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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vs불교] 불도佛道의 현장, 공동체
 글쓴이 : 혜안 | 작성일 : 19-01-31 21:25
조회 : 543  

 

 불도佛道의 현장, 공동체

 

안혜숙(금요 대중지성)


무명과 윤회란

공동체!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내 삶 속에 들어와 있지 않았던 단어다. 시간이 흘러도 한동안 여전히 입에 올리기가 서걱거렸던 말. 굳이 불교의 연기법을 가져오지 않아도 인간은 지구위의 한 공동체임이 분명하건만, 아니 가족도 분명 떼려야 뗄 수 없는 공동체임이 분명하건만 나의 의식은 공동체라는 단어와는 왜 그렇게 동떨어져 있었던 느낌일까. 그만큼 라는 경계, ‘의 분별에 갇혀 살았기 때문이리라.

 

나와 너의 분별은 바로 전까지 살아온 명언종자의 일어남이며, 이것을 타고난 구생기俱生起라고 합니다. …… 우리가 각자 자기의 얼굴을 만들어 가고, 어떤 일에 기분 나빠하거나 좋아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것이 구생기입니다. 지금 또 거기에 따라가면 구생기와 비슷한 자기 얼굴과 생각을 갖게 됩니다.(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313)

 

공부하면서 성격과 관련해서 지적을 받을 때 참 난감해진다. 그 성격이 곧 인데 바꾸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성격상 장점들이야 살아가면서 별 문제 될 게 없지만 대부분 단점이라고 지적받는 것은 스스로도 그로인해 속박됨을 느끼고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위의 정화스님의 말에 따르면 성격은 구생기俱生起에 의해 나와 너를 분별하면서 살아온 나다. 정화스님은 한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거기에 따라가면 분별기分別起이면서 구생기의 연속, 곧 윤회의 삶이 된다고 한다. “삶의 흐름인 한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은 곧 명언종자와 업종자의 현행과 소멸의 반복인데, 이 반복이 바로 윤회.(위의 책, 196) 이 윤회가 곧 무명이다.

공부란 이 구생기의 상속, 윤회를 끊는 일이다. ‘란 건 없다(無我)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라는 물리적인 존재를 부정할 순 없지만 고정된 변함없는 라는 실체는 없다는 것. 그러나 우리는 이 라는 감옥에 갇혀 가지가지 아상을 만들고 그로인한 집착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번뇌에 휩싸여 살기 일쑤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하고, 저것이 멸하므로 이것이 멸한다.’(아함경) 네가 있어 내가 있고 네가 없으면 내가 없다. 관계를 떠나 어떤 존재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붓다가 깨달은 연기의 원리다. 유식 역시 관계 속의 앎()만이 실재한다고 말한다. 주역은 말할 것도 없이 관계의 원리이자 관계의 철학이다. 여섯 효가 만나 이루어지는 관계 그 자체다.

내가 풀 괘는 천산둔, 뇌천대장, 화지진, 지화명이, 풍화가인, 화택규, 수산건, 뇌수해이다. 그 관계의 현장은 곧 공동체의 현장이자, ‘라는 아상이 만들어내는 번뇌의 현장, 주역의 우환의식의 현장이다. 관계 속에서 살고 죽는 그때그때의 원리들은, 무명의 존재로 태어나 공동체라는 관계 속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공부와 생존의 원리이기도 하다.

 

대장(雷天大壯), (火地晉) : 교만과 질투를 경계하라

비슷비슷한 시기에 들어와 지금까지 함께 공부하고 있는 동료들. 처음 시작했던 동료들은 거의 다 떠났지만, 이리저리 헤쳐모여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연차가 오륙년이 되다보니 지금까지 들어온 풍월이든 뭐든 배운 만큼 내놓고 나누어야 하는 게 공부의 도리다. 이때 생김생김처럼 다양한 각자의 장단점이 빛을 발하기도 하고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나아감의 도리에 있어 대장괘와 진괘에서 말하고자 하는 건 무엇인가.


대장괘는 이 굳세게 성장하는 상이다. 말 그대로 하늘에서 우레가 치듯 왕성한 움직임과 성장을 의미하는 大壯의 형상이다. 에너지도 넘치고 공부의 힘도 생겼으니 가히 그 기운이 세고 큰 동료라 하겠다. 강건한 힘으로 굳세게 움직이니 가히 길하고 형통할 것 같건만 그게 아니다. 역시 에서는 그 넘치는 힘이 오히려 화근이 된다. 시종일관 올바름을 굳게 지키고(大壯, 利貞) 어렵게 여길 것을 강조한다(艱則吉). 자신의 넘치는 힘이 자만이나 교만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교만은 분별심에서 나온다. ‘나와 너라는 비교와 망상에 따른 탐진치의 마음이다. 견고한 아상에 강력하게 속박된 감정이다. 그에 결박되어 있는 한 결코 자유로울 리 없다. 공부가 지혜가 되지 못한 경우라 하겠다.


괘는 스승의 눈에 들어 나아가 안팎으로 명덕을 밝힐 때. 그저 안일하게 배우는 자리에서만 안주할 수 없다. 안으로 키운 앎의 밝음을 깜냥 되는대로 밖으로 드러낼 때다. 순종하면서 스승의 큰 밝음에 달라붙어 있는 진()괘의 형상이 의미하는 바다. , 康侯用錫馬蕃庶, 晝日三接.(나아감은 나라를 안정시키는 제후에게 말을 하사하기를 많이 하고 하루에 세 번 접견한다.) 스승 입장에서는 현명한 제자들이 앞으로 나아가니 좋고, 제자의 입장에서는 고귀한 지위에 나아가 총애를 받는다. , 러면 만사형통인가? 아니다


관계 안으로 들어가 효사들을 보면 완전히 다른 내용들이 펼쳐진다. 이때 결정적으로 조직에 영향을 미치는 자가 구사효라는 동료다. 그는 걸맞지 않은 자질로 그 자리에 있다. 구사효는 질투에 불타 동료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안절부절한다.(晉如鼫鼠, 貞厲) 도반이란 어쩔 수 없이(?) 서로 경쟁하고 질투하며 함께 가는 관계라고 하겠다. 하지만 질투라는 감정 역시 자신을 속박하는 부자유한 감정이다. 그 감정이 올라오는 순간 구생기의 분별심에 사로잡혀 탐심과 진심으로 가는 것이 윤회다. 고귀한 벗의 존재가 자신에게 얼마나 유익한 존재인지를 깨닫지 못한다. 진괘의 우환의식은 이런 존재와의 관계는 단호히 정리하고 나아가라 한다. 부처님도 공동체가 존속하기 위해선 훌륭한 도반의 존재를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火澤睽), (天山遯) : 싫어도 만나고, 사사로운 마음과는 신속히 멀리!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공부하러 왔다가 떠나갔다. 떠나간 이유도 상황도 천태만상이었다. 다시는 보지 않을 듯 등 돌리고 간 사람도 있고, 떠났지만 이어지는 사람도 있다. 만남이 있으면 떠남이 있으니 떠남 자체가 무슨 문제이랴. 동파도 하나였기에 떠남도 등짐도 있다고 했다. 중요한 건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떠나야 일 것이다. 삶의 비전과 활동을 함께하는 게 공동체라면 그것을 함께 할 수 없을 때는 떠나야 하리라. 규괘는 분열과 괴리乖離의 때다.


규괘의 괴리의 원인은 의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서로 상대방의 진심을 믿지 못하는 것. 그러나 의심을 가지고 있어도, 싫어도 만나는 것이 규괘에서 허물을 피하는 방법(見惡人, 无咎)이라 했다. 왜 싫어도 만나야 하는가? 동파의 말을 들어보자. “사람들은 오직 같은 것만 좋아하고 다른 것은 싫어하므로 등지는 일이 있다. 아름다운 것이 반드시 예쁜 것은 아니며, 싫어하는 것은 반드시 악독한 것이 아니다. 나를 따라서 오는 자도 반드시 진실한 것은 아니며, 나를 거부하고 달아나는 자도 반드시 배반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끌어당기기가 어렵다고 해서 버린다면 나를 따르는 자는 모두 나를 미워할 것이다. 이것은 서로를 이끌어서 허물에 들어갈 뿐이다. 그러므로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허물을 피하는 방법이다.”(’동파역전, 314) 그러다보면 끝내 의심이 풀어져 길할 수 있다(상육). 이것이 같으면서도 다르게 행하는(同而異) 조화(’동파역전, 313)라 했다


무엇이 하나이고 같은 것인가? 천지의 이치와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게 우리의 공부이다. 우리는 연기의 관계 안에서 하나로 연결된 존재이다. 비록 다른 생각과 실현방법이 다를지라도 천지의 원리와 뜻을 같이 하는 게 같으면서 다르게 행하는 하나됨의 원리다. 그러나 우리는 유위의 세계에서 로 서로 날카롭게 대립하고 하나 됨을 잊고 살아간다. 나와 너라는 분별과 그 분별이 낳은 아집과 소외 때문이다.


그러나 가능한 신속히 멀리 마음을 멀리 해야 할 때가 있다. 소인의 마음, 사로운 마음이 올라올 때이다. “은둔은 신속하고 멀리 떠나는 것이 중요하다. 사적인 은혜에 얽매이는 건 군자의 도리가 아니다.”(이천) 자기 안에서 자라는 소인의 마음을 어서 떠나라는 말이다. 그런 마음으로는 뜻을 이룰 수 없는 것이 천산둔()의 상이다. 공부공동체에서 멀리해야할 사사로운 마음이란 무엇일까. 적당히 현재의 상태에 안주하려는 마음, 잘하려는 마음이 만들어내는 조급함, 그와 동전의 양면인 쓸데없는 자책감, 몸이 힘들 때마다 불쑥불쑥 올라오는 우울감 따위들... 말하자면 의 자의식이라는 망상, 명언종자와 업종자가 만들어내는 마음들이다. 이럴 때는 다시 공부의 중심을 잡고 신속히 멀리 분별의 마음을 떠나는 것이 괘의 미덕이다. 그것은 곧 탐진치로 분별지어진 소외된 마음에서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되찾는다는 말이다.


(水山蹇), (雷水解) : 어려울 땐 진리와 함께! 양다리는 금물!

()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위험과 장애로 막혀서 곤란한 상황을 뜻한다. 이때 나아가는 것()은 해가 된다. 그래서 위험을 보고서 멈추어 설 수 있으니 지혜롭다!”(見險而能止 知矣哉!)고 했다. 멈추어서 자신을 돌이켜 덕을 수양(反身修德)는 때이다. 맹자는 행하고 내가 기대한 것을 얻지 못하면 자신에게서 그 원인을 구하라(정이천주역, 778쪽)고 했다. 여기서 어려움은 자신의 타고난 종자가 일으키는 행위를 반복한 결과, 윤회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삶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어떻게든 넘어야할 문턱이다.


건괘에서 어려움을 해결하는 포인트는 대인을 만나는 것이다.(利見大人) 오효는 그 처지에 상관없이 편안한 자, 대인이다. 스승이자 진리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롭고(利西南) 이롭지 않은 곳(不利東北)에 구애받지 않는 자. 그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다. 이미 도를 터득한 자, 거의 부처님의 경지인 만청정자(滿淸淨者). “모든 번뇌의 종자까지도 청정하게 되어 언제 어느 곳에서나 앎이 청정한(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30쪽) 경지다. 이런 부처님의 경지까지 가지는 못했더라도 자신의 타고난 명언종자와 업종자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보살(分淸淨者)이 아닐까.


하여 육이처럼 비록 자신은 역량이 안되지만 어려움을 구제하려는 뜻을 기꺼이 함께하여 몸과 마음을 다해 고생하면 허물이 없다. 어려움을 넘어가기 위한 해법인 반신수덕反身修德은 불교의 수행에 다름 아니다. 유식에서 수행은 자신의 분별기를 바꾸는 일이다.(위의 책, 315쪽) 분별기分別起란 구생기인 한 생각이 떠오른 후에 작용하는 마음이다. 보고 듣고 느끼며 떠오른 생각(受想)까지는 어쩔 수 없지만 습관적으로 행(의지작용)으로 흘러가는 것을 바꾸는 일이다. 그것은 떠오른 생각의 흐름을 명확히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육이가 기꺼이 마음을 다해 자신을 닦는 자라면, 이에 더해 상육은 대인에게 배워 어려움에 나아가 커져서 돌아온 자.(往蹇來碩) 육효가 그럴 수 있었던 건 그 뜻을 안에 두고 귀한 자를 따르기 때문이다.(往蹇來碩, 志在內也, 利見大人, 以從貴也) 뜻을 안에 두고 귀한 자를 따르는 것은 곧 스승이자 진리를 따르는 마음을 내고 배우는 태도와 수행의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어려움을 풀려면 어떻게든 움직여야 한다. 움직여서 험난함을 면하는 것이 해다.(, 險而動, 動而免乎解) 하늘과 땅이 풀려서 기가 열리고 교감하고 화합하여 우레와 비가 일어나 온갖 초목의 싹이 트듯 하는 것이 장애가 풀어져 해소되는 형국이다. 그래서 겨울에서 봄으로 가듯 저절로 풀어지려나 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인간들이 모여 사는 조직 안에는 병이되는 자가 있기 마련이다. 육삼은 양다리를 걸치는 애다. 해괘에 다툼을 초래하는 유일한 자다. 짐을 짊어져야 하는데 마차도 타고 싶은 것이다. 본심이 마차타고 싶은 것이라면 짐을 짊어져야 하는 관계를 맺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그는 어느 것도 놓고 싶지 않아 결국 도둑을 끌어들여 조직에 해를 끼친다. 해괘의 모든 효가 육삼과의 관계를 정리함으로써 자신의 문제가 해결된다. 육삼과 관계맺지 않음을 증명하거나(초육), 가까이 있어도 마땅하지 않은 자이니 버리거나(구이) 엄지손가락을 끊어내듯 단호하게 끊어내야 친구가 믿게 된다(구사). 군자인 육오는 소인인 육삼과 다투지 않고 스스로 물러나게 하고, 상육은 다툼을 끊이지 않고 일으키는 고질인 육삼의 존재를 쏘아 제거해 해결한다


~ 이것이 해결의 원리라니! 공동체에서 양다리는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해괘가 우레와 비가 되어 초목을 자라게 하는 상이듯, 공부공동체는 또 다른 생명과 가치를 낳고 생육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자신 만의 이익을 위해 이것도 저것도 놓지 않으려는 자가 천지의 이치 운운하는 건 거짓이기 때문이다.

 

명이(地火明夷), 가인(風火家人) : 원칙이 자신과 공동체를 지킨다

가인괘와 명이괘는 어떻게 자신과 공동체를 지키고 보존해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대비하여 보여준다. 명이괘는 죽임(明夷誅也)의 괘다. 무명의 존재가 높은 자리(상육)에 올라 힘까지 넘칠 때 얼마나 어두운 세상이 펼쳐질 수 있는가를 말한다. 이런 존재가 힘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지 않아도 어떤 일도 함께 도모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처음엔 밝음이 사방을 비췄으나(初登于天) 나중엔 밝음이 손상되어 땅으로 들어간다(後入于地)고 했다. ‘원칙을 잃었기 때문이다. ‘를 잃은 것이다. 원칙과 도란 우주만물이 살아가는 이치다. 연기실상의 흐름으로 살아가는 일이다. 어둠의 주인공인 상육효는 밝지 않아서 어두워진 자(동파역전, 305). 애초 무명의 업장이 두터운 자라 하겠다. 우리는 모두 무명의 존재로 태어난다. “무명은 순간순간의 흐름에 명철히 깨어 있지 못한 것, 즉 근원적인 분별에 의한 것이다.”(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33) 자신의 타고난 종자가 현행하는 대로 사는 게 무명이다. 누구나 지금 자신이 한 생각 일으키는 것에 깨어있지 못하면 무명 속에 있는 것이다. 원칙을 유지하고 도를 잃지 않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에 비해 가인괘는 자기 자신으로, 자기 집안으로 들어와(家人內也) 기본을 다진다. “때를 놓쳐 안을 관리하지 않으면 뜻마저 변한다.”(이천)고 했다. 쉬지 않고 온갖 일들이 일어나는 속에서 자신을 지키고 공동체가 유지되는 건 그 뜻 안에서 관리되기 때문이다. 가인괘의 우환은 너무 가까워서 서로를 업신여긴다는 것. 사사로운 애착 때문에 원칙과 도가 가장 유지되기 힘든 게 가족 아닌가. 그래서 엄격함을 확충하고 멀리 구별하여 서로 잊어버림의 뜻을 보존”(동파)하라 했다. 엄격히 원칙을 지키되 가능한 사사로운 마음과 멀리 하라는 소리다. 강하게 뜻을 세운 사람만이 사사로운 애정 때문에 정리를 잃지 않는다. 그래서 가인괘는 대체로 강함을 가장 선한 것으로 여긴다. 그런데 강함만으로 가 유지되는 건 한계가 있다.


왕이 한 집안처럼 하는 데 이른다는 것(王假有家)은 가족이 서로 사랑을 나눈다는 말이다.(동파) 이 마음은 아끼는 마음이다.(이천) 여기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사사로운 가족사랑에 머무는 마음이 아니다. 그런 마음 이라면 자신뿐만 아니라 조그만 집단도 이끌어가기 힘들다. 믿음과 위엄으로 나타나는 그 아낌, 사랑의 마음은 무엇인가. 믿음과 위엄이 있어 길하다는 건 그가 자신을 반성하는 자이기 때문이다.(威如之吉, 反身之謂也) 반신지위란 스스로 천지만물의 도를 따르는 원칙, 그 도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덕을 닦는다는 말이다. 그래야 원칙이 훼손되지 않는다. 반신지위(反身之謂)! 일상에서 청정함을 유지하기 위한 계율을 지키고 분별심에서 벗어나고 지혜를 터득하기 위한 수행만이 진정으로 사람들을 아끼는 마음인 자비심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그 시작은 괴롭지만 끝이 좋은 것이다(終吉).

 

유식에 의하면 나는 이미 매 순간 관계 속의 흐름에 들어가 있다. 그것이 삶이다. 연기실상의 흐름인 삶은 열린 세계다. 이는 총체적인 앎의 장이자 공동체의 장이다. 이미 존재자체가 공동체임에도 그 속에서 끊임없이 나와 너를 분별하며 의 세계에 갇혀 불만족하고 괴로운 삶을 사는 게 무명이자 윤회하는 삶이다. 무명의 존재로 태어난 우리에게 불교는 필연적으로 가야할 길을 알려준다. 이란 깨어있음이고 교란 수행이다.”(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271) 그 매 순간의 분별, 한 생각의 일으킴 속에 깨어있는 것이 불도佛道라 했다. 깨어있기 위한 수행이 곧 불도이자 공부이다. 공동체는 곧 깨어있기 위한 불도의 현장이다. 존재의 실상인 연기의 열린 세계와 만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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