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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vs 불교] 주역과 불경으로 본 깨달음의 길
 글쓴이 : 후후연 | 작성일 : 19-01-31 21:32
조회 : 392  

주역과 불경으로 본 깨달음의 길

이윤지(금요대중지성) 

금강경의 서두는 부처님의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의 묘사로 시작된다. 식사시간이 되자 부처님은 가사를 걸치고 나가 탁발을 하신 후 처소로 돌아와 식사하고 씻고 자리에 앉으신다. 얼핏 보기에 우리의 일상과 다르지 않다. 우리도 옷을 걸치고 사람들을 만나고 활동하고 집으로 돌아와 씻고 쉰다. 그러나 여기에는 깨달은 자와 중생의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다름 아닌 마음의 차이. 매 순간 깨어있는 고요한 신성(神聖)의 부처님과 끝없이 번뇌와 욕망에 휘둘리며 파도치는 중생의 마음.

몇 년 전 불교를 만나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살면서 겪는 감정의 파도가 인간이 경험하는 마음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마음속에 일어나는 자잘한 파도에 휩쓸려 번뇌를 겪는 것이 아니라 깊은 바다와 같은 전혀 다른 차원의 마음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발심하여 수행을 시작했다. 초발심은 얼마간 그 힘을 지속하는 듯했지만, 수행의 길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명상과 진언 그리고 108배는 잘되는 날이 있는가 하면 피곤하고 힘들 때는 마음속 온갖 변명들이 아우성을 치곤 했다. 수행으로 기쁨이 일어나기보다 자책을 할 때가 많아졌고 공부 일정과 마감에 쫓겨 매일의 수행을 건너뛰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수행과 공부로 번뇌를 더하고 있는 것인가 덜어내고 있는 것인가.

금강경의 수보리는 나 같은 중생을 위해 부처님께 질문한다. “세존이시여, 불법을 배우고자 하는 선한 의도를 지닌 자들이 마음의 본성을 찾아 깨달음을 얻고자 합니다. 온갖 번뇌와 망상으로 어지러운 이 마음을 어떻게 머물게 하고 어떻게 항복시켜야 할까요?” (「금강경 강의」, 남회근 지음, 신원봉 옮김, 부키, 51쪽) 

수보리는 선한 의지와 절실함을 지닌 중생이 깨달음으로 갈 수 있는 길을 묻고 있다. 부처님은 뭐라고 말씀하실까? 나도 수보리를 따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구하되, 지난 1년간 공부하며 끙끙댔던 주역의 괘들이 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이 글을 통해 알아가고자 한다. 우주 만물의 끊임없는 변화의 원리를 보여주는 주역과 마음이 존재의 창조자임을 말하는 불교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그리고 주역과 불교가 가리키는 깨달음과 수행의 길이란 어떤 것일까. 건,곤,몽,수,송,사,비괘의 변화와 흐름을 따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주역의 원리에 적용해보자. 초짜 수행자가 겪는 갈팡질팡한 길에 어떤 지혜를 구할 수 있을지. 무모한 시도가 되겠지만 수보리처럼 간절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그리고 글을 쓰는 동안이라도 마음이 주역과 불교의 지혜 한 방울에라도 적셔지기를 바라면서. 


지혜와 수행, 건(乾)과 곤(坤)

수보리는 선남자 선여인의 깨달음에 대해 묻는다. 이것은 선한 의지를 지닌 중생이라면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한 것이다. 존재라면 누구나 깨달음의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다만 우리는 무명의 번뇌에 가려 그것을 모를 뿐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단언한다. 지혜로 통찰하고 진지하게 수행을 닦아 나감으로써 불성을 드러낼 수 있다고. 

주역의 건괘는 하늘을 상징하며 강건함과 밝음, 道를 의미한다. 건은 모든 것의 시초로 원형리정하며 우주 만물의 큰 덕이다. 이러한 건을 불교의 관점으로 가져온다면 건이란 존재의 대 지혜, 즉 불성(佛性)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깨달음에 이르고자 한다면 우리는 바로 이 마음의 불성을 밝혀야 한다. 

건괘에서 대 지혜, 불성은 용(龍)이라는 상징을 통해 때와 상황에 따라 변화의 양상을 보여준다. 불성의 지혜는 번뇌와 망상에 덮여 있을 때 잠룡(潛龍)처럼 드러나지 않으며, 따라서 쓰지 못한다.(勿用) 그러나 용이 나타나 利見大人하게 되면 깨달음을 위한 지혜의 길을 여는 것이 된다. 수보리와 중생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구하듯이 스승의 가르침을 구하는 것은 리견대인이다. 그러나 스승의 가르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혜는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닦아서 구하는 것이다. 종일건건(終日乾乾)하고 석척약(夕惕若)하며 꾸준히 깨달음의 길을 가야 하는 것. 

내가 애를 쓰며 하던 공부와 수행은 종일건건이 아니라 종일근근일 때가 많았다. 이것도 저것 공부는 많은데 겨우 뒤꽁무니를 따라가는 마음. 바로 이런 나를 두고 건괘의 사효는 말한다. 지혜의 통찰로 도약해 보려는 시도를 하더라도 아직 수행의 근기가 무르익지 않았다면 때에 맞게 따라야 한다고. (或躍在淵) 나는 아직 근기도 되지 않으면서 마음만 앞서 이것저것 벌여 놓고 애만 썼던 것은 아닌지. 飛龍은 그냥 날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잠룡에서 현룡으로 그리고 종일건건을 거쳐 때가 무르익었을 때라야 가능하다. 

여섯 마리 용은 때와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을 드러내지만 결국에는 같은 용이다. 내면에 잠들어 있는 불성과 지혜도 마찬가지. 잠룡처럼 무지 속에 가려있던 불성은 비룡으로 날아오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굿뉴스이기도 하지만 무지 속에 가려있는 나 같은 중생이 비룡처럼 빛을 발휘하기까지 얼마나 먼 길을 가야할지 단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건이 하늘의 지혜라면 건과 쌍을 이루는 곤은 지혜를 따라 완성하는 행위의 닦음, 즉 수행이다. 땅을 상징하는 곤은 만물을 이루고 촉진시켜 완성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계(戒),정(定),혜(慧)를 말하는데 지혜(慧)가 건이라면 지혜와 함께 가는 선정(定)과 계율(戒)은 곤이 된다. 그렇다면 곤이 말해주는 수행이란 어떤 걸까? 

곤의 상징은 牝馬. 암말은 드넓은 대지에 달려나가지만 (君子有攸往) 결코 앞서 나가지 않는다. (先迷後得 主利) 지혜에 대한 이해가 없이 무턱대고 선정만 닦거나 계율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 선정과 계율은 지혜의 이치를 따르며 계정혜의 밸런스를 이루고, 그렇게 올바로 나아가는 수행은 결코 한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 결국 지혜와 수행이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수행은 매일 매일 닦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바탕에 지혜가 뒷받침 되어야 함을 곤괘는 계속 전한다. 곤괘 초육의 履霜 堅冰至는 서리가 단단한 얼음에 이른다는 의미다. 얼음이란 결정체는 음(陰)의 공력으로 만들어지는데, 설괘전에 건은 얼음(爲冰)이라고 했으니 건의 지혜는 곤이라는 수행의 공력 안에 잠재되어 있다는 의미도 된다. 서리는 얼음이 되고 얼음은 서리로부터 시작이듯 지혜를 품은 수행이고 그 수행이 지혜에 이른다. 그렇다면 지혜를 공부함과 수행은 함께 가야 한다. 그렇게 수행을 바로 할 때 내면은 고요하게 머물며 산만하지 않고 집중하는 상태의 直方大가 된다. 그리고 의도하지 않아도 몸에 익숙해 편안할 정도가 된다면 그것은 不習 无不利의 상태인 것. 그러나 수행이 지나쳐 지혜와 균형을 맞추지 못한다면 용이 들판에서 싸워 피를 흘리듯 손상을 초래하고 만다.         

64괘의 시작, 건곤은 불성의 깨달음과 그에 이르는 길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길은 어디 먼 곳에 있지 않다. 공자는 건곤의 다이내믹을 지숭례비(智崇禮卑)라고 하며 지혜는 높고도 원대하지만 행위는 가장 비근한 곳에서 시작하라고 말했다. 곤의 대지는 다름 아닌 내가 지금 발 딛고 있는 이 자리다. 내가 공부하고 내가 수행하고 있는 이 자리. 그리고 내가 공부하고 수행하고 있는 이 자리란 내 마음자리가 일어나고 있는 바로 이 순간이다.            
        
번뇌의 시작, 스승을 찾아라! 둔(屯)과 몽(蒙)       

다시 수보리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어떻게 하면 번뇌와 망상으로 어지러운 이 마음을 극복해 항복시킬 수 있을 것인가. 수보리의 이 문제 제기는 금강경 전체를 관통하며 부처님과 수보리의 문답으로 계속 이어진다. 부처님의 대답은? “바로 그렇게 마음을 항복시켜라”(如是住 如是降伏其心)였다. ‘바로 그렇게’라는 말은 수보리의 질문 속에 이미 대답이 있다는 뜻. 다시 말해 그것은 수보리가 마음을 다해 문제를 제기했을 때 그 순간 이미 번뇌는 사라졌었다는 의미다. 다만 수보리가 그 찰나를 놓쳤을 뿐! 수보리가 놓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선호념(善護念), 마음을 잘 살피는 것이다.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각을 멈추어(止) 관(觀)하는 것!
 건곤이 세워지면 강유의 교류가 시작된다. 이질성의 교류, 즉 건곤, 강유, 천지의 교합은 움직임을 일으킨다. 屯의 시작이다. 이것은 마치 한 생각의 一念이 처음 일어나는 것과도 같다. 건곤이 깨달음과 그 길을 보여준다면 건곤의 효들이 움직여 변화하기 시작할 때 무명의 일념이 일어나는 것이 屯이다. 움직인다는 것은 주체를 세운다는 뜻이고, 주체를 세운다는 것은 自와 他의 구별이 생긴다는 의미이며, 자타의 관념은 분별과 혼란을 일으킨다. 이 일념의 발생은 이미 윤회의 시작이나 다름없다. 일념은 순식간에 번뇌의 파장을 일으켜 (震) 미혹된 망상의 뭉게 구름(水)을 만들어 버리니 바로 이 한 생각을 다스리기가 가장 어렵다. 따라서 둔이 원형리정하다고 해도, 일으킨 생각을 그대로 좇으면 분별과 망상을 따르는 것이니 물용유유왕이라고 경계한다. 오직 이 한 생각을 알아차리는 선호념(侯)을 세우는 것이 이로울 뿐. (利建侯) 

수보리의 질문에 이미 답이 있었던 것처럼, 둔의 혼란과 번뇌 역시 엉킨 실타래 속에 실마리가 있다. 일념은 망상을 일으키지만 그 생각을 알아차릴 때 망상은 거기에서 멈춘다. 물론 번뇌의 순간 알아차림을 한다는 것이 어렵지만 말이다! 둔의 초구가 반환(磐桓)하며 리거정 리건후 (利居貞 利建侯)하는 것은 일어난 생각의 번뇌를 멈추어(止) 알아차리고(觀) 생각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둔괘 육이처럼 도적과도 같은 일념의 유혹에 끄달리는 힘은 세기만 하다. 이것을 이겨내고 수행을 한다면 10년의 세월이 흘러 성과가 있을 것이나, 육삼처럼 자신을 과신하여 가이드도 없이 혼자 깊은 숲속을 들어가는 것은 스승과 지혜 없이 수행하여 길을 잃는 것과 같다. 
    
수행에서 바른길을 가려면 밝은 지혜를 지닌 스승을 찾는 것이 필수다. 금강경에는 수보리를 포함한 비구 1,250명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깨우치지 못한 중생은 직접 스승을 찾아가 지혜를 구해야지 스승이 자신을 불러주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나에게도 얼마나 훌륭한 스승들과 도반들이 있는지. 살면서 내가 큰 복을 받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연구실에 와서 수업과 세미나에 참여하고 배우는 때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수보리의 간절한 물음에 답을 해주셔도 문답을 통해 지혜의 문을 하나씩 열어가는 것은 수보리 자신이듯, 나 자신의 지혜를 일깨워 가는 것은 나 자신의 공부요, 수행이다. 부처님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을 제도시키더라도 실로 제도를 받은 중생은 하나도 없다.”(위의 책 100쪽)라고 말씀하신다. 해탈은 스스로에 달린 것이지 외부의 힘에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발몽(發蒙)하고 포몽(包蒙)하는 스승은 제자의 근기에 따라 적합한 가르침을 준다. 그러나 번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수행의 길에도 번뇌는 도처에 있는 법. 견금부(見金夫)하는 마음은 탐진치의 어지러움에 빠진 상태이며, 그런 곤란함에 빠져 스스로를 단절시키고 마는 것은 곤몽(困蒙)의 상태다. 그러나 겸손하게 낮은 동몽(童蒙)의 자세로 진리를 구한다면 무지가 지닌 폭력성을 끝내는 격파하고야 말 것이다. (擊蒙 不利爲寇 利禦寇)          

기다림과 참회, 수(需)와 (訟)

무지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구하고 수행을 하고자 발심을 한 몽매한 중생이 스승을 만났다고 해서 단박에 깨우침으로 가는 경우는 드물다. 육조 혜능은 금강경의 게송 한 구절을 듣고 단박에 깨우침을 얻었다지만 근기가 각기 다른 중생들에게 깨달음은 서두른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수행이 무르익어 때가 오면 각자의 자량대로 지혜의 문이 열린다. 그래서 몽(蒙)괘 다음 오는 수(需)괘는 기다림을 의미한다. 수괘의 하체에 위치한 乾의 강건한 진취성은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지만 험난한 坎이 앞에 놓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수행자의 도리는 오직 믿음을 가지고 착실히 자기 수행을 하며 기다리는 것 뿐. 그러다 보면 깨달음의 피안으로 리섭대천 할 때가 올 것이다. (需 有孚 光亨 貞吉 利涉大川)     

이때 기다림의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수괘의 초구는 항심(恒心)을 말한다. (需于郊, 利用恒, 无咎) 그것은 불법과 수행의 길에 대한 한결같은 마음이다.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감동하고 기뻐하지만 그 감동이 일시적이지는 않았던가? 그런 감동으로 발심했어도 이 항심의 유지는 쉽지 않다. 금강경엔 ‘사구게를 수지(受持)하라’는 말이 있다. 수지(受持)란 그 가르침의 내용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에 의거해 지속적으로 수양한다는 뜻이다. (위의 책 264쪽) 단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가르침을 이해하고 그 경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러한 철저한 이해와 자기 설득이 없이는 항심을 유지하며 구도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없다. 

수행이 순조로울 때는 번뇌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듯하지만(需于郊), 어떤 때는 번뇌의 파도가 저 앞에 어른거리는 모래사장에 처할 수도 있고(需于沙), 급기야는 번뇌라는 질펀한 진흙밭을(需于泥) 통과하기도 한다. 그러나 음식처럼 수행을 내 몸에 자양분으로 삼는다면 기다림은 더는 기다림이 아닐 것이고, 수행은 내게 힘과 에너지를 주는 음식을 맛보듯 기쁨과 즐거움의 누리는 상태일 것이다. (需于酒食 貞吉) 매일 밥이 주는 기쁨을 거르지 않듯 수행도 그렇게 기쁨과 즐거움의 발현으로 가야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발심하여 스승을 구하고 믿음으로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간다 해도 어긋남이 생긴다. 天水訟은 위로 향하려는 하늘의 움직임과 아래로 내려가려는 물의 움직임이 어긋나는 상황이다. 마음속에 막힌 것이 있어 다투는 것처럼 보이는 이 상황은 송사를 말한다. 그러나 누가 누구를 탓하여 다투어 소송을 한단 말인가? 깨달음의 길은 철저히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마음의 방향이 외부를 향한 순간 하늘을 탓하고 상황을 탓하고 내가 아닌 외부를 탓하게 된다. 그러니 마음을 닦는 수행자에게 송이란 자신을 돌이켜 스스로 송사하는 것이 아닐지!  

남회근 선생은 불법을 배운 뒤 나타나는 가장 큰 병폐가 게으름이라고 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마지막 말씀도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가 아니었던가. 이것저것 듣고 배운 게 있다고 전부 아는 듯 착각하며 정진하지 못하고 매일의 수행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 자기 자신을 향한 송사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나 잘못된 참회의 뉘우침은 후회만을 반복할 뿐 오히려 번뇌를 가중시킨다. 참회란 정직하고 깊은 성찰과 다짐을 통해 다시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참회할만한 행위를 했다는 것은 그 행위가 의미하는 바를 가르침 안에서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리견대인의 대인을 지혜로 여기고 지혜로써 자신의 허물을 통찰하라는 뜻이리라. (訟 有孚 窒 惕 中吉 終凶 利見大人 不利涉大川)   
       
원자폭탄 같은 가르침 그리고 귀의, 사(師)와 비(比)           

송사로써 자신을 추스리면 된 것일까? 아니다. 깨닫지 못한 중생에게는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번뇌와 허물이 끝도 없다. 이 번뇌를 어떻게 다스리는가가 수보리의 질문이었고 부처님의 가르침과 주역의 흐름을 따라 이제 地水師괘에 이르렀다. 師란 군대를 일컫는다. 군대란 강력한 외부의 힘으로 적을 쓰러뜨리는 것. 수보리가 부처님과의 문답을 통해 지혜를 열어가듯 중생이 가르침으로 수행하는 과정에서 師란 깊은 참회로도 무너뜨려 지지 않는 강력한 번뇌를 타파시키는 법문과도 같다. 노련한 장수가 계략을 세워 적진을 무너뜨릴 방도를 알고, 실력 있는 의사가 환자의 병을 고치기 위해 정확한 약을 처방하듯이, 중생이 깨우침을 얻도록 그 무지와 번뇌의 적진에 군대가 진격하듯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師의 방편을 쓰려면 당연히 장인이어야 길하고 무구할 터. (師,貞丈人吉无咎)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상(相)을 버려야 한다고 수차례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그런데 부처님이 보시기엔 수보리가 온전히 그 말을 깨우치지 못했다. 그래서 금강경의 앞부분과 뒷부분에서 부처님은 같은 질문을 반복하신다. “수보리여,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 32상(相)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는가?” 그러나 같은 질문에도 혼란스러운 수보리는 엉뚱한 답을 내놓고,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으신다. “만약 형체로써 나를 보거나 소리로써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자로 여래를 볼 수 없다.” 이 말은 수보리에게 원자폭탄처럼 세게 꽝하며 터진다.(위의 책 522쪽) 형체나 소리로 부처를 보려는 것은 상(相)의 미혹에 빠진 것이다. 상(相)에 집착하지 말고 멈추어(止) 관(觀)하라는 가르침을 적절한 타이밍에 수보리에게 다시 주었을 때 수보리에겐 큰 깨우침이 온다. 그러나 원자폭탄이 터진다고 할지라도 깊이 잠겨있는 마음속 지혜의 문을 여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법문의 군대가 쿵쾅거리며 문을 세차게 두드리고 밖에서 폭탄을 터뜨려도 내면으로부터 밀폐시킨 빗장을 열고 나오는 것은 결국 스스로의 힘이다. 

불법의 가르침의 부드럽게 설득하건 폭탄을 들고 돌격하건 마음의 빗장을 열고 지혜의 문을 활짝 여는 것은 자신의 힘이고 그것은 아주 깊은 이해로 그 이치를 깨우친 것을 말한다. 그렇게 심오한 이해에 도달한 것을 금강경에서는 ‘심해의취(深解義趣)’라고 표현했다. 수보리는 심해의취에 이르러 눈물을 흘리는데 이 눈물은 마음의 청정한 본성이 막 드러나려 할 때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되 비할 바 없는 환희가 생겨나는 상태. 그래서 수보리는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희유 세존! 드무신 세존이시여!” 라고. 

師괘를 이어받은 比괘는 친밀하게 다가가 아랫사람이 기꺼이 복종하는 것이다. 유일한 양효인 구오를 나머지 다섯 음효들이 따르는 모습. 이것은 마치 부처님의 가르침에 심해의취한 제자들이 부처님과 그 가르침에 귀의해 따르는 모습과도 비슷하다. 귀의란 의지하는 마음을 가진 인간의 성향을 깨달음을 위한 방편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比 吉 原筮 元永貞 无咎 不寧方來 後夫凶 이라는 비괘의 괘사는 귀의하는 대상의 원영정함을 근원적으로 판단해서 만약 올바른 귀의의 대상이라면 어서 갈 것을 권한다. 불교에서의 귀의란 부처님(佛)과 가르침(法) 그리고 함께 공부하는 공동체인 승가(僧)에 대한 귀의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우선해 불법의 수행에서 귀의할 곳은 바로 나 자신이다. 비괘 초육은 有孚比之 无咎라고 믿음을 말한다. 믿음이란 내적인 자기 진실성, 성실성이 바탕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어떤 것에 比하고자 할 때, 불법승 삼보에 比하고자 할 때 그 시작은 자신에 대한 약속과 믿음으로 부터이다. 자신의 내면이 진실하지 못하다면 백번 천번 귀의한다고 맹세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질박한 그릇이 가득 차 넘칠 만큼(有孚盈缶) 믿음과 진실이 없다면 말이다. 그래서 귀의는 자기 스스로 선택하고 그 올바름을 지키는 것이다. (比之自內, 貞吉) 이렇게 진실하고 신중한 마음으로 시작하지 않는다면 끝이 좋지 못할 것은 당연하다.(比之无首, 凶)  

마음을 조복시켜 깨달음을 얻고자 한 수보리의 질문이 주역의 8괘에서는 比의 귀의로 마친다. 물론 이게 끝이 아니다. 주역의 64괘를 한 바퀴 돌아야 할까? 깨달음을 향한 수행의 길을 주역과 불교로 더듬더듬 연결해 지혜를 구해보지만 건곤의 시작으로부터 어느 괘 어느 효든 오직 끊임없는 변화만을 보여준다. 이 소용돌이 치는 변화 속에서 선호념 하라고 부처님은 그래서 처음부터 말씀하신 것일까? 우주와 존재의 변화를 보여주는 64괘의 시작이 건과 곤이듯 지혜의 공부와 수행을 함께하며 마음의 길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을 선호념하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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