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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vs 불교] 작은 성취에 안주하지 않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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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상헌 작성일19-01-31 12:50 조회2,7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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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성취에 안주하지 않는 삶



안상헌(감이당 금요대중지성)


이제 더 이상 ‘친함’으로 뭘 하려하지 말자

바라던 뭔가가 이루어질듯 하면서도 답답한 현실! 최근 몇 년 간 내가 이랬다. 예전에 했던 공부와 일에 대해 실망스럽고, 함께 공부하고 일했던 사람들과도 소원해졌다. 예전에 하던 일과 공부의 과정과 성과가 크게 나쁘지 않았고, 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왜 이럴까 싶었다. 그렇다고 기분이 나쁘거나 불안하고 외롭고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만나서 뭘 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예전의 일들과 사람들은 ‘친함’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 서로가 마음을 함께 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그러니 작은 성과가 있었지만, 이것이 나를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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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比에 이은 小畜은 작은 것으로 길들임을 의미하는 괘이다. ‘小畜’이라는 것은 작은 것인 음으로 큰 것인 양을 길들여 키운다는 뜻으로, 키워서 모은 것이 작다.(『주역』, 정이천 주해/심의용 옮김, 글항아리, 240) ‘小畜’이란 여러 양이 음에 의해 제지당하고 길러지는 때다. 하나의 음이 다섯 양을 제지하여 묶어놓을 수는 있지만 견고하게 묶어놓을 수는 없으므로, 작은 것으로 길들여 키우는 것이 된다.(『주역』, 242) 길들이는 도가 크게 이루어질 수 없으니, 빽빽한 구름이 비를 내리지 못하는 것과 같다.(『주역』, 243) 
  
작은 길들임은 “비가 내려 조화를 이루어 제자리에서 멈춘 것으로 덕을 숭상하여 오래도록 쌓인 것이니, 부인이 올바름을 고집하면 위태롭다. 달이 거의 차니, 군자가 움직이면 흉하다.” (上九) 음이 양을 제지하여 길들이는 데 있어서는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멈추게 할 수 없지만, 조화를 이루었다면 멈추게 하니, 길들이는 도가 완성된 것이다.(『주역』, 253) 덕을 숭상하여 오래도록 쌓은 결과이다. 하지만 “부인이 올바름을 고집하면 위태롭다”는 말에서 ‘부인’은 음을 말한다. 음으로 양을 길들이고 유함으로 강함을 제지하는 도리는 위태롭고 어딘가에 안주하게 한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상에서도 부인의 덕(음)을 존중해야 하겠지만, 부인이 시키는 대로만 한다면 작은 길들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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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서 부처님의 제자들이 세존에게 고백하는 내용이 흥미롭다.  

이제, 저희들은 바야흐로 알았습니다. 세존께서는 부처님의 지혜를 나누어 주심에 있어서 인색치 않으심을, 그러나 저희들은 예부터 원래가 부처님의 아들이었건만, 단지 소법만을 즐겼기에 설하지 않은 것이지, 만약 저희들에게 진작 대승을 원하는 마음이 있었던들, 세존께서는 일찍이 저희들을 위하사 대승의 가르침을 설하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법화경』, 홍정식 역해, 동서문화사, 173)

‘그대들이 해야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대들이 있는 경지는 확실히 부처님 지혜에 가깝다. 그러나 잘 관찰하고, 잘 생각해 보라. 그대들이 얻은 것은 진실한 열반이 아니다.’(『법화경』, 188-189)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이 헛된 일은 아닐 것이다. 나의 삶에 있어서든, 주역에서든, 소법만을 추구한 소승 불교에서든 그간의 노력과 성과는 분명 내 삶의 자산이 될 것이다. 하지만 주역과 부처님은 명확하게 선을 긋는다. ‘지금까지 너희들의 작은 성취로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이 끝나지 않았으니, 절대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아직 너희들 세상의 이치가 완성되지 않았으며, 너희들이 얻은 것은 진실한 열반이 아니다.’ 그러니 ‘다시 길을 가야한다.’ 그렇다면 ‘작은 성과’, 혹은 ‘소법’이 아닌 길은 어떤 길일까? 
  
“사물은 제지하여 길들여진 후에 예禮가 있으므로 履괘로 받았다.”(「서괘전」) 예禮란 지금과는 다른 행위 질서를 말하는 것으로 읽어본다. 사물들이 모이면, 크고 작은 것의 구별과 높고 낮은 것의 차등과 아름답고 추한 것의 구분이 있으니, 이는 이치의 당연함이며, 예의 근본이며, 일정하게 이행되어야 할 도리이므로 履괘가 된다.(『주역』, 258) 군자는 履괘의 모습을 보고서 위와 아래를 분별하여 각각 그 본분에 합당하도록 만들어서 백성의 마음과 뜻을 안정시킨다.(『주역』, 262) 이괘는 처하지 않는 것이라 했으니(잡괘전), 나아가 행하는 뜻이다. 괘사, 「상전」에서 말했다. “평소의 도의에 따라 밟아 나아가는 것은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행하는 것이다.” 그 본래 지위에 편안해하면서 본분의 도리를 이행해 나아가는 사람은 구차하게 자신의 이익을 구하려고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뜻한 바를 이행할 뿐이다.(『주역』, 263) 자신이 뜻한 바를 이행함에 있어 마음이 그윽하게 안정된 사람은 올바르고 길할 것이지만, 뜻만 강하면 경거망동하여 본분을 이행함에 있어 도를 따르지 않을 것이니, 이는 무인이 대군이 된 것과 같다. 그러니 언제나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다 하더라도 강경하고 과감하게 이행하면, 올바르더라도 위태롭게 될 것이다.(九五) 옛 성인은 세상의 존귀한 지위에 자리하여, 밝은 지혜로 세상을 충분하게 비출 수 있었고 강직함으로 확고하게 결단할 수 있었으며 그 세력은 전권을 휘두를 수 있었지만, 세상의 모든 논의를 다 취합하지 않음이 없어서 비록 미천하고 무식한 사람의 시시한 말일지라도 반드시 취했다.(『주역』, 269) 뿐만 아니라, “이행한 바를 반성하여 미래의 조짐을 고찰하되, 그 주선周旋함이 완비되었다면 크게 길하다.”(上九) 사람의 길흉은 자신이 이행한 바에 달려 있으니, 선과 악의 많고 적음은 곧 길흉의 작고 큼이다.(『주역』, 270) 이는 보살들이 중생을 제도하려는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기원하는 서원誓願과 같다. 


큰 변화를 실행하되, 막힘을 경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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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禮를 실천하여 서로의 뜻이 소통된 후에 안정을 이루므로 태괘로 받았다.”(「서괘전」) 하늘과 땅 그리고 음과 양의 기운이 서로 교류하여 조화를 이루면 모든 것이 생겨나고 번성하게 되므로, 소통하여 안정된다.(『주역』, 274) 괘사, 「상전」에서 말했다. “하늘과 땅이 교류하는 것이 태괘의 모습이니, 군주는 이것을 본받아 천지의 도를 마름질하여 완성하고, 천지의 마땅함을 법제화하여 백성의 생활을 돕는다.” 하늘과 땅이 교류하고 음과 양이 조화하면 모든 것이 무성하게 자라나니, 세상이 안정되는 이유이다.(『주역』,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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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가 도가 막혀 정체된 때라면 군자는 물러나서 궁핍한 곳에 처하지만, 그 때가 도가 소통되는 때이므로 그 뜻이 정치권력으로 나아가려는 데에 있다. 그러나 군자의 나아감은 반드시 그 뜻을 같이하는 동류들과 함께 서로 이끌고 연대한 것이 마치 띠풀의 뿌리와 같아서 하나를 뽑으면 함께 연결되어서 일어난다.(初九) 함께 나아가되 “더러운 것을 포용하고, 맨몸으로 바다를 건너며, 먼 것을 버리지 않고, 파벌을 없애면, 중을 시행하는 것에 합치한다.”(九二) 군자의 나아감이란 ‘정치적 차이를 포용’하고, ‘습속을 타파’하며, ‘깊게 사고하고 멀리 바라보며’, ‘파벌을 없애는 것’이어야 한다. 소통과 안정의 때에 이 네 가지가 있다면, 중中을 시행하는 것에 합치될 것이다. “평평한 모든 것은 기울어지고 나아간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九三)는 것은 하늘과 땅이 교제하는 이치이다. 사람이 부유해서 그 부류가 따르는 것은 이익 때문이다. 그러나 부유하지 않는데도 따르는 것은 그 뜻이 같기 때문이다. 구삼효, 「상전」에서 말했다. “빠르게 아래로 내려가서, 부유하지 않아도 그 이웃으로 삼은 것은 실제의 자리를 잃었기 때문이고, 경계하지 않아도 믿음직스러운 것은 마음속에서 원한 것이다.” 경계하지 않았는데도 진실한 의도로 서로 함께하는 것은 그 마음이 원했기 때문이다. 이치 상 당연한 것이 하늘(天)이고, 사람들이 모두 동의하는 것이 그 때의 마땅함(時)이다. 그러니 군자 혹은 보살은 아래와 같은 세상의 이치를 관조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세상에 존재해 있는 일체의 것은 공(空)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전도되지도 않고, 동요하지도 않고, 물러서지도 않고, 바뀌지도 않으며, 허공과 같아서 고유의 성질이 없고, 말로도 입으로도 설법할 수 없는 것이며, 생긴 것도 나온 것도 일어난 것도 아니고, 이름도 모습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으며, 한량없고 끝도 없으며, 걸림도 막힘도 없으나, 다만 인연에 의해 존재해 있을 뿐이며, 판단의 전도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라고 관조해야 한다.”(『법화경』, 219) 

하지만 “태泰는 소통이지만 어떤 것이든 끝까지 소통을 유지할 수는 없으므로, 그 다음에 정체를 상징하는 비괘로 받았다.”(「서괘전」) 하늘과 땅이 서로 교류하고, 음과 양이 조화하여 펼쳐지면 소통된다. 그러나 하늘이 위에 처하고 땅이 아래에 처하면, 이는 하늘과 땅이 단절되어 서로 교류하며 소통하지 못하는 것이니, 정체된다. 하늘과 땅이 교류하지 않으면 만물이 생겨나지 않으니, 이것은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이므로 ‘비인匪人’이라 했다.(『주역』, 295) 군자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괘이다. 큰 것(군자의 도)는 줄어들고, 작은 것(소인의 도)은 자라난다. 정체되고 막힌 모습을 보고 군자는 그의 덕을 수렴하고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재앙과 환난을 피해야하지, 정치적 지위를 차지하여 영화를 누려서는 안 된다.(『주역』, 297) 정체의 때에 처해서 나아갈 수 있는 자는 소인이고, 군자는 도를 펼치면서도 재앙을 면할 뿐이다. 특히 ‘군자의 진퇴는 그 동지와 연대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初六) 다른 점이 있다면, 소통과 안정의 때에는 ‘함께 연대하여 나아가는 것’이 군자의 길함이라면, 정체의 때에는 ‘함께 연대하여 올바름을 지키는 것’이 군자의 길함이다. 구이(九二)효, 「상전」에서 말했다. “대인은 정체되지만 형통한 것은 소인의 무리와 어지럽게 섞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인이 정체의 때에 자신의 올바른 절도를 지켜서 소인의 무리와 혼잡하게 섞이지 않으니, 몸은 비록 막히고 정체되지만 도는 형통한 것이다.(『주역』, 301) 그러면 중정을 이룬 구오(九五)효에서 정체의 때를 그치게 하니, 길함이 있다. 하지만 이때에도 “망할까, 망할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뽕나무 뿌리 무더기에 묶어놓듯” 견고하고 안정된 방법, 즉 세상의 이치를 찾아야 한다. 


마음을 함께 하는 길동무를 만들자

나이 50이 넘어선 요즘 주역 공부가 참 깊게 다가온다. 지금까지 뭘 보고 있었나 싶다. 뭔가 공부하고 뭔가 하려고 했는데, 지금 돌아보니 제대로 된 건 하나도 없다. 동시에 그 동안의 공부는 마음을 함께하지 못했다는 반성이 밀려온다. 마음을 함께 하지 못했으니, 그 동안 나의 공부와 일은 당연히 꽉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다. 나에게 힘이 있다면 막힘은 새로운 길의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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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도 끝까지 정체되고 단절될 수 없으므로, 동지와의 연대를 상징하는 동인괘로 받았다.”(「서괘전」) 하늘과 땅이 교류하지 못하면 정체가 되지만, 위와 아래가 서로 함께 하면 동지들이 연대한다. 또 세상이 정체되고 단절되면 반드시 사람들이 함께 힘을 합쳐야 단절된 세상을 구제할 수 있다.(『주역』, 309) “동지와의 연대는 광야에서 이루면 형통하니, 큰 강을 건너는 것이 이롭고, 군자는 올바름을 굳게 지키는 것이 이롭다.”

보통 사람들의 연대는 사사로운 의도로 결합하니, 친한 사람끼리 어울리는 감정일 뿐이다. 그래서 반드시 광야에서 해야 하니, 친하고 가까운 사람들끼리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연대하지 않고 광야의 드넓은 곳에서 연대하는 것이다.(『주역』, 310) 소인은 오직 사사로운 의도를 가지고 행하며, 친한 사람들은 옳지 않더라도 연대하고 미워하는 사람은 옳더라도 배제하므로, 그 연대하는 바가 편파적으로 파벌을 이룰 뿐이니, 그 마음이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이다.(『주역』, 311) 동지들과 문을 나가서 연대하면 허물이 없지만(初九), 집안사람끼리 연대하면 인색하다(六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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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사전」에서 “군자의 도리는 정치권에 나아가건 물러나건, 침묵하건 말을 하건, 두 사람이 마음을 함께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도 자른다.”고 했다. ~~ 그 이치는 지극히 은미하므로, 성인이 그것을 찬미하여 “마음을 함께한 사람의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고 했으니, 그 말이 가진 의미가 매우 깊음을 말한 것이다. 구오효, 「상전」에서 말했다. “동지와의 연대에서 먼저 울부짖음은 진실하고 올바르기 때문이고, 큰 군사로 이겨야 서로 만나는 것은 결국에는 이길 수 있다는 말이다.” 먼저 울부짖는 이유는 마음이 진실하고 정성스러우며 이치가 올바르기 때문에, 분함과 절박함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주역』, 323) 예를 들면, 베트남 전쟁에서 버려진 탄피를 모아 수행할 때 쓸 종을 만든 코코넛 스님의 일화와 같은 것이다. 『법화경』에서 말하는 부처의 궁극적 차원이다.

“총알이여, 탄피여! 내 너희들을 하나로 모아 수행에 기여하도록 도왔느니. 전생에는 비록 살생을 했지만, 이번 생에서는 사람들에게 인류애와 사랑, 포용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라.”(『내손 안에 부처의 손이 있네』, 틱낫한 지음/김순미 옮김, 예담, 211)

또한 군자와 보살은 풍족한 소유의 풍성함을 향유하되, 하늘의 일(天工)을 대신하여 여러 종류를 다스리고 길러야 한다. 이는 마치 갖가지 몸으로 나타내어 곳곳에서 여러 중생들을 위해 가르침을 설하고 있는 보살과 같다.

“만약 성문의 모습으로 제도하는 것이 좋은 이에게는 성문의 모습으로 나타나 설법해주고, 벽지불의 모습으로 제도하는 것이 좋은 이에게는 벽지불의 모습으로 나타나 설법해 주고, 보살의 모습으로 구하는 것이 좋은 이에게는 보살의 모습으로 나타나 설법해 주고, 부처님의 모습으로 제도하는 것이 좋은 이에게는 부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들을 위해 설법하였다. 이와 같이 제도해야 할 상대에 따라 갖가지 모습을 나타냈다.”(『법화경』, 219)

보살과 군자는 이렇듯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면서도 해로움과는 내적으로 관련되지 않고(初九), 자신의 소임을 충실히 다할 수 있다.(九二) 이렇듯 군자와 보살은 “사람들에게 접근해 제도하기 위해서는 그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도 우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마음을 움직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보살의 네 번째 방편인 ‘동사’이다. 갱단에 가서는 다른 갱 조직원들과 똑같이 행동하고 말하면서 보살행을 한다. 감옥에 가서는 죄수의 모습을 하고 다른 죄수들에게 보살이 되어 준다.”(『내손 안에 부처의 손이 있네』, 239) 하지만 자신의 이해관계가 우선인 소인은 이것이 불가능하다. 오직 군자만이 대유의 일을 할 수 있다.(九三) 그렇지만 아무리 군자일지라도 지나치게 성대함을 경계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추고(九四), 믿음을 가지고 교류하며 위엄이 있어야 한다.(六五) 그러면 저절로 하늘이 도와주니, 길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上九) 「계사전」에서도 “하늘이 돕는 것은 천리를 따랐기 때문이고, 사람이 돕는 것은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대유의 삶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늘의 이치를 따르고, 사람에게 신뢰를 얻는 것이다. 대유의 삶을 살고 싶다면 하늘의 이치를 알아가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는가? 또 마음을 함께 할 친구가 있는가를 물어보면 될 것이다. 


겸손과 절제된 기쁨으로 군자의 윤리를 실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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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이란 고귀하고 높은 덕을 가지고 낮은 아래에 처하는 것이다. 가진 것이 풍족해지면, 허영과 오만에 이르러서는 안 되니, 반드시 겸손에 있어야 한다.(『주역』, 345) 군자는 뜻이 겸손에 있으니, 끝마침이 있다. 하지만 소인은 욕심이 있어서 반드시 다투고 자랑하여, 설령 힘써 겸손하려고 애를 써도 또한 안정되게 실천할 수 없고 오래도록 굳게 지킬 수도 없으니, 끝마침이 있을 수가 없다.(『주역』, 346) 또한 소리를 내는 겸손(六二 vs 上六)이라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얻은 것과 겸손함이 지극하나 높은 지위에 자리하여 겸손하려는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백성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다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울음은 세상을 밝히는 덕이 되지만,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는 사사로운 울음은 억지로라도 다스려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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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유大有괘와 겸謙괘, 두 개의 뜻을 이은 것이 예豫괘이다. 풍족하게 소유했는데도 겸손할 수 있다면, 사람들이 열광하고 즐겁다. 하지만 처음(初六)부터 그의 뜻과 생각이 오만하여 그 기쁨을 감당하지 못하고 소리로 드러나는 데에까지 이른 것은 흉하다. 그러니 그 기쁨을 하루가 지나지 않아 단호하게 행동하여 절제할 수 있어야 하며(六二), 의심을 받지 않게 하면 친구들이 모일 것이다.(九四) 겸손하면서 기미를 살피고 신뢰를 얻는 절제된 기쁨을 가진 사람만이 길동무를 만날 수 있고, 이들과 오래 함께 갈 수 있다. 그러나 이 기쁨 또한 변해야 한다.(上 六) 변하면 허물이 없겠지만, 변하지 않으면 어찌 오래갈 수 있겠는가?
  
군자와 보살은 작은 성취에 만족하지 않는다. 군자와 보살은 지금까지의 성취를 자산으로 삼아 세상의 새로운 예禮를 실천하는 길동무가 되려할 것이다. 비록 이들은 때론 형통하고 때론 막히겠지만, 언제나 겸손하고 쾌활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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