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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vs 불교] 습감구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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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남 작성일19-01-30 16:13 조회1,3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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習坎求道하기

이 성 남 (금요 감이당대중지성)


4학기 에세이 미션은 3학기보다 강도가 더 높아졌다. 네 괘에서 여덟 괘로 늘어났고 불경과 횡단하는 글쓰기라야 한다. 내가 미션으로 받은 괘는 ‘天雷无妄, 山天大畜, 山雷頤, 澤風大過, 重水坎, 重火離, 澤山咸, 雷風恒’이다. 4학기 첫 주부터 매주 한 괘씩 ‘종일건건세미나카페’에 올린 글을 바탕으로 삼았다. 올 한해 나에게 육체적으로 힘들었던 사건이 허리디스크였다면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점은 아이와의 갈등이었다. 그래서 아이를 올해 고등학교에 보내면서 겪게 된 공부갈등을 주요스토리로 삼아 내가 미션으로 받은 여덟 괘 주역과 『금강경』을 등불삼아 '탐진치' 삼독에 빠진 나를 들여다보려고 한다.

감괘 구덩이에서 허우적대다!
아이와 갈등하게 된 계기는 이러하다. 중학과정까지 그림 그리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를 느긋하게 내버려두다가 고등학교 입학원서를 쓰면서 내 마음은 바뀌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던 아이가 진로를 그 쪽으로 가지 않겠다고 하자 공부를 시켜야겠다는 조급한 마음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빡세게 공부를 시키면 성적도 올라가겠거니 싶어 빡세게 경쟁하는 학교에 원서를 넣었고 원하던 J여고에 입학하게 되면서 우리의 갈등은 칡덩굴마냥 엉키고 엉켜 갔다. 나는 앞으로 뭘 먹고 살아야할지가 결정 나는(?) 고등학교 과정에서 아이가 코피 터지도록 공부와 붙어보기를 바랐다. 아이도 내말만 믿고 초반에는 열심히 하려고 했다. 그러나 입시경쟁에 몸을 최적화시킨 아이들이 다수인 학교의 첫 중간고사를 치르고 나서야 ‘여기가 바로 입시지옥이구나!’를 실감했다. 마치 坎卦의 초효처럼 ‘習坎, 入于坎窞, 凶’의 꼴이었다. 나는 ‘입시구렁텅이’에서 아이와 일 년 간 허우적대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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坎은 물이고 물은 어디든 흘러가지 멈춰서 축적하지 않는다. 그런데 坎에 익숙해져서 더 깊은 웅덩이로 들어간다면 물은 흐를 수가 없고 고인다. 고인 물은 바로 썩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흉하다고 한 것이다. 물구덩이가 험하다고 더 깊은 웅덩이로 들어가거나 ‘에라 모르겠다.’하는 심정으로 험한 구덩이에서 아예 자리 잡고 누워버린다면? 험난한 ‘입시구덩이’에서 끝내 헤어나지를 못할 것이다. 

그런데 험난함을 굳이 험난함이라고 여기지 않아도 된다고 주역은 말한다. 험난함에 익숙해지면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習坎’하면 된다. 習은 논어에서도 언급되었듯이 ‘學而時習知’의 習이다. 익히고 연마하는 부단한 노력의 과정이 ‘習’이다. 따라서 감은 험난함을 상징하는 말이니 험난함에 익숙해지라는 이 말에 나는 주역의 지혜가 있다고 본다. 물에 익숙해져서 물을 물이라 여기지 않으면 된다. 물에 익숙해지게 되면 우환을 함께 하는 벗도 얻게 된다. 내가 험난한 가운데 있지만, 육사효처럼 소박한 음식을 들창으로 내려는 마음을 내어 벗과 함께 이 우환을 견뎌낸다면 그것이 귀하다. 열하로 가는 길에서 아홉 번 강을 건너며 죽을 고비를 넘겼던 연암이 깨달았던 ‘일야구도하기’처럼 입시구덩이로 빠진 것은 맞지만 ‘습감구도하기’가 절실한 때이다. 

폭력은 폭력으로 반응한다
학습결과와 태도가 마음에 안든 나는 마뜩찮은 표정으로 애를 대하게 되었고 낯선 학교에 친구 하나 없이 배정받아 교우관계에 애를 먹는 아이에게 학습으로 ‘호시탐탐’ 볶아댔다. 스트레스를 너무 받은 아이는 손목자해와 귀에 온통 피어싱을 하고 집안 유리문을 발로 걷어차서 부수면서 자신의 의사를 피력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나는 또 학교성적에 집착했다. 입시과정을 몸 편하게 놀면서 회피하려는 아이가 밉게만 여겨졌고 성과를 못내는 아이가 한심했다. 

나는 도대체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나의 진심을 몰라주고 반항만 하는 아이가 싫었다. 나에게 완강하게 문을 닫아버린 아이가 괘씸하기만 했다. 나의 진심을 아이는 왜 폭력으로 여기고 아이는 폭력으로 반응했을까? 머리가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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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卦의 구사효에 ‘貞吉悔亡. 憧憧往來, 朋從爾思.’라는 구절이 있다. 올바른 도리로 감응할 때만 길하고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사로운 마음으로 다가간다면 동동거리며 애를 써도 너의 친구 몇몇만이 너의 생각을 따를 것이라고 한다. 바르게 교감하고 소통하는 어려움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준다. 함괘의 효사들이 왜 엄지발가락, 장딴지, 넓적다리, 등이나 광대뼈 뺨과 같은 구체적 신체부위로 감응하는 바를 반복적으로 말했는지 알겠다. 이유는 우리의 소통이 지엽적이기만 하다면 감응의 범위가 지극히 협소하고 그런 교감은 진정한 소통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소통하고 교감하려면 감동을 일으켜야 하는데 반드시 바른 도리로 다가가야 신체적 반응이 지엽적이지 않고 마음이 열리는 것이다. 아이에게 사사로운 마음으로 다가간 교감을 그동안 나는 소통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나는 아이의 미래를 걱정해준다는 어리석은 욕심으로 아이에게 폭력을 휘둘렀던 것이다. 폭력은 가깝고 감응은 너무 멀다는 말이 딱 맞다. 

<계사전>에서는 감응을 어떻게 얘기했을까?
“해가 가면 달이 오고 달이 가면 해가 오니, 해와 달이 서로 밀쳐서 밝음이 생겨난다. 추위가 가면 더위가 오고 더위가 가면 추위가 오니, 추위와 더위가 서로 밀쳐서 한 해가 이루어진다. 가는 것은 움츠려듦이고 오는 것은 펼쳐짐이니, 움츠려들고 펼쳐지는 것이 서로 감응하여 이로움이 생긴다.”(『계사전』 下편)
공자님이 이해하신 감응은 자연의 작용처럼 자연스러운 서로간의 반응인 것이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감동은 반응이 반드시 있고 서로 감응할 때 이로움 또한 생겨난다고 했다. 비워주고 상대를 펼치게 해주고. 계산 없이 미련 없이 자신의 자리를 비워줄 때 상대가 교감으로 이로움을 생산하는 것이다. 그럼 계산하는 사사로운 마음으로 다가가면 어떨까? 서로간의 이로움은 고사하고 반목으로 서로 웬수되기 십상이다.
 
경거망동의 대가는 혹독하다
나는 급기야 철학관을 찾아 아이의 새 이름을 받아오기까지 했다. 아이가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되면 치우친 기운이 조화롭게 되지 않을까라는 명분이었지만, 흑심은 딴 데 있었다. ‘정신 차리고 공부에 집중하는 아이’로 변신하라는 욕심이 더 컸다. 수 십 만원을 지불하고 지은 이름을 적은 종이는 장롱 속에 잠자고 있고 나의 노력과는 반대로 아이의 가을 중간고사 성적은 참담했다. 더 이상 공부로 애를 볶는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이는 얻을 것을 얻었기에 편해졌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한 번씩 불안한 마음이 올라왔다. 대학을 가는 게 자기 목표가 될 수 없다는 아이의 결정을 존중해주기로 했지만, 내 마음 속으로는 ‘쟤 저러다 루저로 살면 어쩌지?’라는 불안이 올라온 건 사실이었다. 노는 것만 좋아하는 애로 잘못 키웠나 자책이 들다가도 키우느라 애썼던 대가가 이런 것인지 분노가 올라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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无妄괘의 육삼효에 나의 경거망동을 꾸짖는 뼈아픈 말이 있다. ‘无妄之災, 或繫之牛 行人之得  邑人之災’라는 구절. 妄은 인간의 욕심으로 움직일 때 거짓된 행동을 일컫는다. 진실무망과 반대되는 말이다. 아이에 대한 나의 욕심 때문에 무망의 재앙을 나는 받고야 말았다. 소를 엉뚱한 사람이 몰고 가버리고 나는 소를 잃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철학관에 가서 이름을 받아오면 만사형통할 수 있으리라는 조작된 마음이 바로 망령된 마음이다. 무망괘의 육이효에 ‘밭을 갈지 않고 수확하고 밭을 묵혀두지도 않았는데 기름진 밭’이 되는 현상은 삿된 마음이 하나도 작용하지 않았을 때 얻어지는 결과이다. 다시 말해 ‘불경확 불치여’는 마땅한 이치를 따라 망령됨이 전혀 없을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지 흑심을 품고 나처럼 움직인다면 소를 잃고 후회하는 꼴만 당하기 마련이다. 
 
진정한 복을 누린다는 것 
아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전에는 진로는 아이가 결정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었다. 그런데 막상 아이가 입시생이 되니까 그렇지 않았다. 성공과 출세의 상이 남들과 다르지 않았고, 복을 누린다는 것은 소유와 증식을 벗어나서는 불안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홍복에만 집착해서다. ‘홍복’이란 기러기가 누리는 복이라는 뜻으로 세간에서 누리는 복을 말한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SKY 캐슬>의 부모들이 안달하는 복의 실체다. 사실 우리가 누릴 복은 청복도 있고 지복도 있는데 우리는 왜 홍복에만 그렇게 매달릴까? 사회에서 성공하고 출세하는 상을 내면화해서 그것만이 행복을 누리게 해준다는 성공도식에 집착해서다. 성적이 낮은 아이 또한 그 상이 깊이 새겨져 있다. 
 
 
“너 청소기가 무섭지? /나도 나보다 높은 위치의 사람들이 무서워.
 청소기가 네 친구들, /털 뭉치들을 뺏어가듯이,
 내 행복을 그들이 뺏어 갈 것만 같았어. / 만약에 만약에  
 나보다 큰 건물들이 무너지고 / 너보다 큰 세상이 뒤집어져
 모두 조각난다면, /부스러져 고운 가루만 남는다면/
 그렇게 된다면 / 내가 두려울 게 없을까?"
                                          (「고양이에게」중 일부, 황은비)

이 시에서 아이도 성적과 행복의 상관관계를 인정하고 있고 그래서 성적이 낮은 자신은 루저로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성공과 출세가 자신의 행복과 직결되고 있다는 점이 뼈아프다. 왜 우리는 소유와 증식으로만 부귀를 바라보고 있을까? 드라마 <SKY 캐슬>은 묻고 있다.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홍복의 삶이 과연 행복한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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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에서는 음과 양이 항상 서로를 기대어 함께 있을 때 ‘無咎’하다고 하는데,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과 매우 흡사한 괘가 있다. 양이 음을 무시하고 양이 교만하기가 하늘을 찌를 만큼 지나친 괘가 大過괘이다. 양이 지나치게 강성해서 집이 와르르 무너지기 일보직전이다. 본말이 약해서 기둥이 흔들리는 세상에서는 강성함만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 하찮아 보이는 곳, 허술해서 신경 쓰기 귀찮은 곳, 그곳부터 손을 잘 봐야한다. 

내부의 튼실함이 어디에서 오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바로 약한 곳에 의지해서이다. 그러니까 기둥이 흔들리는 세상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것은 정성스럽게 바닥에 깔아놓은 띠풀이다. 대과괘의 초효가 그렇게 공경하는 마음으로 양을 섬겼고 구이가 초효의 그 마음을 받들어서 용마루는 높이 솟아오를 수 있었다. 즉 띠풀의 정성스런 그 마음에 튼실한 용마루가 의지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띠풀의 가치’를 무시한다면 상효의 ‘過涉滅頂’의 지경에 이르러 흉하게 될 것이다. 성공도식의 相에 계속 집착하게 된다면 아이와 나의 관계 또한 더 심각한 수준으로 무너질 것이다.

탐심을 저지하는 것이 보시로 가는 길
주역의 大畜괘는 축적에 대한 담론이다. 우리 시대의 축적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증식하는 자산 축적에만 포인트를 둔다. 그 부가 어떻게 순환되어야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담론은 풍부하지 못하다. 그러나 주역의 대축괘는 한마디로 소유와 증식을 전복하는 담론이다. 즉 대축괘의 축적방식은 초반에는 위태롭게 여기고 그쳐 멈춰야 한다. 필요하다면 달리는 수레바퀴의 차축을 스스로 풀기도 한다. 축적하는 초기에는 쾌속 질주는 금물이다. 왜냐하면 축적의 초기에 진정으로 쌓아야 하는 것은 내면의 덕이기 때문이다. 만약 덕을 충분히 쌓지 않는다면 부귀를 얻었을 때 혼자서만 누리려는 탐심을 저지하려는 주역의 장치로 보인다. 강건하게 달려 나가려는 탐심이 올라올 때 스스로 ‘輿說輻’하라는 지혜가 놀랍다! 이렇게 덕을 충분히 쌓고 난 후라야 세상에 유용한 기술지를 배우라고 한다. 그러나 '日閑輿衞’할 때도 원칙은 있다. 도반들을 팽개치고 혼자 달려 나가는 것이 아니라 벗들과 함께 속도를 맞춰가며 달려가라고 한다. 

더 많이 축적하려면 경쟁에서 이겨야하는데 왜 대축괘에서는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걸까? 주역에서는 덕을 축적하고 세상에 필요한 기술지를 익혔다면 그 덕과 기술지를 나만을 위해 증식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소뿔’과 ‘날카로운 돼지어금니’로 비유되는 나의 단점들을 제지하는 것이 급선무다. 우리 시대에서는 성공하고 출세하면 어떻게 더 부유함과 쾌락을 누릴까에 골몰하는데, 주역에서는 축적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 덕을 어떻게 더 베풀 수 있을까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 혹여 덕에 해로움이 될 만한 ‘소뿔’이나 ‘날카로운 돼지어금니’를 미리 방비하는 지혜로움을 큰 축적으로 본 것이다. 소유와 증식으로만 가려는 강건함을 제지하는 것이 대축의 진정한 덕이요, 지혜로움이다. 그래서 대축괘의 상효에 이르면 하늘의 거리가 형통하다. 왜냐하면 대축괘의 극에 이르면 축적이 다 흩어져버려 도가 크게 행해졌기 때문이다. 대축의 가장 큰 덕은 흩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 도가 행해지는 이치이기 때문이다.   
 
『금강경』에서는 ‘진정한 복덕은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로 닦을 수 있다.’고 했다. 우리가 누리고자 하는 복과 전혀 다른 최고의 복덕은 바로 ‘보시’다. 베푸는 덕이다. 대축괘에서 큰 축적은 덕을 베풀고 흩어버리는 것이라고 했듯이, 『금강경』에서 말하는 ‘복덕’과 일맥상통한다.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란 내가 베풀었다는 인식조차 잊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보살은 법에 대해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한다. 이른바 형체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하며, 소리 향기 맛 감촉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한다.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이렇게 보시하며 상에 머물지 않는다. 왜 그런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금강경강의』, 남회근, 부키출판사, 제4품 중, 117쪽)

영험한 거북
주역의 頤卦는 ‘어떻게 기를 것인가’에 대한 담론이다. 이 괘에서는 키우고 배양할 때 스스로 기르는 도리를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괘사에 ‘觀頤 自求口實’이라는 구절이 있다. ‘길러줌을 관찰해서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한다.’라는 뜻이다. 頤卦의 기르는 도에서 말하는 바의 핵심은 결국 스스로가 저마다 살 길을 찾아가는 이치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頤卦의 초구효에는 특급비밀이 담겨 있다. 그 비밀은 모든 존재가 ‘신령한 거북’이라는  것이다. 마치 불교에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처럼. 그런데 왜 초효에서 ‘舍爾靈龜 觀我朶頤 凶.’이라고 했을까? 자신의 잠재력도 모르고 다른 이에게 먹을 것을 구하느라 입을 벌리고 있어 흉한 것이다. 스스로가 신령한 거북이라 남에게 먹여달라고 길러달라고 할 필요가 없는 존재인지도 모르는 무지함의 극치. 마치 이 학원 저 학원으로 떠돌아다녀야만 더 좋은 살 길을 찾을 것만 같은 요즘 아이들이나 학부모들 같다. 우리 아이나 나도 자신의 영험한 거북을 모르는 무지함 때문에 ‘턱을 벌리고’ 그렇게 괴롭게 살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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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아이의 습작노트를 보게 되었다. 대학이 목표가 아니라고 선언한 이후 마음이 편해졌는지 습작노트 이름도 ‘힐링 캠프’였다. 아이는 여기에서 숨을 쉬고 충전하고 있었다. 아이 나름대로 건강하게 자기 삶을 꾸려 가리라는 믿음이 생겼고 내가 작위적으로 아이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순리를 따라 길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 없어 타이틀,/ 방황대신 여행이라고 믿자고 / 똑같은 하루 / 배울 점이 어딨어? / 여기 와서 잠깐 쉬기로 해"라고 외치는 아이는 자기만의 ‘영험한 거북’을 찾아 나선 듯하다. 아이는 달리던 수레에서 내려 수레바퀴의 차축을 스스로 풀고 어떻게 사는 것이 맞는지 고민을 시작한 듯하다. 스스로 살 길을 찾아 나선 당당한 아이의 미래를 나는 어떤 마음으로 觀頤해야할까?
 
頤卦의 이효나 삼효처럼 ‘기름의 도’를 벗어나 내 욕심대로 기른다면 반드시 흉하다. 육사효처럼 끈기 있게 지켜봐 줘야한다. 육사효와 호응관계인 초효를 ‘虎視耽耽 其欲逐逐’해야 한다. 초효는 호랑이처럼 길들일 수 없을 정도로 양강하다. 하지만 초효는 ‘영험한 거북’을 품고 있다.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꺼내어 스스로 살 길을 찾아가도록 ‘기욕축축’ 해줘야 한다. 마치 『금강경』에서 부처가 중생을 제도하고도 제도한 중생이 하나도 없다고 한 그 마음과 같아야 한다. 보살의 마음 말이다. 그래서 소상전에서 육사효가 베푸는 덕이 빛난다고 한 것이다. 
 
또 부드러움이 중정함에 붙어 밝게 세상을 비춘 離卦의 덕을 배워야 한다. 강성함을 내세우거나 내 욕심대로 앞서가려하기 보다 離卦의 육오효처럼 ‘出涕沱若 戚嗟若’하는 자세 말이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지난날을 후회하고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고 저녁까지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이 나에게 절실하다. 암소의 유순하고 인내하는 덕 말이다. 그래야만 부모라는 이유로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윤회를 되풀이 하지 않을 것이다. 

恒心은 머무는 바가 없다!
입시구덩이에서 거의 일 년 간 허우적대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習坎求道하는 법을 물으며 이 글을 시작했다. 아이나 나는 아직 물에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더 깊은 구덩이로 내려가지는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구덩이에서 더 이상 폭력에 중독된 상태로 살기 싫다는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를 내 마음대로 조종하는 거짓된 마음을 버려야 진정한 복덕을 쌓는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우리 사회에서 주입시키는 복이 진정한 복인가를 탐구했을 때 그건 단지 소유와 증식의 관점에서만 이로울 뿐이었지 인간이 누리는 진정한 복덕으로 보자면 참으로 작고도 볼품없는 복이었다. 왜냐하면 세간의 복은 경쟁을 부추기고 남보다 앞서 가야하기 때문에 그 길은 참으로 외로울 것 같기 때문이다. 우환을 함께해도 벗이 있어야 멋진 인생이라고 아이가 스스로 영험한 거북을 찾아가는 인생길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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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뒤에 사물은 변하게 마련이다. 아직 궁에 이르지 않았음에도 나아가는 도가 바로 恒이다. 아이와 나의 관계가 궁한 지경에 이르러서야 아뿔싸! 나의 어리석음을 뉘우치며 어떻게 살아야할까를 고민했다. 이런 방식은 얼마나 수동적인가. 궁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음에도 비우고 상대를 펼치게 해주는 四時의 변화처럼 때에 맞게 능동적으로 변하는 도가 恒이다. 항심을 가진다는 것. 그것은 吉과 福만을 취해 거기에서 머무르려는 탐심이 없다. 凶과 禍가 와도 피하지 않는 우직함이 항심이다. 그래서 항은 항시 기운이 들락거리며 섞인다. 그 동력으로 변화하고 나아간다. 그러므로 아이와 나의 관계도 감응하되 머물지 않기를! 언제나 우레와 바람이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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