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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vs 불교] 모든 것이 마음 하나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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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푸르니 작성일19-01-31 21:08 조회2,8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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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마음 하나에 달렸다



김현화(감이당 금요 대중지성)


 

주역과 불경 횡단 에세이. 나에겐 난이도 인 이 미션을 통과해야만 올 한해가 무사히 끝날 것 같다. 주역도, 불경도 알 듯 모를 듯 겨우 맛보기 수준인데, 크로스해서 글을 쓰라니! 참 대략 난감이다. 주역의 여덟 괘는 제비뽑기로 이미 주어졌고, 소의경전으로 어떤 책이 좋을까? 한 해 동안 읽었던 대승 경전 책들을 이리 저리 뒤적여 본다. 에휴~ 한숨만 연발하다 결국 혜능 대사의 육조 단경을 집어 들었다. ‘마음을 수행자가 의지해야 할 경전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난 언제부터인가 마음에 마음이 갔다. ‘마음을 키워드로 정하긴 했지만, 주역 괘들과 어떻게 엮어서 글을 써야할지? 고민하다가 너무 완벽하게 하려고 하면 시작을 못하고, 그러면 시간이 갈수록 더 불안해 지니까 그냥 쓰라는 혜민 스님의 말씀(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을 접했다. 글을 잘 쓰기보다 有終에 방점을 찍고 일단 써보기로 했다. 육조 단경에서 마음은 인연을 다 드러내고 있는 앎이라 설명하는데, 어떻게 인연이 곧 마음이면서 앎이 되는 걸까? 궁금했다. 하여 내 인생역정을 주역 괘들과 연결시켜 시절인연에 따라 일어났던 마음의 결들을 살펴보려 한다. 그야말로 내 마음의 탐구가 될 것 같다.


욕계 중생의 마음자리

 

澤風 大過

大過, 棟橈 利有攸往 亨.

初六, 藉用白茅 无咎./ 九二, 枯楊生稊 老夫得其女妻 无不利./

九三, 棟橈 凶./ 九四, 棟隆 吉 有它 吝./

九五, 枯楊生華 老婦得其士夫 无咎无譽./ 上六, 過涉滅頂 凶 无咎.

 

육조단경을 설한 혜능 스님은 무학이었으나, 금강경의 가르침을 한 번 듣고서 곧바로 마음인연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것의 본성이 빈 것임을 알아차리고 단박에 깨달으셨다. 四相(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오염된 마음을 보고 알아차리는 청정한 마음이 곧 불성이므로, 수행자가 돌아가 의지할 곳은 스스로의 마음이라며 단박에 깨닫는 돈교를 제창하셨다. 자신의 삶과 인생을 부족하게 여기는 것이 중생의 삶이고, 삶 자체를 온전한 삶으로 여기고 인연의 현재를 전체로 사는 삶이 부처의 삶이라 하는데(육조단경, 법공양, 85),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내 마음은 결핍으로 가득한 대과의 시기였다.


택풍 대과는 크게 지나친 일이고 상식을 뛰어넘는 일을 의미한다. 당시 난 사교육의 일번지라는 대치동에 살며 자녀교육에 올 인했다. 요즘 핫한 ‘SKY캐슬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문득 그 시절이 떠올랐다. 당시 내 아들이 다니던 초등학교는 한반 학부형의 절반쯤이 의사였고, 나머지도 전문직, 대기업 학부모들로서 모두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아니 경쟁하듯 과도한 교육열을 불태웠다. 자녀()를 잘 키우는 일은 부모()의 소임이지만, 자녀의 성적에 연연해 삶의 본말이 휘청거릴 정도라면 지나쳐도 한참 지나친 일일 것이다.


얼마 전 숙명여고에서 벌어진 교무주임의 시험지 유출 비리도 대치동의 과잉 교육열이 빚은 참사가 아닌가 한다. 이 사건은 과도하게 건너다 이마까지 빠져 흉하니 탓할 곳이 없다는 대과괘 상육효의 상황이다. 학벌에 대한 집착과 지나친 욕심 때문에 쌍둥이 딸들은 퇴학을 당하고 가장인 아버지는 형을 받게 되었으니 정말 누구를 탓할 것인가?


 

重水 坎

習坎, 有孚, 維心亨, , 有尙.

初六, 習坎, 入于坎窞, ./ 九二, 坎有險, 求小得./

六三, 來之坎坎, 險且枕, 入于坎窞, 勿用.

六四, 樽酒, 簋貳, 用缶, 納約自牖, 終无咎./ 九五, 坎不盈, 祗旣平, 无咎.

上六, 係用徽纆, 寘于叢棘, 三歲不得, .

 

불교를 공부하면서 어느 정도 습관화된 인식의 패턴을 알게 되었다. 중수 감은 빠지다, 험하다는 의미가 있는데, 위의 교무주임처럼 나 또한, 자녀를 욕망의 대상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괴로움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자녀교육은 당시 내 인생 최대의 목표였다. 전업 주부였기에 남편이나 자녀라는 대상의 사회적 성공을 통해 내 인정 욕망을 실현하려 했다. 존재 이유를 그들에게서 찾다 보니 감괘 육삼효의 처지였다


오고가는 때에 빠지고 빠지며, 위험한데 또 타인의 도움에만 의존하여 더 깊은 웅덩이로 들어갔으니 딱 내 상황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다녀왔는데 우리도 안 갈 수 없지~’라며 캐나다로 두 아이들 데리고 조기 유학을 다녀오고, 유명하다는 학원을 찾아 아이들을 종일 뺑뺑이 돌리고, 밤에는 과외 선생님까지 초빙하며 사교육에 매진했다. 그렇게 자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매니징 하느라 물적으로 심적으로 지치고 힘들었고, 사춘기였던 아들과 3년 동안 날마다 크고 작은 전쟁을 치렀다. 내 기대와 어긋나는 아들과의 불화는 분노와 애증으로 치달았고 마음 자체가 지옥이었다. “엄마가 학습관리 해 주는 대로만 따라해!”라며 닦달하니, 아들이 보기에 나는 더 이상 엄마가 아니라 벗어나야 할 괴물일 뿐이었다


사람을 가르칠 때는 육사 효처럼 반드시 그 사람의 마음이 쉽게 통하는 부분을 취해서 진심을 다해 이해시키고 신뢰를 구해야 하는데, 그 정도를 잃었으니... 동아줄로 결박하여 가시 숲속에 가둔 것을 3년이 지나도 면치 못하는 상육처럼 흉하게 된 것은 자업자득이었다.

 

山天 大畜

大畜, 利貞, 不家食, , 利涉大川.

初九, 有厲, 利已./ 九二, 輿說輹./ 九三,良馬逐,利艱貞,日閑輿衛,利有攸往.

六四, 童牛之牿, 元吉./ 六五, 豶豕之牙, ./ 上九, 何天之衢, .

 

어떻게 그 질풍노도의 험난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계기는 우연하게 왔다! 내가 바라는 아들 상에 부합되지 않는 실제 아들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극에 달했을 즈음, 3 딸의 수시 합격여부가 궁금해 난생 처음 철학관을 찾았다. 그때 아들의 사주도 들이밀었더니, 점쟁이가 얘는 공부보다 기술 쪽으로 먹고 살 운이 있고, 엄마가 병이니 이대로 가면 아들이 집을 뛰쳐나가거나 잘못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아들을 망치는 원흉이라니! 부모에게 자식의 생명과 행복보다 더 큰 것이 뭐가 있을까? 더 큰 것을 위해 아집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대축 괘의 초구는 위태로움이 있어서 멈추는 것이 이롭다고 한다. 나의 첫 단계는 아들에게 퍼붓던 잔소리와 간섭을 중지하는 것이었다. 그냥 내 곁에 있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감사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구이효의 상황은 수레에서 바퀴통이 빠진 것이니, 스스로가 더 나가지 못하도록 제지하는 것이다. 아들이 중 3이었지만 각종 학원이 밀집한 환경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예전에 살았던 동네로 다시 이사를 했고, 화해의 증표로 아들의 평생 소원이던 강아지(그래서 이름이 wish)도 한 마리 입양했다. 그리고 헛된 망상으로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정토회의 불교대학에 입학했다.



현1(불교대학).png



열반의 저 언덕을 향하여

 

重火 離

, 利貞, , 畜牝牛 吉.

初九, 履錯然, 敬之, 无咎./ 六二, 黃離, 元吉./

九三, 日昃之離, 不鼓缶而歌, 則大耋之嗟, .

九四, 突如其來如, 焚如, 死如, 棄如./ 六五, 出涕沱若, 戚嗟若, .

上九, 王用出征, 有嘉, 折首, 獲匪其醜, 无咎.

 

육조 혜능은 말씀하신다. 세상사람은 모두가 본래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지혜를 지니고 있지만, 마음이 미혹하기 때문에 스스로 깨칠 수 없으니 반드시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고.(육조단경, 47) 불교대학을 마친 후 지성으로 깨닫기 위해 감이당에 와서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 ‘란 불을 뜻하고 텅 비어 밝게 빛나는 모습이니 지혜를 의미하고, 붙잡음을 뜻하기도 한다


감이당에 붙어 여러 성현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려면 수순하는 마음은 필수다. ‘괘의 괘사처럼 설령 공부의 미션이 과하더라도 암소처럼 유순한 덕으로 나가는 것이 길하다. 어떤 때는 내가 꼭 이 나이까지 시험에, 과제에, 전전긍긍하며 살아야 하나 이리저리 어지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초효처럼 공경함과 신중함을 알고 함부로 나갈 수 없는 것은 허물을 피하기 위함이다. 번뇌 총량의 법칙이라 했던가? 공부의 장을 떠나면 또 다른 장에서 그만큼의 번뇌를 겪을 테니 차라리 공부로 번민하자고 마음을 다독인다.

 

山雷 頤

, , , 觀頤, 自求口實.

初九, 舍爾靈龜, 觀我, 朶頤, ./ 六二, 顚頤,拂經, 于丘, , , .

六三, 拂頤貞, , 十年勿用, 无攸利./

六四, 顚頤, , 虎視耽耽, 其欲逐逐, 无咎.

六五, 拂經, 居貞,, 不可涉大川./ 上九, 由頤, , , 利涉大川.

 


산뢰이 괘는 축척 후 확장하고 기른다는 의미가 있다. 이는 턱과 입의 형상으로 말과 음식으로 자신의 몸을 기르는 것이다. 자신으로부터 배양이 이루어지니, 감이당에서는 평소 접하지 못했던 의역학, 인문, 철학, 불경, 주역 등 시공간을 넘나드는 책들을 읽고, 암송하고, 시험보고, 글을 쓰는 훈련을 한다.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의 공부를 하며 스스로를 배양하는 중이다.


초구는 너의 신령스러운 거북을 버리고 나를 보고서 턱을 늘어뜨리니 흉하다고 한다. ‘너의 신령스러운 거북이(爾靈龜)’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육조 단경과 연관지어 보면 우리 마음의 불성이 아닐까 싶다. “모든 진리는 자신의 몸과 마음 가운데 다 갖추어져 있거늘 어찌 자신의 마음을 쫓아서 단박에 있는 그대로의 청정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습니까?”(육조 단경, 130) 혜능 스님은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깨닫기만 하면 앉은 자리에서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신다. 마음 안에 이미 갖추어진 불성을 모르고 밖에서 부처를 찾고 있으니 어리석은 중생이라 하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길러주기를 바라며 턱을 늘어뜨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육사처럼 위엄과 엄격함을 배양하여 호랑이가 위엄스럽게 바라보듯이 하고, 필요한 것을 반드시 시행해 나가면 궁색하지 않으므로 허물이 없을 것이다. 상구처럼 스스로를 배양한 후에는 장차 세상을 배양하는 길로 나서야 할 것이나 아직은 스스로를 키우기도 버거운 수준이다. 하여 공부가 일상이 되고 일상이 공부가 될 수 있도록 계속 공부해 나가련다.


 

雷風 恒

, , 无咎, 利貞, 利有攸往.

初六, 浚恒, 貞凶, 无攸利./ 九二, 悔亡./ 九三, 不恒其德, 或承之羞, 貞吝.

九四, 田无禽./ 六五, 恒其德, , 婦人吉, 夫子凶./ 上六, 振恒, .

 



처음 감이당에서 공부를 시작할 때 한 10년 쯤 생각했는데, 크고 작은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절반이 지나갔다. 앞으로 남은 5년을 어떻게 계속 공부해 나갈 수 있을까? 문제는 항심이다. 오래 지속되는 항상성을 의미하는 택산항 괘에서 그 답을 구해볼 수 있겠다.


 ‘항상성이란 오래 지속할 수 있는 도를 말하는 것이지, 한 모퉁이만을 고집하여 변통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중략) 하나에 고정해서 집착하면 오래 지속할 수 없다(주역, 653)는 말처럼, 초구는 상도를 조급하게 깊이 요구하는 것으로 올바름에 집착하여 흉한 것이다. 상도를 지킬 줄만 알았지 변통의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고지식하면 오래 갈 수 없다. 불교에서도 법에 과도하게 집착하면 법집에 빠져 불도를 이룰 수 없다고 한다.


그럼 어떻게오직 때와 상황에 따라서 변화하고 바꾸는 것이 곧 오래 지속할 수 있는 방도가 된단다. 그것도 아직 궁함에 이르지 않았을 때 변해야 하는 것이 비법이다. 구이효가 후회가 없어지는 것은 중도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남회근 선생은 ()’를 번뇌로 풀이하는데 번뇌가 없어지면 곧 열반이니 부처의 마음 아닌가? 부처님도 중도를 말씀하셨는데 뭔가 통하는 부분이 있는 듯하다. 상육효 처럼 항상성이 흔들려 흉함이 극에 달하기 전에 변해야 오래 갈 수 있다면, 감이당에서의 공부도 포기하려는 마음이 극에 달하기 전에 능동적으로 변해야 오래 할 수 있을 것이다. 핑게 같지만 공부에 너무 진을 빼면 오래 못갈 거 같아서 내년에는 좀 쉬어갈까 한다.


공부를 그만둔다는 의미가 아니라 읽고 싶은 책 위주로 세미나에 참여하고, 나이가 들수록 몸의 중요성을 실감하니 몸에 대해 더 탐구해 보고 싶다. 자벌레가 펼치기 위해 몸을 구부리듯이, 마음도 쉼이 있어야 펼칠 수 있으니 명상으로 공부에 변화를 줄까 한다.



현화샘 1.JPG


청정한 마음을 경전 삼아

 

天雷 无妄

无妄, 元亨, 利貞, 其匪正, 有眚, 不利有攸往.

初九, 无妄, 往吉./ 六二, 不耕, , 不菑, , 則利有攸往.

六三, 无妄之災, 或繫之牛, 行人之得, 邑人之災./ 九四, 可貞, 无咎.

九五, 无妄之疾, 勿藥, 有喜./ 上九, 无妄, , 有眚, 无攸利.

 


무망은 허망함, 망령됨이 없다는 뜻으로, 천명에 따라 본성 그대로 행해 나아가는 것이다. 육조 단경에서는 반야 삼매를 깨닫는 것은 허망한 생각이 없는 것(無念)‘ 이라 했다. 허망함이 없다는 점에서 무망무념을 같은 뜻으로도 볼 수 있겠다. 이는 청정한 마음으로 본래부터 한 물건도 없어서 오고 가는 일체를 그 모습 그대로 알아차리고 있는 마음이다.(육조 단경, 19) 천뢰무망 괘는 하늘 아래 우레가 있는 형상으로 천리를 따르는 것이 도리인데, 그 바름이 아니면 재앙이 있다고 한다. 초효는 무망괘의 처음이라 아직 허망한 생각에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마음 그 자체로 어디를 가도 길하다.


대산 주역에 의하면 사람은 본래 선한 무망으로 태어나는데 욕심 때문에 망령되게 사는 것이다. 육이효는 밭을 갈지 않아도 거두고 묵히지 않았던 밭이 옥토가 된다고 했으니, 이는 욕심없이 일의 당연한 이치를 따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인위적인 노력 없이도 저절로 좋게 이루어지는 것은 복을 구하려는 마음이 욕망임을 알아 구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때, 구하는 모든 것이 다 구해진 것과 같아서 복을 구하지 않아도 충분한 복을 누리게 된다’(육조 단경, 151)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육삼효는 지나가는 행인이 소를 얻은 것은 곧 마을 사람의 재앙이라 했다. 한 공동체에서 누군가 이익을 얻으면 누군가는 손해를 볼 것이다. 자연의 이치에서 보자면 얻음도 이익이 아니라 잃음이 될 수 있으니 인간의 허망한 생각을 경계하고 있다


구사효는 본래의 무망함을 올바르고 굳게 지키기 때문에 허물이 없는 것이고, 구오효 무망의 병은 지나치게 허망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 때는 약을 쓸 일이 아니라 본래 그대로의 마음을 회복하도록 청정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불교 대학 졸업 때 수계식을 하고 법명을 주는데, 무주심(無主心)’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우연이었을까? 아집이 강한 내게 꼭 필요한 처방이 머무르지 않는 마음이었다. 당시는 그 의미를 잘 몰랐으나 불경을 공부할수록 내게 얼마나 훌륭한 마음의 보약인지, 각성제와도 같은 법명에 감사할 따름이다. 상구는 무망에 행하면 재앙이 있어서 이로울 바가 없다고 한다.


사람의 성품은 본래 청정해서 허망한 생각만 여의면 되는데, 청정함이라는 이미지를 세워 청정함을 보려 하면 도리어 도의 인연에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이미 무망인데 거기서 더 나가면 욕심일 뿐이다. 닦아야 할 특별한 마음이 어디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억이나 앎, 감정, 분별 등 한 생각에도 머무름이 없도록 알아차리고, 알아차리고 또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澤山 咸

, , 利貞, 取女吉.

初六, 咸其拇./ 六二, 咸其腓, , 居吉./ 九三, 咸其股, 執其隨, 往吝.

九四, 貞吉, 悔亡, 憧憧往來, 朋從爾思./

九五, 咸其脢, 无悔./ 上六, 咸其輔頰舌.

 


택산함은 젊은 남녀가 감응하는 것처럼 교감하고 서로 함께 통하는 것이다. 괘사를 보면 사물이 감응하면 형통하고 올바름을 지키는 것이 이롭다. 그럼 함 괘의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이는 마음을 비워서 사심, 즉 나를 내세우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사심이 있으면 서로 함께감응할 수 없다. 구사 효는 마음으로 통하는 것을 뜻하는데 동동왕래, 붕종이사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정이천 선생은 왕래하기를 끊임없이 하면, 친구만이 너의 생각을 따른다고 해석한다


한편 남회근 선생은 마음이 뒤숭숭하여 온갖 것이 왔다 갔다 한다라고 풀이한다. 해석의 차이는 있으나 감응이 마음 작용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마음에 따라 인연도 달라짐을 나와 아들과의 관계로 실감했다. 똑같은 내 아들인데 예전에는 원수였다가 지금은 부처님으로 그 위상이 바뀌었다. 마음이 원수로 인식했을 때는 미워하고 싸우는 방식으로 원수를 대하듯이 아들을 대했다.


헌데 마음을 돌이켜 나를 깨우치러 온 부처님이라고 생각하니 아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면서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아들의 모났던 마음도 차츰 풀려서 지금은 가족 중 제일 많이 대화하고 눈빛만 봐도 통하는 사이가 되었다. 현재가 바뀌면 시방삼세의 인연이 달라진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모든 움직이는 것은 모두 감동을 받으니, 감동을 받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반응이 있고, 그 반응은 다시 타인을 감동하게 만들고, 감동하면 다시 그에 상응하는 반응이 있으니, 그러므로 끊임이 없다.(주역, 645) 이를 내가 이해한 불교식으로 설명하자면, 인연이 있으면 알아차리는 앎인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은 다시 인연을 만들고, 그 인연은 또 마음이 되고... 무상한 변화가 곧 마음이며 앎이 되니. 하여 인연이 곧 마음이라 하나보다. 공자는 계사전에서 사람의 생각은 만 갈래지만 온갖 생각은 텅 빈 그 곳마음 하나로 통한다고 했으니, 주역과 불경을 세상에 선물한 성인들의 마음과 감응하는 인연을 발원해 본다.

 

현 2(마지막).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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