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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vs 불교] 앎을 열망하는 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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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남주 작성일19-01-31 18:32 조회2,4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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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을 열망하는 힘으로


안남주(금요대중지성)


아무리 해도 모르겠다. 이렇게 꽉 막힌 것은 생전 처음인 것 같다. 일 년 동안 공부 했던 주역과 대승불교의 만남에서 아무것도 엮어지지 않는 이 공허함이 뭐지? 택화혁에서 화산려까지의 괘를 가지고 글을 쓴다는 것은 4학기가 시작되면서 주어진 미션이었는데 왜 이렇게 헤매는 걸까? 어떻게든 되겠지~ 이런 나태함이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이다. 조급해지지 않는 연습을 한다는 명분에 함몰된 자아의식의 실체. 나태함의 극치를 보는 순간이다. 이렇게 꽉 막힌 경험을 하지 않았던 건 그동안 얼마나 수동적으로 살았는지에 대한 결과물이다. 막히면 돌아가는 물의 도(道). 상선약수(上善若水)의 묘미를 생활에 적용한 합리화였다. 때는 늦었다. 그래도 건너야할 강이다. 여기서 멈추면 도루아미타불이 된다. 십지경 오리지널 화엄경의 제1지 환희지(歡喜地)에서 보살이 진리를 체득한 즐거움에 넘쳐 있는 경지에서부터 출발 해보고 싶다. 진리를 이미 체험한 경지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이 부끄럽지만 앎을 열망하기에 도전장을 내밀어 본다.

   들은 것을 밝게 사유하되, 탐착의 마음이 없고,
   마음으로 이득과 공양을 탐하지 않고, 보리심을 지녀,
   앎을 열망하고 힘을 갖춘 청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초월의 길을 구하고 환상과 기만을 떠납니다. 

   말한 대로 그대로 행하되 진실한 말에 입각하고, 
   승리자의 가문을 더럽히지 않고 단지 깨달음을 배우며, 
   세속의 일을 떠나지만, 세상의 이익을 기뻐하며
   밝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높은 지평을 향해 힘씁니다. 

   이처럼 진리를 기뻐하여 덕성과 의취를 갖추고
   승리자를 친견하기 위해 서원을 발원하고,
   정법을 지니고 선인들에게 다가가서 
   최상의 실천 행을 위해 서원을 발원합니다. 
                               (<십지경>, 환희지, p372)


변혁의 道, 화합의 장

    革 已日 乃孚 元亨 利貞 悔亡
    初九 鞏用黃牛之革                六二 已日乃革之 征吉 無咎  
    九三 征凶 貞厲 革言三就 有孚  九四 悔亡 有孚 改命吉 
    九五 大人虎變 未占有孚          上六 君子豹變 小人革面 征凶 居貞吉

혁(革)이란 변혁(變革)이다. 서로 어긋나게 나아가면 대립하고 분열할 뿐이다. 구삼효는 변혁하는 데에 조급하게 행동하는 자다. 이런 방식으로 행하면 흉함이 있다. 자신이 확신을 가질 수 있고, 대중이 신뢰하는 것이 이와 같다면 변혁할 수 있다. 스스로의 강명한 능력만을 믿지 말고 공론을 살피고 고찰하여 세 번 모두 합치에 이른 뒤에 개혁하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 모르면서도 질문을 할 줄 몰랐던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공부의 흐름을 모르면서도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은 타인에게 민폐가 될까봐 조심스러웠던 것이 제일 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더 깊이 들여다보니 답을 찾지 못하면서 질문만 하는 것은 서로에게 에너지 소진이 크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렇게 쉬운 것도 모르냐는 비웃음을 받는 것도 한 몫하고 있었다. 귀찮게 하는 것 같다는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스스로 해결하다 안 될 때 질문하면 답을 얻을 수 있지만, 무턱대고 묻기만 하고 행동이 바뀌지 않는 사람을 가끔 만나다보니 왜 물었느냐고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행동이 바뀌지 않는 사람에게 질책을 하기 일쑤였다. 그런 일이 지속되다 보니 관계가 불편해 지는 걸 느꼈다. 정화스님께서 무유법은 자신이 한 것을 ‘했다’는 생색을 내지 않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렇게 간단한 걸 여러 가지 생각으로 얽혀서 혼자서 고민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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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이란 옛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묻지 못하는 나를 변화 시키는 방법으로 학인들에게 많이 물으면서 진행했다. 8개의 괘를 모두 풀고 소이경전으로 결론을 내야 하는지, 아니면 8개의 괘의 중간 중간에 소이경전으로 결론을 내야 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바쁜 와중에도 답을 주는 학인들 덕분에 한 숨 돌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고 위안을 삼는다. 군자가 되기 위한 공부가 주역인데 나의 묻지 못하는 단점을 이렇게 해석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상육효는 군자는 표범으로 변하는 것이고 소인은 얼굴만 고치니, 정범하여 가면 흉하고 올바름에 거하면 길하다고 했다. 소인은 어리석고 어두워 고치기 어려운 자이니, 마음으로 변화할 수는 없지만 또한 얼굴을 고쳐 윗사람의 가르침과 명령을 따르는 척한다. 헉! 소인의 모습으로 비춰진 순간이다. 어리석다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스스로를 학대하는 자포(自暴)와 스스로를 포기하는 자기(自棄)다. 글쓰기를 포기 할까 마음먹었던 나를 비추었다. 주역이 이렇게 예리함을 보여주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부끄러움이 따라온다.
  
   鼎 元吉亨
   初六 鼎顚趾 利出否 得妾 以其子 無咎            九二 鼎有實 我仇有疾 不我能卽 吉 
   九三  鼎耳革 其行塞 雉膏不食 芳雨 虧悔終吉  九四 鼎折足 覆公餗 其形渥 凶  
   六五 鼎黃耳 金鉉 利貞                            上九 鼎玉鉉 大吉 無不利

사물을 변혁하는 것은 가마솥만 한 것이 없다고 한다. 날것을 변화시켜서 익힌 것으로 만들고, 딱딱한 것을 변화시켜 부드러운 것으로 만들며, 물과 불은 함께 처할 수 없는 것인데 서로 합쳐서 작용하도록 만들어도 서로 해를 끼치지 않게 할 수 있다. 가마솥이라는 요리 기구는 살아 있는 사람이 매우 절실하게 의지하는 것이다. 

감이당의 공동체가 가마솥의 형상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실생활에서 밥을 먹는 공부를 하는 곳. 감이당에서 공부 하게 되었을 때 식당의 시스템을 볼 수 있었다. 청년공자들의 매니저 역할도 눈에 들어 왔고 스스럼없이 음식을 만들어 내는 봉사자들의 움직임도 내 것, 네 것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청년에서부터 중, 장년층의 어울림이 자연스러운 화합의 장이었다. 간혹 절간에 가면 나이 지긋하신 공양주 보살님의 진두지휘 하에 움직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청년 공자의 모습은 보기 힘들었다.

'구삼효는 재능을 가지고서 불행히도 기회를 얻지 못했으므로 부족하다는 후회가 있지만, 양강한 덕을 가지고 있고 윗사람이 총명하고 아랫사람이 겸손하며 올바르기 때문에 결국에는 서로 만나게 되어 길하다.'(정이천주역p1002) 지금의 청년들이 겪는 백수생활을 감이당에서는 자립하는 청년 공자들의 활약으로 보인다. 도올 선생님이 20여년 전에 주역 계사전 강의를 하실 때 지금의 학인들이 시간이 흐르고 각자의 자리에서 공부한 것들이 펼쳐 질 때가 있다고 했던 것처럼, 지금 감이당에서 공부하는 청년공자들이 각자의 재능을 펼칠 때가 있으리라. 십지품의 제3지 발광지(發光地)에 딱 맞춤인 것 같다. 

스스로 궁극적인 깨달음에 도달하고자 노력하는 동시에 세상 사람들을 깨닫게 하고자 힘쓰는 이타의 두 가지 실천을 거듭하다 보면 자기 속으로부터 지혜의 광명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통찰력의 道, 고요함으로 

   豊 亨 王假之 勿憂 宜日中 
   初九 遇其配主 雖旬無咎 往有尙        六二 豊其蔀 日中見斗 往得疑疾 有孚發若 吉 
   九三 豐其沛 日中見沬 折其右肱 無咎  九四 豐其蔀 日中見斗 遇其夷主 吉  
   六五 來章有慶譽 吉                     上六 豐其屋 蔀其家 闚其戶 闃其無人 三歲不覿 凶 

돌아가야 할 곳을 얻은 자는 반드시 성대해지므로, 풍요를 상징하는 풍괘로 받았다. 풍(豊)이란 성대하다는 뜻이다. 밝은 지혜로써 움직이고, 움직이되 현명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풍요에 이르는 도다. 밝음이 세상을 충분히 비출 수 있고, 움직임이 충분히 형통 할 수 있는 뒤에야 성대한 풍요를 이룬다. 그런데 타인과 협력하는데 힘이 대등한 경우에는 자신을 낮추어 서로 구하고, 힘을 합쳐서 일을 처리해야 한단다. 만약 자신을 우선시하는 사사로운 이득을 마음에 품고 타인을 이용하려는 뜻이 있다면 환난이 이르게 되므로, 대등함이 과도하면 재앙이 있다고 했다. 대등한 관계인데 자신의 이득을 먼저 내세우면 이는 대등함이 과도한 것이다. 한편에서 이기려고 한다면, 협동할 수 없다. 

육오효는 음유한 자질로 존귀한 지위에 자리하고 진(震)괘가 상징하는 진동하는 형체라서, 마음을 비우고 겸손하게 이치에 따라 현자에게 자신을 낮추는 모습이 없으니, 아래에 현자가 많더라도 또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얼마 전에 본 ‘국가 부도의 날’이 생각난다. 대한민국 최고의 경제호황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때, 엄청난 경제 위기가 닥칠 것을 예견한 한국은행 통화정책 팀장을 비롯한 비공개 대책팀에서 벌어지는 위기대응 방식에서의 대립을 보는 것 같다. 작은 공장의 사장이자 평범한 가장이 아무것도 모르고 백화점과의 어음 거래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행복을 꿈꾸는 그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질문을 한다. 속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유아인의 대사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속지 않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상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세상을 제대로 보려면 사람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처해 있는 상황들을 읽어 낼 줄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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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사람을 볼 줄 모르는 내게 제일 어려운 일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사람공부 한다고 현장을 뛰어 다녔다. 무조건 믿고 따라가다 보니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것을 알았다. 내 편견이 만들어 낸 결과에 대해 가슴을 쓸어 내렸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나의 부족함을 자책하면서 더 큰 구덩이에 빠져 들고 있었다. 객관이 아닌 주관이 얼마나 무서운지 배우는 시간이었다. 본래대로 돌아가고 싶어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삶의 얽힌 실타래는 엉켜버리는 아이러니. 그 와중에 지인의 조언이 결정타였다. “가만히 있으라고, 그러면 보이는 게 있을 거라고.” 열망하는 게 강해서 열심히 뛰다가 체력이 떨어져서 쓰러져 죽게 생겼다. 그런데 가만히 있으라니... 물이라도 마셔서 힘을 내야 다시 뛸 수 있다고 발버둥 치다가 알게 되었다. 힘이 잔뜩 들어 간 상태의 내 모습은 대등함이 과도해서 엉망이 되었다는 것을. 마음을 비우고 나를 낮추어서 삶에 대한 열망의 힘을 빼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보이기 시작했다. 부족함을 채우려는 마음은 어찌되었던 사회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에 합류하지 못한 열등감이었고, 대등하고 싶은 욕망이었다는 것을. 제6지 꿰뚫음의 지평 현전지(現前地)에서 커다란 전환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세계의 모든 일이 다 자기 마음에서 말미암는다는 자각이다. 삼계에 속한 것은 어떠한 것이든 마음뿐(唯心)이다. 깨어 있는 마음, 그래서 본질을 볼 줄 아는 지혜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艮其背 不獲其身 行其庭 不見其人 無咎.
   初六 艮其趾 無咎 利永貞         六二 艮其腓 不拯其隨 其心不快 
   九三  艮其限 列其夤 厲薰心     六四 艮其身 無咎. 
   六五  艮其輔 言有序 悔亡        上九 敦艮吉

간(艮)이란 멈춤이다. 움직임과 고요함은 상호 작인(作因)이 되어, 움직이면 고요함이 있고, 고요하면 움직임이 있다. 그런데 멈춤을 의미하는 지(止)라는 글자를 쓰지 않은 이유는 간에는 산의 모습이 있으니, 안정되고 중후하며 견고하고 진실한 뜻이 있어서, 멈춤이라는 지(止)라는 글자만으로는 그 의미를 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이천주역p1029) 멈춤의 도는 오직 때에 달려 있으니, 나아가고 멈추며 움직이고 고요할 때에 적합하게 하지 않으면 허망한 것이다. 성인이 세상을 순조롭게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일을 만들고 법도를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각각 그 합당한 위치에 멈추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멈춤이란 그침이다. 

제7지 온거님의 지평 원행지(遠行地)에서는 보살행의 완성을 향하는 일에서 잠시라도 떠나는 일이 없다. 한 찰라도 길의 성취를 떠나지 않고, 걸을 때에도 이러한 앎의 성취에 힘쓰며, 서있을 때에도, 앉아 있을 때에도 누워 있을 때에도 잠잘 때에도 이러한 지각에 대한 정신활동을 떠나지 않는다.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 모든 순간에 깨어있기다. 


여행자의 道, 나아감에도 순서를

   旅 小亨 旅貞 吉 
   初六 旅瑣瑣 斯其所取災          六二 旅卽次 懷其資 得童僕貞  
   九三 旅焚其次 喪其童僕貞 厲    九四 旅于處 得其資斧 我心不快 
   六五 射雉一矢亡 終以譽命        上九 鳥焚其巢 旅人 先笑後號咷 喪牛于易 凶 

산은 멈추어 자리를 바꾸지 않고 불은 활활 타오르면서 머무르지 않는다. 서로 어긋나 떠나가서 처하지 않는 모습이므로 유랑이다. 유랑하는 자에게는 유랑하는 상황에서의 중도가 있는 것이다. 현명한 자에게 멈추어서 의지한다면 그 때의 마땅함을 잃지 않으니, 이렇게 한 뒤에야 유랑에 대처하는 방도를 얻는다. 불이 높은 곳에 있으니, 세상 모든 곳을 비출 수 있다. 밝게 비추면서도 합당한 위치에서 멈추는 것도 신중하게 하는 모습이다. 나그네로 처하는 도리는 유순하면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자세가 우선이다. 

구삼효는 강하지만 중도를 이루지 못했고 또 하체의 윗자리와 간괘의 윗자리에 자리하여, 스스로 자만하는 모습이다. 방황하는 때에 과도하게 강하면서 스스로 자만하는 태도는 곤궁과 재앙을 자초하는 길이다. 자만하면 윗사람에게 순종하지 못하므로, 윗사람이 함께하지 않고 그 머무는 곳을 불태우니, 편안한 곳을 잃는다. 문명하고 유순한 덕이 있으면, 윗사람과 아랫사람들이 함께하려고 한다. 윗사람에게 순종하여 받들 수 있어서 윗사람이 함께하니, 윗사람에게 미치는 것이다. 그래서 타향을 유랑할 때에는 겸손하고 자신을 낮추고 유연하면서 조화를 이루어야 스스로를 보존할 수 있는데, 과도하게 강하게 굴면서 자만하면 자신에게 합당하게 안정된 위치를 잃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란 좀 더 나은 위치에 서면 우월감에 젖어 뽐내게 마련이고, 약점이 있으면 위축되게 마련이다. 보살이라면 어떻게 할까? 제2지 이구지(離垢地) 진리를 체득한 보살이 현실 사회에 돌아가 도덕의 기본적인 훈련을 시작하는 단계이다. 그리하여 그것에 의해 점차로 인간의 더러움에서 떠나는 것이다. 도를 닦았으면 산 중에 있지 말고 시끄러운 시장바닥에 나와서도 고요함을 지킬 수 있는지를 보라고 한다. 진흙탕에 연꽃처럼  탐.진.치에 물들지 않고 살아가는 길을 모색하는 게 여행자의 모습이다. 

  漸 女歸 吉 利貞
  初六 鴻漸于干 小子 厲 有言 無咎.              六二 鴻漸于磐 飮食 衎衎 吉. 
  九三 鴻漸于陸 夫征不復 婦孕不育 凶 利禦寇.  六四 木 惑得其桷 無咎. 
  九五  鴻漸于陵 婦 三歲 不孕 終莫之勝 吉      上九 鴻漸于陸 其羽 可用爲儀 吉

어떤 사물도 끝까지 멈추어 있을 수만은 없으므로, 점진적인 진입을 상징하는 점괘로 받았다. 점(漸)이란 점차적인 진입이다. 요즘 사람들은 느리게 나아가는 것을 점차적인 것이라고 하는데, 나아가기를 순서에 따라 해서 차례를 뛰어넘지 않기 때문에 느린 것이라고 한다. 점차적인 진입의 뜻에서는 안으로는 멈춰 안정을 이루고 겉으로는 공손하고 이치를 따르므로, 그 나아가고 행동하는 데에 곤궁함이 없다. 점차적으로 진입하여 때와 순서를 잃지 않으면, 점차로 나아가는 데에 그 마땅함을 잃지 않는다. 단 반걸음에도 순서가 있지 않음이 없다. 그 순서를 잃지 않으면 길함을 얻지 않음이 없음으로, 상구효가 매우 고원한 경지에 있지만 그 길함을 잃지 않는 것이다. 모범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은 순서가 있어서 혼란스럽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걸음을 쌓지 않으면 천 리 길도 이르지 못하고, 작은 흐름을 쌓지 않으면 강과 바다를 이루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주역과 대승불교에 들어 온 순간 겁이 덜컥 났었다. 좋아하는 공부지만 과연 이 흐름에 따라 갈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암송에 대한 두려움이 제일 컸다. 다행히 오티때  필사를 해도 된다는 문을 살며시 열어 주셔서 진입할 수 있었다. 한자에 대한 거부 반응은 없었지만, 일주일에 4개의 괘를 쓰기까지는 쉽지 않은 훈련이 필요했다. 3학기에 시작된 연좌제는 공부하고 싶은 것도 내려놓아야 한다는 설움에 눈물을 흘렸던 게 최고의 약이었던 것 같다. 아마 곰샘의 강한 액션이 없었다면 아직도 암송은 먼 나라 이야기가 되어 있을 것 같다. 4학기 마지막엔 꿈에 그리던 산책도 하면서 여유 있게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제8지 부동지(不動地)는 보살의 인격형성에 마지막 전환점이 된다. 보살은 이 경지에서 대 자연의 운행에 동화하는 것이다. 의도적 노력의 마음을 떠나 앎의 활동에 맡겨 국토의 생성과 괴멸과 유지를 관찰하면서 즐기는 경지다. 

주역에서 많이 배우는 게 ‘때’였던 것 같다. '괘는 인간이 처한 여러 가지 상황을 상징하고, 괘사는 괘가 상징하는 상황에 대한 전체적인 진단과 방향을 담고 있다. 64괘 384효가 하나의 상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기에는 그 속에 담지 못한 더 많은 다양한 상황적 맥락이 내포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인간의 삶에는 어떤 틀에 의해서 도식화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층위와 변화의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정이천 주역>, p15) 불교식으로 표현하자면 삼천대천세계라고 할까? 진리의 체험이란 무엇을 뜻할까? 그것은 보살이 온갖 보살행을 실천하다가 궁극의 깨달음을 향해 마음이 갑자기 열린 것을 뜻한다고 한다. 

십지품 9지의 선혜지와 10지의 법운지는 ‘있는 그대로를 알고 행하는 경지’에 도달함이다. 결국 주역에서 말하는 최고의 경지도, 불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경지도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부터 끝없이 높고 먼 형이상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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