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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vs주자] 파이터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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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흰나비 작성일17-01-03 22:13 조회3,0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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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터 주자
 
대중지성 3학년 김희진
 
 
“그러므로 '하필(何必)'이라고 운운하는 것이 옳기는 옳지만 저는 그 말이 엄밀하지 않음을 한탄스럽게 여깁니다. 만약 '필(必)을 '가(可)'로 바꾼다면 알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불필(不必)'이라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고, '불가(不可)'라는 것은 해가 있다는 말입니다. 무릇 이 둘 사이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주서백선』, p.72)
 
이 글은 약 구백 년 전쯤(1168년) 송나라의 주희가 쓴 편지글의 한 조각이다. 조선시대 정조께서 이 주자의 사상을 흠모하시어 그의 편지 100편을 모아 편찬하였으니, 그것이 『주서백선』이다. 주자의 글은 어렵기도 하고 고리타분한 느낌도 있었지만, 나를 질리게 하는 부분은 바로 위와 같이 시시콜콜 따지고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주자의 레이다에 걸리기만 하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스캔 당한다. 주력부분은 사상검증인데 친한 사람이라도 그 생각하는 바가 조금이라도 자신과 다른 부분이 감지되면 ‘제 미흡한 생각은 이렇습니다~’하면서 꼭꼭 찝어서 반론한다. 위의 글은 주자와 편지를 주고받은 왕상서의 말에서 한 꼬투리를 잡은 것인데, "도가 육경에 있으니 다른 데서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하필)"라고 한 것이 주자의 레이다에 탁 걸린 것이다. 아주 예민하신 분이다. 도를 구하는데 선(禪)적인 면이 들어오는 것은 '불필'정도로 거부해선 안 된다. 불가(不可)가 맞다는 것이다. 먹으면 죽는 독이기 때문이다.

『주서백선』의 글에서 주자가 가장 미워하는 대상은 소동파와 왕안석으로 보인다. 우리같은 소인이 보기엔 다 훌륭하신 말씀이오, 개중 자기 것만 고집하는 주자가 꽉 막힌 고집불통으로 보이기만 한다. '다 바르게 살자는 말인데 그게 그거 아녀?' 그러나 나는 최근 이런 뉴스를 보았다. 
 
“검찰은 필요, 법원의 입장은 불필, 유가족의 입장은 불가”
 
이 뉴스는 너무나 절박하고 첨예한 상황을 전하고 있었다. 천 년의 시간이 넘었어도 현재에도 필요니 불가니 입장차이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는 주자를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조금 숨가쁘게 읽어보기로.
 
불안한 시대, 첨예한 대립
한 농민이 시위를 하다가 직사물대포에 맞아 뇌사상태로 실려갔다. 근 1년동안 병원에 누워있다 며칠 전 돌아가셨다. 그 시신을 부검하겠다고 검찰이 부검영장을 신청하고, 법원은 불필요하다고 기각했으며 유가족은 정부가 1년이나 되는 기간동안 어떤 대응도 하지 않고 있다가 이제서야 시신을 빼앗으려고 시도하니 절대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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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주 예전에 대학에서 농동아리 활동을 했었다. 매년 여름이면 아무리 변비에 시달려도 9박10일의 농활도 거뜬히 해내고, 겨울이면 농한기를 맞이하여 농민대회를 함께 준비하곤 했다. 우루과이라운드와 쌀전면개방때도 아스팔트에서 함께 보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 농민이 참여했던 그 자리는 내가 있던 자리였고 죽은 자는 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의 일이 되니 ‘불가’라는 단어에 비장함이 솟아난다. 주자의 글을 다시 면면히 들여다보았다. 같은 편지의 마무리 부분을 보니 이 깐깐한 양반이 단단히 화가 난 것을 알 수 있다.
 
 “어리석고 변변하지 못하지만 제 힘이 부족함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런데도 개연히 분을 내기를 그만두지 못하는 까닭은 이 문제를 결판 지으려는 것 때문입니다. 천하에 어찌 두 가지 도가 있겠습니까?” (p.75)
 
분이 날 정도로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인 것이다. 소식의 도에 선적인 면이 있으니 그의 문장을 읽는 것도 안 된다며 분을 내고 계신다. 주자는 ‘왕씨와 소씨의 경우에는 모두 부처와 노자를 성인으로 여기고 있으므로 이미 순수한 유자의 학문이 아니’(p.72)라고 한다. 게다가 왕안석은 이미 그 폐해가 커서 실각 후 후손의 미움을 받지만 소식은 사상이 완전히 틀려먹었는데도 그 문장의 아름다움 때문에 아직도 많은 이들이 흠모하니, 더욱 위험한 인물이라고 여기고 있다. 낯익은 이념싸움의 풍경이다.
 
주자가 살았던 남송 시대는 송나라(북송)를 오랑캐에게 빼앗겨 남쪽으로 쫓겨 내려온 불운한 시대다. 주변국 국제정세가 매우 복잡하다. 요나라와 금나라가 싸우고 군대가 약한 송나라는 그 사이에서 외교전술을 이용하려다가 무능과 부패의 자기 덫에 걸려 황제일가와 함께 나라(북송)를 잃는다. 주자 사후의 일이지만 또 다른 오랑캐 몽골의 징키스칸이 완전히 중원을 장악해서 남송도 망하게 된다. 주자의 시대는 요 사이에 낀 잠시의 안정기였으나, 전후(戰後)의 첨예한 이념대립이 극심하던 때였다. 남송시대와 현재 사이를 채우고 있는 모든 시대 역시 클로즈업 해보면 전쟁 또는 대립의 반복이다. 가까운 일은 급박해보이고, 먼 일은 느슨해 보일 뿐. 주자의 ‘불가’(不可)와 이 시대의 ‘불가’는 동일한 절박함이요,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명분이다.    
 
주자가 제시하는 정치체는 세습군주제를 바탕으로 하되 사대부가 황제를 보위하는 형태의 나라다. 황제 측근에 간신배와 소인의 무리가 있느냐, 군자들이 결집해 있느냐가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황제보다 신하들의 역량이 더 중요하다.
 
“바라건대 승상께서는 먼저 인재가 어진지 어리석은지 충성스러운지 사악한지 분별하시는 일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으십시오. 만약 어떤 사람이 정말 어질고도 충성스럽다면 드러내어 조정에 나오게 하시되 그러한 자의 붕당에 사람이 많지 않아 천하의 일을 함께 도모할 수 없지 않을까만을 염려하십시오. (...) 군자들이 붕당을 만드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데 그치지 말고 자진하여 기꺼이 그들의 붕당에 들어가도록 하십시오. 자진하여 기꺼이 그들의 붕당에 들어가는 것을 꺼리기는 커녕, 임금님까지 이끌어 그들의 붕당에 들어가도록 유도하십시오.” (p.179)
 
주자는 군자들이 붕당을 이루어 황제를 바른 길로 보필해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는 한 사람의 자질보다 붕당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는데 바른 말이라도 혼자서 하면 무시당하거나 쉽게 제거당할 수 있으므로 정치하는 자에게 세력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사실 주자가 미워하는 왕안석은 세력이 없이 오로지 신종황제 한 사람의 파트너로서 신법을 강행했기 때문에 그 막강한 황제의 지지에도 버텨낼 수 없었다. 붕당과 세력, 매우 중요하다.
 
중앙 정치판의 붕당을 장려하는 모습에서 주자가 자신의 뜻을 고집스레 관철시키고자 하는 모습이 보인다. 왜냐하면 위 편지는 주자와 매우 친분이 있고 주자를 후원한 유정이란 사람이 승상이 되었을 때 그에게 보낸 편지이기 때문이다. 그 승상은 아마도 중립을 지켜서 세력 간의 갈등을 조금이라도 봉합하려고 한 것 같다. 주자는 그런 승상에게 과감한 커밍아웃과 한 쪽 편에 서서 국정을 운영할 것을 주문한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주자가 말하는 군자의 붕당에 대한 기준이 너무 주관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질고 어리석음, 충성과 사악을 승상이나 주자가 판단 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구나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고 백성을 위한다고 하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관리가 되었소~'라고 말하지 않는다. 일단 현실 정치판에 들어선 관리들은 은거를 좋아하는 노장사상이나 출가해야하는 불교를 숭배하지는 않을 것이니, 기본적으로 유학자들의 무리일 것이다. 이 중, 군자 소인을 나눈다는 것은 이쪽이나 저쪽이나 각자의 명분이 옳다고 싸우는 이념 싸움이다. 여기서 주자는 우리 편이 군자의 붕당이고, 우리 붕당을 강화하자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주자 편은 어떤 편? 
주자가 지향하는 군자의 붕당에 입당하기란 쉽지가 않다. 뇌물이 법인 시대이건만 돈으로도 살 수 없다. 앞서 얘기한대로 주자는 사상검증의 대가다. 이제 주자가 여러 편지에서 강조하고 있는 중심사상을 살펴서 그가 말하는 군자의 이상형을 찾아 사상검증을 통과해 보자. 주자는 정이(程二)의 사상으로써 공맹을 해석하는 방법을 취하는데, 정이사상의 특징은 마음의 작용에 관심을 두었다는 것이다. 주자도 이것을 자기 나름으로 해석하여 마음으로 하나를 이루는 성과 정(情)을 말한다. 둘의 작용은 서로 맞물려 있으니, 마음이 고요할 때에도 존양(存養)하고, 마음이 움직일 때도 성찰해야 한다고 한다.(p.118) 고도의 마음수련이 아닐 수 없다. 언제나 삼가는 것(敬)으로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 이것이 거경(居敬)이다. 다른 하나는 격물치지의 방법으로 하학(下學)하는 것이다. 단번에 성인이 되는 길은 없다. 좌선이나 하며 깨달음이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한 가지씩 배워나가는 길이다. 집에서 효도하고, 형제끼리 우애 있고, 청소 잘하고, 암송 잘하고, 그러다 보면 임금께도 충성하고 군자도 되는 것이다. 한 가지 사물에서 궁리를 다 하는 방법을 견지하여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깨우쳐 나가는 공부법이다.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삼가고 성찰해야 하는데다가, 자나 깨나 공부하라고 한다. 일상은 틀에 박힌 듯 규범적이어야 한다. 정말이지 쉽지 않은 길이지만, 주자는 이런 자들이 임금 주변에 포진하여 잘 보위하면 나라가 참 잘 될 것이라고 믿는다. 
“경연에서는 지금 어떤 책을 강의하십니까? 제 생각으로는 『맹자』가 오늘날 가장 필요한 책입니다. 그렇지만 날마다 강독하고 해석하는 것이 반드시 유익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것보다는 폐하께 정사를 돌보는 틈틈이 하루에 한두 장씩 읽고 그것을 반복해서 완미(玩味)하여 성현이 작용하는 본말을 궁구하여 살피도록 권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다음에 야직할 때에 폐하께서 공부한 내용을 질문하고 그에 따라 인도하도록 하십시오.” (p.98)
 
이런 조정, 이런 국가! 누가 봐도 잘 될 것 같지 않은가. 파란 지붕의 현실 정치를 생각하면 쓴웃음만 나올 뿐이지만, 그것은 송나라 조정의 실태도 다르지 않았다. 송나라가 배경인 『수호지』를 읽어보면 소설 상의 과장을 감안한다고 해도 송조의 부패와 무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충의를 행하고 싶어도 행할 수가 없는 호걸들이 도적이 된다는 이야기인데, 송나라의 관리사회와 황제에게 이런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아! 주자는 이상주의자였던 것이다.
 
나라는 개인에게 무엇인가.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왜 국가라는 공동체에 이토록 기대를 걸고, 그 명운을 걱정하며 이상향을 그리고 있는가. 수많은 브레인들이 자신이 평생에 걸쳐 갈고 닦은 학문의 정수 중 엑기스만 모아서 국가의 비전을 제시한다. 천하를 주유하는 공자와 맹자를 보라. 그러나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이란 그것을 받아들이기엔 얼마나 비루한지.
 
그래도 어쩌랴, 인간은 미약한 존재로서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야만 하고, 그것은 공기와도 같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면밀히 따져보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체이지 그것이 반드시 국가의 형태를 띤 사회체일 필요는 없다. 그래서 국가든 작은 공동체든 어떤 것이 인간에게 적합한지 정해지지 않았기에, 끊임없이 도전받고 줄기차게 비전을 만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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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비전
시공간을 조금 뛰어넘어 보자. 1600년 경 네델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도 국가의 비전을 제시한다. 스피노자 역시 극심한 정치적 갈등상황에서 폭풍의 중심에 있었다. 종교적 이념대립, 불안정한 정권의 교체, 이런 시기에 철학자가 공동체의 비전을 제시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신학정치론』의 주제는 한마디로 국가는 철학함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철학도 원래는 인간의 본성을 탐구한다. 아마 모든 철학은 여기서 출발할 테지만. 수동적 정념에 지배되지 않고, 이성에 인도되는 삶과 지혜를 사랑한 스피노자. 그가 제시한 국가의 이상형은 역시 이성에 따라 구성된 공동체다. 개개인의 모든 욕망을 전부 실현할 순 없으므로,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한 합의. 사회계약이다. 개인의 욕망을 안정적으로 보장 받으려면 이성의 판단 아래서만 가능하다. 그것이 공동체에 개인의 모든 권리를 양도한 민주정의 원리라는 것이다. (『신학정치론』, 비홍출판사, 16장, p.261)
 
이러한 계약이 개인의 욕망보다 언제나 크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체제유지를 위해 여러 가지 장치들이 계속 등장하게 된다. 국가가 폭압적 장치들로 국민의 욕망을 무리하게 억압한다면? 또는 나의 욕망만이 지속적으로 억압당하고 소수의 욕망만이 지속적으로 보장되는 사회라면? 계약을 철회하면 된다. 홉스의 사회계약설과 달리 개인에게는 절대로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있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주장이며, 계약은 언제나 파기될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이다. 아마 스피노자도 놀랄 것이다. 모든 국민이 나이만 맞으면 어떤 조건에도 딱 한 표 씩 행사하여 자신의 의견을 대신할 입법자를 뽑는 제도가 몇 백 년 뒤 실현된다는 것을. 현재 우리가 4,5년의 짧은 텀으로 직접투표를 통해 대의민주제를 행하는 것은 언제든 양도한 권리를 빼앗을 수 있는 방편이 된다. 얼마나 아름답고 완벽한 정치체인가. 아... 코메디가 되어버렸다. 주자와 마찬가지로 스피노자도 이상주의자인가? 그렇다. 모든 철학자는 이상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는 현실은 언제나 녹록치 않고, 권력은 국가 간의 전쟁뿐 아니라 혁명과 내전 등의 피를 요구한다. 그래서 어떤 시대의 철학자건 그 책무는 그가 당면한 현실에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출구를 제시하는 것이고, 이상주의자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학정치론』 후에 집필한 『윤리학』(에티카)에서 스피노자는 국가가 ‘기쁨’의 공동체이기를 바랐다. 스피노자의 ‘기쁨’이란 신체의 역량이 강화되는 것이다. 더 많은 것들과 접속할 수 있는 신체가 되는 것이다. 개인의 신체도 수많은 요소들의 운동과 정지의 비율로 이루어진 복합신체이듯 국가는 그런 작은 복합신체인 개인이 모여 더 큰 복합신체를 이룬 것이다. 국가의 구성원이 자기에게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힘으로 스피노자는 ‘이성’, 이 아름다운 단어를 강조한다. 이성이 결여되면 자신에게 나쁜 것, 자신을 노예로 전락시키는 것들을 계속해서 원하게 된다. 결국 다시 개인의 윤리적 성찰로 돌아가는 것이 스피노자가 제시한 국가 비전인 민주정의 전제조건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주자는 그 완고함 때문에 끊임없이 접속하는 복합신체로서의 공동체와 괴리가 커 보이는 것 같다. 주자는 명확한 입장표명을 강조하고 소인과 거리 두기를 원한다. 가장 경계하는 것이 소인과 군자의 붕당을 적절히 섞어버리는 조정설이다. 누구나 각자의 욕망이 있는데 어찌 이쪽과 저쪽의 경계가 없을 수 있는가. 그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이 소통일까? 경계가 없다면 접속 자체가 불가능하며 아예 그런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것이 충돌일지라도 상대와의 입장을 구분 짓고, 만나서 싸우는 것도 접속인 것이다.  
 
『주서백선』은 주자의 파이터 기질을 너무 잘 볼 수 있는 책이다. 자기의 생각을 아는 사람에게나 모르는 사람에게나 자꾸자꾸 얘기한다. 지금 같은 SNS시대에는 트위터의 촌철살인 일수도, 일간지의 칼럼일 수도 있다. 술자리에서나 떠드는 성토의 이야기나 겁쟁이들의 뒷담화가 아니라, 글로써 자신의 생각을 반복해서 피력하면서 스스로를 단련시키고, 적들을 긴장시키는 것. 자꾸만 얘기하고 설득하는 과정. 자기의 의견을 확실하게 드러냄으로써 상대에게 반격의 꼬투리를 주고, 그 반격을 받아서 자기 생각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가는 것. 주자는 자신의 의견 뒤나 편지 말미에 꼭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공께서는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꽉 막힌 것처럼 보였던 주자가 사실은 접속의 달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주자가 주장하는 붕당정치나 아니면 주자 스스로 보여주는 이런 전투적인 태도는 상대와의 공통점을 찾아 합일을 이뤄내는 것만큼이나 역동하는 복합신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공통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일단 참고 대충 섞어버리는 것이 주자에게는 악으로 보였다. 스피노자를 통해 보니 주자는 신체의 역량이 더 강화된 기쁨의 공동체를 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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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과 자기 확신
이렇게 뚜렷한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사람들과 논쟁을 즐긴다는 것은 보통사람이 따라갈 수 없는 자기확신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그 확신은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
“지난번에 쓴 대학을 두고서는 정본이 틀림없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여러 사람들과의 강론을 통해 ‘혈구(絜矩)’장은 여전히 세밀하지 못한 부분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 한 가지 학설을 터득하고 나서 종신토록 그것을 고치지 않을 경우 그 사람은 상지(上智)가 아니면 하우(下愚)일 것입니다.” (『주서백선』,p.383)
 
주희가 62세 때 사위에게 쓴 글이다. 여러 사람들과 강론끝에 자신의 학설에 잘못된 지점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함께 강론한 지기들로부터 주자는 자신이 했던 것 못지않은 날카로운 지적들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정치에 붕당이 필요하듯 공부에도 밴드가 필요하다. 붕당은 그 안에서 토론도 하고 의지할 세력도 된다. 또 공부 밴드는 그 속에서 서로의 부족한 점을 일깨워 혜안에 이르게 하니, 그들이 주장하는 학문의 도리와 거기에서 얻어낸 정치적 명분에는 그만큼의 확신이 서있다. 주자에게 이 붕당과 공부밴드는 둘이 아니었다. 이익과 공리(功利)에 따라서 이합집산 하는 무리가 아닌, 사상적 동지로서의 운명공동체라고 할 수 있겠다.  철저하게 이러한 신념과 일치된 삶을 살았던 주자. 그래서 그는 강력한 사대부라는 이상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주자는 자신의 학문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당대의 상황에서도, 거짓학문으로 탄압을 받을 때에도 꼿꼿하게 자신의 이상을 펼쳤다. 깊은 성찰 가운데서만 얻을 수 있는 그런 확신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개인에게도, 공동체에도. 누구와도 만날 수 있는 사람, 반대자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정치가. 끊임없이 공부해서 견고한 확신으로 상대방과 싸울 수 있는 지도자. 지금 주자와 같은 파이터를 꿈꾸는 것이 이상주의자의 몽상일까?  _(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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