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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기 vs 아함경] '착한 벗'과 함께 쿵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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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혜안 작성일17-01-09 07:54 조회3,1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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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벗’과 함께 쿵푸를!

안혜숙(대중지성 3학년)


공부가 목적이 된 공부
연말이 다가오며 자주 생각나는 친구가 있다. 이십년 넘게 알고 지내다 점차 소원해져 이젠 거의 연락이 끊어지다시피 되었다. 공부의 장에 발을 들여 놓은 후엔 거의 내가 먼저 연락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연락을 끊지 않았다. 잊을만하면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하며 근황을 물어왔다. 그럴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일어나곤 했다. 그러면서도 만나고자 하는 마음이 쉽게 내지지 않았다. 올 초 오랜만에 만나고 돌아오며 내가 마치 빚진 걸 갚듯이 만남도 의무처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가을에 연락이 왔다. 에세이와 곰댄스가 코앞이라 끝나고 연락하겠다고 했다. 그리곤... 잊어버렸다. 다시 생각났을 땐 이제 연락이 오지 않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마음이 썩 좋지는 않았다. 상황은 조금씩 다르지만 나의 과거의 친구나 지인들이 이렇게 하나 둘 멀어져 갔다.

“불문에 귀의한 이후로 성심으로 불법의 가르침을 받들어 요사이는 산에 오르고 물을 건너느라 정신이 없소. 그래서 어릴 적 친구들과도 다 소원해지고 제대로 찾아보지도 못한 터라, 선생의 존안을 잘 알아보지 못하겠소.”(『서유기』, 오승은 지음, 서울대학교 서유기 번역연구회 옮김, 솔, 6권, 82쪽) 우마왕의 동생 여의진선이 자기를 알아보겠느냐는 물음에 대한 손오공의 대답이다. 자기가 몸 둔 장場과 관심이 달라지니 기존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그런데 난  아직 그게 편하지 않다. 뭔가 흔쾌하지만은 않은 느낌이 남아있었다. 그 느낌을 붙들고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게 아니어도 눈앞에 닥친 해야 할 과제들이 줄줄이 있었다. 그렇다. 공부를 시작한 이후로 늘 수행해야 할 과제가 앞에 있었다. 항상 쫓기는 느낌이었다. 처음엔 그게 나쁘지 않았다. 다른 쓸데없는 망상이나 일상의 산만함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바쁜 가운데서도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자유로움을 느꼈다. 밥벌이를 하고 있었으니 그땐 쫓기는 느낌이 단순히 시간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돈 버는 일에서 벗어나 공부가 오롯이 내 생활의 중심이 되었는데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는 말로 공부 외의 다른 일들은 최소화 하거나 끊고 있었다. 그렇다고 다른 일들이 많은 것도 아니지만, 친구건 가족이건 공부의 장이 아닌 다른 관계엔 별 관심이 가지지 않았다. 때론 과제를 핑계로 주변에 관심을 끊고 책 속으로 공부 속으로 도피하고 있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다. 시간에 쫓기고 과제에 밀려도 공부가 좋으니 공부의 장에 있다. 힘들어도 공부를 하느냐 마느냐로 고민한 적은 없다. 어느새 공부가 주어진 과제를 해가기에 급급한 것이 되었지만, 그것만이 공부일 수는 없다. 내 삶의 전 영역이 공부의 장이다. 오랫동안 알아오다 멀어져간 친구와 지인들. 그들도 한 때 내 삶의 중요한 인연들이었다. 지금 나의 공부에 대한 사유 속에서 그 관계와 그에 대한 내 마음을 다시 생각해본다. 
 
갈림길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삼장밴드의 과제 완수, 쿵푸의 길
『서유기』를 읽으며 좀 당황한 부분이 있었다. 십사 년이나 걸려 그들의 목적지인 영취산, 부처님 계신 곳이 코앞에 다다른 지점에서 네 명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모습 때문이다. 손오공은 여전히 화를 참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원숭이’나 ‘필마온’이란 말을 들으면 여전히 “빠득빠득 이를 갈고 발끈 성을(『서유기』,10권, 51쪽) 낸다. 또 “마음 같아서는 그 강도들을 한 방에 쳐 죽이고 싶었으나 살상을 한다고 삼장법사에게 야단맞을까봐 두려워”(10권, 180쪽) 참는다. 저팔계는 더하다. 술 먹고 항아를 성희롱한 죄로 아래 세상으로 추방 받았으면서도, 14년이 흐른 후에도 같은 짓거리를 반복한다. 천축국에서 공주로 변신해 요괴짓을 하던 옥토끼의 주인인 태음성군이 항아선녀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걸 구경하던 저팔계가 “마음속에서 이는 욕정을 참을 수 없어”(위의 책, 10권, 134쪽) 뛰어올라 항아를 끌어안고 전부터 아는 사이니 놀러나 가자고 한다. 참, 놀랍다! 이렇게 변하지 않다니! 사오정 역시 그 모습이 그 모습이고, 스승 삼장도 여전하다. 툭하면 울고 요괴 앞에서 두려워 떤다. 

나는 내심 이 길고 긴 고난의 여정 끝에 변신해 있는 그들을 상정하고 있었던 거다. 십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길 위에서 시련을 겪었고, 그 길이 고행과 수행의 시간이었다면 처음과는 완전 다른 환골탈태(!)한 인간이 되어있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런 환상이라니~^^) 더구나 그 길은 다른 길도 아닌 불법승으로서 구도의 길이 아니었던가. 물론 긴 여정동안 조금씩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건 아니다. 특히 손오공의 변화는 놀랍기도 하다. 안하무인 무서울 게 없이 살생을 일삼던 손오공이 스승 삼장을 향한 애틋한 마음에 눈물을 쏟기 일쑤고, 때론 스승보다 더 깨달은 자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화를 참지 못하고 살생의 마음이 불쑥불쑥 일어난다. 나머지 멤버들도 별로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들이 그나마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모습은 미션을 완수하고 난 후이다. 삼장은 인간의 태를 벗고 가볍게 해탈했고 손오공과 사오정은 부처가 되었다. 부처는 깨달은 자란 뜻이니 존재의 해방이 되었단 소리다. 저팔계는 아직 “어리석은 마음이 남아 있고 여자에 대한 욕정도 사라지지 않아”(위의 책, 10권, 283쪽) 부처가 되지는 못했다. 저팔계는 자기만 부처가 못됐다고 투덜댔지만 자나 깨나 그를 괴롭히던 식욕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단지 ‘경전을 얻어 동녘 땅으로 전해주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의 구원과 깨달음으로 바로 연결된다는 이 설정이 처음엔 언뜻 납득되지 않았다. 각자의 깨달음은 각자의 몫이고, 스스로의 수행만이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지 않은가. 삼장법사야 원래 청정한 인물이니 말할 것이 없다. 그러나 손오공이나 저팔계, 사오정은 여전히 부족한 채로 보인다. ‘환골탈태’한 인간까진 아니어도 각자의 타고난 성정이나 탐·진·치에서 자유로워져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유기』는 이 멤버들 개개인의 변화에 주목하기 보다는 마지막 여든 한 번째 고난을 완수하는 것에 더 방점을 둔다. 미션 완수와 동시에 각 개인의 깨달음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션 완수를 위한 14년의 과정이 곧 그들 깨달음의 알파요 오메가, 곧 미션의 전부였다고 하겠다. 

내가 그들의 별반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 모습을 보고 잠시 당황한 건 내 무의식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었을까. 공부하다보면 가끔 조급해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맨날 그날이 그날인 속에서 문득 이러다가 어느 세월에 난 깨달음에 이르려나, 좀 더 자유로워지려나 싶을 때가 있다. 그렇다고 특정한 깨달음이나 어떤 경지를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나도 모르게 작동되는 어떤 무의식적인 조급함이다. 막연하게 어떤 도달해야할 경지를 상정하고 그에 이르기 위해 공부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조급한 마음이 나로 하여금 과거의 친구들에게 잠시의 시간을 내는 것조차 인색하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오로지 목적지만을 향해 갈 때 주변을 돌아보기 힘든 것처럼 말이다.

삼장밴드도 도달해야할 목표와 목적지가 있었다. 삼장법사도 조금이라도 빨리 가고자 하는 조급한 마음에 일찍 새벽에 나서다가 구덩이에 빠져 요괴에게 걸려들기도 한다. 가도 가도 끝이 없으니 한 숨 쉬기 다반사고 포기할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애초 이 삼년이면 되리라 여겼던 여정이 십사 년이 걸렸다. 삶이 애초 목적대로 맘먹은 대로 이루어지는 게 아님을 보여준다. 81고난이라는 총량은 하늘에서 정했을지언정 그걸 감당하는 몫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 지난한 여정에 인간의 마음은 얼마나 변화무쌍한가. 그 마음의 상징인 막강한 요괴들과 무수한 사건들이 등장했다. 그 어느 것도 외면하거나 회피할 수 없다. 그들에게 주어진 건 정면으로 마주치고 넘어 가야한다는 사실 뿐이다. 자신들과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일도 그들은 해야 할 일은 한다. 그래서 빨리 가고 싶은 마음과 달리 그들의 길은 한없이 늘어진다. 화염산에 막혀 갈 수 없을 때 저팔계가 딴 길로 돌아가자고 한다. 그러자 토지신이 꾀부릴 생각 하지 말라며, 딴 길로 돌아가는 건 바로 이단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수행하는 이가 할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여러분의 사부님이 지금 올바른 길[正路]에 앉아서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으니”(『서유기』, 6권, 35쪽) 정로를 가라는 말이다.

이들 구도의 길에서 정로란 무엇인가. 맞닥뜨리는 매번의 고난에 온 몸과 마음을 다해 돌파해 넘어가는 것! 그 고난 하나하나가 곧 미션 완수 자체라는 것 아닐까. 내 삶에서 일어난 사건 하나 마음 한 자락도 놓치지 않고 직면해 넘어가는 것. 그래서 어떤 마음의 걸림도 없이 가는 길. 이것이 바로 공부의 길, 아니 몸으로 하는 쿵푸[功夫]의 길이다.
 쿵푸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이 길의 전부, ‘착한 벗’
삼장밴드의 미션 제안자인 석가여래는 관음보살에게 그 길은 경전을 가지러 오는 ‘선하고 믿음 깊은 자’가 홀로 오기 어려운 길이라 했다. 그러니 “도중에 신통력이 큰 요마를 만나면 반드시 그에게 좋은 것을 배우기를 권하고, 경을 가지러 오는 사람의 제자로 삼도록 하고, 그가 부름에 복종하지 않으면 이 고리를 그의 머리에 씌워 (…) 주문을 외면 눈이 튀어나오고 머리는 아프고 이마가 빠개지는 고통을 줄 것인지라, 그를 불문에 귀의 시킬 수 있을 것”(위의 책, 1권, 241쪽)이라한다. 애초부터 이들 미션은 홀로갈 수 없는 길이었다. 머리가 빠개지는 고통을 주고서라도 제자로 삼아 함께 가야하는 길이다. 억지로 고통을 주어서라도 데리고 가야하는 길. 그 길은 이런 길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나를 좋은 친구로 삼음으로써, 늙어야 할 몸이면서도 늙음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 병들어야 할 몸이면서도 병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 죽어야 할 몸이면서도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 고뇌와 우수를 지닌 몸이면서도 고뇌와 우수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아함경』, 마스터니 후미오 지음, 이원섭 옮김, 현암사, 181쪽)


붓다는 자신을 ‘좋은 친구’로 삼아 생로병사와 번뇌로부터 자유로운 길을 가라고 한다. 그가 깨달은 그 길은 ‘연기의 원리’에 의해 이해되는 세상이다. “이것 있음에 말미암아[緣] 저것이 있고, 이것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이것 없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 멸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위의 책, 101쪽) 즉 모든 존재하는 것은 조건에 의해 발생하고 멸한다는 것! 조건이 변하면 관계도 변한다. 그래서 세상 어느 것도 변하지 않는 건 없다. 시시때때 찰나로 조건은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친구관계도 그때의 시공간의 인연 조건에 따라 맺어졌고, 혹은 이어져 오고 혹은 끊어지기도 했다. 친구라고 다 같은 친구가 아니듯이 유독 마음이 쓰이는 친구가 있다. 긴 세월 가깝게 지내온 관계일수록 그렇다. 함께 한 시간이 길수록 내겐 그 관계에 대한 고정된 상相이 형성되어 있다. 친구는 내게 이런 존재였고 나는 친구에게 저런 존재라는 상. 이렇게 내가 만든 상, 곧 아상我相에 붙들려 있는 것이 붓다가 말하는 번뇌[苦]이자 집착[集]이다. 내 맘이 편치 않았던 건 그 고정된 상과 지금의 내 실체와의 간극에서 오는 몸의 반응이 아니었을까. 지금 내 몸이 놓여있는 시공간의 조건은 이미 달라졌는데 아직 내 몸은 과거를 기억하고 그것을 유지하려는 오랜 습성 말이다.  

그래서 다시 나는 나의 공부란 어떤 것인가를 묻게 된다. 공부하면서 수없이 듣는 ‘사고의 전제를 바꾸라’는 말. 이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이 어떤 건지 몸적으로 실체적으로 다가오진 않는다. 그런데 어떤 사건에 맞닥뜨렸을 때 올라오는 감정이나 몸의 반응은 그에 대한 나의 전제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순간의 경험을 붙들어 들여다보지 못하고 그냥 흘려보내면서 살고 있었다. 그것을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집중해 들여다보고 사유하는 훈련이 공부이자 내 기존의 전제를 바꾸기 위한 수행이다.

삼장밴드가 길고 긴 시간동안 고난을 겪으며 넘어간 것도 바로 이런 수행의 과정 아닌가. 수많은 요괴, 자기 마음과의 싸움을 매번 집중해서 맞닥뜨리고 돌파하며 넘어가는 과정. ‘지금, 여기’의 내 몸과 마음의 현장은 인간만이 아니라, 하늘과 땅 사이의 온 삼라만상들이 얽혀있는 인연의 현장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지 않던가. 마음과 마음의 싸움은 곧 몸과 몸의 싸움이다. 기존의 습에 물든 마음과 새로운 길을 내려는 마음, 과거의 몸과 지금의 몸의 싸움. 그건 그야말로 매번 한바탕 피투성이의 전투이다. 그렇게 손오공 삼인방은 매번의 전투를 치르며 몸이 달라져가지 않았을까. 그저 책속에 코를 들이박고 앉아 몸 따로 머리 따로인 공부가 아니라, 몸으로 체득하는 쿵푸! 그렇게 조금씩 변하는 과정이 축적되고 축적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 미션이 완료됨과 동시에 다른 신체, 다른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겐 매번의 고난이 곧 미션 완료 자체였다. 매 고난의 순간과 마주치며 몸과 마음을 다해 걸어가는 것. 오로지 그것만이 이 길의 전부라는 걸 『서유기』는 말하고 있다. 이러한 쿵푸의 길, 그 길의 안내자이자 스승이자 동지가 바로 붓다가 말하는 ‘착한 벗’이다. 
 
아난다가 붓다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대덕이시여, 곰곰이 헤아려 보매, 착한 벗이 있고 착한 동지와 함께 있다는 것은 이 성스러운 길의 절반에 해당한다 생각됩니다. 이런 소견은 어떻겠습니까?”
“아난다여, 그것은 잘못이다 아난다여,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아난다여, 착한 벗이 있고 착한 동지와 함께 있다는 것은 이 성스러운 길의 전부이니라.” (『아함경』, 182-183쪽)

‘착한 벗’이 왜 이 길의 전부인가. ‘착한 벗’ 붓다가 말한다. “보라, 모든 것은 타고 있다.”(위의 책, 75쪽) 끊임없이 고정된 상을 만들며 번뇌의 불꽃을 지피고 있는 중생들. 그들은 그렇게 자기가 만든 상[我]에 집착하며 고통받고 있었다. 매 찰나 변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영원한 무언가를 갈망하며 욕망의 불구덩이에 빠져있었다. 붓다는 깨달았다. 그것은 중생들이 무명無明속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존재하는 이 세계의 실상이자 필연적인 법칙인 ‘연기緣起’의 원리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착한 벗’, 붓다는 그러한 무명無明의 어둠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알려준다. 그 길은 스스로 만드는 번뇌의 불구덩이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탐·진·치의 윤회를 반복하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되는 길이다. ‘착한 벗’은 그 가르침을 따라 길을 가려는 자들이다. ‘지금, 여기’의 연기 조건 속에서 나와 엮인 ‘착한 벗’! 그가 있어 나도 있고, 그가 없으면 나도 없다. 붓다가 말하는 연기의 원리가 이해되지 않았던 코티카라는 제자가 친구인 사리불에게 물었다. 사리불의 대답은 이렇다. “그 갈대 단은 서로 의지하고 있을 때는 서 있을 수가 있다. (…) 그러나 만약 두 단의 갈대에서 어느 하나를 치운다면 다른 갈대 단도 역시 넘어져야 할 것이다.”(위의 책, 110쪽) 삼장밴드가 가는 길은 ‘착한 벗’들이 가는 길이었고 서로에게 ‘착한 벗’이었다. 스승 삼장도 천하무적 손오공도, 멍텅구리 저팔계, 존재감 없는 사오정도, 결코 홀로 갈 수 없는 길. 그 길을 가며 때론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때론 가는 길의 훼방꾼이 되기도 하고, 발목을 붙드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의지해 길을 갔다. 하나가 넘어지면 같이 넘어지면서. 자기의 능력만큼 맡은 일을 해내며, 오직 끝까지 간다는 한 마음으로 길을 갔다. 나 역시 지금 이런 ‘착한 벗’들과 함께 공부, 아니 쿵푸의 길을 간다. 
 서유기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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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과거의 친구에게서 마음이 흔쾌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한 번을 만나더라도, 한 번의 전화를 하더라도 내 몸과 마음을 오롯이 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부터 그들은 나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나는 너와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분별심이 작동해 마음의 벽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흔쾌하게 마음에서 놓지도 못하고 과거의 인연을 붙들고 있었다. 매 순간 변하는 인연 조건 속에서 그들과 나의 관계도 마음도 변했다. 만남이 계속 이어지고 아니고는 중요하지 않다. 각자 자기의 길을 가는 것뿐이니. 문제는 마음을 어떻게 내느냐이다. 

삼장밴드는 매번의 요괴와의 마주침에 사활을 건다. 매번 다른 조건 속에서 만난 요괴들.  시간이 없다고, 다른 길을 가는 존재라고 회피하지 않는다. 그렇게 새로운 마주침과 사건을 만나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싸우고 다음으로 넘어간다. 요괴를 살리거나 죽이거나 주인이 거둬가거나 그건 사후 문제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어떤 미련도 남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요괴와 한바탕 싸운 후 반드시 불을 질러 다 태우고 길을 떠난다. “요괴의 씨를 말려야 나중에라도 뒤탈이 없다”(『서유기』, 9권, 263쪽)면서. 그렇게 어떤 마음의 여지도 남기지 말고 미련 없이 길을 가라는 의미이다. 이미 지나간 인연은 여기에 없기 때문이다. 그건 내 몸에 습으로, 상(相)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삼장일행이 그랬듯, 매 순간 맞닥뜨리는 인연과 사건에 온전히 집중해 돌파하고 넘어가는 것, 그 매번의 미션완수의 과정에서 몸은 변한다. 진정한 공부, 쿵푸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내 존재가 변할 때 관계도 변한다. 혹시 모른다. 어느 날 우리가 ‘착한 벗’이 되어 함께 쿵푸하게 될는지.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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