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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VS 불경] 다시 생각하는 '유종의 미'
 글쓴이 : 無心이 | 작성일 : 19-01-31 21:44
조회 : 543  



다시 생각하는 ‘유종의 미’

                                                           

                                                                    오창희(금요 대중지성)


2019년 기해년, 나의 미션은 1년 장기프로그램인 금요대중지성과 일요대중지성, 그리고 각종 세미나를 공부의 장으로 삼아 일 년을 무사히 마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이미 정원을 초과한 일요대중지성 담임이 사주에 조직운이라고는 없는 내게 특히 마음 쓰이는 일이다. 주역 리라이팅을 위해 괘 정리를 하면서도 이 생각은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이런저런 문제들을 떠올리다가 결국 지금 가장 내 관심을 끄는 이 문제로 에세이를 시작한다.

  
가비야운 마음으로

미션에 임하기 전 준비물부터 챙겨 본다. 가진 건 크게 두 가지. 주역 8괘와 『원각경』. 먼저 주역. 주역 해설서인 『계사전』에 의하면 “生生之謂易”, 즉 생성하고 생성하는 것, 그것을 역이라 한다. 역에는 쉼 없이 움직이는 역동적인 과정만이 있을 뿐 완성이나 종말이 없다. 우리네 인생사가, 그리고 64괘의 끝이 미제임이 그걸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易을 시작하는 문이 乾과 坤이다. 나머지 괘는 건과 곤의 변화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고로 건괘와 곤괘는 인간사 62개 상징을 제대로 읽고 해석하기 위해서 꼭 알아야 할 두 힘이다. 이 두 힘의 운동성과 용법을 안다면 나머지 괘들이 주는 메시지를 해석하고 사용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重天 乾
乾, 元, 亨, 利, 貞. 
初九, 潛龍勿用. /九二, 見龍在田, 利見大人. 
九三, 君子終日乾乾, 夕惕若, 厲,无咎. 
九四, 或躍在淵, 无咎. / 九五, 飛龍在天, 利見大人. 
上九, 亢龍有悔. / 用九, 見羣龍, 无首, 吉. 

重地 坤   
坤,元,亨,利牝馬之貞. 君子有攸往, 先迷, 後得主, 利. 西南得朋, 東北喪朋. 安貞吉. 
初六, 履霜, 堅冰至. / 六二, 直方大, 不習无不利. /六三, 含章可貞, 或從王事, 无成有終.  
六四, 括囊, 无咎无譽. / 六五, 黃裳, 元吉. 
上六, 龍戰于野, 其血玄黃. / 用六, 利永貞.  


두 괘사에서 보듯이 건과 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덕(능력, 역량)은 元.亨.利.貞이다. 만물을 낳고 기르고 촉진시켜 완성에 이르게 하는 힘을 함께 가졌는데 그 성질이 다를 뿐이다. 즉 乾은 양의 품성대로 坤은 음의 품성대로 덕을 베푼다. 건과 곤에서 만물이 생겨나고, 건과 곤이 균형을 이루려는 움직임 속에서 다양한 변화와 소통이 가능해진다. 

乾의 덕은 역동적이다. 이는 살리고자 하는 생명력이자 창조력으로 드러난다. 동파는 건괘의 이러한 힘이 삼효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보았다. 용의 덕을 지녔지만 기꺼이 물에 잠긴 채 때를 기다릴 수 있는 초구의 지혜, 세상에 헌신하면서도 공을 드러내지 않는 구이의 겸손함, 때가 왔을 때 물러서지 않고 비약을 시도할 수 있는 구사의 용기, 심지어 하늘을 날며 온누리에 자유자재로 베푸는 구오의 덕까지. 이 모든 힘이 삼효에서 나온다고 본다. 동파는 이어서 말한다. 천하의 막대한 복과 예측할 없는 화가 모두 구삼효에게 모여 결정을 기다리니 삼효가 만약 이런 상황을 처리할 수 없다면 건괘는 그 존재 이유를 잃게 된다고. 그래서 털끝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는다고. 이것이 구삼의 군자가 終日토록 乾道를 본받아 쉼 없이 자신이 해야 할 일에 게으르지 않으면서, 또 다시 夕惕若厲하는 이유다. 그러니 밤낮으로 널리 배우고, 명석하게 분별하고,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그치지 않는 것’, 이것이 스스로를 건답게 만드는 처음이자 끝이다. 이러한 건의 용법에서 주의할 점은 강함을 지나치게 쓰지 않는 것, 우두머리가 되고자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자체로도 강한데 거기에 더해서 더욱 강하고자 하고 앞장서 나가고자 한다면 건의 덕을 잃게 된다. 건의 덕인 건실함은 강함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쉼 없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坤의 덕은 땅의 품성을 닮아, 건의 덕인 생명력과 창조력을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는 포용력을 지닌 실천력, 그리고 구체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현실감각으로 드러난다. 곤괘의 이러한 힘도 삼효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含章可貞, 或從王事, 无成有終. 음의 상징인 곤괘의 덕은 아름다움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 품는 것이다. 품은 것을 겉으로 드러내면 이미 곤이 아니다. 그러기에 혹 왕의 일에 종사하더라도 공을 취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직분을 다하여 일을 마치는 것을 본분으로 삼는 것이다. 이것이 무성유종의 의미다. 거꾸로 말하면 곤괘의 가장 큰 허물은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게 아니라, 끝마침을 제대로 못하는 것이다. 성과야 있든 없든 곤이 가치를 두는 것은 오로지 암말처럼 유순하게 그러나 끝까지 자기 일을 해 내는 것이다. 

요컨대 건괘가 기운을 끊임없이 발산함으로써 만물을 생성케하는 형이상학적인 힘이라면, 곤괘는 기운을 안으로 쌓아 구체적인 사물을 생성하는 현장에서 발휘되는 힘이다. 여기는 매우 섬세한 조건들이 개입을 하고 변수들이 작용을 한다. 그러므로 곤괘는 이런 것을 알아채고 조율할 수 있는 현실감각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서리를 밟으면 그것이 머지않아 얼음이 되는 기미를 알아채야 하고, 곧고 강하고 큰 포용력을 발휘해서 필요한 때에 적절한 조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위태로운 상황에 맞닥뜨릴 때는 기운을 쏟아내는 방식이 아니라, 주머니를 동여매듯 지혜를 감추고, 죄를 초래하는 허물도, 의심을 초래하는 명예도 피하면서, 오로지 본분을 다할 수 있도록 하는 신중함을 지녀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안으로 쌓은 덕이 저절로 흘러넘치도록 해야 한다. 

이 두 힘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남녀의 몸이다. 양의 기운인 건괘가 형상화된 남자의 정자는 죽을 때까지 새롭게 생산된다. 그러나 여자의 난자는 태어날 때부터 일정한 수를 가지고 태어나고 월경을 할 때마다 하나의 난자를 쓴다. 자궁벽이 허물어져 밖으로 나오는 것이 월경이다. 월경 직전에 자궁벽은 5-6mm정도 두꺼워진다. 그랬다가 정자를 못 만나 착상을 하지 못하면 쌓았던 자궁벽을 싹 쓸어 내 보낸다. 그리고 다시 시작한다. 이렇게 난자를 다 쓰고 나면 생명을 탄생시켰든 아니든 미련 없이 월경을 끝낸다. 그리고 가임기가 끝나면 미련없이 폐경으로 간다. 여기엔 어떤 미련도 감정의 앙금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정자를 만날 때까지 월경을 미루지도, 아이를 낳기 위해 죽을 때까지 월경을 연장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곤의 덕인 有終의 힘이다.   

다음으로 『圓覺經』.(함허,법공양,2000) 원각이란, 연기조건 속에서 ‘내’가 사라지고, 일체가 그냥 통으로 하나임을, 일체가 평등하며 무엇으로도 더럽힐 수 없고 깨뜨릴 수 없는 청정하고 不動한 상태임을 깨닫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느끼는 이 모든 것은 ‘생각(분별심)’이 만들어낸 허상임을 아는 것이다. 두 번의 경험이 이것의 이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 하나는 지난 추석 연휴 내내 앓았던 눈병이고, 다른 하나는 대퇴부골절상으로 수술을 하고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얼떨결에 하게 된 경험이다. 통증은 있으나 그것을 느끼는 ‘내’가 사라진 상태, 그때의 편안함. 덕분에 우리가 경험하는 일체가 ‘허공의 꽃’이라는 가르침을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 여기서 보현보살이 질문하신다. 일체가 幻임을 안다면 수행하는 사람도 방편도 모두가 幻일 텐데 어떻게 수행을 통해 幻化에서 벗어날 수 있냐고. 이 질문에 부처님은 일체 중생의 환화가 모두 여래의 圓覺妙心에서 나온다고 운을 떼신 다음, 두 나무를 비벼서 생긴 불이 나무를 다 태워서 나무도 연기도 재도 사라지면 종국에는 허공만 남는다는 비유를 들어 답하신다. 여기서 허공이 원각묘심이다. 결국 幻인 부처님의 가르침과 幻인 우리들의 몸과 마음에 의지하여 역시 幻인 수행을 함으로써 幻에서 벗어나는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건과 곤의 힘이 서로 갈마들면서 만들어내는, 원각묘심에 바탕을 둔 갖가지 空華들이 난무하는 삶의 구체적인 현장, 구체적인 卦의 상황으로 들어가 보자. 거기서 행여 새해 미션 수행에 필요한 기술들을 얻을지도 모르니. 설사 별반 효과를 얻지 못한다 해도 이 길밖에는 길이 없다고 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간절함은 힘이 세다   

水雷 屯   
屯, 元亨, 利貞, 勿用有攸往, 利建侯.
初九, 磐桓, 利居貞, 利建侯.
六二, 屯如, 邅如. 乘馬班如, 匪寇婚媾, 女子貞不字, 十年乃字. 
六三, 卽鹿无虞, 惟入于林中, 君子幾, 不如舍, 往吝. 
六四, 乘馬班如, 求婚媾, 往吉, 无不利. /九五, 屯其膏. 小貞, 吉, 大貞, 凶. /上六, 乘馬班如, 泣血漣如.

山水 蒙    
蒙, 亨.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初筮告, 再三瀆, 瀆則不告. 利貞. 
初六, 發蒙, 利用刑人, 用說桎梏, 以往吝. 
九二, 包蒙, 吉.  納婦, 吉, 子克家.
六三, 勿用取女, 見金夫, 不有躬, 无攸利. 
六四, 困蒙, 吝. /六五, 童蒙, 吉. 
上九, 擊蒙, 不利爲寇, 利禦寇.


다 다른 조건들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많은 학인들과 공부라는 공통분모 하나로 일 년이라는 긴 호흡으로 함께 가는 여정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屯괘를 읽으면서 눈여겨 본 것은 괘사와 초구의 효사에 동시에 언급되는 ‘利建侯’다. 屯괘는 건곤, 즉 음양의 교류가 시작되는 상황이다. 아직 질서도 잡히지 않고 무엇이 어떻게 되는 건지도 잘 보이지 않는 아득하고 혼란스러운 때, 이러한 때에 괘사에서도 ‘함부로 나아가지 말고 제후를 세우는 것이 이롭다’고 하고, 초구에서도 ‘나아가기가 어렵다. 곧음에 머무는 것이 이롭고 제후를 세우는 것이 이롭다’고 한다. 

험난한 상황(☵)에서 움직일 때(☳)는 먼저 제후를 세우라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동파는 “하늘이 어찌 物物을 다 만들겠는가? 그저 간략하고 아득하게 할 뿐”이며, “성인이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어찌 인인을 다 구제하겠는가, 역시 제후에게 맡기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한 개인이나 공동체에서도 어떻게 모든 사람, 모든 사건마다 그것을 어떻게 판단하고 정리할 것인지를 그때그때마다 기준을 정해서 처리하겠는가, 그러니 시작하기에 앞서 다함께 공유할 수 있는 지향점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고 이것이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이 따를 수 있는 제후를 세우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분명하지 않으면 안내자 없이 깊은 숲속으로 사냥을 떠나는 것처럼 길을 잃을 수 있으며, 공동체는 사사로운 뜻에 동조하는 몇몇 사람들과만 교류하는 사적인 모임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채로 상황을 단번에 바로잡으려다가 급기야 혼돈의 극단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처지에 몰릴 수도 있다. 그러니 처음부터 지향을 함께 할 사람들을 신중하게 찾은 다음 나아가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 길을 끝까지 가겠다는 간절함이 있다면 이런 길동무를 만난다는 게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괘에서는 공부하는 자가 가져야 태도를 배울 수 있다. 괘사에 대한 동파의 해석이 마음을 끈다. 몽이란 사물에 가려진 것일 뿐, 그 가운데는 본래부터 올바름이 있으며 아무리 가려짐이 심해도 끝내 그 올바름을 없앨 수는 없으니, 장차 내부에서 싸워 그 덮인 것을 벗기고자 한다는 것. 그러니 스스로 벗기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해질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다. 幻을 벗겨내면 그것이 바로 원각이며, 간절함이 있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圓覺經』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몽괘의 괘사 중 “匪我求童蒙, 童蒙求我”에서 배우려는 자의 간절함이 어리석음을 벗겨내는 전제 조건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 다음 어리석음을 벗기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윤리를 철저하게 익히고 지켜나가면서, 구이처럼 배움이 조금 성취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을 너그러이 품어주고, 육오처럼 공부를 어느 정도 성취했더라도 아랫사람에게 배움을 기꺼이 청하면서 함께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다 보면 자기가 가는 이 길이 어떤 길인지 어렴풋이 그 윤곽이 드러나는 때가 온다. 그런 때가 되면, 배우고자 하는 간절함은 고사하고 金夫를 좇다가 몸 둘 곳마저 잃어버리는 육삼이나,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육사에게, 섣부른 조언이나 충고로 擊蒙을 하려다가 도리어 폭력을 행사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싸움의 기술

水天 需    
需, 有孚, 光亨, 貞吉, 利涉大川.
初九, 需于郊, 利用恒, 无咎. /九二, 需于沙, 小有言, 終吉.
九三, 需于泥, 致寇至. / 六四, 需于血, 出自穴.
九五, 需于酒食, 貞吉.
上六, 入于穴, 有不速之客三人來, 敬之, 終吉.

天水 訟    
訟, 有孚, 窒, 惕, 中吉, 終凶, 利見大人, 不利涉大川.
初六, 不永所事, 小有言, 終吉. /九二, 不克訟, 歸而逋, 其邑人三百戶, 无眚. 
六三, 食舊德, 貞厲, 終吉, 或從王事, 无成. /九四, 不克訟, 復卽命, 渝, 安貞吉.
九五, 訟, 元吉. /上九, 或錫之鞶帶, 終朝三褫之.

 
비전을 가지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벗겨내고 지혜에 다가가려는 마음이 간절하다 해도 그 길은 쉽게 갈 수 있는 게 아님을 우리 모두는 안다. 그 길을 가는 과정에서는 무수한 싸움들이 일어난다. 그래서 기술이 필요하다. 

訟괘에서 동파는 “소송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처음을 신중하게 고려하는 데에 달려 있다. 계약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소송이 발생한다”고 괘사의 의미를 해석한다. 감이당과 같은 인문학 공동체에서는 ‘처음’과 ‘계약’을 비전의 공유로 해석할 수 있겠다. 비전을 공유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세부적인 문제라면 끝까지 다투어야 할 것이고, 아예 비전이 달라서 일어나는 다툼이라면 싸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걸 분명히 판단할 수 있다면 불필요한 감정다툼으로 번지면서 결국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은 소모적인 과정이 되는 길을 피할 수 있다. 그 밖의 세부적인 싸움의 기술은 송괘의 효사들이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새겨둘 만한 것은 승리를 쟁취한 상구에게 달린 효사다. 우여곡절 끝에 승리한 상구에게 뜻밖에도 경고를 한다. 상으로 받은 하사품을 짧은 아침 시간 동안 세 번이나 빼앗길 것이라고. 이에 대한 동파의 해석이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진 자가 패배를 치욕으로 여겨 악에 빠져든다면 송사의 화가 언제 그칠지 모르기에, 이긴 자는 허리띠를 빼앗기고 진 자는 올바름에 안주함으로써 재앙의 싹을 없앤다는 것이다. 결국 유익한 싸움이 되려면 승패에 그 가치를 두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걸 통해 공동체의 비전을 구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 그게 아닌 싸움이라면 빨리 그만두는 게 상책이다. 

需괘는 싸움의 기술 중 기다림의 미덕을 보여준다. 需는 구름☵이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다. 구름이 하늘로 올라가 음양이 조화되기를 기다린 뒤에야 비가 내린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도와 덕을 가슴에 품고 편안한 때를 기다리며 음식으로 자신의 몸을 기르면서 몸과 마음을 조화롭게 한다. 음양이 조화를 이루면 다툼은 일어나지 않는다. 초구처럼 강한 자질을 가졌어도 다툼이 일어날 수 있는 곳과 거리를 유지하거나, 구이처럼 자신의 기질을 알고 한 자리에 거해 여유롭게 처신하며 균형을 잡으면 다툼을 피할 수 있다. 상구처럼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자들을 이미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들을 공경하는 태도를 취하면 최소한 흉함까지는 가지 않는다. 이런 이치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한다면 구오처럼 적이 코앞에 있어도 그것이 자신을 훼손할 수 없음을 알기에 특별한 방어 없이도 술과 음식을 먹으며 자신을 돌보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이런 기다림의 미덕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수양이 필요하다.  


협력의 기술  

地水 師     
師, 貞, 丈人, 吉, 无咎.
初六, 師出以律, 否, 臧, 凶. /九二, 在師, 中吉, 无咎, 王三錫命. /六三, 師或輿尸, 凶. /六四, 師左次, 无咎.
六五, 田有禽, 利執言, 无咎, 長子帥師, 弟子輿尸, 貞, 凶.
上六, 大君有命, 開國承家, 小人勿用.

水地 比     
比, 吉. 原筮, 元永貞, 无咎. 不寧, 方來, 後, 夫, 凶.
初六, 有孚比之, 无咎, 有孚盈缶, 終, 來有他吉.
六二, 比之自內, 貞吉. /六三, 比之匪人.  
六四, 外比之, 貞, 吉. /九五, 顯比, 王用三驅, 失前禽, 邑人不誡, 吉. /上六, 比之无首, 凶.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려면 싸움의 기술만큼이나 협력의 기술도 필요하다. 사실 싸움과 협력은 생각처럼 그렇게 나눠지는 게 아니기도 하다. 협력하면서 싸우게 되고 싸우면서 같이 가게 되는 게 인생사다. 

師괘부터 짚어보자. 정이천은 괘사 “師, 貞, 丈人, 吉, 无咎”를 “군중을 이끄는 방식은 올바름을 굳게 지켜야 하니 장인이라야 길하고 허물이 없다”라고 해석하였고, 동파는 丈人을 “일에 익숙하고 덕행이 높은 사람”이라고 했다. 이런 자라야 무리를 올바르게 이끌 수 있으며 후환이 없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 다음에는 시작점인 초구에서부터 함께 지켜야 할 윤리를 분명히 하고, 이 윤리를 준칙으로 삼아 구이는 주군으로부터 받은 권한을 행사하되 그 권한이 직분상 마땅히 해야 할 일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육삼처럼 흉함에 빠지지 않으려면 무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전적으로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 자세로 임할 때, 사사로운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상황을 올바르게 판단하여 육사처럼 물러설 때 물러설 줄 아는 용기를 발휘할 수 있다. 여기서 리더가 경계해야 할 태도는 함께 하는 사람을 의심하는 것이다. 신뢰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협력은 사사로운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일시적인 이익추구에 불과하다. 함께 하는 사람을 의심하는 것은 자기 안에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比괘. 천지 사이에 살아가는 것 가운데 친밀하게 협력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런 이치는 굳이 불교의 연기법과 주역에서 말하는 우주 자연의 이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상식이다. 앞의 師괘에서 협력에 필요한 구체적인 기술을 이야기했다면 비괘에서는 어떤 사람과 협력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괘사 중 原筮, 元永貞, 无咎가 그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동파는 이를 “거듭(原) 따를 바를 점쳐서(筮) 시작부터 길이 곧으면(元永貞) 허물이 없다고 했다. 같은 길을 갈 사람을 택할 때는 이처럼 신중하게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구오와 가장 멀리 있으며, 위로 호응할 상대가 없어 도움이 가장 시급한, 힘없는 초구의 협력 요청에 가장 먼저 응해야 한다. 그런 모습을 보인 후라야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수양에 힘쓰는 육이 같은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며, 밖에서도 함께 하겠다며 찾아오는 육사 같은 인연도 만나게 될 것이다. 이런 인연들이 공동체를 든든하게 받쳐주며 활기차게 만들어준다. 

******

건괘와 곤괘, 『원각경』을 도구삼아 기해년에 닥친 가장 마음 쓰이는 미션, 즉 일요대중지성 담임의 역할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다 보니 여섯 괘가 주는 메시지에서 공통점이 보인다. “비전을 분명히 하라”는 것. 이는 연기조건 속에서 ‘내’가 사라지고 일체가 그냥 통으로 하나이며 그래서 일체가 평등하다는 걸 아는 그 자리가 圓覺임을 분명히 아는 것과도 연결되는 문제이다. 처음 감이당에 와서 고미숙 선생님 말씀 중 “사람이 자유로워지는 길은 고도의 지성을 연마하는 것”이라는 게 가장 마음에 남았다. 그 이후, 지금까지 경험으로 넘어온 마디들을 고도의 지성으로 넘고자 하는 바람을 가졌다. 그리하여 수술 후 통증으로 힘들었던 그 순간, 찰나였지만 ‘내’가 사라지면서 느꼈던 그 편안함을 누리고 싶었다. 그런데 고도의 지성이 무엇인지 그것은 어떻게 연마할 수 있는 것인지 아득했다. ‘고도의 지성 연마’를 마음에 품고 공부해 오다가 작년에 불경을 배우고 주역을 공부하면서 나도 모르게 부처님이 깨달으신 연기법을, 그리고 주역이 말하고 있는 우주 자연의 이치를 이해하고 체득하는 것, 그것이 고도의 지성임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로부터 수없이 반복해서 들었을 참 단순한 이치가 ‘내 안에서 말이 되어 나오는 데’에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면서 길이 보였다. 내가 가야 할 길, 지금 하고 있는 공부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 보였다. 그러면서 산만함이 줄어들고 편안해졌지만 아직은 이번처럼 새로운 미션이 떨어지면 순간 나도 모르게 다시 시야가 좁아진다. 오래된 습이 작동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들이 마음이 만들어낸 幻이라 할지라도 지금 여기를 떠나서는 이를 벗어날 길이 없다면, 아니 환화를 더욱더 깊이 더욱 더 꼼꼼히 탐색하는 게 중생이 환화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면, 지금 서 있는 발밑을 수행처로 삼아 그 길을 가는 데에 온 힘을 기울일 일이다. 고도의 지성을 연마하겠다는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가는 길에도 여전히 수많은 ‘허공의 꽃’은 피었다 지기를 반복하리라. 다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내년 이맘때 無成하나마 有終은 할 수 있기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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