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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금성 주역] 가당찮은 미션이 남긴, 참으로 가당찮은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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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無心이 작성일18-10-06 20:19 조회1,59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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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당찮은 미션이 남긴, 참으로 가당찮은 꿈




                                                                     오창희(금요 대중지성)

주역 리라이팅. 이제 겨우 주역의 걸음마를 시작했는데 그걸 내 삶과 엮어 리라이팅하다니, 내겐 참 가당찮은 미션이다. 어차피 감당하기 어려운 글쓰기라면 고민할 것 없이 이번 학기에 배운 '계사전'의 안내에 따라 쉰 개의 산가지에 선택을 맡겨 보자. 그렇게 해서 뽑은 네 개의 괘가 지뢰복, 중화리, 중풍손, 뇌풍항이다. 


  ‘不遠復’의 비밀 


  지뢰복.png 地雷復(지뢰복)

  復, 亨. 出入无疾, 朋來无咎, 反復其道, 七日來復. 利有攸往.
  初九, 不遠復, 无祗悔, 元吉. 
  六二, 休復, 吉. 
  六三, 頻復, 厲, 无咎.
  六四, 中行, 獨復.
  六五, 敦復, 无悔.  
  上六, 迷復, 凶, 有災眚. 用行師, 終有大敗, 以其國, 君凶, 至于十年, 不克征.
  
지뢰복 괘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건 초구의 효사였다. 不遠復, 无祗悔, 元吉. 복괘가 어떤 상황인가. 소인이 판을 치던 산지박 괘에서 겨우 살아남은 양효 하나. 나약하기 그지없는 양효 하나로 잃어버린 도를 회복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아직은 소인의 기세가 등등한 세상에서 힘이 되어줄 벗들이 오기를 기다려 조심조심 나아가야 하는 때가 아닌가. 이 판국에 시작점부터 다짜고짜 ‘멀리 가지 않고 회복하면 후회에 이르지 않아 크게 길하다’니

회복한다는 건 문제가 있었음을 전제로 한다. 문제가 질병이라고 하자. 감기처럼 그냥 왔다 가는 거라면 대체로는 머지않아 회복될 것이고 그러면 후회에 이를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주역에서 그 정도의 문제가 회복됐다고 해서 크게 길하다고까지 할 리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꽤 심각한 병이 난 건데 시작부터 불원복이라고? 그게 가능하려면 처음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그게 그리 쉬운 일인가? 그럴 수만 있다면 누가 고난이 닥치는 걸 두려워하겠는가. 

스물한 살 봄 류머티즘이 발병했을 때, 처음엔 일시적인 문제겠지, 곧 낫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지금도 나와 함께 살고 있다. 처음 10년간 명약을 순례했다. 귀착점은 무릎 인공관절 수술이었고, 그 역시도 겨우 무릎 통증 하나를 해결했을 뿐 전신 관절의 통증은 그대로였고 변형은 계속되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休復-頻復-獨復-敦復 따위는 한가한 소리였다. 곧바로 迷復의 凶함에 빠졌고, 用行師 終有大敗요, 至于十年 不克征이었다. 말 그대로 백약이 무효! 길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회복의 초장부터 불원복 무지회를 말하다니! 

그러다 문득 불원복에 이어지는 ‘无祗悔’에 눈길이 갔다. ‘후회에 이르지 않는다면’ 길하다. 그것도 크게 길하단다. 후회에 이르지만 않는다면, 도로 회복하려는 마음을 품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든지 얼마나 극심한 고통을 겪었든지 상관없이 그건 ‘머지않아 회복하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 어떤 고난을 겪든, 어떤 잘못을 저지르든, 그 시간이 얼마나 오래든 후회로 남기지 않을 수 있다면, 도를 회복하는 계기로 삼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불원복이라는 것. 그렇다. ‘오직 낫고 싶다’는 열망이 ‘아프면서 살면 되지’라는 걸 넘어 ‘아파서 살았다’가 되는 순간, 나는 구도의 길로 들어섰고, 그와 동시에 지나간 그 시간들은 곧바로 불원복이 되는 기적을 경험했으니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을까. 나는 믿는다. 무지회가 불원복의 비결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무지회할 수 있는 힘은 구도의 여정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고, 구도의 길에서는 出入이 无疾이고, 朋來无咎라는 것을. 그 길을 가고 있는 한 反復其道하며 七日來復하리라는 것을. 그러니 이 길을 갈 밖에.

동파는 말한다. ‘양이 장차 사라질 때는 다섯 양효가 존재하더라도 부족하고, 양이 장차 자랄 시기에는 한 효로도 충분하’다고.


  ‘매직아이’가 필요해  


  noname01.png 重火離(중화리)  

  離, 利貞, 亨, 畜牝牛吉. 
  初九, 履錯然, 敬之, 无咎. 
  六二, 黃離, 元吉. 
  九三, 日昃之離, 不鼓缶而歌, 則大耋之嗟, 凶.
  九四, 突如其來如, 焚如, 死如, 棄如. 
  六五, 出涕沱若, 戚嗟若, 吉. 
  上九, 王用出征, 有嘉, 折首, 獲匪其醜, 无咎.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면’. 오랜 투병 생활 속에서 갖게 된 꿈이다. 통증만큼이나 힘들었던 게 치료법을 선택하는 거였다. 그럴 때면 생각나는 게 ‘매직아이’였다. 그냥 봐서는 뭐가 뭔지 모를 문양들이 어지럽게 그려져 있는데,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초점을 맞추면서 그림을 응시하면 거짓말처럼 혼란스런 상황이 사라지고 너무도 선명하게 어떤 문양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런 눈을 갖고 싶었다. 그런 통찰력이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라도 적어도 아주 나쁜 판단은 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후 병석에서 일어나 활동을 하게 되면서는 그런 꿈도 점차 희미해졌다. 그러다 다시 그런 바람을 가지게 된 것은 감이당에서 공부를 시작하고 나서이다. 

공동체라곤 혈연공동체 안에서 살아본 게 거의 전부인 나로서는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부대끼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옳다고 믿었던 행동윤리와 충돌하는 상황을 만나면 무엇이 옳은 것인지가 혼란스러웠고, 갈등을 중재하는 일을 맡을 때면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를 무엇을 기준으로 언제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럴 때마다 세상 이치를 꿰뚫어볼 수 있는 그런 눈을 갖고 싶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사소한 문제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는 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많은 문제들을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정이천은 문명을, “어떤 현실적인 일들의 이치구조를 분명하게 아는 것”으로 해석한다. “文明하면 이치를 완전하게 파악하여 어떤 상황이든 분명하게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화리 괘는 불이 둘 겹쳐 있어 밝음에 밝음을 더한 구조다. 그래서 文明을 상징한다고 본다. 불은 그 속성상 주변을 밝히려면 종이에 붙든 나무에 붙든 양초에 붙든 어딘가에 붙어야 한다. 그런데 正道에 붙어야 제대로 밝힐 수가 있다. 내가 붙으려는 게 지푸라기인지 장작인지 석탄인지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연후에는 정도에 순종하기를 유순함이 지극한 암소처럼 해야 한다. 正道가 몸에 축적되어 어떤 상황에서도 자연스레 꺼내 쓸 수 있는 덕으로 길러지도록 올바름을 굳게 지키며 꾸준히 암소처럼 가야 하는 것이다. 

물론 가다 보면 초구처럼, 빨리 타올라 밝히고 싶은 마음에 우와좌왕 ‘발자국이 어지러워’지기도 하고, 구사처럼, 밝음을 계승해야 할 본분을 망각하고 ‘날뛰다가’ 무리로부터 내침을 당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黃離면 元吉임을 믿고, 불경과 주역, 니체, 師友와 함께 걸어간다면 日昃之離의 황혼녘에 鼓缶而歌하는 상도의 즐거움을 누릴 수는 없더라도 大耋之嗟의 흉함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언젠가부터 가졌던 ‘죽음에 다다랐을 때, 지나온 삶이 참 허무하다는 생각은 안 들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이루어지는 셈이다. 이에 덧붙여 어려움에 처했을 때 당황하지 않고 상황의 이치를 분명하게 살필 수 있다면, 두려워하고 근심하여 出涕沱若, 戚嗟若할 수 있는 현명한 눈으로 문명을 이루겠다는 마음을 흔들림 없이 지켜 나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밝음이 지나쳐, '잘못을 범한 괴수를 죽이는'서 그치지 않고,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랐던 '무리들까지 낱낱이 벌하는' 인색함을 면할 수만 있다면. 지나친 결단력이 너그러움을 손상시키지만 않는다면. 
 
 
  ‘권력’을 행사하는 기술 

 
  중풍손.png 重風巽(중풍손)  

  巽, 小亨, 利有攸往, 利見大人.
  初六, 進退, 利武人之貞.
  九二, 巽在牀下, 用史巫紛若, 吉, 无咎.
  九三, 頻巽, 吝.
  六四, 悔亡, 田獲三品.
  九五, 貞吉, 悔亡, 无不利, 无初有終, 先庚三日, 後庚三日, 吉.   
  上九, 巽在牀下, 喪其資斧, 貞凶. 
  
동파는 중풍손 괘에서 공손함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초육과 육사에게는 실제로 권력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행사할 자리에 있지 않으니 합당한 자리에 있는 구이와 구오를 통해 쓰도록 하고, 구이와 구오더러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실질적인 힘이 초육과 육사에게 있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그 힘을 가져다 쓰는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하라고. 이렇게 해야 공손하게 처신한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공손함이란, 힘을 행사할 때 지녀야 할 태도와 지켜야 할 절차와 관련된 덕목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실제로 공동체 내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대부분이 공손하게 처신하지 못해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감이당 안에 ‘장자스쿨’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장년의 자립을 도모하는 프로그램이다. 감이당에서 밥그릇 수가 좀 되는 학인들이 공부하고 있다. 취지는 그들을 신체적으로든 지적으로든 한계치까지 밀어붙여 한 단계 도약을 하거나 다른 길을 가도록 하는 것이다. 장자스쿨의 담임을 맡고 있다 보니 각기 다른 자리, 다른 처지에서 서로 다른 힘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인다.
 
유약한 기질로 강한 자들 틈바구니에서 공손이 지나쳐 進退조차 결정하지 못하고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초육이 있는가 하면, 공손의 때에 공손함이 극에 달해 陽이 가진 결단력마저 잃어버린 상구도 있고, 공손할 수 없는 자질을 타고 났으나 공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공손을 흉내 내느라 얼굴을 찡그리고 사는 구삼도 있다. 그런가 하면 타고난 자질도 강한데다가 공부를 하겠다는 진실된 마음으로 중심까지 잡고 가는 구이가 있고, 강한 자들에 둘러싸인 상황을 알아차리고, 중정한 덕을 갖춘 구오를 스승으로 삼아 평온한 마음으로 아래로도 위로도 공손할 줄 아는 육사도 있다. 이러한 힘들이 충돌하고 합치고 흩어지며 만들어내는 다양한 상황들. 거기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적절하게 해결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중풍손 괘를 공부하다 보니 장자스쿨 담임으로서 겪은 최근의 일들을 되짚어보게 된다. 학업을 중단해야겠다는 결정을 하기까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물로 하소연하던 학인들의 모습, 미션의 과도함을 호소하는 학인들의 요구에 잠시 중심을 잃었던 나의 행동. 그 밑바닥에는 공통된 약점이 있었다. 갑자기 어떤 문제에 직면하면 생각보다 너무나 쉽게, 지금 내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방향을 잃어버린다는 약점. 중풍손 괘를 두고 보면 나는 구오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고 거기에 걸맞은 힘을 행사해야 한다. 구오는 공손의 때에 명령이 나오는 자리로 굳센 올바름을 지키면 길하다고 했다. 학인들은 오래도록 미션의 과부하를 호소해 오던 터였다. 그러던 차에 2학기를 마치고 조장 모임을 하는 자리에서 생각지도 않게 그 문제가 거론되자 나도 모르게 학인의 입장이 되어 그 말에 공감하고 어떻게 하면 부담을 덜어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그들과 함께 이런저런 대안들을 모색했다. 

선생님께 논의된 내용을 말씀드렸더니 간단하게 몇 말씀 하셨다. “어떻게 해도 좋다. 여기서 중단해도 좋고. 그러나 우리가 왜 그런 미션들을 주었는지를 놓쳐서는 안 된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난 장자스쿨의 담임이다. 그리고 미션은 신체적인 능력이든 지적 능력이든 한계치까지 밀어붙여 그것의 확장을 도모하겠다는, 더 이상 정체된 상태로 있게 하지 않겠다는 취지로 주어진 게 아니었나. 잠시 잠깐 중심을 잃으면 힘은 엉뚱한 방향으로 내달려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니 어찌 힘을 행사하는 기술을 익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것은 다양한 힘들이 충돌하는 사건들 속에서 배우는 수밖에 없다.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공동체 안에서.   


  恒하려면 일단 섞여라

 
  
뇌풍항.png 
雷風恒(뇌풍항) 

  恒, 亨, 无咎, 利貞, 利有攸往.
  初六, 浚恒, 貞凶, 无攸利.
  九二, 悔亡.
  九三, 不恒其德, 或承之羞, 貞吝.
  九四, 田无禽. 
  六五, 恒其德, 貞, 婦人吉, 夫子凶. 
  上六, 振恒, 凶.
  
정이천은 뇌풍항 괘의 恒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하나에 고정하여 집착하면 오래 지속할 수가 없으며’, ‘이 세상 만물 중에 움직이지 않고 오래 지속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항괘의 괘사에서 ‘가는 바를 둠이 이롭다’고 하였다. 변화하지 않고는 오래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동파는 오래 지속하고 싶으면 섞이라고 한다. 그 이유를 내가 이해한 대로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다양한 사람과 섞이고, 텍스트와 섞이고, 사건과 섞이고, 낯선 공간과 섞여야 성장이 가능하다. 성장이 기쁨을 가져오고, 기뻐함으로 해서 모든 허물이 사라진다. 그러고 나서야 올바를 수 있으며 올바르면 비로소 항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항괘에서는 잘 섞이지 못하는 효가 흉하다.  

초육은 나약하고 어리석은 자인지라 채 통하지도 않은 채 항심부터 바라니, 구삼 역시도 강한 자질로 강한 자리에 앉아 중을 얻지 못한 자라 강함만을 내세우니, 모두 섞이기가 어렵다. 그에 비해 구이 육오는 둘 다 중을 얻어 섞여야 한다는 형세를 파악할 수 있는 눈을 가졌다. 그래서 구이는 후회가 없고, 육오는 부인의 도리로는 올바름을 얻어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함께 공부하는 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깊이 통하지 않고, 잘 섞이지 않고서, 공동체에서 오래도록 함께 공부하기는 매우 어렵다.    

10년 간 투병을 하다가 어느 날 문득 병과 함께 살기로 마음먹은 이후 ‘건강’에 대한 생각도 함께 바뀌었다. ‘병이 없는 상태’에서 ‘병과 함께 살 수 있는 힘을 가진 상태’로. 그때부터 근 20년 동안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쉰 중반이 되어 내 몸을 탐구할 요량으로 감이당에 왔다. 이런 저런 책을 읽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건강에 대한 생각에도 변화가 생겼다. 니체의 ‘위대한 건강’에 매료되기도 했고, 뉴욕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겪은 신체의 변화를 통해 건강에 대한 또 다른 정의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어떤 시공간에든 주저 말고 자신을 던져 놓을 수 있는 용기가 바로 건강함이며, 신체적인 능력을 확장시키는 것 또한 건강이라고.

건강에 대한 생각이 변하면서 더 다양한 생각들을 건져 올리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고 그러한 욕구가 공부하는 즐거움을, 때로는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최근 들어 문학 작품 속 질병 탐구 세미나를 하면서는 질병에까지 관심의 영역이 넓어졌다. 이러한 변화들이 지루함을 없애 주었고 끊임없이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지금까지 이 장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건, 구이와 육오처럼 중심을 잡아주는 스승과 학인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에 더해 사람들과 섞이기 좋아하는 타고난 기질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오래도록 공부하고 싶다면 우선 섞이고 볼 일이다. 그리고 능동적으로 변화를 도모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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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당찮아 보이던 미션이 끝났다. 그래도 남은 건 있다. 어떤 어려움도 후회로 끝마치지 않고, 힘을 행사하는 기술을 터득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공부에 대한 비전은 꼭 붙들고, 어떤 것과도 주저함 없이 섞이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리하여 언제 어디서나 '당당'히, '적당'한 때를 알아, 상황에 '합당'하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을 하면서 즐겁게 공부하고 싶다는, 참으로 ‘가당찮은’ 바람이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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