서든 상상 이상의 속임수가 가는 길목마다 깔려 있다. 이런 게 인생인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가짜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는 여정 말이다. 그런데 그 속임수가 다름 아닌 자신에게서 비롯된다. 이런 걸 두고 시쳇말로 “내 눈 내가 찔렀다”거나 “내 발등 내가 찍었다”고 한탄하는 건 아닐지.  

 진짜와 가짜가 겨루는 하이라이트는 제6권에 나오는 가짜 손오공 사건이다. 이 사건도 손오공이 삼장법사에게 쫓겨난 후에 벌어진다. 저팔계와 사오정이 공양을 구하러 간 사이 허기와 목마름에 지쳐서 홀로 앉아 있던 삼장 앞에 요괴가 나타난다. 손오공의 모습으로 변신한 요괴다. 늘 삼장법사를 위기에서 구해주던 손오공이 가장 위험한 인물로 등장했다. 가짜 손오공은 삼장법사를 후려쳐서 땅바닥에 고꾸라지게 만든다. 삼장법사 일행은 손오공이 가짜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들은 손오공이 배신했다고 생각한다. 서럽게 울며 쫓겨났던 손오공이 화가 나서 복수하러 왔다고 오해할만한 정황이다. 내가 서유기에서 가장 손에 땀을 쥐고 간담을 졸이며 읽은 대목이다. 가장 가까웠던 도반이 요괴가 되는 기가 막힌 상황이 닥쳤다. 

 여차저차 해서 진짜 손오공이 돌아오고 가짜 손오공과 싸운다. 그 어떤 해괴한 요괴와의 전투보다 치열하다. 문제는 누가 진짜 손오공인지 가려낼 수가 없다는 점이다. 관음보살이 긴고아주를 외우면 둘 다 머리를 싸안고 아파서 뒹구니 누가 진짜인지 구별할 수가 없다. 옥황상제가 천지를 비추는 조요경을 가져와서 비춰 봐도 터럭 하나 다르지 않다. 이쯤 되면 삼장법사가 가짜에 속고 진짜를 몰라보는 걸 판단력 미흡이라 말할 수가 없다. 그들이 겪는 고난은 단지 옳고 그름의 싸움이 아닌 것 같다. 진짜 가짜의 이분법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문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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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직 석가여래만이 진짜 가짜를 가릴 수 있다는 말에 두 손오공은 서천의 뇌음사를 찾아간다. 설법을 하고 있던 석가여래는 멀리서 둘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 말한다. “저것 보아라. 두 마음이 서로 싸우며 오고 있구나.” (6권 225쪽) 진짜 손오공과 가짜 손오공은 서로 다른 두 개체가 아니었다. 하나의 개체에서 갈라진 두 개의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요괴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끝없이 출몰하는 내 마음의 다른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실체적 진실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닐까. 
  
 
“사람에게 두 마음 있으면 재앙이 생기나니 하늘 끝 바다 언저리에서도 의심과 시기가 생긴다네....     남북으로 뛰어다니며 쉴 틈도 없고 동서로 치받고 다니며 평안할 날 없구나! (6권 223쪽) 

 삼장법사 일행이 걸어갔던 험한 길은 자신의 마음과 싸우는 여정으로 보인다. 시시 때때로 바뀌는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번뇌와의 결투다. 욕망에 따라 진짜로도 보이고 가짜로도 보인다. 때론 보살의 얼굴이고 때론 요괴의 얼굴로 나타난다. 

고난이 깨달음이 되는 순간

 감이당에서 공부한 지 4년째. 열다섯 번째 에세이를 쓴다. 에세이를 쓸 때마다 수없이 많은 요괴를 만났다. 이번 생엔 글렀어... 자조할 때마다 한 줄도 쓰고 싶지 않았다. 일명 ‘한쓰않’ 요괴라는 번뇌다. 마지막 학기는 특히 심했다. 글쓰기를 통해 자신이 갇혀있던 인식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과 글쓰기 같은 건 포기하고 속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충돌했다. 어느 것이 진짜 나인가. 요괴가 내 마음 바깥에 있다고 말할 수가 없다. 내 마음 자체가 요괴가 된 것이다. 겨우 ‘한쓰않’요괴를 물리치고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다. 허접한 글이라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말자는 항심이 이겼다. 글쓰기가 정말 자의식이라는 요괴와의 한 판 승부임을 실감했다. 이보다 더 지독한 내면의 수행이 없다. 

 
“보살이나 요괴나 결국 일념(一念)에서 나온 것일 뿐, 근본을 따지자면 모두 무(無)에 속한 게 아니더냐.” (2권, 210쪽) 

  보살과 요괴의 근본이 같다. 같은 마음에서 나왔는데 한 끗 차이로 보살이 되기도 하고 요괴가 되기도 한다. 보살이라는 정해진 실체가 따로 없다. 요괴도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모두 무에 속한 것이라고 한다. 어떤 사건을 바라보는 마음에 따라 보살과 요괴 사이를 오간다. 불법에 귀의하겠다고 발심하는 순간 요괴도 진리를 추구하는 존재로 변신한다. 마음 하나 바꿔 먹는 게 깨달음의 전부일지 모른다. 깨달음은 어떤 고원한 상태에 최종적으로 다다르는 것이 아니다. 매 순간 요괴가 되려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채는 과정 속에 있다.

 
“불법은 본래 마음에서 생겨나고 또한 마음을 따라 사라진다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다 누구로부터인가? 모든 것이 자기 마음에서 비롯된다면 다른 사람의 말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다만 힘든 고행을 통해서 철 속에서 피를 짜내듯 해야 한다네.” (2권, 268쪽) 
서유기 길가는 장면.jpg


 드디어 부처님이 계신 영취산이 눈앞에 가까워졌다. 마지막으로 넓은 강의 거친 물살을 건너야 한다. 삼장법사가 꼬르륵 강물에 빠졌다가 배에 올라타자 저 멀리 강물 위에 시체 하나가 떠내려 오는 게 보인다. “사부님, 겁내지 마십시오. 저건 원래 사부님의 껍질이었습니다.” “저건 당신이오. 축하하오! 축하해요.”(10권 210쪽) 모두가 기뻐한다. 삼장법사는 자신을 감싸고 있었던 껍질을 벗고 환골탈태했다. 드디어 인간의 뼈와 살로 이루어진 몸에서 벗어난 것이다. 

 인간이라는 껍질을 벗어 던지는 장면은 아상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을 상징하는 듯하다. 손오공은 말한다. “사부님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하셔서 길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또 고생은 얼마나 많은지요." (10권 40쪽) 하늘과 땅 사이에서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보고, 듣고, 분별하지 않을 수 없다. 진짜와 가짜를 분별하는 아상에는 자신의 욕망이 들어있다. 이미지에 속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는 자신의 욕망에 속는다. 나라는 의식을 전제하는 마음자리를 바꾸지 않는 한 선악과 상식적 통념이 깨지지 않는다. 서유기 일행은 진짜와 가짜를 분별하느라 목숨을 잃을 위기를 수없이 넘겼다. 고난의 과정에서 매 순간 바른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발심을 거듭했다. 진짜 가짜의 분별을 넘어서 깨달음에 이르는 구법의 대여정이었다.(2016.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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