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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vs 불교] 시작과 끝이 맞물린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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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흰나비 작성일19-01-31 11:31 조회2,8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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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과 끝이 맞물린 자리

김희진(금요대중지성)



새해를 맞이하는 올바른 자세

해넘이가 며칠 남지 않았다. 2019년엔 또 어떤 목표를 세우고 한 해를 살아가야 할지 생각하면서 지나간 2018년을 돌아보았다. 역시 바쁘고 정신없이 보낸 한 해다. 이룬 것도 없이 분주하게 무언가를 좇으며 보낸 건 아닌가 하는 헛헛한 마음이 든다. 그러고 보면 매년 연말마다 이런 반성을 반복한다. 공부를 하고 있으니 공부의 진전을 추구했고, 몸뚱이가 있으니 건강을 잘 챙기자고 다짐도 했고, 아들들과 보내는 시간을 질적으로나마 충실히 채우자고 마음먹었다. 계획은 소박했는데도 왜 그렇게 뭔가를 허둥지둥 쫓아가기 바빴을까? 이번 해넘이는 올 한해 배운 주역과 불경을 통해 돌아보면서 여느 때와는 다른 마음가짐을 가져보려 한다. 주역과 불경의 깊이에 기댄다면, 이런 반복되는 패턴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주역에서 택뢰수(澤雷隨)괘는 따름과 추종의 괘다. 뭔가 좋은 것을 따라가고, 추구하는 것이 수괘의 의미이니, 새해의 목표를 세우는 이때에 마땅히 살펴봄직하다. 내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정신없이 뭔가를 쫓아다녔다고 반성하긴 했지만, 사실 정신없는 것이 문제지, 따르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따름의 도는 크게 형통하다고 한다. (隨, 元亨, 利貞, 无咎) 정이천은 ‘군주가 선을 뒤따르고, 신하가 명령을 받들고, 배우는 사람이 마땅한 의리를 따르고, 일에 임해서는 어른을 따르는 것은 모두 뒤따름’(『정이천주역』, p.384)이라고 하였다. 누군가를 배우고, 어떤 목표를 추구하는 것도 모두가 뒤따름이다. 하지만 여기엔 허물이 생길 수 있는 여지도 있으니, 반드시 올바름을 얻은 후에야 형통할 수 있단다. 그렇다면 그 올바름을 얻어야만 중심을 잃고 정신없는 상태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허물을 짓지 않을 수 있는 올바른 윤리를 효에서 찾아보자. 여섯 효가 어지러이 움직이고 있다. 각자 무엇을 따를 것인가 분주히 찾고 있는 것인데, 각 효들은 멀리 있는 자기의 짝(應)과 옆에 친한 친구 사이에서 갈등을 하고, 사적인 정과 공적인 의리 사이에서도 갈등을 겪는다. 초구는 양효로서 움직임의 주체다. 따라가는 움직임을 주도하여 간다는 것은 따르는 수동의 행위를 능동적으로 선택하여 가는 것이다. ‘문 밖에서 교제하면 공이 있다’는 말은 사적인 사람들의 말을 따르지 말고, 정리에 이끌려 일을 처리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官有渝 貞吉 出門交 有功) 한편, 육이와 육삼은 마음이 어지럽다. 육이는 멀리 있는 자기의 짝, 정응(丈夫)을 버리고 바로 밑에 있는 초구(小子)를 따르기로 한다. 정도를 버리고 사사로운 욕망에 휘둘리는 것이다. 또 정응이 없는 육삼은 맨 아래의 小子(初九)와 바로 위의 丈夫(九四) 사이에서 갈등을 하다가 장부를 선택해 실리를 취한다. (繫丈夫, 失小子, 隨 有求得, 利居貞)   

구사는 제후로서 사람들이 따르는 자리다. 인기도 있고 공도 있는데, 여기에 안주하여 사람들의 따름을 기꺼워한다면 필경 군주의 의심을 사서 위험해질 것이다. 그래서 구사는 마음속에 깊은 신뢰를 가지고, 도에 자리하며, 명철하게 행동해야 한다.(有孚 在道 以明 何咎) 그렇다면 구오인 군주의 경우에는 무엇을 따를 것인가? 구오는 강한 자질과 높은 지위에 걸맞게 오직 善을 추구한다. (孚于嘉 吉) 아름다움이나 훌륭함에 마음을 단단히 잡아매고 가는 것이 바로 善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존위에 있는 자만이 능히 따를 수 있는 도다. 

隨괘의 세 양효는 공정함이나 도, 선과 같이 추상적 윤리를 따르는데 비해 음효들은 누구를 따를 지부터 결정하느라 번뇌에 휩싸이고, 누구든 따를 수밖에 없는 수동적 존재들이다. 어떤 한 해를 보내고 싶은지를 생각할 때, 우리는 능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양효처럼 멋지게 마음의 중심을 잡고 ‘도’를 향해 성장하는 한 해를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매해 연말마다 정신없었다는 반성이 반복되는 이유는 내 다짐이 말 그대로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이어서 나의 삶과는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양강(陽剛)하지도 않고, 존위의 자리에 가지도 않았으면서 음효의 덕보다는 양효의 덕만을 숭상한 것이 패착이었을 수 있다. 역은 때의 철학이다. 우리는 그 변화를 생활 속에서 모두 경험할 수밖에 없다. 역의 요체가 수시변역(隋時變易)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듯이 수괘의 단전에는 “때를 따르는 의리는 크도다!”(隋時之義 大矣哉!)라는 말이 나온다. 

분명 음약하게 구체적 대상을 따라야 할 때도 있고, 거기서 선택의 번민을 하게 되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잘못된 따름이 있어 허물이 생겨 후회한다고 해도, 그 ‘때’도 역시 지나가게 마련이다. 그러니 다른 마음가짐이 필요한 때가 왔을 때, 대범하게 심지를 곧추세우고 갈 수 있도록, 언제나 그 찰나찰나에 집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새해엔 수동과 능동을 넘어서는 따름의 도, 수시변역을 명심해야겠다. 자, 그렇다면 항상 변화하는 현장에 어떻게 밀착하고 집중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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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현장

때에 따라 변한다고 함은 사건마다 다른 입장에 처했음을 알고, 다른 태도를 취해야 함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변하는 외부 세계와 감응하지 못하고 하나의 가르침에, 하나의 태도에 붙들려 있기 일쑤다. 수시변역이 안 되는 건 ‘나’를 고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따름의 수괘 다음에 오는 고(蠱)괘는 이런 고착화에 따른 여러 가지 적폐를 처리하는 일을 맡는다. 나란히 있는 수괘와 고괘는 딱 붙어있는 도전괘의 관계지만 그 사이의 틈은 한없이 넓고 깊다. 거기엔 우리가 살면서 만들어내는 어려움이라는 것은 모두 단지 나를 고집하는 데에서 비롯될 뿐이라는 소박한(!) 진실이 담겨 있다.

불교에서는 우리의 존재가 실체 없는 ‘환幻’일 뿐이라고 말한다. ‘지·수·화·풍 사대四大가 실체가 없이 인연으로 화합하여 만들어진 모습’(『원각경』, p.110)으로서 육근六根도 마음도 있는듯 하지만 없는 것이다. 나는 그 ‘실체 없음’이라는 말과 허망하다는 말에 항상 의문을 품어왔다. 그 인연의 장 속에서 만들어졌으며, 육근을 가지고 있고, 마음이라는 것이 생겨난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을 삶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삶에 있으면서 삶 아닌 것을 보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하지만 수괘와 고괘 사이에서 쌓인 적폐는 ‘나’건 ‘추종의 대상’이건, 뭐든 변치 않는 것이 있다고 하는 집착이 만들어낸 인간사의 필연적 고질병이다. 그러니 64괘의 변화를 볼 수 있는 힘은 바로 세계가 실체 없이 오직 ‘변화’로만 이루어진 환이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삶 아닌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삶을 보는 힘이다. 변한다는 것은 결코 허망하지 않다. 그 변함을 알아야 찰나 찰나에 찾아오는 매일의 현장에 충실할 수가 있다.    

고괘는 일事이며 현장이다. 이 고괘의 일은 아버지 대에 쌓인 적폐를 처리하는 일을 맡은 아들의 모습이어서 크게 형통하고 큰 강을 건너면 이롭다고 한다.(元亨 利涉大川) 고괘의 일은 아버지 대부터 쌓인 일인 만큼 그 수습의 범위도 크다. 지금 물이 샌다면 물을 닦는 일은 수습이 아니다. 아마 아버지는 계속 그렇게 해왔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이 그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때가 오면, 아들은 물이 어디가 새는지, 왜 새는지, 언제부터 새는지 등을 알아야한다. 폐단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야 일을 해결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원인을 파악하고 미래의 일을 예측하여 일을 수습하는 것을 일러서 선갑삼일 후갑삼일(先甲三日 後甲三日)이라고 한다. 

충무로에 새로 지은 건물에 퓨전 호프집이 생겼었다. 인테리어도 깨끗하고 조용했건만 이상하게 파리만 날리다가 일 년여 만에 문을 닫았다. 다시 인테리어 공사를 하더니 새 점포가 들어왔는데 그것도 호프집이었다. 망하려고 작정을 한건가? 안타까웠다. 그런데 그 집은 영업을 시작하자마자 1,2주 만에 다시 공사에 들어갔다. 얼마 후에 내걸린 플랭카드를 보니 누수 공사를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 공사는 하루 이틀이 아니고 거의 한 달 동안 진행됐다. 먼저 있던 점포를 리모델링 하던 기간만큼 다시 공사를 한 것이다. 긴 시간 영업을 하지 못하는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누수의 원인을 근원적으로 밝혀 다시 재발하지 않도록 한 것으로, 큰 강을 건너는 것과 같은 큰 공사가 되었다. 그건 분명 선갑과 후갑을 고려한 것이다. 공사 기간 안에 ‘선갑의 원인’과 ‘후갑의 비전’이 있었다. 그 집은 지금 장사가 아주 잘 되니 공사는 형통했다.  

찰나에 집중하는 것과 과거·현재·미래를 모두 고려하는 고괘의 일은 일견 모순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시간이 차별이 없이 평등하다. 쉽게 말해서 하나다. 미래의 꿈을 향해 지금을 사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과거와 미래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돈을 벌고, 먹고사는 생활의 문제는 중요하다. 연일 자영업의 몰락이 기사화가 되어 이 점포의 공사가 눈에 더 들어왔나 보다. 삶의 현장 어디에서나 선갑과 후갑의 일처리를 통해 윤회를 끊어내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다. 공부, 건강, 집안일은 내가(自) 운영하는(營) 나의 현장이다. 내 삶의 모든 디테일한 현장에서 이 진리를 체험하는 새해를 만들어가보자.  


성공과 실패의 자리

일이 되어가고 번창하는 시기가 바야흐로 시작될 때, 성공을 예감하며 희망찬 미래를 꿈꾸지 말라. 주역에선 이때에 마땅히 실패의 씨앗이 자라날 때를 대비하라고 한다. 地澤臨괘는 변화에 아주 민감한 괘로서 끝없이 변화하는 주역의 원리를 통찰하고 있다. 고괘의 후갑삼일처럼 미래를 대비하지만, 그보다 더 멀리 가서 완전히 전세가 뒤바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8월이 되면 흉할 것(至于八月 有凶)이라는 말은, 복괘에서 일양이 생긴지 여덟달 만에 양이 한 바퀴를 돌고 소멸해, 좋은 시절 다 지나가고 밑에서 음이 두 개 생겨 흉조가 시작되는 때를 말한다. 양이 두 개 자라는 臨괘와 정 반대의 상황이다. 변화를 아는 자만이 변화에 대응할 수가 있다. 그러면 그것을 막을 수도 있을까?

임괘가 내다보고 있는 미래의 변화는 세상의 근본적인 이법理法으로서 달이 차면 기울고, 올라가면 내려오고, ‘성대한 잔칫상도 끝날 날이 있다’라는 『홍루몽』의 속담처럼 변치 않는 ‘변화의 원리’다. 기우는 달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이 불가항력적인 변화 앞에서 우리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길밖에 없는 것일까? 임괘는 우리에게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동파에 따르면 “한참 성장할 때 사라질 것을 고려하는 자는 일이 빠르게 진척되는 것을 경계한다.”고 했다. 이 경계심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그래서 임은 다가감이다. 효들은 대부분 주위의 상황에 감응하고 공감하며 신중히 일을 진척시켜 나간다. 지극하게 다가가고(至臨), 돈독하게 다가감(敦臨)은 아주 조심조심, 느릿느릿 다가가는 임괘의 모습이다.  


“군자의 도가 자라날 때 성인이 미리 경계해서 극한에 이르면 흉해질 수 있는 이치가 있다는 점을 알아 미리 근심하고 방비하게 한 것이니, 항상 꽉 찬 극한에 이르지 않는다면 흉함이 없을 것이다.”(『주역』정이천주해, p.423)


어떤 박물관에는 절반만 채워지면 뒤집어져 물을 쏟아내고 다시 받는 컵이 있다고 한다. 그 컵은 물이 차오를 때, 이 컵이 다 차서 넘치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중간 중간에 끊임없이 스스로 비워내는 것이다. 부지런히 비워내서 끝까지 채워지기를 무기한 연장시키기! 이것이 변화의 운명에 최선을 다해 대처하면서 사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진짜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꽉 차지도 않았는데 중간에 덜어내라고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따를 사람은 희귀하고 드물다. 아니,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지연시킬 수는 있어도 결국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음양의 이치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말로 易의 변화를 아는 힘은 쇠락과 실패의 시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지박괘는 산이 무너져서 땅에 붙어있는 모습이다. 철저히 무너져 내린 시기이며 단 하나 남은 희망의 끄트리마저 사라져버릴 위기에 놓인 상태다. 박괘의 스토리는 사람이 누워있는 침대의 다리부터 깎으며 올라와, 침대 프레임을 석석 깎아대다가 내 피부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묘사한 것으로 마치 공포영화처럼 소름이 끼친다. 깎으며 올라오는 것이 무엇인가? 음이다. 어둡고 음습한 음의 무리는 밝은 군주의 자리까지 꽉 차올라와 이제 종말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음은 누구일까? 음은 내 안의 절망과 공포다. 외부의 적은 나를 일으켜 세우지만 내 안의 적은 나를 주저앉힌다. 안주하거나 포기하거나 도망가거나... 모두 내 안의 소인이다. 사람이 돈 좀 벌더니 돼먹지 못하게 변했다던가, 어떤 자리에 가더니 거만해졌다던가, 한 번 실패하더니 완전 못쓰게 됐다던가 하는 말들은 특정 상황에서 그 사람 안에 있던 소인이 점점 커간 결과이다. “‘유함이 강함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유함이 자라서 강함이 변한다는 말이다”(『주역』 p.489) 그러니 진정 두려워할 것은 내 안의 소인이 아니겠는가. 

산지박괘의 맨 끝은 석과불식(碩果不食), 먹히지 않는 과일이다. 이 하나의 양효는 양효로서 작용을 전혀 하지 않는다. 국면 전환의 잠재성이라고는 하지만, 그저 이 국면이 완전히 음으로 뒤덮였음을 말하면서 음의 절정을, 결국은 그 끝을 말하고 있다. 끝나지 않는 잔칫상이 없듯이 끝나지 않는 전쟁도 없고, 끝나지 않는 슬픔도 없다. 그래서 나는 석과불식을 마지막까지도 죽지 않는 ‘양’의 기운이라거나, 또는 어떤 실체 있는 희망으로 여기지 않는다. ‘陽’이 희망이 아니라, 끝이 희망인 것이다. 끝은 변화를 예고한다. 실패 앞에서 ‘그래도 나는 무너지지 않는다’라는 오만함이 아니라, 철저히 무너지는 절망의 끝을 경험해보는 것이야말로 한 번 죽고 다시 태어나는 방법이 아닐까?


허공의 꽃과 허공

끝과 시작은 맞물려 있다. 산지박을 거꾸로 하면 맨 밑에서 하나의 양이 시작되는 地雷復괘가 된다. 그 양을 일양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것도 산지박의 상효처럼 양으로서의 작용을 하지 않는다. 그저 시작을 뜻하고 있다. 자라기 시작하는 국면은 양이 두 개가 된 임괘의 상황이다. 작용을 하지 않고 단지 끝과 시작만을 의미할 뿐 움직이지 않는 산지박과 지뢰복의 하나의 양효! 두 괘를 이어주는 이 양효는 64괘 변환의 고리이다. 이 고리는 하루의 시작과 끝이 맞물린 자시(子時)이자, 한 해의 시작과 끝이 맞물린 동지(冬至)다. 남회근 선생은 이때가 생명에너지가 다시 솟아나는 회복의 때로서 도교에선 복괘를 활자시(活子時)라 부른다고 한다. 어지럽게 맞물려 돌아가는 64괘의 변환이지만 그 바탕은 원래 고요하단다. 그렇다면 맞닿아 있는 산지박과 지뢰복 사이의 틈은 그 고요함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창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나는 동지(冬至)인 지금 2018년을 성찰하고 새해를 어떻게 보내겠다는 마음가짐을 다잡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이 글은 그 틈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변화를 가능케 하면서 변하지 않는 그 고요를 엿보려 애쓰는 작업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동짓날 밤 열두시, 이 때가 되면 조수가 중단된 것처럼 우리의 마음과 몸도 이상하리만큼 평온해집니다. ‘천심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구절에서 천심이란 생명 본래의 모습을 말합니다. 움직이지 않을 때, 바로 이때를 장악해야 합니다. 이때가 바로 일양이 막 움직이려 하는 때로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만물이 생기지 않은 때란 선종에서 말하는 소위 본래 아무것도 없는(本來無一物) 아주 조용한 경지입니다. (『주역계사강의』, 남회근, p.305)


‘변치 않는 것은 변한다는 사실뿐’이라는 말처럼 본래 64괘는 무한히 변화하는 세상의 이치다. 허나 진실은 부동의 고요함이다. 『원각경』에서도 세상의 모든 것이 幻이고 허공에 핀 꽃과 같지만 허공의 본성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다. “생사가 비록 움직이는 듯하더라도 단지 잘못된 견해로써 그 움직임을 보는 것이지, 그 움직임에는 움직이는 근본 성품이 없으니 그 움직임은 항상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원각경』, p.71)라는 것이다. 

새해에는 무엇이 되겠다, 이루겠다는 허망한 욕심을 쫓지 않기를 다짐했고, 오직 그때그때의 삶의 현장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러려면 우선 ‘나’라는 고집을 버리고 오직 변화하는 세계를 이해해야만 수시변역 할 수 있다. 그런데 주역은 수시변역의 세계를 펼쳐내면서도 그 근원은 움직임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64괘의 인과의 고리들도 모두 환인 것일까?

부처님은 이런 마음과 눈을 일러 병든 눈이라고 하신다. 허공의 꽃이 허공의 꽃임을 알지 못하고 그것이 환임을 의심하는 눈이다. 또 환인가 실체인가에 집착하는 이분법적인 분별심이 마음을 병들게 한다. 우리는 삶과 현장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이 싫어서 거부하고 의심을 품기 때문에 고요한 부동의 경지를 보지 못한다. 이렇기 때문에 결국 변화하는 삶을 보지 못하고 다시 삶에 집착하게 된다. 

실체 없이 오직 변화뿐인 세계를 보겠다고 하여도 나의 감각은 자꾸만 실체를 인식하고 실체를 찾으려한다. 그래서 세계를 의심하기 전에 나의 감각과 그것을 느끼는 ‘나’를 의심해야 한다. 허공의 꽃을 보는 눈은 누구의 것인가? 새해에는 실수를 덜하고자 욕심내는 나는 누구인가? ‘나’라는 집착에서 벗어나야 수시변역 할 수 있음에도 아직도 보는 눈이 있고 생각하는 견해가 있다는 것은 그 변화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은 무사야 무위야, 생각하지도 않고 하려하지도 않는다. 오직 적연부동한 가운데 천지와 감응할 뿐이다. (易 无思也, 无爲也,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 이 감응으로 일양이 자라나고, 일음이 움직인다. 그것이 삶의 국면국면이 되는 것이다. 

아... 어렵다. 부처님의 제자들도 오리무중이었는지 부처님께 병통을 벗어나는 방법을 묻자 부처님은 어리석은 중생들이 깨달음으로 갈 수 있는 점차방편을 설해주셨다. 부처님은 우리 중생의 몸이 이미 환이라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중생의 환심(幻心) 또한 환에 의지하여 멸하게”(p.89)될 수밖에 없다고 하신다. 환인 육체와 환인 현장이 수행의 자리이다. 결국 매일의 현장과 삶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적연부동의 본래면목을 알려면 다시금 64괘의 변화에 천착할 수밖에 없다. 선갑과 후갑의 원인과 비전, 지우팔월의 성장과 쇠락의 시간들 사이사이에 그 변화를 움직이는 도가 있을 것이다. 산지박괘와 지뢰복괘의 사이에 있는 멈춤의 순간은 모든 괘들과 효들이 변하는 가운데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새해의 다짐은 다시 ‘내가 서있는 자리에 충실하자’라는 평범한 말로 마무리해야겠다. 그러나 가능한 자주 멈춰서서 고요함을 느껴보리라. 들숨과 날숨 사이의 찰나의 멈춤을 깨달음의 수행처로 의지하여 갈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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