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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vs 불교] 책읽기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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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생각통 작성일19-01-31 13:48 조회2,7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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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에 대한 고찰 

성승현 (금요대중지성)


지난해 공부가 쉽지 않았다. 공부가 영 깊어지지 않는 것 같아 답답했다. 여러 가지 이유들을 생각해봤다. 금성 공부와 함께 새롭게 시작한 튜터와 강의는 빠듯했고, 처음 열게 된 세미나를 준비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부모님도 편찮으셨다. 내게 이렇게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난 적이 있었던가 싶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공부의 현장이지, 공부가 깊어지지 않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 고민의 결론이다. 그렇다면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간과한 것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감이당에서 보내는 1년이라는 시공간이 만들어주는 결과를 기대하기도 한다. 그래서 십 년 정도 공부하면 ‘공부한 것으로 밥값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 말은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그런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조직 내 개인이 있다고 했을 때, 조직만 움직여서는 안 된다. 개인도 끊임없이 운동해야 한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책읽기’다. ‘글쓰기’는 우리 모두의 화두이지만, 그것을 위해 가장 오랜 시간을 써야 하는 것은 책읽기다. 읽어야 쓰지 않겠는가.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나도 모르게 공부한 시간에 기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시간이 흐르는 것으로 공부가 된다고 착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이미 오래된 문제 
“이번에 주역 공부 안 했지?” 에세이 발표 때 들은 이야기다. ‘했는데…’ 분명 하긴 했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을 듣게 된 거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미션은 주역과 불교의 횡단 글쓰기였다. 나는 여기에 올해 내내 읽었던 임꺽정을 더해 에세이를 작성했다. 글을 쓸 때는 별 의심이 없었다. 주역과 불교 이야기가 앙꼬처럼 들어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발표가 끝나고, 나는 이 사건을 복기해야만 했다. 차라리 도반들의 말처럼 ‘도발을 한 것’이라면, ‘임꺽정에 취한 것’이라면 스스로도 납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평소와 같이 시간을 들여 글을 썼던 것이다. 

공부에 대한 의심을 해본 적이 없다.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고, 평생 공부하며 살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런 확신과 달리 나의 책 읽기 습관을 들여다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책을 열심히 읽지 않았던 것이다. 작심을 하고 책 읽기를 시작해도 끝까지 읽어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일정에 쫓겨, 다른 텍스트에 밀려서… 이유는 다양하다. 산만함도 한몫 했다. 동양고전, 서양고전, 대하소설, 역사 등 가지가지에 관심이 많아서 책을 검색하고, 수집하는 것에 정신이 팔리는 경우도 많았다. 일종의 돌려막기 같은 거다. 다른 일정에 밀렸다지만 그 다른 일정도 공부였고, 책에 대한 관심 또한 공부의 부분이다. 그러다보니, 공부에 관련된 ‘딴짓’으로 책을 못 읽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이렇게 나의 공부 습관에 서서히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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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괘(蠱卦)는 오래되어 안일해진 상태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고 있다. 오래된 그릇에 벌레가 꼬이듯, 병에 걸리거나 썩어가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게 아니다. 선갑삼일 후갑삼일(先甲三日 後甲三日)이라고, 폐단이 생기는 데에는 7일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까, 병이 깊어지고 벌레가 늘어나는 것을 감지하지 못해, 일이 터질 때까지 방관했다는 말이 된다. 

고괘에서는 단언하고 있다. 이러한 폐단에는 따로 치료약이 없어서 생활습관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고. 물론, 폐단이 생기는 데 한 주기가 소요된 만큼 이를 없애는 데도 한 주기가 소요된다. 그래서, 하루아침에 고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소동파는 ‘선갑삼일 후갑삼일’을 두고 ‘마치면 시작이 있다’고 풀이했는데, 이는 선조로부터 시작된, 그러니까 한 주기를 거쳐 폐단이 된 그 일을 멈춰야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지금까지의 책 읽는 패턴을 멈추지 않으면 그 어떤 시작도,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경고가 아니겠는가. 


올라타야 시작된다
책을 대할 때 나의 자세를 생각해봤다. 대부분은 책에 대해 큰 호감을 가진다. 읽다보면 흥미롭고 재미있다. 그런데, 끝까지 지속하지는 못한다. 왜? 책이 주장하는 가치를 따라가지 못해서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렇게 사유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그렇게 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거다. 주역과 불교를 보자. 나는 끊임없이 조심하라 말하고, 군자의 삶을 강조하는 ‘주역’과, 불성과 자비를 말하는 ‘불교’를 ‘아직은’ 내 역량으로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고정관념이 깨지지 않은 상태로 책을 읽는데 어떤 사유, 어떤 깨달음이 오겠는가. 

수괘(隨卦)에서는 시작할 때 필요한 덕목으로 ‘사유관념 바꾸기’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좋은 것을 택해서 따르고, 어진 이를 보면 그와 같이 되려고 해야 한다. 그런데, 문을 나서야(出門交) 가능하다. 지금 내가 갇혀있는 고정관념 안에서는 그 어떤 사유도 들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야 도량을 넓힐 수 있는 첫발걸음을 뗄 수 있게 된다. 

“그만두어라. 더 말하지 않겠노라. 어차피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진데, 더 이상 말해 무엇하겠느냐?” (『법화경』, 동서문화사, 154쪽) 

법화경 방편품에서 사리불이 부처에게 가르침을 달라고 청하는데, 부처가 거절한다. 부처의 지혜는 한량없이 깊기 때문에 깨닫기가 어렵다. 성문이나 독각의 수준에서도 부처의 심오한 통찰을 가늠할 수 없다. 그래서 부처가 거절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부처가 가르침에 분별을 두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로 논란이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 눈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욕망에 가득 찬 것처럼 보일 것이다. 어두운 눈으로, 밝지 않은 귀로 가르침을 받을 수 없는 이유다. 

부처는 사리불의 말을 두 번 거절하고, 세 번째 청에 이르자 가르침을 설한다. 그런데, 막상 부처가 법화경을 설하려고 하자 5천 명의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가 물러갔다. 큰 깨달음을 들을 준비가 되지 않은 자, 의심에 빠질 수 있기에 물러간 것이다. 이것은 마치, 가르침을 받지 않으려는 중생의 모습과 같지 않은가. 

그래서, 법화경에서 강조하는 것이 ‘승(乘)’의 개념이다. 법화경이 말하는 오직 한 가지 가르침은 ‘일불승(一佛乘)’이다. 부처가 되는 것, 그래서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먼저, 그 가르침 위에 올라타야 한다. 그래서 부처는 이승과 삼승의 방편을 쓴다. 올라타야 일불승으로 갈 수 있으니까. 나는 이 ‘올라탐’이 수괘의 ‘따름’과 같다고 생각한다. 올라타는 것이든 따르는 것이든, 중요한 것은 ‘신심’이다. 이 가르침에 대한 믿음에 없고서야 가르침을 받을 수 없다. 처음에는 신심이라는 것이 공부를 하다보면 생기는 믿음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다. 신심이 먼저다. 신심이 있어야 부처의 가르침을 만날 수 있고, 책의 내용과 만날 수 있다.   


‘리더’라는 마음가짐 
책이 주는 가르침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면, 이제 책을 읽어내는 리더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 어떻게 해야 책과 진하게 만날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바로 ‘임괘(臨卦)’와 ‘관괘(觀卦)’에 있다. 

일 년 내내 조별 토론 시간이 있었다. 우리 조는 토론을 꽤 진지하게 했는데, 문서 발제, 입발제 등 다양한 방식을 채택했다. 발제 순서가 되면 발제를 하기는 하는데, 늘 마음 한 구석이 찜찜했다.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공부가 부족한가 싶을 때에는 ‘시간을 더 확보해서’ 공부를 하기도 하고, 발제문을 준비해보기도 했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토론 시간은 내 부족함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임괘에서는 일을 도모하는 것을 사업이라 일컫는다. 책읽기를 하나의 사업이라고 생각해보자. 하나의 책을 골라 리더가 되어 이끌어나가는 것이다. 리더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앞서다 보니 리더가 되어 있는 경우가 있고, 구석구석 보살피며 따듯하게 이끄는 리더가 있고, 견고한 커리큘럼을 만들어 시스템으로 돌리는 리더도 있다. 임괘에서 주문하는 리더는 어떤 모습일까? 임괘에서는 ‘감응 능력’을 가장 중요하게 본다. 임괘에서는 아래에서 올라오는 두 개의 양을 ‘리더’의 자질을 가진 세력으로 본다. 하지만 자질만으로는 리더가 될 수 없다. 소양을 확보하기 위해, 두 개의 양에게 주어진 미션이 있는데, 바로 ‘감(感)’하는 것이다. 감응의 대상은 육사와 육오다. 이 둘은 높은 위치에서 올바른 도를 행하려는 세력이기에, 이들에게서 지혜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감응할 수 있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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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을 때 자주 쓰는 방식이 있다. 동관(童觀), 규관(闚觀) 하는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보는 것(童觀)은 소인의 도를 말하는 것이고, 틈으로 엿보는 것(闚觀)은 여자의 도를 말한다. 자신은 아직 텍스트를 읽어내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자세를 한결같이 유지하는 경우가 있고, 전체를 보지 않고 부분만 취합하여 읽는 버릇을 고수하기도 한다. 여기서 조금 나은 경우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반성하여 고치는(觀我生 進退) 정도다. 하지만, 리더라면 그 정도로 해서는 안 된다. 관아생(觀我生) 해야 한다. 관아생은 내가 감응해서 얻은 지혜를, 뭇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한다는 것이다. 내가 감응한 것을 전달하는 것만큼 강력한 가르침이 어디 있겠는가. 나와 텍스트, 나와 사람들… 이렇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 것이 ‘감응’이다. 

조별 토론 시간 때 느꼈던 내 마음을 다시 한번 들여다봤다. 나의 부족한 공부가 ‘토론에 민폐를 끼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것은 내가 더 잘하지 못해 아쉽다는 마음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관괘의 구삼처럼 조별토론 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반성하는 정도인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 반성으로는 텍스트와 만날 수 없다. 내가 이 텍스트와 진하게 만나고 싶다는 간절함, 텍스트와 만난 기쁨을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백비(白賁), 올바른 꾸밈의 도
책읽기와 서합괘는 호흡이 척척 맞는 짝궁같다. 책의 내용을 잘근잘근 씹어 소화를 시킨다는 의미 때문일 거다. 서합괘는 초구와 상구의 두 양이 턱이 되어 그 사이에 있는 것들을 씹어 화합하려는 형상이다. 씹어야 할 것이 육이처럼 유연하게 바꿀 수 있는 관념일 때도 있지만, 구사처럼 견고하고 강력한 생각이나 습관일 수도 있다. 이때 초구처럼 책읽기를 통해 생각의 전환을 경험하고 바뀌는 경우도 있지만, 상구처럼 공부를 아예 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상구는 목에 차꼬를 메어 귀가 없어진(何校滅耳) 상태다. 귀가 없어졌다는 것은 듣지 못한다는 뜻이다. 듣지 못한다는 것은 보지 못한다는 것이고, 말하지 못한다는 것과 같다. 어떤 사유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동파는 총명함을 틀어막은 것이니 아무것도 들리지 않기에 흉하다 했다. 그렇다. 책읽기가 무용해진 상태, 그러니 흉할 수밖에 없다. 어떤 것도 흡수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니, 이 지경까지 가면 공부는 불가능해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사실, 공부를 하다보면 막다른 골목에 서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더 나아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 조급한 마음이 들고,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떨어진다. 공부라는 것을 하는 이유는 자신이 싸우고 있는 것을 돌파하기 위해서다. 그것이 자의식이기도 하고, 욕망에 휘둘려 생긴 망상과 번뇌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망치를 들고 그것들을 부셔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들에 역습을 당하기도 하는데, 이때 공부의 길이 꽉 막히게 된다. 

서합괘 상구의 상태일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 답을 비괘(賁卦)에서 찾아보았다. 먼저, 성실한 마음을 되찾아야 한다. 비괘의 초구는 발을 꾸미니 수레를 버리고 걷는(賁其趾 舍車而徒)다. 현명한 자리에 위치해 강명한 덕을 지녔지만 초구의 자리에 있다. 육사와 호응함에도 옆에 있는 육이를 따른다면, 그것은 마땅한 의리가 아니며,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육이(수레)를 버리고 차라리 걷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장애를 만나게 된다. 뭔가를 알아가는 게 아니라, 점점 미궁에 빠지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럴 때 하는 것이 수레를 타는 것이다. 쉽게 해석한 책을 찾아보거나, 다른 사람의 생각을 카피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겠다. 공부가 되지 않는다고 편법을 쓰게 되면, 앞으로도 더 쉽고 편리하게 글을 읽을 방법만 찾게 되지 않겠는가. 수레를 타지 않고 다리의 힘만으로 묵묵히 걷는 것, 그것이 비괘 초구의 선택이다. 

어디를 향해서 걷는가? 근본으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상구는 꾸밈을 희게 하면 허물이 없다(白賁 无咎)고 했다. 꾸밈을 희게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저는 당신들을 깊이 존경합니다. 감히 경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모두 보살도를 실행하여 마침내 성불하시기 때문입니다”(같은 책, 249쪽)

법화경에 나오는 상불경보살의 말이다. 부처님의 정법이 멸한 뒤인 상법의 시대였는데, 이때에는 교만한 비구들이 큰 세력을 차지하고 있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출가를 한 자들이었음에도 교만함에 빠진 상태였던 것이다. 이때 상불경보살은 가르침이나 독송은 하지 않고, 오직 그들을 향해 ‘당신들은 성불할 것이다’라는 예배만을 했다. 

백비(白賁)는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혼돈에 빠진 때,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절망감에 빠져 있을 때에는, 본바탕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된다. 나는 주역과 불교 글쓰기를 하면서 어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올해 내내 공부했던 ‘임꺽정’을 가져왔다. 포부는 있었다. 주역을 설명하는 데 있어 문학이라는 툴을 이용하면 효과적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주역을 깊이 공부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적용할 방법은 아니었다. 이런 꾸밈을 상구에서는 경계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려운 때일수록 본질을 놓치지 말라는 ‘백비’를 강조한 것이다. ‘성불’하는 것 말고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없다는 상불경보살의 말이 그 답이 될 것이다. 


발심의 회복 
책읽기가 되지 않았던 것은 소인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소인의 마음이란 것은 다른 게 아니다. 시간에 기대어 성과를 바란 것, 가르침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것, 겸손함을 가장하여 약한 마음을 갖는 것 등이다. 이런 상황을 두고 ‘박괘(剝卦)’를 떠올릴 수 있다. 초구에서 발을 못 쓰게 되었고(剝牀以足), 이어서 침상의 뼈대(剝牀以辨), 침상(剝牀以膚)까지 못 쓰게 되었다. ‘바름’이 사라져 흉한 상황이다. 발이며, 뼈대며, 침상은 무엇인가. 기본이 되어 지탱해주던 공부들일 것이다. 이때 붙잡아야 할 것이 ‘석과불식(碩果不食)’이다. 깎이고 깎인 상태에서, 큰 과일 하나가 살아남은 것이다. 이때 소인이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과일을 허겁지겁 먹어치울 것이다. 하지만 군자라면, 수레를 얻는다. 수레에 싣고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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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회복을 상징하는 복괘(復卦)로 이어질 수 있다. 복괘는 차가운 동토 안에 숨겨진 씨앗을 의미한다. 박괘에서 남긴 큰 과일을 씨앗 삼아 나아가는 것이다. 복괘 초구에서 소동파는 ‘반드시 떠남을 맛본 뒤에 돌아감이 있고, 잃음을 맛본 뒤에 얻음이 있다. 떠남이 없으면 돌아옴이 없고, 잃음이 없으면 얻음도 없다’(소식, 『동파역전』, 54쪽)고 했다. 과일을 씨앗 삼는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니다. 실패와 번뇌를 경험으로 삼아 발심하는 것이다. 공부를 처음 시작하는 새내기와 같은 마음이 아니라, 매너리즘에 빠진 공부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실패마저도 공부로 삼을 수 있는 그런 마음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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