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 vs 불교] 오직 함께 할 뿐! 오직 즐길 뿐! > 횡단에세이

횡단에세이

홈 > 커뮤니티 > 횡단에세이

[주역 vs 불교] 오직 함께 할 뿐! 오직 즐길 뿐!

페이지 정보

작성자 화이트 작성일19-01-30 23:59 조회1,649회 댓글0건

본문




오직 함께할 뿐! 오직 즐길 뿐!

 



김지숙(금요 감이당 대중지성)




보살, ()의 시대의 출구

부처가 삼매에 든다.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땅은 진동한다. 그러자 부처의 육계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온 천하를 비춘다. 대중들이 탄성을 지르는 가운데 각 불국토에서 부처가 법을 설하고 있다.’ 법화경을 읽는 동안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대목이다. 여기에 있던 부처가 갑자기 저기에서도 보이다니, 도무지 내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대체 이런 허무맹랑하고도 판타지 같은 얘기를 왜 하는 것일까. 단지 부처의 신통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까.


틱낫한 스님에 따르면, 여기에는 두 가지 심오한 뜻이 숨어있다. 우선 불국토에서 설하는 부처는 부처의 화신들로서, 부처는 모든 곳에 존재하며, 수많은 화신을 통해 시방세계에 가르침을 펼치고 있다(틱낫한, 내 손 안에 부처의 손이 있네, 예담, 2014, 126) 것이다. 내 주변 어딘가에 부처가 있고, 불국토라는 것도 저 너머의 세계가 아니라 지금 여기라는 뜻이다. 또 하나는 이분법적 사고에 익숙해서 이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 겉모습에만 사로잡혀 역사적 차원의 인식에만 머물다 궁극적 차원의 인식에까지 이르지 못한 결과다. 따라서 삼매에 든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이분법적 사고의 작동을 멈추는 것의 다름이 아니다




SSI_20060927183439_V.jpg



요컨대 이것과 저것, 늙음과 젊음, 죽음과 탄생, 존재와 비존재, 소수와 다수, 가고 옴, 안과 밖, 너와 나 등등의 구별이 사라지는 궁극적 차원의 인식이 곧 깨달음이자 삼매다. 부처의 육계에서 나오는 빛이 바로 이것을 상징한다. 분열과 갈등을 해결하는 열쇠다. 프랑스 극작가인 앙토냉 아르토가 이를 갈며 끝장내겠다고 했던 신의 심판도 궁극적 차원의 인식을 가로막는 인간의 이분법적 사고였다. 주역에서는 이런 상황을 규()로 설명한다.


, 小事吉.

初九, 悔亡, 喪馬, 勿逐自復, 見惡人, 无咎

九二, 遇主于巷, 无咎.

六三, 見輿曳, 其牛掣, 其人天且劓, 无初有終

九四, 睽孤, 遇元夫, 交孚, 厲无咎.

六五, 悔亡, 厥宗噬膚, 往何咎?

上九, 睽孤, 見豕負塗, 載鬼一車, 先張之弧, 後說之弧, 匪寇, 婚媾,


()란 어긋나는 것이다. 불은 위로 올라가고 연못의 물은 아래로 흘러가니 만날 수가 없다. 한집안에 살던 둘째 딸과 셋째 딸이 다른 집으로 시집가는 모습이다. 원래 같은 것이었는데 뜻이 맞지 않아 갈라서는 것이다. 한마디로 내 편, 네 편이라는 이분법적 논리에 갇혀 있는 것. 그래서 만나려고 하면 뒤에서 수레를 잡아끌고, 앞에서는 나아가려는 소를 가로막는다. 잘못하다간 코가 베이고 머리가 깎일 수도 있다. 이 정도면 차라리 다행이다. 어긋남이 극한으로 가면 자기와 뜻이 다른 상대를 진흙을 뒤집어쓴 돼지로, 수레에 한가득히 실려 있는 귀신으로 착각하게 된다. 활을 들고 쏘아 죽일 수 있는 막다른 상황! 망상의 끝장이다.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아니다. 여기, 전체 판을 읽어내고 분열을 끝내는 존재, 바로 원부(元夫)라는 보살이 있다. 보살은 다름에서 같음을 통찰해내므로 자기를 미워하는 이들과도 기꺼이 함께 할 수 있다. 신하가 군주를 골목길에서 만나듯이 곡진한 마음으로 중생들과 호응한다. 자기를 낮추고 비울 수 있으니 그들의 살을 씹어 자신의 살과 합할 수 있다. 마침내 화살을 내려놓게 되고 음양이 합해져서 비가 내린다. 중생들을 궁극적 차원의 깨달음으로 이끌게 된다는 뜻이다. 괘사에서 길하다고 한 것은 이런 이유다. 그렇다. 보살은 규의 시대의 출구다.



(二乘)삼승(三乘)도 아닌 일승(一乘)으로

법화경의 가르침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보살이라는 중재자가 필요하다. 보살은 궁극적 차원을 인식할 수 있다는 믿음, 다시 말해 이분법을 해체할 수 있다는 자기 안의 불성을 믿고 수행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이끈다. 그런데 수행을 한다고 해서 모두가 보살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혼자서 깨달았다고,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다고 단언하는 독각이나 성문으로 불리는 소승의 수행자도 있었다. 부처님은 이들을 향해 손사래를 치며 절대로 가르침을 설하지 않겠다고 했다. 아니, 좀 거만하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하지 않은가. 자비를 베풀라는 부처님이 이래도 되는 것인가.


사실 홀로 수행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도 위험한 일이다. 자칫 잘못하다 자의식의 수렁으로 빠져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거나 스스로 깨달았다는 생각에 오만과 독단으로 빠지기가 쉽다. 게다가 완벽하게 깨닫는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천지가 창조되고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규의 시대가 아닌 적이 있었나. 사방팔방에 널려진 이분법적 그물망에 걸려들면서 늘 시험에 드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번뇌가 곧 깨달음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깨달음은 관계 속에서 부딪히고 깨지는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지, 혼자 수행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이야말로 자신을 깨닫게 해 주는 보살이다. 결국, 다른 사람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것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다시 말해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인간 본성의 발현이다. 사실 여기에는 모든 중생은 불성과 성불의 능력을 가지고 있(61)다는 믿음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부처가 볼 때 독각승이나 성문승들은 이런 믿음이 약한 존재들이다. 그러니 보살행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안주해 버린다. 한마디로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수행의 단계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시점이다.


利西南无所往其來復吉有攸往夙吉.

初六无咎.

九二田獲三狐得黃矢貞吉

六三負且乘致寇至貞吝

九四解而拇朋至斯孚.

六五君子維有解有孚于小人.

上六公用射隼于高墉之上獲之无不利.


막혔던 것이 풀리는 것, 수행의 어려움을 뚫고 깨달음에 이르는 것, 그것이 바로 해(). 내 안의 불성을 회복하는 것이니 길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풀림의 초기는 길하다고 하지 않고 무구라고 했다. 왜 그런 것일까.


그 이유는 처신하는 것에 따라 마땅함을 얻을 수도 아닐 수도 있어서다. 깨달았다고 하면서 보살행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은 마땅함이 아니다. 그런 기미가 보이면 빨리 차단하는 것이 이롭다. 교활하고 간사한 여우를 잡는 것이 바로 소승이라는 해로움을 제거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수행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만으로 가득 차 짐을 져야 할 위치인데도 수레를 타서 도둑을 부르게 된다. 이 고비를 잘 넘겨야 한다. 물론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사나운 새매가 여전히 밖으로 나가지 않고 담장 위에 있기 때문이다. 대승의 길을 가는 듯하다가도 소승의 길로 방향을 트는 경우는 언제나 있다. 반드시 새매를 쏘아 잡아서 혼란을 없애야 한다.



송골매-클립아트__k2953352.jpg



그렇담 대승의 길을 따르고자 할 때는 어떻게 할까. 소승의 유혹을 물리치고 엄지발가락을 풀어 없애 자신을 낮추어 기꺼이 중생 속으로 들어간다. 벗들이 몰려오고 그들로부터 신뢰를 얻는 것은 당연지사. 사실 부처님이 독각이나 성문에게 야박하게 군 것은 하나의 방편이었다. 그들도 모두 불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승(二乘), 삼승(三乘)도 아닌 일승(一乘)으로 귀결된다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믿음과 여유를 가지고 포용하라

부처님이 방편을 썼던 것처럼 보살은 육바라밀을 방편으로 삼아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해탈로 이끌고 마침내 성불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육바라밀은 보살의 길에 기본이 되는 수행(320)으로 행위의 문이라고 불린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여섯 가지가 그것이다. 우선 보시는 물질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사랑, 가르침 등등 비물질적인 것을 베푸는 행위 일체를 가리킨다. 그런데 보시에도 나름의 원칙이 있다.


, 康侯用錫馬蕃庶, 晝日三接

初六, 晉如摧如, 貞吉, 罔孚, 裕无咎.

六二, 晉如愁如, 貞吉, 受玆介福于其王母

六三, 衆允, 悔亡

九四, 晉如鼫鼠, 貞厲.

六五, 悔亡, 失得勿恤, 往吉, 无不利

上九, 晉其角, 維用伐邑, 厲吉, 无咎, 貞吝.


()은 밝은 해가 땅 위로 나와 더욱 성대해진 것이다. 밝은 지혜를 가진 현명한 사람이 나아가 세력이 커지고 있음을 뜻한다. 보살이 중생에게 가르침을 베푸는 일이 호응을 얻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성급하게 나아가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중생들로부터 믿음을 얻지 못해 후회가 생긴단다. 왜 그럴까.


법화경 4<신해품>에 나오는 부자 상인과 거렁뱅이의 우화가 그 답을 알려준다. 부자 상인은 자신의 집에 허드렛일를 구하러 온 거렁뱅이를 보자마자 잃어버린 아들임을 확신했다. 그래서 곧바로 사람을 시켜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려오려고 했다. 당연히 예쓰!”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러기는커녕 거렁뱅이는 기절하는 것이 아닌가. 죽을 줄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사실 이 우화는 누구나 자신 안에 불성이 있다는 것과 보시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 아직 깨달음에 대한 영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부자 상인은 자신의 방식이 잘못된 것을 알고 방법을 바꾸었다. 거렁뱅이를 하인으로 삼아 곁에 두면서 친아들처럼 대해주었다. 가르침을 주고 자신감을 북돋워 주며 그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기다렸다. 죽을 때가 다 되었는데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깨달음에 대한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았다는 것이다. 높은 지위를 탐하고 실득을 따지며 다람쥐처럼 행동하는 사람들과는 달랐다. 보시란 이런 것이다. 받는 자와 베푸는 자의 개념이 없고 숨을 쉬듯이 자연스럽게 베푸는 것(326쪽 재인용) 말이다. 그래서 보시에는 무주상보시밖에 없다.




포용2.png





두 번째 바라밀은 지계다. 지계란 계율을 지키는 것이다. 생각만해도 굉장한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런데 틱낫한 스님은 사랑과 이해가 있으면 일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지계바라밀을 행할 수 있(340)다고 말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계율이란 지금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각성하게 될 때 나올 수 있는 윤리다. 공동체의 이해와 사랑을 바탕으로 각자의 역할과 맡은 일을 성실히 하면 되는 것이다. 억지로 노력하고 말고가 없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어머니는 어머니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행동하면 된다. 그래서 지계의 출발은 가정이다.


家人利女貞

初九閑有家悔亡

六二无攸遂在中饋貞吉.

九三家人嗃嗃悔厲婦子嘻嘻終吝

六四富家大吉.

九五王假有家勿恤

上九有孚威如終吉.


가인(家人)의 괘상은 불에서 바람이 나오는 모습이다. 집안사람들의 도가 밝으면 밖이 소란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집안이 편안해야 국가의 안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원리다.


맏딸은 부모를 대신하는 역할이므로 집안의 법도를 만들어 동생들을 이끌어간다. 가정의 도가 출발하는 단계에서는 맏딸의 역할이 이렇게도 중요하다. 그럼 큰아들은 어떤가. 장남이랍시고 자기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큰누나가 만들어놓은 집안의 법도를 따를 줄 알아야 한다. 아랫사람을 존중하고 자기를 낮출 수 있는 장남이라야 집안의 부를 보유할 수 있다. 어머니는 뭔가를 이루겠다는 마음 없이 묵묵히 밥을 차리면서 가족들을 챙기면 그만이다. 아버지는 이런 부인을 진심으로 아끼고 존중하면서 자신의 수양에 힘쓸 뿐이다. 저절로 집안이 다스려지니 걱정할 것이 없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집안의 도가 어그러지려고 할 때, 이를테면 며느리와 손자가 희희낙락할 때 위엄을 갖추어 그것을 바로 잡는 역할을 한다. 평소에는 뒷짐지고 한발 물러나 있다.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믿음과 존중, 그리고 배려를 통해 공동체의 조화와 이익을 꾀하면서 각자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지계다. 요컨대, “지계바라밀을 실천한다는 것은 건전하게 생활하고 일상의 모든 행동 속에서 사랑과 배려, 이해심을 드러내는 것(338)이다.


인욕바라밀은 어떤가. 왠지 힘들 것 같다. 참고 절제해야 하니까. 하지만 이렇게 되면 인욕이 너무 협소해진다. 넓은 마음, 포용이라는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인 행위가 인욕이다.


明夷, 利艱貞.

初九, 明夷于飛, 垂其翼, 君子于行, 三日不食. 有攸往, 主人有言.

六二, 明夷, 夷于左股, 用拯馬壯, .

九三, 明夷于南狩, 得其大首, 不可疾貞

六四, 入于左腹, 獲明夷之心, 于出門庭

六五, 箕子之明夷, 利貞.

上六, 不明晦, 初登于天, 後入于地.


명이란 밝음이 손상되어 땅밑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다. 보살행을 펼치려는데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아 힘든 상황이다. 그래서 새의 날개가 드리워져 있으면 그 기미를 알고 즉시 떠나야 한다. 보살행을 멈춘다는 뜻이 아니다. 잠시 물러나 있는 것뿐이다. 기자처럼 밝음을 숨기면서 말이다. 그래서 왼쪽 다리가 손상되더라도 싸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빨리 바로잡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때를 기다리며 여유와 관대함으로 응하는 것, 그것이 인욕바라밀이다



포용.jpg



그런 점에서 상불경보살은 인욕바라밀의 전형이다. 사람들의 불성을 깨우쳐 주려고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조롱과 욕설뿐이었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을 다 포용하고 수용하면서 보살행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욕의 끝장은 뭐니 뭐니 해도 부루나였다. 거칠고 난폭한 사람들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가르침을 펼치겠다니 부처님도 놀랄 정도다. 사람들이 소리를 질러도, 모욕을 줘도, 막대기로 때려도 그들을 너그럽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죽이려고는 하지 않았기에. 죽이겠다고 하면 기꺼이 죽음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간사하게 순종하는 척하면서 왼쪽 배로 들어가 문 앞의 뜰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바르고 진실된 마음으로 모든 것을 포용했다. 500명의 재가 출가자들을 모아 승가를 세울 수 있었던 것도 다 인욕바라밀 덕분이었다.

 


벗과 함께 수행을

육바라밀의 네 번째는 정진이다. 이것도 오해하기 쉬운 방편 중의 하나다. 혹독하게 자기를 고통의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것으로 말이다. 온몸이 저리는데도 하루 종일 좌선을 하는 것, 다른 사람들이 말을 못 붙일 정도로 염불을 쉬지 않고 외우는 것 등을 정진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정진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小利貞.

初六遯尾勿用有攸往

六二執之用黃牛之革莫之勝說.

九三係遯有疾畜臣妾

九四好遯君子吉小人否

九五嘉遯貞吉

上九肥遯无不利.



()이란 물러남이다. 왜 물러나는 것일까. 소인들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분별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틱낫한 스님 말씀대로 부정의 씨앗이 싹트려고 해서다. 이럴 땐 망설이지 말고 바로 물러나는 것이 상책이다. 꼬리처럼 뒤쳐져서는 안 된다. 물론 황소의 가죽으로 잡아매는 것처럼 뜻을 굳건히 해야 한다. 사사로운 것에 얽매이고, 익숙한 것과 이별하지 못해 물러나지 못하면 위태롭고 곤란하다. 좋아하면서도 은둔할 수 있다면 길하고 아름답다

결국, 정진이란 끊임없이 자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이다. 그래서 벗이 중요하다. 내 안의 탐욕과 분노, 망상을 지적해주고 긍정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다. 편협한 시선에서 벗어나 마음의 여유를 찾게 해주는 친구야말로 수행의 필수 요소다.



보시.jpg




이번에는 선정바라밀이다. 선정은 삼매에 들어가기 위한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도 보았지만, 삼매란 궁극적 차원을 인식할 수 있는 의식의 상태다. 이런 의식에 머물지 못하는 것은 모든 존재들은 변하고 인연에 따라 생긴다는 것을 통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 利西南, 不利東北, 利見大人, 貞吉

初六, 往蹇, 來譽

六二, 王臣蹇蹇, 匪躬之故.

九三, 往蹇, 來反

六四, 往蹇, 來連

九五, 大蹇, 朋來

上六, 往蹇, 來碩, , 利見大人.


()은 밖으로는 위험한 함정, 안으로는 높은 장애물이 있어 아주 곤란한 상황이다. 이럴 땐 나아가지 말고 멈추어야 한다. 고난을 해결해 줄 대인을 만나는 것이 이롭다. 그렇다면 무엇이 위험한 장애인가. 무아(無我)와 무상(無常)을 통찰하지 못해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이 위험한 장애다. 하지만 상황이 그런 것이지, 자기의 잘못이 아니다. 말하자면, 눈에 병이 든 탓이다. 그 결과 보이는 것만이 전부이자 진실이라고 생각하게 되어 마음이 소란스러워진 것이다. 이런 마음의 상태로 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래서 가면 어렵고, 오면 영예가 있다. 마음이 되돌아오니 많은 사람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위험한 장애를 혼자 극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이 소란스러운 것을 스스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란스러운 마음을 읽어내고 그것을 알려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누구일까. 정진수행에서와 마찬가지로 친구다. 친구는 고난을 해결해 주는 대인이다. 하지만 친구가 그냥 와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 눈의 병을 꼭 고치겠다는 신념을 잃지 않고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을 때 친구도 오는 것이다. 큰 어려움에 처해 벗이 와서 고난이 해결된다는 것은 이런 의미다. 수행과 벗은 함께 간다.


마지막으로 지혜바라밀, 즉 반야바라밀이다. 사실 육바라밀을 구분해서 설명했지만 각 바라밀 안에는 다른 바라밀들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반야바라밀은 나머지 바라밀을 실현하기 위한 토대이자 열쇠(357).


大壯利貞

初九壯于趾征凶有孚

九二貞吉.

九三小人用壯君子用罔貞厲羝羊觸藩羸其角.

九四貞吉悔亡藩決不羸壯于大輿之輹

六五喪羊于易无悔.

上六羝羊觸藩不能退不能遂无攸利艱則吉.



대장(大壯)은 양()이 자라나서 강건한 힘으로 굳세게 움직이는 것이다. 정이천은 말한다. 이렇게 되면 올바르고 크게 되므로 천지의 실정을 볼 수 있다고. 천지의 실정이란 어떤 것일까. 너와 나의 구별이 없는 것, 상호 존재한다는 것, 말하자면 존재와 세계가 공()이라는 것이 천지의 실정이다. 이것을 완벽하게 이해할 때, 지혜바라밀을 수행할 수 있다.

헌데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지혜바라밀의 강성함만을 믿고 밀어붙이면 안 된다. 숫양이 울타리를 치받아 그 뿔이 곤궁하게 되는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언급했듯이, 바라밀을 행할 때는 성급하게 해서는 안 된다. 여유와 관대함으로 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말며, 빨리 바로 잡으려 하지 말라고 한 것을 기억하자. 울타리가 자연스럽게 터져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양들의 강성함을 온화하게 대하여 잃게 하듯이 지혜바라밀을 수행하면 후회가 없다.


이쯤에서 올 한해 내가 진행했던 세미나 시간을 돌아보게 된다. 솔직히 말하면, 세미나를 끌어가면서 이런저런 부딪힘으로 힘들었다. 다른 세미나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나가버린 사람, 자기 얘기만 줄구장창 하는 사람, 책을 전혀 읽어 오지 않는 사람, 개념만 늘어놓는 사람, 발제를 펑크내는 사람 등등 때문에


그런데 나는 세미나원에 대한 어떤 표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해주고, 그들과 잘 지내고, 책을 꼼꼼히 읽어오고, 발제를 따박따박 해오고, 삶과 연결해서 개념을 설명해주는 그런 사람 말이다. 이런 표상을 갖는다는 건 궁극적 차원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다. 세미나원이라고 해서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나는 스스로 분별하고 그들을 미워하면서 규()의 시간을 초래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저 함께 가는 것 말고는 없다. 인내하고 포용하면서 말이다. 나는 왜 공부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조금씩 조금씩 뭔가를 깨달아가고 그래서 내 삶이 좀 더 고귀해지고 있다는 확신이 들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것을 나눠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마땅한 일이다. 자신도 깨달으면서 남도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 공부의 전부다. 물론 그것 자체가 보살이 되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들이 잘하지 못한다고 타박할 것이 아니라 부자 상인이나 상불경 보살, 부루나가 그랬던 것처럼 인내하고 포용하면서 기다려줘야 한다. 다시 말해, 성급하게 몰아치지 않고 그들의 리듬과 속도를 존중해주는 지혜를 발휘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들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이것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그들이야말로 나의 보살이었다! 


사실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은 특별한 수행이라고 생각했다. 억지로 해야 한다는 강박이 들기도 했다.이렇게 되면 삶이 너무 피곤해지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약왕보살은 사바세계에서의 여행을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줄(196)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삶이나 수행을 이나 해야 할 숙제(197쪽)로 여기지 말고 그저 즐기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깨닫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육바라밀의 실천은 덤으로 따라온다는 것이다. 게다가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는 벗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겠는가. 그렇다. 삶이란 이런 것이다. '오직 함께 할 뿐!, 오직 즐길 뿐!'



벗이있다면.jpg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