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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vs 유식30송] 내 삶에 『주역』 사용기(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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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짱숙 작성일19-01-31 19:11 조회3,1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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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 『주역』 사용기(記)

장 현숙 (감이당 금요대중지성)


주역』 사용법

주역에는 64개의 괘(卦)가 있다. 각 괘는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하나의 상황이다. “매순간 삶 전체의 모습이 전부 드러나”(『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도서출판 법공양, 정화스님, p143)기 때문에 하나의 괘는 이 순간 내 삶의 전체 모습을 부호화 한 것이다. 그런데 이 부호 안에는 지금 내 삶의 모습뿐만 아니라 이것을 어떻게 겪어낼지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이것이 효(爻)이다. 상황 자체는 인연의 큰 흐름으로 오는 것이어서 우리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적다지만, 그 상황 속에서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는지 에는 여섯 가능성이 있다. 

어떤 상황도 그 자체로는 좋다거나 나쁘다 할 수 없다. “수상(受想)의 작용이 일어나는 순간, 즉 현행하는 순간은 무기(無記)이지 선악이 아니”(같은책, p150)기 때문이다. 상황 자체가 아니라,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을 취하느냐에 따라 좋거나(吉) 나쁜 것(凶)이 된다. 그러므로 주역의 괘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여기서 ‘공평하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상황이 연출된다는 뜻이 아니다. 상황은 그저 상황일 뿐 그 자체로는 좋음도 나쁨도 없다는 뜻이다. 좋음과 나쁨은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행동하느냐가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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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을 배우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리고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행동이란 것이 길흉을 예측하여 길함은 따르고 흉함은 피하는 행동인 것일까? 사실 이 부분에서 아리송하다. 주역이 길흉을 예측하여 길함의 방향으로 내 행위를 결정하는 것으로 쓰임 되는 것이라면, 주역을 공부하여 최종적으로 얻고자하는 것은 결국 부귀이다. 그런데 부귀는 세상의 가치에 나의 좋음과 나쁨을 맞추어갈 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주역을 공부한다는 것은 곧 길흉이라는 세상의 가치에 나를 종속시키는 행위가 아닌가. 뭔가 허망하다. 기껏 공부해서 세상의 가치에 편승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니. 분명 다른 사용법이 있을 것이다. 불교와 함께 하는 이번 에세이 미션덕분에 그 다른 사용법이 궁금해졌다.   

효의 무한반복으로써의 윤회

’창이지‘에서 하는 주역세미나 중 참가자 한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은 늘 초효의 삶만을 반복할 수도 있겠네요.” 그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그렇다. 초효는 일의 시작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어떤 상황이 일어나든 늘 초효의 행동만을 반복한다. 그러면서 ‘내 삶은 왜 나아지지 않지?’하고 고민한다. 중천건괘의 경우, 초효는 잠용(潛龍)이다. 잠용은 용이 물에 잠겨있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잠재능력을 재대로 발현하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용(龍)은 자신이 안주하고 있는 물을 떠나 하늘로 날아올라야 한다. 그러기 위해 종일건건(終日乾乾)하고 석척약(夕惕若)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런 과정 없이 비룡(飛龍)이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과정을 지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니 늘 잠용으로 있다. 이것이 윤회(輪廻)다. 눈뜨고 반복하는 것. 그건 다른 효도 마찬가지이다. 육효에 있는 사람은 늘 뭔가 오버한다. 항룡 유회(亢龍 有悔)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과하게 행동한다. 자신도 모르게 끝까지 가서 후회한다. 자신의 행동이지만 제어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삼효도 사효도 마찬가지이다. 삼효는 자신이 이룬 것에 자만한다. 사효는 눈앞에 보이는 이득에 욕망이 오락가락한다. 안보이면 욕심조차 내지 않고, 일의 시작단계(초효)라면 아예 포기라도 하겠지만, 나름 좀 높이 올라왔을 때는 한 발짝 더 나아가면 뭐라도 될 것 같은 욕심을 제어할 수 없다. 

하나의 효는 상황 속에서 자신이 처한 위(位)를 의미한다. 위(位)란 시간과 공간이 합쳐진 개념이다. 이 말은 어떤 시간(상황)이 주어지면 그 시간 안에서는 그 마음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효의 반복은 마음의 반복이다. 마음이 반복되니 삶의 패턴도 반복되는 것이다. 매일의 행동패턴이 그 전날과 같고, 지금 이순간의 욕망이 다른 날들과 같을 때 우리는 윤회한다고 한다. 주역64괘는 우리 삶에서 겪을 수 있는 하나하나의 사건들이다. 우리는 그 사건들을 어떻게 겪어내고 있는가. 매번 새로운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매번 같은 방식으로 겪어내고 있는 건 아닐까. 같은 효의 무한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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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반복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유식(唯識)은 이럴 때 상(想)과 행(行) 사이의 흐름을 명확하게 관찰하라고 한다. 자신에게 무슨 생각이 올라오고 있는지 그리고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관찰하라는 것. “수상(受想)이 일어나는 순간이 전생의 구생기가 총체적으로 일어나며 여기에서 행온이 ‘분별로 가느냐, 아니면 고요함의 수행으로 가느냐’에 따라 후생이 결정된다.” “이것이 전생과 후생의 상속으로서 윤회”(같은책, p150)이다. 유식에 의하면, 내게 올라오는 매순간의 상황에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 등류습기(等流習氣)가 유전하는 윤회로 가느냐, ‘여래의 청정본연의 모습’이 드러나는 삶의 참모습으로 가느냐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주역』의 다른 사용법이 있다. 내 삶의 청정본연의 모습을 실현하는 것으로 사용하는 사용법. 효의 무한반복은 지금 이 순간 내 삶의 전체모습으로 드러나는 상(想)에 대한 집중 없이 습관적으로 다음 행(行)을 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올라오는 한 생각을 괘에 걸어 분명히 관찰해보자. 내가 무엇을 반복하고 있는지. 나는 무엇을 윤회하고 있는지. 

내 삶에 『주역』

 00여성회에서 6개월 동안 책읽기 소모임을 진행했었다. 그 후속모임으로 철학책읽기 모임이 계속된다. 이 모임은 00대 철학과교수가 진행한다. ‘철학과교수’라는 타이틀 때문인지 아니면 ‘서양철학’이라는 장르 때문인지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그런데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내가 아는 사람들이었다. 일단 ‘창이지’ 세미나에 참여하는 사람, 그리고 도서관에서 같이 인문학모임을 했던 분들, 그리고 예전부터 이런저런 이유로 알고 지낸 분들. 많은 분들이 그렇게 참여했다. 그런데 첫 모임 때 내 마음이 이상했다.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던 철학 공부를 하도록 소개해서 기쁜 마음 반, 소소하게 일구고 있던 내 작은 텃밭이 와해되는 것 같은 불안한 마음 반. 생각지도 못했던 마음에 당황하고 혼란스러웠다. 나는 사람들이 공부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나? 그냥 내 텃밭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만을 바란 것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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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수뢰둔(水雷屯)
이 상황을 『주역』괘에 걸어보자면 둔(屯)이다. 둔은 혼돈이다. 혼돈 속에서 사물이 처음 생겨나듯이 혼돈이 있어야만 보이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둔의 상황일 때는 앞으로 나아가지 말고(勿用有攸往) 제후를 세우는 것이 이롭다(利建候)고 했는지도 모른다. 제후란 혼란의 상황에서 나를 도와줄 세력을 말한다. 나를 도와줄 세력이란 외부적으로는 사람이나 물자이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내 혼돈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다. 그래야 똑같은 상황이 왔을 때 주저하거나 머뭇거리지(磐桓) 않고, 안내자도 없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卽鹿無虞) 헤매는 우(愚)를 범하지 않는다. 그러니 혼돈일 땐 일단 멈추어서 생각해봐야 한다. 제후를 세워야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과 같이 공부하는 것을 바란 것일까? 아님 그저 내 텃밭이 커지기만을 바란 것일까? 이 상황에서 제대로 내 마음을 보지 않으면, 비슷한 상황이 오면 다시 혼돈에 빠질지도 모른다. 같은 상황의 무한반복. 윤회.  

2)산수몽(山水蒙)
혼돈은 왜 생긴 것일까? 어리석음 때문이다. 왜 어리석은가? 내가 나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왜 모르는가? 사물에 가려져서 무엇이 올바른지 모른다. 여기서 사물이란 나를 현혹하는 것들이다. 몽(蒙)괘에서는 이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방법으로, 스승이 어리석은 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이가 스승을 찾아야 한다(匪我求童蒙 童蒙求我)고 한다. 이는 스스로 어리석은 줄 아는 사람만이 어리석음을 깨우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은 자는 누군가 아무리 알려줘도 소용없다(再三瀆, 瀆則不告). 자기가 어리석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깨우칠 수 있는가. 

사물에 의한 가려짐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본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올바름은 없앨 수는 없다. 구름이 아무리 두텁더라도 태양을 없앨 수 없듯이. 이는 주변의 잡다함 때문에 잠시 마음이 어지럽혀지더라도 본디 내 속에 있는 청정하고 부동한 마음은 절대 없앨 수 없다는 말과도 같다. 유식에서는 이를 “한 생각의 흐름 속에는 전6식, 제7식, 제8식이 동시에 나타난”(같은책, p198)다고 표현한다. 즉, 한 생각 속에는 전6식, 제7식의 분별에 의한 가려짐 뿐만 아니라 제8식의 청정함도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몽(蒙)하다고 하나, 그 속에는 몽에서 깨어날 수 있는 올바름과 깨어나고자 하는 마음도 함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형통(亨)하다. 

3)천수송(天水訟)
당황하고 혼란한 와중에 묘한 마음이 자라났다. ‘이 사람들의 공부 방식은 뭔가 옳지 않다’는 마음이었다. 이는 달리 말하면 ‘내 방식이 옳았다’는 것이다. 사실, 아무 근거도 없고 뜬금도 없는 마음이었다. 도대체 이 마음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굳이 말하자면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불쑥 생겨났다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런데 이 마음이 생기니 책읽기 모임 내내 괴로웠다. 송(訟)괘에서는 다툼은 내가 옳다는 믿음(有孚)에서 생긴다고 한다. 무엇이 옳다는 것일까? 타인의 어떤 생각에 대해 ‘나는 옳다’는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나와 타인’을 갈라 “총체적인 관계 속에서 아집을 일으키는 물든 마음인 사량(思量)”과 “경계를 나투어 요별(了別)”(같은책, p61)하는 마음에서 생긴다.

물론 질문에 대한 답변이 너무 ‘교수’스럽다는 것, 진행방식이 학생 지도하듯 한다는 등의 이유가 있긴 했다. 하지만 마음이 올라온 순서로 보면, ‘내 방식이 옳다’가 먼저이고, 이유는 그 다음이었다. 그러니 다툼은 내가 옳다고 믿는 그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이 마음 때문에 막히고 두려우며(窒惕), 소외되고 괴롭다. 실제로 책읽기 모임 내내 나는 스스로 소외되고 있었다. “삶에 있어서 자기 소외(彼彼遍計)로 말미암아 서로 간에 벽이 생긴다(遍計種種物)”고 했다. 그러나 “소외와 벽(遍計所執)은 허망한 분별이 바탕이며, 실재하지 않”(같은책, p215)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벽은 “삶에 부드러움과 따뜻함이 같이할 수 있는 장(같은책, p219)을 만들지 못한다. 




4)중지곤(重地坤)
복(福)이란 ‘막힘없이 흐르는 맑고 따뜻한 기운’이라고 한다. “열린 세계에서 열린 마음으로써 대상을 파악하면 따뜻한 기운이 교류되는데, 이 교류를 복이라고”(같은책, p203)한다. 그러니 나는 그 순간 ‘복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 스스로 자초한 박복함으로 괴로운 사람이었다. 

그날 저녁 ‘종일건건’ 글쓰기를 위해 마지막 남은(다른 괘들은 한 번씩 글을 쓰고 마지막으로 남음) 중지곤괘를 공부했다. 괘사를 공부하는데, 평소엔 가볍게 지나가던 ‘선미후득주리(先迷後得主利)’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딱 그날의 상황과 일치했다. 그날 나는 坤으로 있어야 했다. 곤은 땅이다. 끝도 없고 경계도 없는 대지이다. 가장 유순한 자질로 만물을 생(生)한다. 이러한 대지의 모습이 형통하여 괘사는 원형(元亨)으로 시작한다. 그러곤 암말(牝馬)의 바름이 이롭다고 한다. 암말이란 성정이 부드럽고 온순한 것을 의미한다. 땅의 유순한 성질을 빗대어 암말이라고 한 것이다. 땅은 만물을 생한다. 그래서 만물의 어머니라고도 한다. 근데 땅이 만물을 생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땅은 절대 자신을 고집하지 않는다. 장미는 장미 그대로, 들풀은 들풀 그대로, 아이는 아이 그대로 각자의 인연의 모습으로 자라게만 한다. 여기에 땅의 고집은 없다. 그리고 땅의 내세움도 없다. 땅은 그저 그들에게 양분과 뿌리를 내릴 도타운 지반만을 제공한다. 장미의 아름다움에 뿌듯해하지 않고, 곡식의 익음에도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저 만물이 가진 성정 그대로 그들이 원하는 모습 그대로 길러주기만 한다. 그것이 땅이 만물을 길러내는 모습이다. 땅의 이 모습이 ‘앞장서면 혼미하고 뒤에 가면 주인을 찾아 이로운(先迷後得主利)’ 곤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 모습이 스스로 소외하여 서로 간에 벽을 만들지 않는 모습이었다.  

5)수천수(水天需)
이제 알겠다. 내 혼돈을, 내 어리석음을, 내 박복함을. 이는 내 오래된 습에서 비롯되었다. 나와 남을 가르고,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고(탐심)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내 것으로 만들지 않으려는(진심)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탐심과 진심은 모든 “상과 행온 사이에서”(같은책, p142) 습관적으로 일어난다. 이 습관적 마음이 윤회의 핵심이다. 

이 습관적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하나? 유식은 습관적 마음에서 벗어나는 법을 아주 쿨하게 제시한다. 너무나 쉬워서 정말 될까? 싶을 정도다. 바로 정신을 집중시키고 그냥 지켜보라는 것. 그러면 “탐심이나 진심으로 이끌어가는 의지작용인 행온의 분별이 일어나지 않음에 따라 삶의 참모습으로 바뀌게”(같은책, p143) 된단다.   
   
수(需)는 기다림의 괘다. 하늘에 구름은 있으나 아직 비는 내리지 않는 상황. 밀운불우(密雲不雨)의 상태. 그런데 괘사의 처음이 ‘유부’이다. 유부는 마음에 신의를 품고 있다는 뜻이다. 무슨 신의일까? 바로 언젠가는 비가 내린다는 믿음이다. 그래서 수(需)의 기다림은 초조하지 않다. 술과 음식을 즐기며 여유 있게 기다린다(需于酒食). 이 기다림에는 올바름을 지킴에서 오는 길함(貞吉)이 있다. 어쩌면 나는 이 수(需)괘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당장 내 혼돈이, 내 어리석음이, 내 박복함이 없어져야 한다고 호들갑떨지 않고, 그저 내 마음이 올라오는 모습(想상)과 내가 행(行)하는 사이의 흐름을 지켜보자. 그러다 보면 구름 속 작은 물 알갱이가 모여 문득 비가 내리듯이, 나도 습관적 마음에서 문득 벗어날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비 내림은 내 소관이 아니다. 술과 음식을 차려놓고 여유 있게 기다리는 수괘처럼 매순간 상과 행온 사이를 그냥 지켜만 보는 것. 이것만이 나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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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사(師)와 비(比)
비 내린 다음 맑게 갠 하늘처럼 내 마음도 한결 밝아졌다. 내 마음의 행로를 주역괘에 걸어 봤을 뿐인데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이 많았다. 철학책읽기 모임의 장점도 보이기 시작했다. 교수님이 생각보다 소탈했고, 같이 하는 사람들은 열의가 있었다. 가까이에서 서양철학을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아 기쁘기도 했다. 친밀한 협력은 길(比 吉)하다고 했나? 생각해보니 공부에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좋은 일인 것 같았다. 혼자 공부하는 것이 힘드니 서로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 혼자 할 수 있다고, 내 텃밭에서만 해야 된다고 버티는 건 그 자체로 흉하다(不寧方來 後 夫凶). 성숙하게, 일관성 있게, 바르게 공부할 수 있다면(原筮 元永貞) 어디서든 공부할 수 있다는 열린 마음이 친밀함을 생기게 한다. 

사람이 모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사(師)괘처럼 편을 갈라 싸우기 위해 모이는 것도 있다. 위기일발의 이런 상황에서는 싸움에서 이겨줄 든든한 장인(丈人)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유리하다. 하지만 평소엔? 성숙하게, 일관성 있게, 그리고 바르게 자신의 친밀함을 드러내는(顯比) 사람에게 모인다. 이 친밀함에는 인연된 사람과는 함께하게 되어 있다는(王用三驅 失前禽) 질그릇에 가득 찬 순박한 믿음(有孚 盈缶)이 있기 때문이다.  

『주역』으로 해탈하기  

제목이 이상하다. 『주역』이랑 해탈이라니. 『주역』과 불교를 엮으려니 두는 무리수다. 하지만 해탈은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무엇이 속박인가? 반복하는 것이다. 괴로운데도 반복하는 것. 마음의 반복, 행위의 반복. 이 반복에서 벗어나는데 주역은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내 행위가 어디에서 반복되고 있는지 괘와 효로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니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괘의 부호에 나의 삶을 걸어보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다. 나의 삶을 객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 객관화는 ‘그냥 지켜보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윤회는 상과 행온 사이에 있다고 했다. 상을 객관화시킬 수 있은 힘은 탐심과 진심에 꺼둘리는 행을 바꿀 수 있는 힘도 준다. 그러니 ‘『주역』으로 해탈하기’는 얼토당토않은 미션인 것만은 아니다. 『주역』 공부로 이 미션을 달성할 수 있다면 한번 공부해볼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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